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의 기록영상

제2차 세계대전 항공모함전. 대략 23분 40초 정도부터 미드웨이 해전이 나온다.

敵機直上、急降下! (적기 직상, 급강하!)
― '운명의 5분'의 순간, 일본 해군 항공모함 카가의 견시원이 급강하 폭격을 시도하는 미 해군 항공대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를 목격하고 전파한 보고. 이 순간 태평양 전쟁의 승패는 갈렸다.
미드웨이 해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1]
날짜
1942년 6월 4일 ~ 1942년 6월 7일
작전명
MI作戦 (MI 작전)
장소
미드웨이 제도
교전국미군
미국
일본군
일본 제국
지휘관 체스터 니미츠
프랭크 플레처#s-1.2" 프랭크 잭 플레처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야마모토 이소로쿠
나구모 주이치
야마구치 다몬
결과
미군의 승리
영향
일본의 공세 저지
미국이 태평양에서의 주도권을 일본에게서 뺏어옴.
병력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약 7척
구축함 15척
항공기 360기
항공모함 4척
전함 2척
보조함 약 15척
항공기 264기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다수의 전투함
피해규모항공모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침몰
항공기 약 150기 손실
307명 전사
항공모함 4척 침몰
순양함 1척 침몰
항공기 248기 손실
3057명 전사

1 개요

영어 : The Battle of Midway
일본어 : ミッドウェー海戦

독소전쟁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면 태평양 전쟁에서는 미드웨이 해전이 있다

일본 제국 패망의 신호탄

1942년 6월 4일부터 6월 7일까지 미드웨이 제도 주변에서 벌어진 일본 제국미국해전.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은 미국에게 태평양 전선에서의 주도권을 넘겨줬다.

2 배경

2.1 미군의 사정 -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태평양 전선에 참여하고 있는 연합군 세력은 미국(American), 영국(British), 네덜란드(Dutch),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Anzac)으로 줄여서 ABDA 없다 연합군이었는데 이들 사정은 썩 좋지 않은 편이었다. 미국의 경우에는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전쟁에 뛰어들었지만 전쟁준비를 다 마치지 못했고, 영국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외부에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으며, 심지어 네덜란드는 이미 본토를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연합군은 중일전쟁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선을 유지하기는커녕 계속 뒤로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결국 ABDA 연합군은 필리핀과 자바 해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며 사실상 없어졌다 와해됐다. 인도차이나영국군은 일본군에 항복했고, 필리핀 바탄 반도에 고립된 미군필리핀군 역시 일본군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영국군은 인도까지, 미국-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연합군은 멜라네시아 지역까지 방어선을 후퇴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수적으로 가장 적었던 네덜란드군은 아시아 함대가 박살나고,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격파되어 사실상 연합군에서 이탈했다. 이것도 모자라서 인도양에서 벌어진 실론 해전으로 인해 인도양 동부의 제해권이 일시적으로 일본군에게 떨어지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렇게 태평양에서 일본에 대항할 존재는 사실상 미국만 남았지만, 미국조차 사정이 녹록치 않았다.

진주만 공습에서 신나게 털린 태평양 함대는 전력의 중핵이었던 전함을 대부분 상실했다. 침몰한 전함들을 다시 건져 올려서 진주만 도크에서 수리 중이었지만, 전함은 그렇게 빨리 수리되는 것이 아니라서 10척 중 완전 침몰한 2척을 제외한 8척은 1943년 ~ 1944년 즈음에서야 다시 전선에 배치되는 상황이니 당장 동원할 전함병력은 없었다.

또한 외형적인 전력손실과 더불어 태평양 함대의 전반적인 사기도 땅에 떨어져 있었다. 스스로 최강이라 자부하고 있었다가 자신들이 한 수 아래라고 얕보던 적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절름발이가 되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태평양 함대 소속 고위 장교들은 이제 남은 건 퇴역이나 한직으로 밀려나는 일이라며 낙담해 있었고, 위의 분위기는 자연스레 아래로 번지게 마련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전시킨 건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새로 부임한 미합중국 해군대장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었다. 그는 태평양 함대 소속 장교들을 전원 유임시킨 것이다. 당시에도 미 태평양 함대는 미 해군 내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으므로 그들을 대신할 인재들을 다시 모은다는 건 쉽지 않고, 진주만 공습의 경우 태평양 함대에게 책임을 물을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 니미츠의 판단이었다.

한편, 니미츠 제독은 당시 미 해군 항공모함 기동 부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고 여차하면 물량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도 일본 해군 항모 기동부대를 격멸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과는 별개로 당장의 전력차는 어찌할 방법이 없었고, 전장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알아서 나서주지 않는 이상 니미츠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를 잡을 기회는 없었다.

미 해군이 할 수 있는 대응은 일단 보유한 항모 기동부대를 이용해서 이제는 일본군 손에 넘어간 마셜 제도, 웨이크 섬, 마르커스 섬에 공습을 가한 것이 전부였다. 이 일련의 공습 작전은 실전경험 축적 및 앞으로 있을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비하여 사기와 공격 정신을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당장의 전략적인 효과는 미미했기에 태평양 함대 내에서도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고 분석하고 있었고, 일본군 수뇌부 역시 미군의 공격 자체를 사소한 발악 정도로 치부하고 있었다.

미군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2.2 일본군의 사정 - 칼 끝을 어디로 돌릴 것인가?

진주만 공습남방작전이 예상 외로 큰 성공을 거두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이후의 진로를 두고 혼란이 빚어진다.

일단 '미국의 싸대기를 맛깔나게 때리면 미국이 쫄아서 협상 테이블에 나오겠지?'란 명목하에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미국을 협상에 이끌어 내는 방법을 두고 일본군 육군, 일본군 해군, 그리고 연합함대 수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생각이 완전히 달랐다.[2]

중국 전선을 최우선으로 두던 육군은 남방 전선을 비롯한 태평양 방면에 더 이상 발을 걸치고 싶지 않았으므로 점령지의 방어를 강화하고 미군의 공격을 계속 막아내면 미국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거라는 수세적 전략을 주장했다. 반대로 일본 해군은 자신들이 확보한 전략적 우위를 바탕으로 공세에 나서면 미군이 확실한 타격을 입을 거란 계산을 하고 있었으며 그 일환으로 호주 침공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호주 침공은 보급과 전력 동원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육군에게 손쉽게 반박당했고, 이에 해군에서는 호주와 미국 간의 연락선만 끊어 놓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한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진주만 공습이 끝난 직후의 회의에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들이 모두 건재하기 때문에 이들이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으며,[3] 이후 전술된 미 항모에 의한 일련의 도서 지역 공격은 이러한 야마모토의 생각을 더욱 굳게 하였다. 이에 야마모토는 남방작전이 종료되는 즉시 중부 태평양 방면에서 미 해군에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항공모함을 끌어낸 다음 이들을 격멸한다는 작전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야마모토 제독의 계획에는 일본군의 어느 누구도 동의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야마모토의 원래 구상은 호주나 미드웨이가 아니라, 지상병력까지 동원해 미 해군의 본거지인 하와이를 공격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야마모토의 구상은 육군과 해군 모두에게 외면받기 딱 좋았다. 야마모토의 의중에 말려들지 않으려던 대본영 내 해군과 육군 수뇌부는, 호주와 미국 간 연락선을 차단하는 내용의 MO작전[4][5]과 FS작전[6]을 합의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는 한 발 물러나서 미드웨이를 공격하는 방안으로 선회했고, 진주만 공습으로 얻은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이용하여 이 계획을 어떻게든 밀어붙였다. 결국 진주만 공습 때처럼 자신의 직위를 걸고 나서야 마지못해 승인을 얻었지만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다. 해군 수뇌부가 구상한 MO작전을 위해 제5항공전대를 제공해야 했고, 육군의 요구에 따라 알류샨 열도 공격도 같이 진행해야 했다.[7] 이렇게 MI작전으로 불리는 미드웨이 공격이 결정되었으나, 야마모토의 연합함대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이 작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8]

양군 수뇌부를 확실하게 끌어들일 더 이상의 뾰족한 수가 없던 야마모토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미국이 이 상황을 먼저 뒤엎어 버리게 된다.

2.3 Game Changer : 둘리틀 특공대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군과 국민들의 사기 고양을 위해서는 그에 준하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며 이에 적극적으로 도쿄 폭격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 수뇌부는 틈만 나면 불려가 빨리 방법을 강구하지 않는다면서 루스벨트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에서 육상 폭격기를 발진시키면 도쿄 공습이 가능하다는 계획이 나왔고 이 안건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둘리틀 특공대가 결성되었으며 그들은 성공했다.

사실 중형 쌍발 폭격기 16대로 수행했던 둘리틀 특공대의 폭격이 대단한 물리적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는 진주만 공습의 울분을 갚아주는 카운터 펀치가 되었으며, 일본은 그야말로 마른 하늘의 날벼락을 얻어맞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이는 폭격 그 자체보다는 벌건 대낮에 미군의 폭격기에게 일본 본토, 그것도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를 대놓고 공격당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특히 이것이 진주만 공습 때와 마찬가지로 항공모함을 동원한 공습이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일본 해군은 그야말로 온갖 비난에 시달리며 해군에 대한 기대는 심해 밑바닥까지 추락한다.

해군이 비난당한 것은 해상 경계가 철저하지 못했다는 점[9]도 있었지만 역사상 단 한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았던 일본 본토[10], 그것도 '덴노가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다. 본토에 폭격이 일어났다는 건 '인계의 신'인 덴노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일본 군부는 해군과 육군이 완전히 분리되어 육군이 해군의 작전을 해군에 심어둔 스파이를 통해 알아낼 정도로 막장이었으니, 이는 육군이 해군을 물어뜯을 최상의 떡밥으로 작용했다. 즉 해군은 이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 덴노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는 반역자가 되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본토를 다시 공격한다면, 해군은 육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파에게 그야말로 샌드백마냥 두드려 맞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제서야 수뇌부는 야마모토 제독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야마모토 제독은 혜안을 가지고 이 안건을 제시한 것이었고 수뇌부가 그 선견지명을 무시한 까닭에 이 험한 꼴을 당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특히 체면 문제가 걸려 있던 해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대본영에서도 큰 저항없이 이 작전을 채택했다. 더불어 육군에서도 정예 연대를 편성하여 상륙 부대로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거기에 더해서 해군이 요구한다면 항공모함의 기지인 하와이 그 자체를 점령하는 작전에도 동의하였고 이에 따라 2사단과 7사단,53사단이 하와이 침공을 위한 훈련에 들어갈 정도로 일본군은 이 공습에 날카로운 반응을 보였다.

한편 미군은 일본군의 다음 공세를 대비하면서 일본군을 기만하고 정보를 캐내기 위해 두 번의 낚시를 시도했는데, 일본군이 그때마다 낚여주는 바람에 대박.

3 전투 준비

3.1 AF가 어디야!?

(태평양 함대로부터 일본을 낚으라는 명령을 받고.)

장교: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났다고 보내, 평문으로.
통신병: 평문으로요? 하지만 해수 담수화 장치는 멀쩡합니다. 제가 방금 다녀왔습니다.
장교: 야, 그냥 보내라면 보내, 알았어?
통신병: 예. 간부들이 죄다 더위 먹었구만...
― 영화 '미드웨이' 中

1942년 5월 20일 야마모토 제독이 발신한 통신문이 태평양 함대에서도 감청되었다. 일본 해군은 모든 통신문을 암호화하여 전달하고 있었고, 설령 감청당하더라도 해독하지 못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IBM에서 개발한 장치를 이용하여 암호문을 해독하고 있었고, 그 결과 일본군의 다음 공격 목표가 'AF'란 사실을 입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AF가 어디냐는 점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이 장악한 지역을 A로 시작하는 두단어의 약자로 표시하였는데 진주만의 경우 AH였으며 AF의 경우 진주만의 북쪽에 있으며 비행장이 있다는 것만 알수 있었다.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과 참모부는 3월에 2식 대정이 프렌치 프리게이트 솔에서 급유를 받고 진주만을 공습했을때 AF에서 떠오른 정찰기를 조심하라는 경고를 감청하여 AF가 미드웨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이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본토의 높으신 분들 중에서는 하와이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태평양의 어느 섬 또는 알류샨 열도를 지목하는 사람도 있었다. 심지어 육군에서는 샌프란시스코라고 주장하면서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었다.

