貞明公主
1603년 5월 19일 ~ 1685년 8월 10일
1 개요
조선의 공주로,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딸. 영창대군의 동복누나. 선조의 딸 11명 중에서 10번째 딸이자 유일한 적녀(嫡女)이다.
2 인생
2.1 환영받지 못한 출생
늦둥이에 유일한 적녀이니 아버지 선조의 귀여움을 받았으며, 나이 차로는 아버지 뻘[1]인 이복오빠 광해군도 경쟁자가 될 수 없는 공주이기 때문인지 귀여워하였다고 한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이 어렸을 때, 광해군은 인목왕후를 문안하며 공주는 쓰다듬으며 칭찬해주었지만 같이 그 자리에 있던 대군은 본 체도 하지 않아, 영창대군이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다."라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태어난 이후에는 주변에서 축복했다지만, 정명공주가 태어난 시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어날 때까지, 당시 정명공주를 임신한 인목왕후는 유산될 뻔할 정도로 불안정한 환경을 보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잉태되었을 당시 대군이 태어날 것을 염려한 광해군의 장인 유자신에 의해 일부러 큰소리를 내거나 죽은 쥐를 중궁전에 눈에 띄게 둔다던지, 낙태 시도가 있었다지만, 다행히도 무사히 태어났다. 또한, 정명공주가 태어났을 때 대군이 태어났다고 소식이 잘못 전해졌는데, 유자신은 이에 침묵하고 있다가 공주가 태어났다고 정정하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예물을 진상했다고 한다.
정명공주가 6살, 영창대군이 3살 때 아버지 선조가 돌아가셨다.
2.2 서궁 유폐시절
또한 정명공주는 11살 때 천연두를 앓았다고 하는데, 계축일기에 따르면 광해군 측 북인들은 그것을 매우 기뻐한 듯하다.(...) 당시 천연두에는 칼질이 안 좋다는 미신이 있었는데, 평소에는 토막도 안 내 보내던 고기를 일부러 근처에서 칼질해 보낼 정도였다고. 공주는 광해군의 왕위 경쟁자가 될 수 없으므로, 공주가 죽기를 바란 것보다는 사실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이 천연두에 옮아 죽기를 바란 것이리라 추정된다.
외조부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 하여 벌어진 계축옥사 후, 어머니 소성대비[2]가 서궁(덕수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 역시 서궁에 유폐되었다. 서인으로 궁에 두지 말고 사가로 내보내자는 주장까지 제기되자, 정명공주마저 빼앗길 것을 염려한 소성대비는 정명공주가 이미 죽었다고 거짓말까지 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옆에서 큰 글씨 작은 글씨를 썼다고 한다. 남겨진 서예 작품은 '화정(華政)' 두 글자 등이 전해지는데, 남구만은 이 작품의 발문을 쓰면서 "선조의 글씨를 본떠 규합의 기상이 전혀 없다"고 평가하였다. 어쨌든 어머니가 유폐될 때 그녀 역시 옹주로 낮춰지고[3] 같이 유폐되었다.
사실 정명공주가 서궁에 유폐된 1618년에는 이미 공주의 나이 16세로, 조선시대의 왕녀들이 보통 10세 전후에 부마감을 간택하던 것을 생각하면 공주가 그때까지 혼인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 정명공주의 부마 간택이 미뤄지던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들을 빼앗기고 친정이 몰살당한 인목왕후가 딸도 곁을 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혼인을 미루었든지, 인목왕후의 사위이자 영창대군의 자형이라는 지지세력이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광해군이 일부러 공주를 혼인시키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다. 아무튼 정명공주는 유폐된 이후에도 혼인하지 못하고 계속 서궁에 갇혀 지내게 된다.
2.3 인조반정 이후
인조반정 후 복위, 당시로서는 결혼도 어려운 노처녀에 들어갔던 21세 때, 3세 연하의 영안위 홍주원(洪柱元)에게 하가하여 7남 1녀를 낳았다. 정명공주가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이다 보니 나이 비슷한 남편감은 도저히 찾을 수 없어 연하를 구했다고 한다.[4][5] 그것도 이미 홍주원에게는 약혼녀가 있었으나 파혼시키고 결혼한 것이라 한다.[6] 사실 공주와 그나마 비슷한 나이의 남자들이 아직 혼인하지 않은 이유는, 혼인하기 어려운 하자가 있었거나 이미 혼인은 정해져 있었으나 사정으로 혼인을 미루고 있는 경우밖에 없다. 그렇다고 공주를 문제 있는 남자와 혼인시킬 수는 없었으니 정해진 혼담이 있는 남자들이라도 전부 부마 단자를 내게 해서 부마를 구한 것이라 한다.
