목차
1 종족집단
여진족 항목으로.
2 동명이인
2.1 성우: 윤여진
2.2 연예인: 최여진
2.3 고구려 유리명왕의 아들
如津(? ~ 18)
서기 18년(유리명왕 37년), 여름 4월에 물에 빠져 사망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유리명왕은 애통애하며 여진의 시체를 찾고자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에 비류 사람인 제수(祭須)라는 자가 여진의 시체를 찾아서 왕에게 알렸다. 유리명왕은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頃)을 하사하여 보답하였으며, 여진의 시신을 거두어서 예로서 왕골령 (王骨嶺)에 장사지냈다.
유리명왕은 여진이 죽은 후 불과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여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리명왕은 이전에도 도절과 해명태자 등 2명의 아들을 잃은 바 있다.
이 사람이 북사(北史)에 기록된 고구려의 왕 여율이라는 설도 있다. 북사에 의하면 여율은 여달(유리명왕)의 아들이자 막래(대무신왕)의 아버지로 기록되어있는 왕이다. 다시 말하자면 꼬일대로 꼬인 고구려 초기왕계의 열쇠도 될 수 있는 인물.
2.3.1 만화 바람의 나라의 여진
유리명왕의 아들로 모친은 미유부인. 다만 만화와 소설 모두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온다. 아버지를 상당히 무서워하는 어린 아이로 등장한다.
무휼에게는 내 아버지처럼(아버지가 여진을 대한 것처럼) 내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겠다란 결심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작품상에서도 익사로 나오며 유리명왕이 여진의 죽음으로 상당히 괴로워하기도했다. (2권 초입부 참조,). 정확히 말하면 사고나 자살로 세상을 떠난 아들들 그리고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절망, 분노를 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진이 유리왕을 두려워한 이유가 평소 자식들을 냉혹하게 대한 본인 태도 때문이었으니... 훗날 무휼과 호동 사이의 갈등을 미리 암시하는 장면.
이 시절의 그림체가 워낙 수려해서 그런지 상당히 귀여운 모습으로 나온다. 또한, 1부에서 잠깐 등장하여 등장빈도는 적지만 작품의 주제를 다시 한 번 상기를 시켜주는 인물이기도 하며, 특히 2부에서 무휼이 점점 유리왕을 닮아가며 호동에게 냉혹하게 변해가는 모습과 겹쳐져 더 크게 다가온다.
2.4 여성 싱어송라이터
1958년생.
서울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가 되었다. 1979년에 1집 앨범을 냈고 그리움만 쌓이네라는 곡이 크게 히트하였다.
1987년에 2집 앨범을 발표했으나 그 당시에도 여전히 교사 재직중이어서 활동은 거의 하지 못했고 점차 대중의 관심에서는 멀어져갔다. 하지만 '그리움만 쌓이네'는 노영심, 레이지본등의 후배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꾸준히 사랑받았다.
2009년에 3집 앨범을 냈다.
2.5 가면라이더 포제의 등장인물 카자시로 미우의 국내명 백여진
3 큰 지진이 일어난 후 뒤따라 이어나는 지진
Aftershock. 余震(よしん).
이것의 반대말은 전진(前震 , Foreshock)으로, 큰 지진 전에 앞서 오는 작은 지진을 이르는 말이다.
지진이 일어난 후 뒤따라 이어나는 지진들. 일반적으로 본진(本震)보다는 리히터 규모가 작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구마모토 대지진 이후 공식 보도 등지에서는 지진의 예측에 있어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다. 가장 처음에 발생한 지진(M6.5)를 본진(本震)으로 생각하고 여진의 규모 및 확률을 계산해 발표했는데, 이보다 큰 지진(M7.3)이 발생하고 첫 지진이 예진(予震)으로 정정되면서 여진 규모 및 발생 확률의 예측에 있어 상당한 혼란이 생겼기 때문. 지진의 규모가 본진보다 작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에 따른 혼선 또한 컸다. [1]
국내로는 2016년 경주 지진이 위의 구마모토현 대지진과 비슷한 예시로, 예진으로 M 5.1, 본진으로 M 5.8의 규모로 약 1시간 이내 간격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정확히 7일 뒤 똑같은 시간에 규모 4.5의 큰 여진이 일어났다.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