이때 로슈포르 중령의 암호 해독반이 계책을 냈다. 당시 미드웨이 섬에는 도청의 우려가 없는 해저 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해저 케이블만을 사용하여 통신하면 일본이 통신이 하나도 없는 것을 의심하고 케이블의 존재를 눈치챌까 봐, 일부러 도청을 당할 것이 뻔한 무선을 통하여 알려져도 위험하지 않은 내용을 정기적으로 교신했다. 이 정기 무선 통신을 이용하여 미드웨이 기지에 약속된 통신을 보내도록 하고, 일본군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감청하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미드웨이의 급수 시설이 멀쩡했음에도 불구하고 미드웨이 방어군에게 "해수 담수화 장치가 고장나서 식수가 부족하다"란 내용의 거짓 내용을 무선 '평문'으로 보내도록 해저 케이블을 통해 지시하였고, 그런 줄도 모르고 이 떡밥을 덥썩 물어 버린 일본군은 이틀 뒤에 'AF에 식수가 부족함, 추후 해수 담수화 장치가 필요할 것'이란 무전을 날렸다. 이 무전은 성공적으로 감청됐고 다음 공격 목표가 미드웨이란 사실이 판명됐다.

당시 미드웨이는 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최전방 요충지였다. 특히 동태평양에는 이렇다 할 섬이 없기 때문에 미드웨이가 무너지면 그 다음은 바로 하와이였고, 하와이가 무너지면 바로 미국 서해안이었다.[11] 이에 그 이전부터 요새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미드웨이가 공격지로 판명된 이상 더 많은 물자를 쏟아부어 방어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니미츠 제독은 미드웨이 섬에 주둔한 해군과 해병대 지휘관에게 필요 물자 요청 목록을 보내도록 지시하고는 그보다 훨씬 많은 물자를 보내고, 거기에 당시 중령이던 방어 지휘관들에게 격려 차원에서 대령 계급장을 보냈다.[12] 여기에 버팔로, 와일드캣, 빈디케이터, B-17 등의 항공기도 있는 대로 보냈다. 비행장 크기가 섬의 1/4을 차지하는 작은 섬에 항공기 124대가 북적거렸고, 대공포에다 지뢰까지 떡칠해 버렸던 탓에 설사 미 함대가 전멸한다 해도 미드웨이 섬을 점령하기는 힘들 것이란 예상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준비상황이 100%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당장 미 육군은 위에도 나왔다시피 미국 서부 해안이 위험하다며 대부분의 폭격기들을 손에 꼭 틀어쥔 채, 미 해군이 요구했던 수량에 미치지 못하는 숫자만 미드웨이로 보냈다. 당시에는 나름 타당한 결정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조종사들은 태반이 풋내기들이었으며, 버팔로는 이미 열세임이 증명되었고 와일드캣 정도나 간신히 싸울 수 있었다. 빈디케이터는 조종사들에게 '바이브레이터'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기체의 노후화가 심해서 날개에 비닐 테이프를 붙여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6기의 최신형 뇌격기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 역시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었다.

3.2 일본군을 기만하라

한편 태평양 함대의 항모 기동부대는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 산호해 해전이 끝난 틈을 타 니미츠 제독은 일본군을 기만하기 위해 두 번째 떡밥을 던졌다. 당시 보급 문제로 진주만을 경유하느라 산호해 해전에 참여하지 못한 윌리엄 홀시 제독에게 모든 항공모함을 이끌고 일본군의 툴라기 기지로 진출하여 병력을 노출시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 의미를 이해한 홀시 제독은 충실히 그 명령을 수행했고, 일부러 정찰기가 있는 데까지 가서 대놓고 모든 병력을 보여 줬다. 그 결과 일본군은 태평양 함대의 모든 항공모함이 남태평양 지역에서 작전 중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더불어 남태평양에서 작전을 마친 기동부대가 도착하자마자, 니미츠 제독은 3일만에 보급과 정비를 마치도록 한 후에 바로 미드웨이로 출격시키고 일본군의 주요 정찰 거점에 구축함을 파견하여 일본의 비행정을 통한 정찰을 방해하였다 [13]

그 결과, 일본군은 전장에서 미국 항공모함을 발견할 때까지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작전 준비를 마치고 미드웨이에 파견된 미국 함대는 정규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이었다. 이 병력은 사실상 태평양 함대가 최대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었다. 게다가 알류샨 열도 지역에도 병력을 배치해야 했고, 테오볼드 소장이 지휘하는 제8기동부대에 중순양함 2척, 경순양함 3척, 구축함 13척을 할애해야 했기 때문에 실제로 미드웨이에 투입된 병력은 훨씬 더 적었다. 일본군과 비교하면 명백한 전력 열세였기 때문에 니미츠 제독은 영국의 태평양 방면 항공모함 3척 중에서 1척을 빌려오려고 접촉을 했는데, 막상 영국은 일본군의 다음 목표가 인도양 부근일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기에 "항공모함 빌려줘서 인도양을 상실하면 댁들이 책임져 줄 거요?"란 반응이 돌아와 못 빌렸다. 렌드리스에 의지 중이던 영국이 이런 반응을 보인 것은, 앞서 언급한 실론 해전의 패배 등으로 인해 인도 상실에 대한 영국의 공포가 극에 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태평양 지역 식민지들에 대한 지배력을 잃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돈줄인 인도까지 잃게 된다면 나치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경제상황은 그야말로 파멸로 치달을 가능성이 매우 컸기 때문이었다.[14]

한편, 개전 이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해 오던 홀시 제독이 피부병을 얻어 병상에 눕는 바람에 프랭크 플레처 제독이 총지휘를 맡게 되었고, 홀시 제독이 지휘하던 기동 부대의 지휘는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게 됐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철저하게 일본군을 기다리고 있는 미군의 목표는 한 가지.

일본 항모 전단을 섬멸한다!!

3.3 대체 이길 마음은 있나요?

그야말로 이기기 위해 있는 방법 없는 방법을 다 동원한 미군과 달리 일본군은 승리병에 도취되어 자만한 상태였다.
파일:Attachment/미드웨이 해전/4466789.jpg [15]
억지로 우겨서 결과 고친다고 실전에서 안 그럴 것 같냐?
실제론 1발에 대파인데 왜 3발에 소파일까
[16][17]

특히 작전 수립 단계에서 미드웨이 공격 계획 작성 전에 실행한 모의전에서는 미드웨이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기의 공격에 기함인 아카기(카가라는 설도 있다)가 어뢰 9발을 얻어맞고 격침된다는 결과가 나오자, '배 한 척이 어뢰를 이렇게 한꺼번에 얻어 맞을 리가 없잖아'라는 연합함대 참모장 우가키 마토메의 주장으로 결과를 3발 명중, 소파로 고치고 계속해서 모의전을 진행했다는 일화가 유명. 일단 미드웨이 기지의 항공기들은 일본 함대에 전혀 피해를 입히지 못했으므로 이런 발로 굴린 시뮬레이션도 결과적으로 맞기는 했다. 다만 실제 전투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드웨이 기지에 이어 공격을 개시한 미해군의 항모였고, 이 모의전도 결국 미드웨이의 공략 자체는 성공했으나, 몇몇 함이 연료 부족으로 좌초되는 등 상당히 볼썽사납게 끝이 난 모양. 근데 '실전에서는 이렇게 되지 않도록 하자' 한 마디로 끝냈다고 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무리한 모의전을 진행했는지는 불명이나, 당시 미드웨이 공략을 좀 더 뒤로 미뤄야 한다는 반대파들[18]이 있는 상황에서 미드웨이의 조기 공략으로 전쟁을 빠르게 끝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겠냐는 추측이 있다.

일단은 아카기의 피격탄을 바꾼 후에 당연히 실제로 9발을 맞으면 어쩔 거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일본으로써는 그런 식으로 항공모함을 잃는다면 이길 도리가 없으니 이 워게임은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일단 워게임의 명중은 주사위로 결정하니 어뢰가 맞을지는 랜덤이고, 다시 하면 결과는 바뀐다.) 어쨌건 간에 위의 만화처럼 농담처럼 바꾸지는 않았고 아래에서도 반발이 꽤나 있었다는 것이 현재 정설이니 저 장면은 만화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항공모함 한 척의 손실도 감당하지 못할 국력으로 미국과 맞선 것이 가장 큰 패인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게다가 일본군은 진주만 공습 때와 같은 철통보안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모를 보안의식 결여의 극치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출항을 앞둔 군함의 승조원들은 "우리 미드웨이 레이드 갑니다"를 떠들고 다녀 스파이들이 어렵지 않게 정보를 캐낼 수 있는 수준이었고, 승조원들이 배치되는 과정에서 야마모토 제독은 아예 무선으로 모든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군함들끼리도 무선 통신을 통해 미드웨이를 떠들고 다녔으며 그 중 압권은 어떤 군함에서 이번 작전이 끝난 이후 승조원들의 편지 주소를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자 다른 군함에서 미드웨이라고 답변한 것이었다. 이랬으니 미군은 통신을 가로채기만 해도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 어이없는 사태는 앞선 낚시를 통해 일찍이 미드웨이 공격을 알아낸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헷갈리게 만들었으며 워싱턴이나 영국군도 "비열한 쪽발이들이 페이크를 치고 있다."면서 니미츠 제독을 압박했다.

물론 일본군도 완전 바보가 아니기에 이런 통신들은 대부분 암호문으로 보내고 있었으나, 당시 미군은 정보 분야에 투자를 엄청나게 한 결과 일본군의 암호(전략암호 D)를 상당히 해독하고 있었으며 미군 지휘부는 적어도 일본 해군 참가 함정만큼의 작전 개요는 파악하고 있었다. 미드웨이 작전 직전에 일본군이 암호를 바꾸기는 했지만, 미군의 정보국은 일본군의 암호 교신 패턴을 거의 파악하고 있어서 미드웨이 해전 중 일본 해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19]

일본군은 MI작전에 참가하는 전력을 4개의 부대로 나눠서 해군 중장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지휘하는 제1항공함대(각각 정규 항공모함 2척씩으로 구성된 제1, 제2항공전대를 묶어서 구성), 알류샨 열도 방면을 공격할 북방함대, 미드웨이 상륙을 위한 침공부대, 야마모토 제독이 직접 지휘하는 본대로 편성했다. 일본 함대의 규모는 정규항공모함 5척, 경항공모함 3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의 거대한 세력으로, 여기에 잠수함 22척과 수상기모함, 소해정 및 기타 보조 함정들을 합치면 거의 200척에 가까운 대함대였다. 특히 본대에는 당대 최강의 전함인 야마토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제는 각 부대들의 배치였다. 목표 지역의 거리가 있는 북방 함대를 제외하더라도 부대를 굉장히 넓은 간격으로 배치했는데, 이 때문에 이후 전투에서 어느 한쪽이 공격받고 있어도 나머지 전력이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실제로 항공모함들이 당한 이후에 전함으로 야간 공격을 시행하려고 했으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미 해군을 따라잡지 못했다. 연합함대 수뇌부 및 야마모토 사령관을 태운 야마토는 항공함대로부터 500km 후방에 배치되어 있었으나, 항공전이 예상되는 해역에 야마토를 이렇게 이끌고 나온 것은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다. 결국 이 200척에 달하는 함정 중 실제로 전투에 투입된 함정은 아무리 많이 쳐줘야 그 1/10 정도였다.[20]

일본 해군이 이렇게까지 느슨한 자세로 싸움에 임한 것은 진주만 기습 이후로 계속된 일방적인 전투를 거치면서 미군이 잔뜩 쫄아 있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야마모토는 미드웨이가 점령되고 나서야 미 해군이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일견 어이없어 보이는 부대 배치 또한 이를 감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그 누구도 미군이 쫄기는 커녕 복수심을 활활 불태운다는 걸 몰랐으며, 그래서 현재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승리병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일본군의 하늘을 찌르고도 남을 자만심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안일함의 또다른 예로, 진주만 공습 당시 제1, 제2항공전대와 함께 제1항공함대를 구성했던 제5항공전대(쇼카쿠, 즈이카쿠)가 이 작전에서 빠진 것을 들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들 역시 제1항공함대 소속으로 MI작전에 참가했어야 하나, 작전 입안 중 MO작전에 2척의 항공모함을 지원하기로 함에 따라 둘만 먼저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이다.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으로 이어졌고, 이 전투에서 항모들이 저마다 피해를 입고 전열에서 이탈하게 되면서 결국 미드웨이 침공 불참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즈이카쿠의 경우 쇼카쿠와 달리 배 자체의 피해가 경미해, 함의 수리를 서두르고 큰 피해를 입은 기존 항공대 대신 다른 항공대를 배속시키면 충분히 작전 투입이 가능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은 항공모함과 그에 배속된 항공대를 쇼군다이묘, 전함주포마냥 일체화된 존재로 취급했기 때문에 항공대가 항공모함을 옮겨다니며 작전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이러한 경직된 사상 덕에 여차하면 투입이 가능했던, 일본에서 가장 성능이 좋은 항공모함 1척이 가장 중요한 전투의 순간에 발이 묶여 있었다. 설령 이러한 사상이나 절차상 문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에서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즈이카쿠를 완편 상태로 참가시켰을 것이지만, 야마모토 제독을 비롯한 군 상층부는 즈이카쿠를 미드웨이 침공에 참가시키려는 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심각한 피해를 입고 빈사 상태로 돌아온 요크타운을 긴급 수리해서 억지로 참전시켰던 미 해군의 행보와 매우 대조되는 장면이다.[21] 또한, 그때까지 일본 해군이 진주만 공습을 비롯한 서전에서 거둔 화려한 전과와 산호해 해전의 결과로 인한 MO작전의 실패가 하나같이 항공전력의 숫적 우세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행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끝나지 않는데, 제1항공함대를 이끌고 있는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원래 항공전과는 전혀 무관한 수뢰전 전문가라는 것.[22] 쉽게 말해 항공전이 전문 분야도 아닌 사람에게 항공전 지휘관을 맡겼다.[23] 같이 미드웨이에 왔던 야마구치 다몬이나 1항공전대를 육성한 경험이 있던 오자와 지사부로가 제1항공함대를 맡았다면 조금 더 나은 성적을 냈을지도 모르겠다.[24] 야마구치 다몬의 경우에는 공격기, 폭격기가 전투기의 지원을 받기 힘든 성급한 공격을 주장하기도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주장이 관철되었을 경우 병장 교환으로 인한 유폭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에 한두 척의 항모는 살아남았을 가능성이 높았고, 오자와 지사부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잘못된 아웃레인지 전법을 구사해 항공기를 다 갈아먹었지만 이미 그때는 미드웨이에서 1,2항공전대(및 파일럿)을 다 날려먹은 후라 어떻게 보면 뻔한 결과였다. 일본 해군이 우세였던 미드웨이에선 다르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높다.