소성대비는 노처녀 딸이 겨우 얻은 사위를 예뻐했던 모양으로, 사위에게 왕만이 탈 수 있는 어구마까지 내려 비판 받기도 하였다. 인조는 자신의 즉위의 대의명분인 소성대비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호화롭게 치러주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 땅이나 재산을 하사하였다. 일제강점기까지 소작 분쟁이 이어진 암태도도 정명공주가 받은 땅이다.
그러나 소성대비 사후 그녀의 처소에서 흉측한 백서가 나와 이에 연루된 정명공주의 궁녀들이 줄줄이 체포되어 수차례의 형문은 물론이고 압슬, 낙형까지 당해 고문치사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최명길 등은 인조반정의 명분을 위해서라도 정명공주를 처벌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인조는 소성대비가 살아있을 때와 달리 정명공주를 그 죽일 놈의 의심병 의심하기 시작했다. 유약한 성품의 소성대비와 달리 정명공주는 이성적인 성품 때문인지, 정명공주의 시가의 뒷배경이 있기 때문인지, 내명부는 아니지만 선조의 유일한 적통공주이며 인조보다 큰어른이라는 입장 때문인지, 정명공주는 서궁 유폐시절보다 더한 불안정한 세월을 보냈다.
서궁 유폐시절에는 정명공주는 왕위계승권이 없는 10대 소녀였고, 방패막이 되어줄 어머니 소성대비도 있었지만, 지금은 평범한 유부녀에 불과했기 때문에, 서궁 유폐시절에는 글을 썼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눈에 띌 수도 있고 양반들과의 교류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글을 쓰지않고 평범한 여인들처럼 바느질에만 몰두하며 인조의 의심을 피하려고 했다.
2.4 안정적인 삶의 말년
인조 사망 후 효종 역시 조 귀인의 저주 사건에 정명공주가 연루되었다고 의심하여 정명공주의 궁녀를 의심했다. 아버지 인조와 마찬가지로 정통성 문제로 의심한 듯하고, 현종 역시 의심하지 않진 않은 듯하다.
그러나 숙종은 정명공주를 종친의 큰어른으로 대우했다. 참고로 숙종은 정명공주의 현손자뻘이다.
83세에 사망. 조선의 왕녀들 중에서 가장 장수했다. 사도세자의 정실 부인인 혜경궁 홍씨는 홍주원과 정명공주의 5대손으로, 한중록에서 종종 이를 언급한다.[7]
3 창작물에서
- ↑ 실제로 광해군의 아들 폐세자 이질은 물론이요, 인조도 정명공주보다 나이가 많다. 폐세자 이질과 인조는 모두 정명공주의 조카이다.
- ↑ 인목왕후의 대비로서의 존호는 소성대비이지, 인목대비가 아니다.
- ↑ 살짝 애매한 게 조정 논의에서 "그래도 선조의 딸이니 옹주로 낮추자"는 의견이 나왔지만 이이첨이 "죄인인 영창대군의 누나이니 폐서인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광해군도 옹주로 낮추자는 주장에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폐서인되었지만 선조의 딸이니 혼인과 늠료에서만 옹주 대우를 해주겠다고 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 ↑ 물론 요즘 기준으로 따지자면 21세는 조혼이지만, 19세에 결혼한 인목왕후만 해도 당시 기준으로는 노처녀였다.
- ↑ 다만 왕자들의 혼인에서 연상과의 결혼은 흔하다. 10세 전후에 결혼하는데, 조혼의 경우 여성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합방이 결정되기에 연상과 결혼해서 빨리 후사를 보라고.
- ↑ 홍주원은 집안의 초상 문제로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 ↑ 혜경궁 홍씨가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 중에 정명공주가 사용하던 것들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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