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령군

연령군
延齡君
(1699~1719)

1 개요

본명은 이훤(李昍)

자는 문숙(文叔), 시호는 효헌(孝憲)이다. 본관은 당연하지만 전주 이씨. 조선 숙종과 명빈 박씨(榠嬪朴氏)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숙종의 6남이다.

훗날 영조로 즉위하는 연잉군과 함께 숙종의 귀여움을 받았다. 어찌나 숙종이 연령군을 총애했는지 경종의 자리를 위협하던 연잉군의 자리가 연령군에게 위협당했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다. 연령군의 숙배 때 늦은 이조정랑 조도빈은 바로 파직당했을 정도.[1] 하지만 연령군은 그저 정치와 무관한 사랑용 아들이란 주장도 있다. 5세에 그의 생모인 명빈 박씨가 죽었는데 숙종은 주상자가 된 연령군을 서둘러 군에 봉했다. 군은 원래 6세 이후에 봉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반대가 있었으나 상대가 누군가? 천하의 숙종이다. 반대하는 대간들을 모조리 개발살내버리고 강행했다.

2 생애

9세에 판돈령 부사 김동필의 딸과 혼인하였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변의 맛을 볼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08년에 출궁하여 사저에 기거했다. 숙종은 연령군을 위해 수만냥의 돈을 들여 저택을 지어주려 했지만, "연잉군에게 2천냥 썼는데 여기서 돈을 낭비하면 되냐"는 조정의 비판에 그만두고, 선조의 적녀인 정명공주의 200칸 저택을 사서 주었다. 원래 이 저택은 연잉군이 눈독들이고 있던 건데, 숙종이 어림없는 소리를 외치면서 못 사게 한 것이었는데 연령군에겐 대뜸 사주었다. 연잉군 안습... 주춧돌을 보수하는 데만 4가구의 재산에 해당하는 돈을 썼다 할 정도로 연령군을 위해 엄청난 돈을 썼다.

어쨌거나 사저에 기거할 때 민간에 폐를 끼치지 않았다는 좋은 평이 보인다. 숙종이 죽기 직전에 고작 21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숙종은 크게 상심했고 제문과 묘지문을 손수 지었다.

3 사후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차남 낙천군이 그의 양자로 사후에 입적되었으나, 낙천군 역시 자식이 없었고, 다시 낙천군의 양자로 입적된 달선군이 자살하자 파양, 다시 사도세자의 넷째 아들 은신군을 양자로 들였으나 은신군 역시 자식 없이 요절하여 무려 양증손자까지 들여야 했다.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된 남연군(인평대군 후손)에게는 아들 4명이 있었는데, 그 중 넷째가 바로 흥선대원군, 다시 그 차남이 고종이 된다.

명빈 박씨 옆에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금천, 현재의 동작구 대방동에 묻혔다.

나중에 연령군 내외의 묘소는 양증손자인 남연군의 묘가 충청남도 예산군에 조성되자 대방동에 묻힌 양고손자 흥녕군 이정응의 묘와 함께 예산군 덕산면으로 이장되었다.
  1. 다만 조선시대 벼슬살이에서 파직은 그리 큰 벌이 아니고 곧 동급의 다른 벼슬에 제수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