이렇게 일본 해군 안에는 불안 요소가 산재해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제대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 25일부터 각 함대들의 출항이 시작되며 MI작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5월 말, 6월 초에 이르러 위에서 언급된 미군의 부산하고도 수상한 움직임(비록 항공모함을 직접 발견한 것은 아니지만)이 계속 포착되면서, 미군이 일본군의 의도를 알고 있다는 정보가 야마모토에게 전달되었다. 앞서 가는 나구모 제독 역시 이 정보를 알고 있었으나, 야마모토와 나구모 모두 이 정보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해당 정보를 접수한 본대에서 제1항공함대와 연락하려다가 "나구모 제독도 통신을 들었을 것이니 굳이 본대의 위치를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는 진언을 받아들여 제1항공함대에 정보를 보내지 않았는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나구모 제독은 기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한 무선 봉쇄 덕분에 이 정보를 듣지 못했으며 결국 이것이 커다란 패착이 됐다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로는 나구모 제독도 이 내용을 이미 알았다는 것이 정론인 듯.

이런 어이없는 행동의 원인은, 미리 짜놓은 계획이 헝클어지는 것을 원치 않은 데다[25] 미드웨이와 하와이 사이에 미리 배치해 둔 잠수함들이 미 항공모함의 접근을 알려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잠수함들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 게다가 이 잠수함 부대의 지휘관은 미드웨이 공격 작전에 별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가 뒤늦게 잠수함 부대를 전개하는데, 제때 전개했어도 이미 늦었다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전개가 늦었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4 양군 편제

4.1 일본군

일본 해군 연합함대 - 정규 항공모함 4척, 경항공모함 4척, 수상기모함2척, 전함 11척, 중순양함 11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11척, 함재기 248기, 수상기와 비행정 16기 [26][27]

  • 호소가야 보시로의 제5함대(북방부대)
    • 본대 - 중순양함 나치(那智), 구축함 이카즈치(雷), 이나즈마(電)
    • 경항모 2척
      • 제4 항공전대(제2기동부대) (전대장 : 카쿠타 카쿠지) : 류조(龍驤), 준요(隼鷹)
    • 제4전대2소대 : 중순양함 타카오(高雄), 마야(麻耶)
    • 제7 구축함대 : 구축함 아케보노(曙), 사자나미(漣), 우시오(潮)
    • 제1 수뢰전대(애튜 공략부대) : 경순양함 아부쿠마(阿武隈)
      • 제21 구축함대 : 구축함 하츠하루(初春), 와카바(若葉), 하츠시모(初霜)
    • 제21전대(키스카 공략부대) : 경순양함 타마(多摩), 키소(木曾)
    • 제6 구축함대 : 구축함 아카츠키(暁), 히비키(響), 호카제(帆風)
    • 보급단 - 유조선 2척, 수송선 3척
  • 코마츠 테루히사의 제6함대(선발대)
    • 연습순양함 1척 - 카토리[30]
    • 잠수모함 1척 - 이스쿠니마루 [31]
    • 잠수함 11척 - I-156, I-157, I-158, I-159, I-162, I-165, I-166, I-168, I-121, I-122, I-123

4.2 미군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 - 항공모함 3척, 중순양함 7척, 경순양함 1척, 구축함 17척, 잠수함 19척, 함재기 233기, 육군소속의 육상기 127기

  • Task Force 16(제16임무부대) -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소장
    • TG 16.5 Carrier Group
    • TG 16.2 Cruiser Group
    • TG 16.4 Destroyer Screen
      • DesRon1(제1구축함전대) 구축함 9척 - 펠프스(USS Phelps, DD-360), 모너헨(USS Monaghan, DD-354), 위든(USS Worden, DD-352), 아일윈(USS Aylwin, DD-355), 볼치(USS Balch, DD-363), 커닝엄(USS Conyngham, DD-371), 베넘(USS Benham, DD-397), 엘릿(USS Ellet, DD-398), 모리(USS Maury, DD-401)
    • Task Force 16 Oiler Group
      • 구축함 2척 - 듀이(USS Dewey, DD-349), 몬신(USS Monssen, DD-436)
      • 함대 유조선 2척 - 시마론(USS Cimarron, AO-22), 플랫(USS Platte, AO-24)
  • Task Force 17(제17임무부대) - 프랭크 J. 플레처 소장
    • TG 17.5 Carrier Group
    • TG 17.2 Cruiser Group
      • 중순양함 2척 - 아스토리아(USS Astoria, CA-34), 포틀랜드(USS Portland, CA-33)
    • TG 17.4 Destroyer Scree
      • DesRon2(제2구축함전대) 구축함 6척 - 함만(USS Hammann, DD-412), 휴즈(USS Hughes, DD-410), 모리스(USS Morris, DD-417), 앤더슨(USS Anderson, DD-411), 러셀(USS Russell, DD-414), 그윈(USS Gwin, DD-433)

5 전투

5.1 전초전

1942년 6월 3일 오전 8시, 알류샨 열도의 더치 하버에 공습이 감행되었다. 그리고 애투 섬과 키스카 섬에 대한 상륙 작전도 병행됐는데, 미군의 저항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북방에 파견된 제8기동부대의 사령관 테오볼드 소장이 "일본 놈들이 알래스카를 공격할 것이다."라면서 부대를 엉뚱한 곳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양 측 모두 별다른 손해 없이 공습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일본군이 자신들이 예측한 범위 내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만족하고, 미드웨이에 일본 함대가 곧 출현할 것이므로 정찰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6월 3일 오전 9시, 미드웨이에서 파견된 정찰기가 일본군의 상륙 부대를 발견했다. 정찰기와의 접촉은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나구모 제독은 그냥 보고만 올리고 말았으며 다음날 새벽에 미드웨이를 공격한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은 가만히 있지 않고 가장 먼저 B-17 폭격기를 동원하여 일본 함대를 폭격하였으나 수평폭격의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 당시 미국이 보유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노던 폭격 조준기조차 원형공산오차(CEP) 30m로 사실상 선박을 맞추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32] 이어서 어뢰를 탑재한 PBY 카탈리나 비행정을 동원하여 새벽 1시경 다나카 라이조 제독의 수송 함대에 뇌격을 가해 수송선과 유조선에 피해를 주었다. 하지만 속도가 떨어지는 수준의 피해였으며, 작전 참여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5.2 미드웨이 기지와의 공방전

나와 함께 있던 해병대는 18~22살의 청년들이었다. 그렇게 침착한 사람들은 처음 보았다. 난 깨달았다. 승리가 우리의 것임을...

-존 포드[33]

6월 3일 새벽 3시를 기점으로 일본 해군과 미드웨이 방어군은 각각 전투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4시, 미드웨이에서 전투 정찰 임무를 띤 카탈리나 비행정과 F4F 와일드캣들이 이륙하여 일본 함대 수색에 나섰으며, 새벽 4시 30분에는 일본 함대에서 제로센, 급강하 폭격기, 뇌격기 등이 이륙하여 미드웨이로 출동했다. 이때 나구모 제독은 노련한 조종사들을 후위로 뺀 다음, 경험이 적은 조종사들을 1파로 보냈다. 이때 항공대 지휘관으로 내정된 후치다 미츠오 중좌는 맹장염 수술을 받았기에 항공기 탑승이 불가능했고, 그 대신 자신이 신임하는 부하인 토모나가 조이치 대위를 대신 추천했다.

한편 미국 항공모함이 출현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구모 제독은 정찰기들을 발진시켰으며, 일부 전력은 함선 공격용 철갑탄을 무장하여 즉각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문제는 20기나 정찰에 투입한 미군과는 달리 딸랑 8기만 날렸다. 그 넓은 해역[34]에서 (상대적으로)쬐끄만한 미군 항공모함을 발견하기 위한 정찰기 숫자로는 매우 부족한 수준이었다. 한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에서 발진시키기로 되어 있던 정찰기가 캐터펄트 고장으로 발진이 30분 늦어졌고, 이게 나중에 일본군이 패배하는 원인 중 하나로 꼽혀 왔다.

새벽 5시 30분 초계에 나선 정찰기가 미드웨이로 날아가는 일본 해군 항공대를 발견했고, 그 25분 후에는 다른 정찰기가 일본 제1항공함대 제2항공전대(소류, 히류가 포함된)를 발견하여 보고를 올렸다. 이 당시 미국의 항모기동부대는 제1항공함대의 동북쪽 320km 지점에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총지휘관이던 플레처 제독은 일본의 항공모함이 다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서 자신이 이끄는 CV-5 요크타운은 나머지 2척의 항공모함에 대한 예비대로 활용하기로 마음먹고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CV-6 엔터프라이즈와 CV-8 호넷을 동원하여 남서쪽의 일본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에 따라 스프루언스 제독은 약 250km 거리까지 접근한 후에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함대를 이동시켰다.

6시가 되자 미드웨이의 레이더에서도 일본군 대편대가 탐지되었고, 미드웨이의 모든 폭격기, 공격기 전력들은 일본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곧바로 출격했다. 15분 후 일본군 편대가 미드웨이 인근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미리 상공에서 대기중이던 F2A 버팔로와 와일드캣들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여 2기를 격추시켰지만 곧이어 제로센들이 반격에 나섰다. 결국, 미드웨이의 전투기 부대는 편대장 팍스 소령을 비롯한 많은 조종사들이 희생당했고 살아남은 조종사들의 전투기도 엄청난 손상을 입는 등 완전히 박살났다.

별다른 손실을 입지 않은 토모나가 대위의 부대는 미드웨이 섬을 폭격했고 수도관, 디젤유 저장소, 중대 본부, 수상기 격납고, 탄약고 등이 완전히 박살났다. 하지만 활주로는 의외로 멀쩡했고 이미 수비대 전원은 콘크리트 방공호로 대피한 상태였다. 미군 수비대의 피해는 전사 11명, 중경상 18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일본 공격대의 피해는 이미 섬에 떡칠해 놓은 대공포 탓에 상당히 심했다. 미드웨이 상공에서 격추된 숫자는 8기에 불과했지만, 크게 피해를 입은 기체들이 많아서 귀환 도중 추락하거나 귀환 후 폐기된 기체들까지 합한 공격대의 최종 손실은 무려 22.4%에 달했다. [35]

7시를 전후로 마무리된 공격의 성과를 관찰한 결과 미군의 저항이 심해 2차 공격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하고, 토모나가 대위는 함대에 2차 공격이 필요하다고 타전했다.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 함대 수뇌부도 70기의 단발 폭격기/공격기로 한 번에 미드웨이의 지상 기지를 무력화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치 않았기에 후속 공격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드웨이로부터 반격이 시작되면서 일본함대의 계획은 꼬이기 시작한다.

비슷한 시간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공격대들이 일본 함대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VT-8(제 8뇌격비행대)소속 TBF 어벤저 6대[36]와 육군 항공대 소속 B-26 4대로, 모두 뇌격을 실시했으나 각각 5대, 2대의 피해를 입은 채 공격에는 실패했다.

이들이 물러난 뒤인 7시 55분경 로프톤 헨더슨 소령[37]이 이끄는 SBD 돈틀리스 16대가 일본 제1항공함대 상공에 도착하였다. 헨더슨 소령은 비행대를 8대씩 2개의 비행중대로 나누어 각각 히류와 소류를 공격하기도록 했고 엘머 글리던 대위에게 1개의 비행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하지만 일본 함대 상공을 초계하던 제로센에 걸려서 6대의 돈틀리스가 공격을 시도하기도 전에 격추당하고 말았다. 헨더슨 소령도 제로센에 격추당해 전사했고, 글리던 대위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남은 10대의 돈틀리스를 이끌고 히류를 공격했다. 그러나 돈틀리스가 떨어뜨린 폭탄은 모두 히류에서 빗나갔다. 히류 또한 대공포와 대공기관포로 돈틀리스를 공격했지만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폭격을 마친 돈틀리스는 철수 도중 제로센에게 두대 더 격추당하여 8기가 귀환했으나 이중에서 6기는 다시 비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대파된 상황이었다.

