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태자

解明太子
(BC 12 ~ AD 9)

고구려의 태자. 유리명왕의 둘째 아들이자, 대무신왕의 형.[1]
조선시대에 사도세자가 있었다면 고구려에는 이 사람이 있었다.

1 소개

유리명왕의 장남이자 첫번째 태자였던 도절이 병에 걸려 죽은 후, 서기 4년(유리왕 23년)에 태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힘이 세고 용맹하였다고 전한다.

2 활을 부러트려 아비의 심기를 불편케 하다.

유리왕 27년 봄, 옛 도읍(졸본성. 이 시기엔 이미 국내성으로 수도를 이전했다)에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은 고구려 주변에 있던 나라였던 황룡국의 왕이 해명의 무용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강한 활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해명태자는 그 활을 당겨 부러뜨리고는 "내 힘이 강해서가 아니라 활이 약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사실상 황룡국에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라 봐도 무방한데 아마 함부로 고구려를 넘보지 말라는 뜻을 품고 있는 경고 행위인 듯 하다.

황룡국왕이 이를 전해 듣고는 부끄럽게 여기자, 유리왕은 해명이 자식으로서 불효하다면서 화를 내고 황룡국왕에게 해명을 보내며 그를 죽여줄 것을 부탁했다. 3월에 황룡국왕이 사신을 보내서 해명을 만나려 하자 주변에서 말렸지만 해명은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데 황룡국왕인들 나를 어떻게 죽이겠느냐?"라면서 태연하게 황룡국으로 갔다. 황룡국왕은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 했지만, 그를 보자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를 갖추어 돌려보냈다.

3 아비가 아들을 죽이다.

다음해 28년 봄, 유리명왕은 자신이 천도한 뜻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라를 튼튼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해명이 힘이 센 것만 믿고 이웃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불효하다면서 자살하라 명령하며 칼을 내려줬다.

해명이 곧 자살하려 하자 어느 사람이 말렸지만, 해명은 지난번에 활을 부러뜨린 것은 황룡국이 고구려를 가볍게 본 것이라 생각하여 보복한 것이었는데, 아버지가 뜻밖에 화를 내고 자살하라 하니 죽지 않을 수 없다면서 여진(礪津)의 동쪽 벌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고 말을 타고 달리다 창에 몸을 던져 스스로 창에 찔려 죽었다. [2]

사망 당시 고작 21세였으며, 사후 태자의 예로써 동쪽 들(東原)에 장사지내고 사당을 세우고 그 곳을 불러 창원(槍原)이라고 하였다. 이후 그의 바로 아래동생이자 유리명왕의 삼남인 대무신왕 무휼이 태자가 되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해명태자의 행동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판적인 평가를 달았다. 대무신왕의 아들 호동왕자도 비슷하게 목숨을 끊었는데, 이런 걸 보면 고구려 초기의 문화는 꽤나 거칠었던 것 같다.

묘하게 뒷날 조선의 사도세자와 겹치는 면이 있다. 둘 다 왕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고, 힘이 세고 무예에 재능이 있었다는 점, 의 심기를 거슬러서 부왕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점, 그리고 대신 다른 후계자가 부왕의 뒤를 이었다는 점이 있다.[3] 다만 사도세자는 정신병적 증상을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반해 해명태자는 그런 것을 확인할 길이 없다.

4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김진 작가의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 자결을 앞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구려와 주변국의 앞날을 예견하면서 동생 무휼을 도와 부여를 치고 한나라를 극복할 것을 부탁하였으며, 죽기 전날 밤에 자신을 오래도록 흠모하던 혜압과 사랑을 나누어 인연을 맺는다. 죽은 뒤에도 혼령으로서 고구려의 앞날을 지키고자 한다. 조카인 호동왕자를 지키기 위해 나타나기도 한다.

참고로 여기서는 화희의 아들로 설정되어 있다. 해명이 자결하자 화희가 서화(무휼의 생모로 송양의 둘째 딸이자 유리명왕의 둘째 왕비)에게 자신이 젊을 적에 치희를 내쫓은 것 때문에 유리왕이 자기 아들까지 죽게 했다며 울며 하소연하는 장면이 있다. 나중에 해명의 혼령이 생모를 회상하는 장면에도 나온다. 치희를 내쫓은 일로 유리명왕에게 소박을 맞은 뒤 처소에서 부질없이 옷감만 짰다고.

  1. 다만 기록의 모순 때문에 대무신왕을 유리명왕의 손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대무신왕은 해명태자의 조카가 된다.
  2. 이건 상식적으로 너무 거추장스러운 자살 방법이라 그냥 유리명왕이 보낸 암살자가 던진 창에 맞아죽고 자살로 공표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3. 그리고 두 군주 모두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을 발휘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애당초 대무신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한 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