헨더슨 소령의 돈틀리스 부대의 참패는 나중에 미군 항모에서 출격한 돈틀리스들이 단 5분만에 일본 항모 3척을 격침시키며 순식간에 해전을 결정지은 것과 대비되는 성과인데,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우선 헨더슨 부대의 파일럿들은 미드웨이 해전에 참전한 전 미군 파일럿 중에 가장 미숙한 대원들이었다. 이들은 전투 경험도 없었고, 심지어 돈틀리스 조종 경험도 없었다. 또 한가지는 헨더슨 부대에서 격추된 돈틀리스는 전부 초계하던 제로센들이 대함 공격 전후에 격추시킨 것이며, 히류의 대공포는 10대의 돈틀리스[38] 중 한대도 격추시키지 못했다. 나중에 항모에서 출격한 돈틀리스들은 헨더슨 부대보다 훨씬 큰 규모였기 때문에 일본 항모의 대공포는 역시나 전혀 효과가 없었고, 제로센은 거듭되는 뇌격기들의 공격으로 연료 고갈과 탄약 부족 등 피로를 겪고 있는 상황에다가 저고도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돈틀리스들을 저지하지 못했다.

헨더슨 소령의 부대에 이어서 8시 30분경에 구형 빈디케이터 급강하 폭격기들이 도착했으나 이들 역시 피해만 입은 채 공격에 실패했다. 핸더슨 공격대와 빈디케이터들이 박살나던 동안 B-17 폭격기들이 수평 폭격을 가했지만 역시 같은 이유로 인해 실패했다.[39][40] 종합하자면 첫 공격은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일본 함대는 대혼란에 빠지는데, 미군 조종사들의 공격에 맞서 회피기동을 할 때마다 함상 작업이 중지됐으므로 안 그래도 모자란 시간을 더 잡아먹는 와중에, 끼어든 미군 잠수함 노틸러스 호를 잡으러 다니느라 항공모함, 호위함정 할 것 없이 함대 진형이 죄다 흐트러지고 말았다. 거기에다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의 공격과 이들을 막으려는 제로센들의 요격이 진행되는 와중에 1차 공격대가 함대 상공에 도착해서 착함을 기다리는 등 바다와 하늘 모두 난장판이었다. 미군처럼 무전기와 레이더가 충실하고 별도의 통제 시설까지 갖췄다면 아군 함정들과 항공기들을 적절히 통제하며 이런 상황에 대해 대응 가능했을지도 몰랐지만, 당시 일본 함대의 통제 수단은 수신호, 발광 신호, 조명탄, 연막이 전부였고 통제 시설이라곤 일본 항모 특유의 좁아터진 함교 뿐이었다. 이런 혼란스런 상황은 제1기동함대 수뇌부들의 상황 파악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때 일본 함대가 거둔 전과는 모두 제로센에 의한 것이었고 대공포화에 의한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미드웨이에서 출격한 미군 조종사들은 대부분 신참들이어서 대공포화를 제대로 회피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이 빈약한 대공포화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본 함대에게 비극의 단초가 되고 만다.

5.3 미국 항공모함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한편 나구모 제독은 2차 공격을 위해 당시 대기 중이던 공격대에서 함선 공격용 무기들을 철거하고 육상 공격용 폭탄을 장착하라고 지시한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아까 늦게 출발했던 정찰기(토네의)가 플레처 제독이 지휘하던 17기동부대를 발견하고 보고를 올렸지만, 함종에 대한 언급이 없는데다가 무전기 고장으로 그 보고조차 늦게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나구모 제독은 15분 가량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하다 일단 제1항공전대(아카기, 카가가 포함된)에는 무장 전환 작업을 중지하고 적의 함종을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그 사이 미드웨이에서 발진한 미군 공격대의 습격이 이어졌지만 역시 기량 부족이었던 까닭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았다. 하지만 일단 폭탄은 날아오니 회피 기동을 해야 했으므로, 이번에도 무장 전환 작업이 중단되는 등 난장판이 또 벌어졌다. 핸더슨 공격대의 공격이 끝났을 무렵 아까 그 정찰기가 추가로 "항공모함은 없었다"라는 보고를 올린 덕분에 나구모 제독은 안심할 수 있었으며, 무장 전환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그런데 그 정찰기에서 다시 "항공모함 1척을 봤던 것 같다"고 보고를 번복하는 바람에 나구모 제독과 참모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 와중에 미드웨이에서 파견한 공격 부대(빈디케이터, B-17)가 또 나타나면서 대응할 시간을 더 빼앗겼다.

당시 일본 해군의 교리를 그대로 따를 경우, 함재기의 발진 과정에 필요한 절차들(무장, 급유, 이동, 엔진 예열, 기타 등등)을 아무리 서둘러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과 함재기와 항모 승조원들로서는 1차 공격대의 귀환 이전에 함재기들을 출격시킬 수 없었다. 정찰기의 보고를 접수한 직후 바로 출격 지시를 내렸어도, 함재기들의 출격이 완료될 때까지 토모나가 공격대는 최소 30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도 귀환하는 기체들이 멀쩡하고, 적의 공격이나 기타 지연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나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는 1차 공격대의 함재기 중 다수가 심한 피해를 입어서 한시바삐 착륙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미군의 추가공격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함대 방공을 위해 전투기들을 수시로 띄워야 했다. 또한, 적기가 전투기들의 방어를 뚫고 공격하면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항공모함이 회피기동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 동안 함재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비행 갑판 위에 계류되지 않은 비행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된다. 더군다나 함종, 규모, 위치 모든 게 불확실했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섣불리 함재기들을 보냈다가는 허를 찔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사정들이 맞물린 탓에 그 시점에서는 공격대를 발진시킬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무시하고 함재기를 날려보냈다 한들 그 시점에서는 이미 늦었다. 정찰기의 보고가 들어온 시점에서 이미 미군 함재기들은 일본 함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후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이 들이닥쳤을 때, 비행 갑판 아래의 격납고 안에는 연료와 무장을 가득 채운 함재기들이 가득하고 각종 무장들은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격납고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명중률은 높으나 뇌격에 비해 낮은 파괴력을 가진 급강하 폭격[41]임에도 불구하고 이 함재기들과 폭탄들이 유폭해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만약 이러한 유폭이 없었다면 일본의 항공모함 중 절반 정도는 살아남았을지도 모른다.

5.4 미국 함대의 공격 - 뇌격기 부대의 전멸

참고로 미드웨이 해전 당시 미군 항모의 비행부대는 3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TBD 데버스테이터로 구성된 뇌격기대대, F4F 와일드캣의 전투기대대, SBD 돈틀리스의 급강하폭격기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 비행대대의 지휘관은 소령이며, 항모 전체의 비행 부대의 지휘관은 중령이다.

오전 7시, 일본군을 공격할 수 있는 위치에 도착한 미국 항모기동부대는 즉시 공격 부대를 발진시켰다. 이 무렵 스프루언스 제독도 한 가지 삽질을 하고 있었는데,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 함대 상공에서 편대를 이룬 후에 공격하러 가라는 지시를 내렸던 것이다. 이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의 16기동부대가 항공모함간의 전투를 해보지 못한 탓이 컸다. 반면 요크타운은 날아가면서 편대를 형성하도록 지시를 해 둔 상황이었다. 더불어 일본 항공모함에서 파견한 공격대에게 공격당할 우려가 있었으므로 미처 제독이 지휘하는 호넷 중심의 18기동부대에게 멀리 분리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미국 항공모함 기동 부대는 세 척이 각각 활동했으며, 그 결과 일본 함대의 타격력 분산에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었다.

함재기를 발진시키고 있던 엔터프라이즈에서 돈틀리스 몇 대가 말썽을 부려 출격이 늦어지자 다급해진 스프루언스 제독은 그냥 기다리지 말고 공격에 나서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상공에서 대기 중이던 항공기들은 그 즉시 일본 함대를 찾아 비행을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 이외에도 각 항공모함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여 152기에 달하는 대규모 편대가 형성되었다.

한편, 앞서 제1항공함대를 노렸다가 호위함정들의 공격을 받고 물러났던 미국의 나왈급 잠수함 SS-168 노틸러스[42]는 기회를 엿보다가 구축함 아라시를 발견했는데, 그대로 가면 아라시에게 포착당할 상황이라 선제 공격을 했으나 유효타를 주지 못해 아라시의 폭뢰 공격을 피해 잠수해야 했다. 노틸러스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다시 살짝 부상했으나 아라시가 아직 남아 있어서 별수없이 다시 잠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아라시는 본대에서 뒤쳐졌고, 황급히 본대를 따라 항해를 시작했다.[43]

한편 미군 비행 부대는 날아가면서도 삽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호넷의 비행 부대에는 지휘 계통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호넷 비행대의 총지휘관인 링 중령은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로 부하들의 큰 불만을 사고 있었으며[44], 과거 조종경력에서 사건사고 기록 때문에 부하들에게 그 자질을 의심받고 있었다. 때문에 링 중령에 대해 부하들의 불만이 상당했고 일부 부하들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각오를 하고 지휘관을 교체해 달라고 요구하려 하는 등 거의 항명 직전의 상황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날 출격한 호넷의 비행대에서 사단이 나고야 말았다. 호넷의 비행대내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후에도 명확히 밝혀지지지 않았다. 전투 후 호넷의 함장 미처 대령은 이날 전투에 참여한 각 예하 비행대 지휘관의 전투보고서를 상부에 올리지 않았고 자신의 전투보고서만을 스프루언스 소장에게 제출했는데, 이때문에 미처 대령이 링 중령 사태에 관련된 일을 고의로 은폐하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미처 대령의 전투보고서는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보고서를 받아든 스프루언스 소장도 내용이 의심스럽다면서 격노하기도 했다. 미드웨어 해전 이후 미처 대령은 제독으로 승진[45]했으나, 스프루언스 소장은 미처를 한직으로 보내버렸다.

증언을 바탕으로 당일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호넷에서 출격한 후 8시 30분경 제8뇌격기대대를 이끌던 존 C. 월드론 소령[46]이 비행대 총사령관인 링 중령에게 지금 비행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서 자신이 말하는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고 링 중령에게 말했다. 하지만 호넷 비행대의 총지휘관인 링 중령은 전 부하들이 무선으로 듣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위에 정면 도전했다고 생각하며 월드론 소령의 제안을 기각했다. 이에 한동안 링 중령과 티격태격하던 월드론 소령은 결국 독단으로 제8뇌격기대대의 방향을 틀어 비행대에서 이탈해 버리며 항명했다. 이때 월드론 소령은 링 중령에게 "Well, the hell with you."라는 말을 남겼다. 오늘날 표현으로 말하자면 "XX드쇼." 혹은 "F*** you!" 정도의 표현이니 당시 상황이 얼마나 험악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후술되어 있지만 이후 본대에서 이탈한 월드론 소령의 제8뇌격기대대는 1명만이 생존하고 29명이 전사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한편 월드론 소령의 제8뇌격기대대가 이탈한 후 제8전투기대대와 제8폭격기대대가 남은 링 중령의 호넷 비행대는 일본 함대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날아가고 있었다. 제8뇌격기기대대가 이탈한지 30분 가량 지난 9시경 와일드캣 10기로 구성된 제8전투기대대의 연료가 바닥났다. 제8전투기대대의 대대장 미첼 소령은 링 중령에게서 아무런 지시가 없자, 링 중령에게 보고없이 와일드캣을 이끌고 호넷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귀환 중 연료가 고갈되어 10대 모두 해상에 불시착했다. 10명의 파일럿들은 구명보트에서 상어와 사투를 벌이는 등 4~5일간 바다를 헤매다가 8명은 구조되었으나, 2명은 실종되었다.

제8폭격기대대만 남은 호넷 비행대는 계속 서진했으나 10시경 돈틀리스의 연료가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에 제8폭격기대대의 대대장 존슨 소령도 링 중령에게 보고없이 돈틀리스 17대를 이끌고 귀환했다. 링 중령이 대형을 이탈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제8폭격기대대는 이를 무시했다. 귀환 도중 연료 부족으로 돈틀리스 3기가 해상 등에 불시착했다.

한편 이런 와중에 엔터프라이즈에서 발진했던 전투비행대는 호넷의 제8뇌격기대대를 자신들이 쫓아가야 될 부대로 오인하고 쫓아가는 바람에, 엔터프라이즈 제6뇌격기대대도 호위없이 단독으로 날아가게 되었다. 게다가 엔터프라이즈의 전투비행대는 호넷의 뇌격기 부대마저 놓쳐 버렸고, 전투 내내 엉뚱한 곳을 맴돌게 된다. 결국 호넷과 엔터프라이즈 뇌격기대대 전원은 모두 전투기의 호위를 받지 못한채 일본 함대와 교전하게 되어 엔터프라이즈 소속 5기의 데버스테이터만이 무사히 전투현장에서 빠져 나왔지만, 1기가 귀환중 엔진이 멈추면서 해상에 불시착했고 4기만이 엔터프라이즈로 귀환했는데 1기가 파손이 심해 바로 처분 되었다.

어찌됐든 09시 20분 링 중령의 본대가 엉뚱한 곳을 비행하고 있는 동안, 본대에서 이탈한 존 C. 월드론 소령이 이끄는 호넷의 제8뇌격기대대는 정말 그의 말대로 일본 함대를 정면에서 발견하고 뇌격에 돌입했다. 그러나 구려터진 항공어뢰[47]와 호위의 부재 탓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일본 초계 전투기인 제로센 8기에 모두 격추당해여 탈출에 성공한 조이 게이 소위를 제외한 29명의 탑승원 전원이 전사했다. [48]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호넷의 비행 부대 중 제8뇌격기대대를 제외한 나머지 전투기, 폭격기 부대는 일본 항모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맴돌다가 연료 부족 등으로 그냥 귀환했다.

뒤를 이어서 09시 37분 콘신 린제이 소령이 이끄는 엔터프라이즈의 제6뇌격기대대 14기가 도착하여 뇌격에 돌입했으나, 이번에도 역시 전투기 호위가 없었고 전투기 지원을 애타게 요청했지만 하필 당시 근처에 있던 전투 비행대는 연료가 떨어진 바람에 도와줄 수 없었다. 역시 단 한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한 채 엘리 중대는 5기가 격추 되고 2기가 생존, 린제이 중대는 4기가 격추 당하고 3기가 생존하여 총 5기의 데버스테이터가 무사히 전투현장에서 빠져 나왔다. 1기는 귀환 도중 엔진이 멈추면서 해상에 불시착하여 4기만이 엔터프라이즈로 귀환했는데 1기는 파손이 심해 바로 처분 되었다.

곧이어 10시 10분 요크타운의 제3뇌격기대대 12기가 도착해서 일본 함대의 가장 앞쪽에 있던 항모 히류에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와일드캣 호위 전투기들도 제대로 따라왔다. 이 호위 전투기 편대의 지휘관은 타치 위브 전술의 창시자였던 존 S. 태치 소령이었다. 와일드캣 호위 전투기 편대는 태치 소령의 지휘에 따라 타치 위브 전술을 선보이면서 그런대로 뇌격기들을 보호했다. 그러나 주옥같은 항공 어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는데 히류를 향해 발사된 어뢰 5발 중 한발도 명중되지 못했다. 또 호위 전투기 세력 또한 열세였던 까닭에 요크타운의 뇌격대도 일본 군함에 이렇다 할 피해를 주지 못한채 제로센의 요격에 TBD 데버스테이터 뇌격기 10기가 격추당했고 2기는 연료부족으로 해면에 불시착했다. 뇌격대원 24명중 21명이 전사했다.

이처럼 3개 항모에서 출격한 뇌격기대대들은 단 한발의 어뢰도 명중 시키지 못하며 거의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채 모두 전멸하는 참극을 겪었다. 그렇지만 이들 뇌격기 대대의 반복된 공격 덕분에 일본 해군은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빼앗기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로센들도 뇌격기를 방어하기 위한 반복된 전투로 피로가 누적되었고 전투과정에서 실탄과 연료를 소모하였다. 또 뇌격기들을 요격하기 위해 일본의 방공 전투기들이 모두 저공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이게 극적인 반전의 계기 중 하나가 된다.[49] 훗날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당시 일본 함대의 고위 지휘관들은 미군의 목숨을 건 공격에서 사무라이를 연상했다고 술회했다. 한편, 모두가 뇌격기 대대의 파상 공격에 정신이 팔려 있던 그 순간...

웬 급강하 폭격대가 일본 함대 상공에 도착했다.

5.5 운명의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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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ve Fateful Minutes

엔터프라이즈 소속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비행대는 일본 해군이 있을 곳으로 예상된 지점에 도착하였지만, 일본 함대가 이미 변침해 버린 관계로 발견하지 못했다. 당시 비행대 편대장 C. 웨이드 맥클러스키 소령이 전투기 출신인지라 선공필승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돈틀리스의 본래 순항 속도보다 빠른 190노트의 속도로 날아 연료가 슬슬 간당간당해질 때였다. 결국 남서쪽으로 좀더 비행을 해보고 귀환하기로 결정했는데, 때마침 운 좋게도 가느다란 항적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항적을 따라가면 일본 함대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한 맥클러스키 소령은 추적을 시작했는데, 이 항적을 남긴 배가 바로 아까 노틸러스를 잡으려다 뒤쳐진 아라시였다.

이들은 요크타운의 뇌격기 대대가 공격을 개시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인 10시 22분에 일본 함대의 상공에 도착했다. 제로센들은 요크타운의 뇌격기들을 막으려고 모두 해수면 근처로 내려가 있어서 방해가 될 전투기 세력도 없었다. 상공을 감시하던 견시병들도 모두 저공에 있던 미군 뇌격기들에 익숙해진 터라 고공에 있던 급강하 폭격기들을 일찍 발견하지 못했다.

최적의 공격 위치에 있었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 부대는 카가를 먼저 공격하였다. 이들은 미드웨이의 조종사들과는 달리 스스로 베테랑이라고 자부할 만큼 경험 많은 조종사들이었기에 그야말로 완벽한 급강하 폭격을 선보였으며, 2개 비행대 28대. 폭탄 합계 50발(...)이 한꺼번에 덤벼드는 통에 결국 카가는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여러 발의 폭탄을 얻어맞았다. 카가에 대한 명중탄은 공식적으로 4발이지만, 워낙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맞다 보니 맞는 쪽은 물론이고 때린 쪽도 정확하게 몇 발이 명중했는지 모를 지경이었으므로 실제로는 10발 전후로 명중한 것으로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여기에 연료와 무장이 가득한 전투기,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무장들이 유폭을 일으키면서 카가의 비행 갑판과 격납고가 절반 이상 날아가고 남은 구역들도 불지옥으로 돌변했다. 이 와중에 함교도 직격탄을 얻어맞아 카가의 지휘부는 몰살당했다. 함장 오카다 대좌를 포함한 중좌 이상 장교 전원이 전사하면서 항공 장교였던 소좌 한 명이 함장직을 인수했지만, 집중된 공격과 지휘부의 몰살로 대응이 늦어지며 카가는 이 해전에서 격침당한 일본 항모들 중 최대의 인명 피해를 기록하게 된다. 당시 참전한 파일럿 더스티 클리스[50]는 피아 식별을 위해 갑판에 큼직하게 그려 넣은 일장기에 명중한 폭탄도 있었고(당장 본인부터가 노렸다. 다만 적중은 실패하고 가장자리에 맞았다고) 아예 갑판 위에서 대기 중이던 제로센에게 명중한 폭탄까지 있었다고 증언했다. 꽤나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 탓에, 일본군과 미군 양쪽 모두에서 당시 카가를 비롯한 일본군 항모의 비행 갑판에 함재기들이 가득했다는 증언이 있는 반면 당시 미군 현장 지휘관들의 보고서에는 비행 갑판 위에는 소수의 제로센들만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51]

아카기는 카가가 얻어맞고 있을 때 비교적 가까이 있었으나 운 좋게도 폭격기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유인즉, 원래 폭격 수칙대로 하자면 맥클러스키 소령의 비행대가 가장 마지막에 아카기를 공격하고 공격 장면을 촬영해야 했으나 이런 대규모 대함 공격의 경험이 부족했던 데다, 원래 전투기 비행대 출신에다 폭격대 지휘관이 된 지도 얼마 안 된 비행대 지휘관 맥클러스키 소령은 이 수칙을 못 떠올린 채 가장 먼저 발견한 카가를 향해 급강하를 시작해 버렸으며, 나머지 휘하 폭격기도 카가 쪽으로만 갔던 것. 원래 수칙대로라면 맥클러스키 비행대의 뒤를 따르던 리처드 홀시 '딕' 베스트 대위가 지휘하는 비행대가 카가를 공격해야 했고 실제로 이들 비행대들도 대부분은 맥클러스키 소령의 편대와 상관없이 카가로 몰려가 버렸다. 이렇게 아카기는 운 좋게 살아남는 듯 했으나, 제대로 된 수칙과 공격 순서를 기억해 낸 베스트 대위가 뭔가 일이 꼬였음을 깨닫고, 그 즉시 편대원 둘을 데리고 빠져서 아카기를 공격하러 갔다. 그리고 이들은 아카기의 운명을 바꿔 버렸다. 첫 번째 공격은 빗나갔고, 두 번째로 프레드릭 T. 위버가 폭격을 감행했지만 빗나갔다. 그러나 이 일격은 선체 바로 근처에서 터지면서 아카기의 키를 고장내 버렸다. 덤으로 비상시 탄약고를 침수시켜 유폭을 방지하게 하는 물펌프도 고장내 버렸다. 그리고 베스트 대위가 마지막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 공격은 비행 갑판 한복판을 관통해 격납고 안에서 폭발했다.[52] 이 폭발로 아카기의 소화 장치와 방화 커튼이 망가졌고, 바로 옆에 있던 무장을 가득 실은 뇌격기들의 대폭발이 다른 항공기와 무장을 유폭시켜 아카기를 생지옥으로 만들어 버렸다.[53] 우가키의 말이 맞았다. 폭탄 2발에 이미 침몰한 배가 어뢰를 9발이나 맞을 리가 없으니.... 대신 카가가 10대쯤 맞았으니 쌤쌤이다

한편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 부대가 막 공격을 시작한 시점에 맥스 레슬리 중령이 이끄는 요크타운 소속의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대대도 도착하여 소류에 공격을 가했다. 3발을 소류에 명중시켜, 결국 소류도 나머지 두 척의 항공모함과 비슷한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한편 호넷에서 출발한 급강하 폭격기대대는 앞서 말한 이유에서 귀환했기 때문에 일본 항모 공격에 참여하지 못했다.

한편 히류는 급강하 폭격기들의 공격에서 벗어나 있었으나, 히류 역시도 요크타운의 뇌격기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아군의 참화를 눈 뜨고 지켜봐야만 했다. 과거의 통설에서는 히류가 나머지 3척들과 거리를 멀리 두고 있어서 급강하 폭격기들의 공격을 피한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당시의 일본 함대 진형을 보면 오히려 히류는 소류 가까이에 있었다. 히류가 살아남은 것은 레슬리 중령이 후속 공격대가 바로 뒤에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아직 날아오르지도 않은 후속 공격대에게 바로 연달아 히류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 당연히 후속 공격대는 그의 무선을 실수라고 생각하고 무시했다.

아카기에 탑승하고 있던 나구모 제독은 간신히 탈출하여 경순양함 나가라로 사령부를 옮겼다. 나구모 제독은 자신의 주특기였던 수뢰전[54]을 실시하기 위해 미군 함대를 향해 자신의 함대를 전진시켰다. 미국 함대도 자신들처럼 수상함으로 최후 결전을 벌이러 접근할 것이라고 믿은 탓이었다. 나구모 제독이 미 함대와 직접 멱살잡이를 하겠다고 나서면서 그나마 자신에게 남은 1척의 항공모함 히류는 안중에도 없던 그 때, 히류에 타고 있던 제2항공전대장 야마구치 다몬 제독은 10시 40분 히류의 급강하 폭격기 18대와 호위 전투기 6대들에게 미국 함대를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상의 상황은 일본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2011)에 묘사되어 있다.

5.6 마지막 공방전

히류에서 발진한 급강하 폭격기 부대는 정찰기가 보고했던 지점으로 날아가려고 했지만 마침 귀환하는 미국 공격 부대가 보이자 그들을 추적했다. 그들은 요크타운 소속의 비행대였고, 그 때문에 요크타운이 공격받게 되었다. 한편 요크타운은 레이더 덕분에 히류에서 발진한 급강하 폭격기들을 미리 발견하고 방어 준비에 나선다. 요크타운은 귀환하던 급강하 폭격기들의 착함을 중지하고 요크타운 상공으로 날아온 급강하 폭격기들은 모두 엔터프라이즈로 보내 버렸다. 그리고 함재하고 있던 전투기들을 급히 이함시키고 대공 전투를 준비했다. 또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전투기 28대가 요크타운을 지원하기 위해 날아왔다.

레이더 덕분에 미리 출격한 전투기들이 원거리로 마중 나가 일본 급강하 폭격기 부대를 저지하여, 18기의 일본 급강하 폭격기 중에서 11기를 격추시켰다. 그리고 요크타운의 대공포가 일본 폭격기 2기를 추가로 격추했다. 공격대 지휘관인 고바야시 미치오 대위도 전사했다. 하지만 일본의 급강하 폭격기로부터 2발이 요크타운에 명중되어 큰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이미 공격에 대비하여 연료관에는 불연성 기체인 이산화탄소를 연료관이 터질정도로 빵빵하게 집어넣었고, 무장들은 안전한 곳으로 치우면서 최대한 신관을 제거했고 일부 폭탄들은 신관만 쑥 뽑은 채 바닷속에 버리기도 했다. 특히 단가 높은 큰 폭탄들이 대상이었을 정도로 확실한 조치를 미리 완료했으므로 일본 항공모함과 같은 꼴을 겪지는 않았다. 다만 1기의 폭탄이 하필이면 굴뚝을 타고 들어가 기관실이 타격을 입는 바람에 큰 낭패를 봤다. 플레처 제독은 이를 기점으로 부대 지휘권을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넘겼다.

요크타운이 큰 피해를 입어 무력화됐다고 판단한 야마구치 제독은 새로 발견한 엔터프라이즈를 다음 공격 목표로 잡고 토모나가 대위에게 어뢰 공격기 10대와 전투기 6대를 이끌고 출격할 것을 명했다. 토모나가 대위의 공격부대는 12시 45분에 히류에서 출격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미군의 손상 관리 및 복구 능력이 굉장히 뛰어났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원래 미 해군은 전 함정 승조원들의 화재 대처 능력 및 함정 보수 능력 향상에 크게 투자하고 있었다(단, 항공기 승무원들은 예외). 사실상 전 승조원이 소방 요원이자 보수 요원인 셈으로, 소수의 보수 인원에만 의지하던 당시 일본 해군과는 아주 대조적이었으며 특히 그 당시의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걸 급히 수리하느라고 출항 이후에도 전문 기술자들이 승함해 있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그 때문에 요크타운은 다소 성능이 떨어지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능을 30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복구하여 정상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시작하였다.현실에 강림한 초재생 능력 그래서 일본군은 2차 공격대가 도착한 시점에 지금 작전 중인 항공모함은 아까의 요크타운이 아니다라고 판단했고, 다시 공격했다.

당시 공격 부대에는 뇌격기 편대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뢰를 먼저 하나 발사하여 요크타운이 회피하도록 유도하고 회피 시 도달하는 지점에 또 다른 어뢰가 명중하도록 하는 고난이도 공격 기술을 실행하였다.[55] 그 결과 요크타운은 2발의 어뢰에 얻어맞았으며, 이것이 치명상이 되어 결국 침몰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전투 보고에 따르면 토모나가 대위는 요크타운을 공격하던 중 대공포화에 맞자 그대로 요크타운의 함교 근처에 들이받고 전사했다고 하는데, 이는 '야마모토 이소로쿠'나 애니멘터리 결단처럼 일본에서 제작한 관련 작품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에피소드이다. 귀환이 불가능할 때 자발적으로 들이받는 행위는 미군에서도 가끔 일어난 행위라서[56] 카미카제와는 다르긴 하지만, 요크타운의 미드웨이 해전 피해 보고서에는 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Yorktown (CV-5) War Damage Report - March 9, 1943 (Midway) 정황상 단순 피격 후 요크타운 주위에 추락한 것을, 격전 도중 동료 조종사가 요크타운에 충돌하였다고 오인하여 보고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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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요크타운이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한 함장 엘리엇 벅매스터 대령은 곧 퇴함 명령을 내렸다. 이전의 교전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승조원들은 대단히 여유 있게 퇴함했다고 한다. 벅매스터 대령은 가장 마지막에 남아서 퇴함하지 못한 승조원이 있는지 확인한 후 퇴함했고 곧 구조되었다.

요크타운이 어뢰에 피격된 그 시각, 요크타운에서 보낸 정찰 비행대가 히류를 발견하고 그 즉시 위치를 보고하였다. 이에 엔터프라이즈에서 공격 부대가 발진하였고, 정보 전달의 착오로 뒤늦게 정보를 전달받은 호넷에서도 공격부대가 발진했다. 여기에는 모함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에 복수를 다짐하는 요크타운의 비행대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전력이 거의 거덜났지만 요크타운을 두 척의 미 항공모함으로 착각했던 야마구치 제독은 마지막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확실하게 기습 효과를 노릴 수 있는 석양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용할 수 있는 항공기는 9대밖에 없었고 쉴새없는 전투로 지친 승조원들은 막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승조원들의 피로도 극심하여 미군 항공기를 제때 발견할 수 없었다.

당시 히류는 전함 하루나, 키리시마와 중순양함 토네, 치쿠마, 그리고 경순양함 나가라 5척이 둘러싸고 있는 윤형진 형태로 방공망을 짜고 있었다. 이때 히류를 폭격하기로 되어있었던 것은 아카기를 폭탄 한발로 작살내버린 베스트 대위의 제6폭격비행대대였는데, 제3폭격비행대대의 셤웨이 대위는 하루나를 폭격하러 가다가 히류를 노린 폭탄 2발이 빗나가는 것을 목격하자[57], 목표를 히류로 바꾸어 급강하에 들어갔고 제3폭격비행대대의 맨 뒤의 2대를 제외한 12대의 돈틀리스가 히류를 향해 급강하했다. 제6폭격비행대대는 갑자기 끼어들어온 제3폭격비행대대를 먼저 보내고 이후 자신들도 급강하 폭격을 개시했다.

히류에는 총 4발의 폭탄이 명중했는데, 4발 모두 함수부분에 밀집되어 떨어졌다. 특히 자카드 소위의 첫번째 명중탄은 1번 승강기에 직격하면서 승강기를 두쪽으로 박살내고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이후 셤웨이 대위가 2번째 명중탄을, 제3폭격비행대대의 누군가가 3번째 명중탄을, 그리고 아카기를 명중시켰던 베스트 대위 역시 베스트하다 가 4번째 명중탄을 날렸다. 거의 동시에 명중한 4발의 폭탄은 히류의 전방갑판을 완전히 박살내고 상층갑판에 적재되어 있던 제로센을 유폭시켜 화재를 일으켰다.

1번 승강기가 박살나 잔해의 일부가 아일랜드#s-3에 걸쳐있는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아카기가 폭탄 단 한 발에 유폭되어 침몰했고, 카가가 아일랜드를 직격당해 완전히 무력화되고 이후 유폭되어 침몰한 것에 비교하면 히류의 피해는 복구 가능한 수준이었다. 피격지점 바로 아래층에 있던 다수의 제로센이 유폭하긴 했지만, 항공유가 발화하거나 폭탄이 유폭하지도 않았고 아일랜드도 멀쩡했다. 거기에 4발이 골고루 떨어지지 않고 함수에 집중되어 떨어졌기에 보다 빠른 뒷처리가 가능했으므로 적절한 데미지 컨트롤을 했다면 침몰을 막을 수 있었지도 몰랐다. 하지만 위 문단에서 언급된 하루나 폭격을 위해 날아가던 제3폭격비행대대의 남은 2대가 히류와 하루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속력을 늦출 수 없었고, 추가공격을 피하기 위해 고속항진하고 있었던 까닭에 불길이 함 전체로 번지면서 무력화되었다.

화재가 함 전체로 완전히 번져 더 이상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야마구치 제독은 나머지 승조원들을 퇴함시키고 함장인 가쿠 대좌와 함께 불타오르는 히류에서 운명을 같이했다. 순식간에 격침된 카가나 소류, 뇌격처분된 아카기와는 달리 히류는 몇 시간에 걸쳐 천천히 가라앉았다.[58] 석양을 배경으로 타오르는 히류의 상공에는 갈 곳을 잃은 제로센들이 처량하게 맴돌았고, 이후 한 대씩 차례차례 해상에 불시착했다.

버려진 채 불타오르는 히류

이 즈음 나구모 제독은 자신이 2척 이상의 미국 항공모함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퇴각을 검토하고 있었다. 정찰기의 보고와 격추당해 포로로 잡힌 미군 조종사를 심문한 결과였다.[59] 이후 나구모 제독은 미 해군의 재공격과 히류를 상실하는 난리통의 와중에서 전투 지속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야마모토 제독에게 철수를 건의하게 된다.

이로써 미 함대와 일본 제1항공함대 사이의 전투가 마무리되었다.

5.7 일본 함대의 퇴각과 전투의 마무리

모든 함재기들을 수용한 스프루언스 제독은 수상함 사령관 시절의 경험을 살려 일본 해군이 야간작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판단, 다시 항공모함 작전이 가능해지는 새벽까지 도망가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의 함대는 전함과 구축함, 순양함들의 수상함전력이 미국보다 우월하였고 미군은 전함이 한척도 없었다. 거기다 야간에는 항공모함의 함재기들이 활약하는데 큰 무리가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미군의 작전 목표는 일본 항공모함을 잡는다는 한가지 뿐이었으므로 이 목표가 달성된 이상 굳이 과욕을 부릴 이유는 없었다. 이에 따라 미국 함대는 계속 동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타격을 입은 일본 항공모함들은 적에게 노획될까봐 하나둘씩 자침하기 시작하였는데, 소류와 카가가 먼저 침몰했으며 히류와 아카기는 나중에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에 따라 구축함에서 어뢰를 발사하여 침몰시켰다. 소류와 히류의 함장들은 이함을 거부하고 배와 함께 가라앉는 것을 선택했다.[60][61]

제1항공함대의 참사를 전달받은 야마모토 제독은 북방함대에게 즉시 본대에 합류할 것을 지시하고, 곤도 중장으로 하여금 휘하의 침공부대 소속 전투함들과 살아남은 제1항공함대의 전투함들을 이끌고 미국 함대를 추격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야마모토 자신도 역시 본대를 이끌고 미국 함대의 추격에 나섰다. 더불어 대기중인 잠수함들은 야간에 미드웨이를 포격하고, 미국 항공모함들을 추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 나구모 제독은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만다. 히류가 공격받은 것을 전후로 하여 전투 지속여부를 두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철수를 건의한 것이 야마모토 제독의 화를 돋구는 바람에 나온 결과였다.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은 공략부대의 지휘관인 곤도 중장에게 넘어갔다.

지휘권을 박탈당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함(아카기)을 잃은 나구모 제독이 야마구치 제독에게 인계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는 히류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히류에 타고 있던 야마구치 제독은 자결할 생각으로 불타는 히류에서 내리지 않고 있었으므로 역시 정상적인 지휘를 할 수 없었다. 설령 히류의 사정이 양호해서 정상적인 지휘가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전투서열에서 밀리는 야마구치 제독이 제1항공함대의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여하튼 분기탱천한 일본 함대가 추격을 시작했지만 이미 본대부터가 500km나 떨어져 있었고, 북방함대는 그보다 더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미국 함대가 동쪽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망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6월 5일 자정을 약간 넘긴 시간에 미국함대의 추격을 중지하고, 미드웨이 공격을 중단한다고 선언하였다. 다만 북방함대에게는 패전을 가리기 위해 예정대로 키스카와 애투섬에 상륙하라는 지시를 내렸다.[62]

한편 야마모토 제독의 명령을 수신하지 못한 잠수함 한 척이 미드웨이 근해에 부상하여 포격을 가하는 바람에 미드웨이 수비대는 물론이고 태평양 함대 사령부를 놀라게 만들었는데, 곧 작전이 중지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딘가에 있을 파손된 요크타운을 찾아 격침시키기 위해 배회하기 시작했다.

요크타운의 피격 소식을 전달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요크타운이 일본군에 나포되지 않도록 어뢰로 격침하라는 명령이 내렸는데 막상 현장에서 살펴본 결과 잘하면 견인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나왔다. 이에 오후부터 예인선을 이용하여 견인을 시작했고, 구축함 6척을 배치하여 견인중인 요크타운을 호위하도록 명령했다.

6월 5일 새벽 3시, 미 해군 잠수함 탬버가 급히 퇴각중인 미드웨이 공격부대를 발견하였고 어뢰공격을 위해 접근하였으나 발각되어 황급히 잠항하였다. 문제는 제7전대 기함인 모가미급 중순양함 쿠마노가 휘하 중순양함들에게 좌현 45도로 변침하라고 명령했다가 좌현 90도로 변침했고, 여기서 제대로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는 바람에 7전대 소속 중순양함이 대혼란에 빠졌다는 것. 스즈야는 우현으로 변침해서 빠져나갔지만, 모가미는 쿠마노를 피하던 중순양함 미쿠마의 측면을 들이받아버렸다. 양쪽 모두 손상을 입고 속도가 떨어지는 바람에 본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오전이 되자 미드웨이에서 날아온 급강하 폭격기들이 공격을 퍼부었고 미쿠마는 적재하고 있던 산소어뢰의 유폭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완전히 낙오되었다. 그리고 호넷과 엔터프라이즈에서 파견한 공격대가 간신히 버티고 있던 미쿠마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격침시켰다. 한편 본의 아니게 같은 편을 공격했던 모가미는 남아있던 산소어뢰를 바다에 몽땅 버리는 바람에 공격은 미쿠마보다 더 많이 받았으나 간신히 격침을 모면하고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파손된 까닭에 일본으로 끌려가 수리를 받아야만 했다.

열심히 도망가던 스프루언스 제독은 날이 밝자 다시 반전하여 일본 함대를 추격하기 시작하였으나 구축함 타니카제 한 척만 발견했으며, 그나마도 격침시키지는 못했다.

진주만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는 항공모함 4척을 날려버렸다는 보고를 듣고도 계속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일단 일본 수상함대의 규모가 크다보니 그대로 공격해도 소용없다는 의견이 대세였다. 하지만 6월 5일 하룻동안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 함대가 미드웨이 공격을 포기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제서야 안도하기 시작했다.

6월 6일 오전, 배회중이던 일본군 잠수함 I-168이 예인 중이던 요크타운을 발견하였다. 경계 구축함들은 잠수함을 막지 못했고, I-168은 4발의 어뢰를 발사하여 요크타운에 바짝 붙어있던 심즈급 구축함 해먼을 격침시키고 요크타운에도 명중시켜 요크타운은 다시 침몰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구축함들이 즉각 보복에 나섰지만 잠수함은 간신히 탈출해 도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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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요크타운은 침몰할 듯 말듯 버티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날이 어두워져서 위험하다는 이유로 예인을 포기했으며, 6월 7일 새벽 5시쯤에 침몰하고 말았다. 워낙 위험해서 승함을 포기했지만 오랜 시간 요크타운이 침몰하지 않고 버텼던 까닭에 현장에 있었던 인력들은 침몰하는 모습을 보며 그냥 배수펌프라도 설치해둘 걸 그랬다면서 후회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사냥에 만신창이가 된 거대한 코끼리의 죽음을 연상시켰다고...

이를 끝으로 미드웨이 해전은 종료되었다.

6 정리

미드웨이 해전 전개도

일본군 피해
- 항공모함 4척(아카기, 히류, 소류, 카가), 순양함 1척(미쿠마)격침
- 항공기 322대 손실(격추가 아니고 항공모함이 격침당하면서 함께 수몰된 것이 대다수)다 침몰했으니까 착륙할 곳도 없었나보다[63]
- 해군 3500여 명 전사. 파일럿 약 100여 명 포함

미군 피해
- 항공모함 1척(요크타운)[64], 구축함 1척(해먼)[65] 격침
- 항공기 147대 손실
- 해군 307명 전사. 파일럿 약 200여 명 포함
- 미드웨이 기지 파손

7 평가

분산된 함대, 레이더의 부재, 너무 많은 정보를 노출시킨 것 등이 일본의 패인으로 꼽히고 있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자만과 지나치게 쓸데없이 세밀한 작전이 꼽힌다. 작전이란 것은 이례적 사태나 실수 등 여러가지 변수에 대비해서 유연하게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일본군의 작전은 쓸데없이 세밀하고 서로 연계되어 있어서, 한 작전이라도 실패하면 연계된 모든 작전에 지장이 생기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나구모를 비롯한 일본군 현장 지휘관들은 꽉 짜여진 시간계획에 쫓기듯이 움직였고 예상치 못한 경우에 대비한 유연한 우발계획을 세울 수 없었으며, 결국 그때 그때 대응하기에 급급하다가 패배하고 말았다. 어째 일본축구랑 비슷하다

7.1 하늘은 미국 편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 있지만 저 '할 일'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은 일본보다 한 발씩 앞서 있었다.

실제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큰 전투, 특히 큰 해전의 특성상 쌍방 모두 전략/전술적 레벨에서 삽을 푸고 있었으며, 일본군이 저지른 실책이나 우연히 벌어진 사고들이 미군의 행운으로 이어졌던 것도 미국의 중요한 승리 원인으로 작용했다.

  • 양측 기동부대 간 치열한 정찰전이 이어지고 있었을 때, 사실 일본군도 거의 동시에 미 기동부대를 발견하였다. 발견한 것은 항공모함 소류에서 발진한 정찰기였는데,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았다.
  • 순양함 치쿠마에서 보낸 정찰기는 국지적인 악천후로 인해 제대로 된 관측을 할 수 없었는데, 하필 그 지점이 미 기동부대 근처였다.
사출기의 고장으로 30분 늦게 출발해서 패인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한 중순양함 토네의 정찰기의 경우, 오히려 예정된 시간과 루트대로 움직였으면 발견이 불가능했고 늦었기에 그나마 관측이 가능했다.
  •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가 함대로 복귀하던 중 긴 항적을 남겼는데, 하필이면 그게 미군 급강하 폭격기 편대를 이끌던 맥클러스키 소령의 눈에 딱 걸렸다. 아라시의 뒤를 따라간 미군은 일본 항모전단을 발견했고 그 뒤는...
  • 무엇보다도, 마치 철저한 스케줄이 짜여 있는 듯 정확한 타이밍(연료와 폭탄이 굴러다니고 제로센들은 뇌격기를 상대하려고 전부 저공에 있는)에 결정적인 타격을 날린 급강하 폭격기 부대의 도착은 엄청난 행운이었다. 이 공격순서가 의도된 거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니미츠는 그것이 절대로 미리 계획된 게 아니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우리에게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만약 급강하 폭격기들이 10분만 늦었다면 우리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을지도 몰랐다. 함재기들이 일본함대의 상공에 도달한 순서는 절대로 미리 계획된 게 아니었다. 조종사들이 죽을 걸 알면서도 그런 명령을 내릴 지휘관은 없을 것이다. 뇌격기 조종사들의 희생은 결코 헛된 게 아니었고, 그때 하늘은 분명히 우리 편이었다."
  • (전술했듯)아카기는 운이 좋았다면 카가와 소류가 당할 때 무사할 뻔 했다. 원래 엔터프라이즈의 급강하 폭격기들은 카가와 아카기를 1개 대대씩 나눠서 공격해야 했으나, 이런 대규모 대함 공격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탓에 카가에게만 공격이 몰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제6폭격비행중대의 리차드 베스트 대위가 아카기에게 눈길을 돌렸고, 요격기 2대를 이끌고 아카기를 공격했다. 그리고 베스트 대위의 일격으로 아카기는 불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역시 베스트 아카기가 이 사람을 어마어마하게 싫어합니다
  • 소류와 히류의 운명 역시 달라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요크타운의 비행대들은 뇌격기와 급강하 폭격기 모두 비슷한 시각에 일본 함대 상공에 도달했었다. 그런데 뇌격기들은 그 당시 가까이 있던 히류를 향해 곧바로 공격했지만, 급강하 폭격기들은 히류를 제껴두고 좀 더 멀리 있던 소류를 공격하러 가버리면서 뇌격기들이 먼저 공격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당시 현장 지휘관의 착각과 미군의 교리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의 급강하 폭격기대 지휘관이었던 레슬리 중령은 자신들의 뒤에 다른 비행대 소속 급강하 폭격기들이 추가로 더 따라오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일본군의 예비대에 대응하기 위해 1개 비행대는 출격하지 않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이 레슬리 중령에게 통보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미 해군 급강하 폭격기의 전술교리상 먼저 도착한 비행대는 멀리 있는 목표를 공격하게 되어 있었으므로 레슬리 중령은 주저없이 히류를 '뒤따라오는 비행대'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소류로 향했던 것이다. 만일, 이들이 소류 대신 히류를 목표로 삼았다면 히류는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의 협공에 걸려드는 셈이 되었으므로 집중공격을 받았던 카가와 마찬가지 꼴을 당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야마구치 제독의 운명이 일찍 결정났을지도 모르고, 여기서 더 나아가면 이 공격 이후 일본군의 반격도 불확실해졌을 것이다.
  • 집중 공격을 받은 카가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저런 이유로 공격력이 분산되었던 아카기나 소류는 불과 1~3발의 명중탄이 '영 좋지 않은 곳'[66]에 맞으면서 어찌 손 쓸 틈도 없이 전투력을 잃고 침몰에 이르렀다.

전장에는 정말 '승리의 여신'이 존재하는 것인가 싶은 대표적인 전투 중 하나가 바로 미드웨이 해전이다.

여담으로 미군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를 기원하며 항모전단의 집결예정지에 Point Luck(행운의 지점)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대로 되었다. 히류에 있던 야마구치 제독은 미군이 히류에게 마지막 공습을 시작할 때, "하늘은 결국 우리 일본을 버리려 하는가"하며 탄식하기도 했다.

7.2 일본군의 삽질

그러나, '승리의 여신'이 미국에 미소를 보낸 그 이면에는 태평양 전쟁 초전의 승기에 들뜬 일본군이 보여준 너무나 안일한 태도와 러일전쟁이후 일본군에 자리잡은 공격 일변도의 사상이 있었다. 여기에 심심하면 들먹이는 저들의 "대일본제국"운운하는 자뻑하는 작태 역시 일본을 패전으로 이끄는 지름길이었다. 저들의 자국군을 부르던 별명이 '무적황군'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진주만 공습 때 보여준, 미국 전체를 속여넘길 정도로 철저한 보안의식은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작전 자체도 안일함과 자만심의 극치였다. 야마모토는 진주만 기습 이후 6개월간의 전투로 인해 미군이 겁을 먹었다고 짐작했고, 이건 야마모토 뿐 아니라 당시 일본군 고위 장성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그 이유는 일본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일본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인 제대로 된 적과 제대로 된 전쟁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만심에 쉽게 빠진 것이다. 그래서 야마토를 위시한 주력부대를 한참 떨어진 후방에 배치한 것은 '안 그래도 쫄아있는 미군'이 주력 부대를 미리 보고서는 혹시나 움직이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더 어이없는 것은 이 작전이 '미드웨이를 점령'하고 '미국 함대를 격멸'한 뒤 북으로는 알류샨 열도를 먹고 남으로는 호주까지 위협한다는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야마모토의 구상은 하와이 공략이었다. 결국 한 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다 보니 전력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야마모토를 비롯한 일본군의 생각과는 달리 미군은 쫄기는커녕 오히려 '오기만 하면 박살을 내줄테다'라며 일본군에 대한 각종 정보를 낱낱이 수집하고,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적시적소에 끌어모으면서 잔뜩 벼르고 있었다. 원래 미국은 자국내의 여론 때문에 참전하지 않은 것 뿐이지, 절대로 겁쟁이가 아니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당해 열세에 놓이긴 했지만 일단 회복한 후엔 전시체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더욱이 군수물자 같은 보급지원에 있어서 미국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이 있었기에 일본 정도는 한방에 훅하고 보낼 정도로 최강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 하였는데 이 부분에서 이미 미드웨이 해전의 승패는 결정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일본 해군에 자리잡은 공격 일변도의 사상은 병력 운용의 융통성을 떨어트리고 결국 참화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었다.
미국이 기존의 정찰기 이외에도 함재 폭격기, 지상 폭격기까지 모조리 동원하여 40기 가까운 정찰기를 보내는 동안 일본 해군은 10기 남짓한 정찰기를 보냈다. 일본 해군의 이런 행동은 공격에 투입할 폭격기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꺼린 것으로, 정찰기로 투입할 수 있는 함재 폭격기를 일부라도 더 투입했다면 정찰기 한 대쯤 무전기 고장을 일으켰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점은 일본 해군도 깨달았는지 이후 미드웨이에서의 교훈을 받아들여 정찰을 강화하게 되고 후일 벌어진 과달카날 전투 중 미 해군의 가용 항공모함을 1척으로 줄여버릴 정도로 미 해군을 몰아붙이게 된다. 하지만 그나마도 미국의 물량이 터져나온 이후로는 큰 의미를 갖지 못했다.

3척의 항공모함이 격침된 뒤 홀로 남은 히류가 공격에 나서지 않고 후퇴했다면 비록 전투에서는 졌을지라도 후일을 도모할 여지는 그만큼 더 늘어났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해군 그 누구도 그 시점에서 후일을 위한 전력 보존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67]결국 일본 해군은 히류마저 잃고 태평양 전쟁 초반 타격력의 핵심이었던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위세를 잃고 만다.

레이더의 부재도 일본군의 패인으로 꼽히기는 한다. 레이더가 없어 급강하 폭격대의 접근을 알지 못해 항공모함 3척이 격침되는 상황이 발생했고, 히류 역시 레이더가 없어 미군의 접근을 파악하지 못해 격침당한 반면, 요크타운은 레이더가 있었기에 일본 항공대의 접근을 파악하여 빨리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6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레이더 기술은 있는 기술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지지부진했고, 결국 필리핀 해 해전에서도 미 해군이 레이더로 일본군의 접근을 미리 파악하고 죄다 요격해 버렸다.

즈이카쿠의 부재도 악영향을 끼쳤다. 산호해 해전에서 함재기를 잃었어도 배는 무사했으므로 다른 데서 항공대를 끌어다가 채웠다면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일본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국이 요크타운을 응급수리해서 새러토가의 함재기를 배치하고 미드웨이에 출동시킨 것과는 완전 딴판이었으며, 이외에도 알류산 열도로 항공모함 류조준요를 보낸 통에 구멍난 항공전력은 더 쪼개져 있었다.

7.3 미드웨이 이후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약 1년 가까이 일본 해군의 세력이 더욱 우세했던 것도 사실이다. 흔히 진주만 이후에 열받아서 확충한 함대를 미드웨이 해전 당시부터 투입한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열받아서 미친듯이 배를 찍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미드웨이 해전에 참여한 미 해군 함정 중 새로 진수된 함정은 하나도 없었고 그저 진주만 공습에서 살아남은 배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당시 미 해군은 사용가능한 항공모함이 3척밖에 없었고, 그중 요크타운은 응급수리만 된 걸 억지로 끌고 나와서 이동 중에도 기술자들이 승함해서 계속 수리했을 정도로 미 해군으로서도 전력을 쥐어짜내 동원한 전투였다. 그리고 미군이 분노의 쇼미더머니를 쳐갈긴 "결과"가 나타난 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뒤부터였다. 어쨌든,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지 않음으로서 미국은 가장 취약했던 순간을 넘길 수 있었다.

문제는 오히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군이 더 심각한 문제를 보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대본영 해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의 참혹한 전과를 철저하게 은폐하였으며, 미드웨이에서 패배한 시점에서 이미 전략적 가치를 잃어버린 알류샨 열도 점령을 크게 선전했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은 조종사와 승조원은 모조리 극비리에 연금시켜 버렸다. 진주만 공습의 1차 공격대장이었던 후지타 미츠오 중령도 이때의 수감자 중 한 명이었다. 전후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이 때, "국가의 영웅이었던 우리가 한 순간에 죄인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며 자괴감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아카기 전투기 부대장 이타야 시게루 중좌나 폭격기 부대장 에구사 타카시게 중좌 등의 중견급 간부들과 부상자들은 외부와의 접촉이 금지되고 모두 연금되었으나 이들은 나은 편이었고, 부상을 입지 않은 초급 장교들과 사병들은 연금도 모자라 아예 남방전선에 총알받이로 보내 버렸다. 이것은 가서 조용하게 죽으라는 소리나 다를 바 없었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 해군 고위층들의 의도대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실제로 작전을 입안하고 지휘했던 고위 지휘관들은 그 누구도 문책받지 않았다.

적이나 다름없었던 일본 육군도, 정부의 고위 관료들 거의 대부분도 모를 정도로 그 은폐공작은 철저했으니 일반 국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일본의 어떤 최고위 외교관도 미드웨이 패전 후 몇 달이 지나서야 입소문으로 패전의 소식을 듣고 큰 충격에 빠졌다고 했으니...[69] 덤으로 이런 은폐공작은 하루 이틀 일도 아니어서, 일본 군인들과 관료, 국민들 대부분이 자기 나라가 처참하게 망해가는 꼴을 조금씩이나마 알게 된 것은 1944년 6월 필리핀 해 해전사이판 전투의 패배 때부터였다. 이때서야 도조 히데키 내각이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지만 물론 전황을 호전시키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70]

일본군은 자국 언론에 미군 항공모함 3척 격침, 자국 항공모함 1척 격침이라는 완전히 거꾸로 된 발표를 했으며, 일본 언론은 "이로써 우리 제국의 방위 수역은 미 합중국의 서해안까지 확장되었다"는 설레발을 치기도 했다. 이 일본군 특유의(...) 인지부조화적 행동은 나중에 대만 항공전에서 또 나온다.

이러한 은폐공작의 부작용은 심각해서,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 육군의 병력 투입 주저에 영향을 주어 과달카날이 미군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고, 더 나아가 이후 일본의 전쟁 수행에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주력을 잃은 해군은 똥줄이 타 들어가는데, 육군에서는 '쟤네들 미 해군 박살냈다면서 왜 저럼?' 이런 식의 반응이 나와버리니 사사건건 부딪힐 수밖에...

일본에게 있어서는 주력 항공모함 4척과 수많은 함재기들을 잃은 것이 이후의 치명상으로 작용하게 된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일본이 베테랑 파일럿의 대부분을 미드웨이에서 잃었고 이 때문에 이후 항공전에서 일본이 불리해졌다는 기존의 통설은 다소 오해가 있다. 당시 참전한 일본 해군 함재기들 대부분은 미드웨이 공격대나 함대 방공에 나선 기체를 빼면 미 함대와 직접 교전을 벌인 것도 아니었고, 항공모함들이 순식간에 침몰한 것도 아니라 공격을 해보기도 전에 기습을 받아 화재나 유폭으로 인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진 뒤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서 가라앉아서 함선에서 대피할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덕분에 공격에 직접 휘말리지 않은 경우에 한해서 파일럿을 포함한 항공기 승무원들 대부분은 안전하게 다른 배로 옮겨탈 수 있었다.[71] 일본측 파일럿의 손실은 아카기 7명, 카가 21명, 소류 10명, 히류 72명의 총 110명으로, 이 전투에서 208명의 파일럿을 잃은 미군측보다 오히려 적은 수다. 여기서 히류의 파일럿 손실이 큰 이유는 다른 배들과는 달리 초기 피해가 없어 오히려 배가 가라앉는 순간까지 미국 함대와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이 큰 이유다.

하지만 항공기 정비요원이라면 이야기가 약간 달라진다. 항공모함들이 최초로 타격을 입은 지점들이 하나같이 비행갑판과 그 바로 아래에 있는 격납고인데다 하필 공격당한 시점이 항공기 출격을 준비하던 때인지라 사방팔방에 연료를 만재한 항공기들과 무장들이 널려 있었으므로, 그때 그곳에 몰려 있던 정비요원들 대다수가 최초 타격 이후 화재와 유폭에 휘말려 수 분만에 전사해버렸다. 피해의 전파 속도가 느렸던 아카기를 제외한 나머지 세 척의 항공모함에서 저마다 백단위의 정비요원 손실을 기록하면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제1기동부대가 보유한 총 정비요원 1800여명 중 40%에 달하는 721명의 정비요원을 잃었다. 문제는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이들 정비요원들 역시 조종사들만큼이나 귀중한 인력이었다는 것이었다. 산업 기반이 취약했던 당시의 일본의 민간 부문에서 기계 정비에 종사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일본 해군의 항공기 정비요원들은 대부분 조종사 교육과정에서 탈락한 인원들이 주가 되어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투입된 인원들이어서 손실이 발생하면 이를 단기간내에 보충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당시에 투입된 정비요원들 역시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수년간의 실전경험을 가진 베테랑들이었다는 것은 더 큰 문제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행기만 주면 파일럿도 가능하고, 정비도 가능한 엘리트급 요원들이 이 전투에서 개발살났다는 것이다.[72]

물론,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해군의 항공전 역량을 박살낸 건 과달카날 전투와 그 뒤에 이어진 2년간의 소모전이었으므로 상기한 인명피해는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는데, 바로 작전에 참가한 제1, 제2항공전대가 사라진 것이었다. 제1, 제2항공전대는 제1항공함대의 중핵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항공모함 몇 척, 항공기 몇 대 수준의 손실이 아니었다. 고속 정규항공모함, 항공기, 파일럿과 항공기 승무원, 정비요원, 함상 운용요원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된 하나의 조직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더군다나 제1, 제2항공전대는 일본 해군에 항공모함이 탄생한 이래 수년에 걸친 실전경험으로 단련되어 있었고, 그에 따른 숙련도와 전투 능력은 당시까지 다른 항공전대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 해군의 전략은 외곽 방어망 곳곳에 배치된 지상비행장이 방어의 근거지가 되고 유사시 적을 방어선 가까이 끌어들이는 동안 항공기를 집결하여 격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구상 아래 항공모함 기동부대는 태평양 상의 외곽 방어망을 설정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기동예비대였다. 그리고, 이를 구성하는데에는 고속 정규 항공모함들로 구성된 항공전대가 최소한 3개가 필요했다. 미군의 공격을 막으려면 재빨리 해당 구역으로 이동해서 한 번에 대량의 항공기를 투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해군에게 있어서 제1, 제2항공전대는 이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핵심이었다.

물론,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도 일본의 항공모함 및 항공전력의 숫적 우세는 여전했으나 질적인 부문에 있어서는 결코 우세를 장담할 수 없었다. 살아남은 항공모함들 다수는 규모가 작아서 항공기를 대량으로 한 번에 운용하기 어려운 경항공모함들이었고, 그나마 기동예비대로 쓸 수 있는 고속성능을 가진 항공모함은 류조, 쇼카쿠, 즈이카쿠 뿐이었다. 규모가 큰 항모라면 준요가 있지만 속도가 느렸고, 류조의 경우 정규항공모함으로 취급받았지만 크기가 작았기에 이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이는 함대 전체의 항공기 운용능력 저하로 이어졌고 그 반대 급부로 구축함 같은 호위세력이 더 필요해졌지만, 당시 일본 해군의 능력으로는 호위세력의 증강이 매우 버거웠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필리핀 해 해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 해군의 항공모함 운용이 이전보다 소극적으로 변한 건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항공모함과 그에 따르는 항공전대의 운용이 소극적으로 변하면서 일본 해군의 항공력은 지상 비행장에 과하게 의존하게 되었고, 이는 과달카날 전투를 필두로 한 이후의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의 선택지를 크게 제한하는 변수가 되고 말았으며 미군은 이 약점을 놓치지 않았다.

위에서 말한 것을 요약하자면, 일본 해군이 태평양 전쟁 이전에 수립한 전략계획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입은 피해로 인해 박살났으며, 지금껏 일본이 쥐고 있던 전쟁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넘어가버렸고, 일본은 태평양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서서 공격에 대비해야 되는 입장이 되었다.

열세의 함대로 승리했고 전쟁의 전환점이 된 전투이기에 미국인들에게 미드웨이 해전은 굉장히 자랑스러운 전투로 회자된다. 우리가 명량 해전을 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두 해전은 전후 경과도 비슷한데, 칠천량 해전/진주만 공습에서 괴멸당한 함대가 잔존 부대를 긁어모아 압도적인 전력차의 상대를 각개격파(명량 : 지형을 이용해/미드웨이 : 일본군의 지나친 병력 분산 배치)하여 대승을 거둔 뒤 후퇴하여 전력을 보존함은 물론 적의 전략 의도를 좌절시켜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상대가 일본군인 것도 똑같다

8 이야깃거리들

8.1 요크타운

항공모함 요크타운의 분전은 미군 승리의 비결 중 하나로 꼽는다. 원래 산호해 해전에 참가했던 요크타운은 일본의 경항공모함 쇼호를 격침시켰지만, 자신도 전치 3개월짜리 진단을 끊을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일본측에선 요크타운이 산호해 해전에서 격침되었다는 보도를 받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언급된 것처럼 미군은 가뜩이나 부족한 전력에서 요크타운이 이렇게 열외하면 더더욱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미 진주만 공습으로 전함을 상실한 태평양 함대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전력인 항공모함마저 잃는다면 미 해군은 일본의 연합함대에 대적할 수 없었기에 어떻게 해서라도 항모전력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에 니미츠 제독은 요크타운의 상태를 정확히 보고하도록 했고 가장 수리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엘리베이터나 기관쪽은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체크했다.

그리고 니미츠 제독은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우린 항공모함 한 척을 놀릴 여유가 없네. 동력과 엘리베이터가 멀쩡하다고? 그러면 3일 안에 요크타운이 함재기를 운용할 수 있게 수리하게"

이 명령이 떨어지고 요크타운이 진주만에 도착하자마자 2,000명 정도의 기술진과 공작함이 옆에 달라붙어 정말로 사흘 만에 전투가 가능한 수준까지 만드는 기적을 연출했다. 파손부위를 강판을 이용해 급히 용접하느라 환기를 시킬 수 없었는데, 그 결과 실내온도가 50도 정도까지 올라가 작업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응급수리를 마치고 함재기가 착함할 수 있을 정도로 수리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미드웨이 해전 내내 기술자들이 계속 수리하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폭탄 3발을 맞고 엄청난 불기둥이 솟으며 격침되는 듯했으나 그걸 또 1시간만에 수리했다. 더러운 SCV 너프좀!그 때까지도 일본은 미국이 항공모함 2척만을 가지고 온 줄 알고 있어서[73], 요크타운을 두 번 보고 미국의 항공모함을 전부 침몰시킨 줄 알았다고 한다. 야마구치 제독이 한 척 남은 항공모함 히류를 퇴각시켜 전력을 보전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전체의 양상을 바꾼 것이다. 결국 침몰하기는 했으나 요크타운은 엔터프라이즈와 더불어 미 해군의 전설이 되었다.

여담으로 요크타운을 포함해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방뢰능력이 없다시피한 레인저와 다르게 어느 정도 어뢰 대응 능력을 갖추었지만, 워싱턴 군축 조약의 배수량 제한 내에서 만들어진 설계다 보니 기준이 TNT 180 kg으로 TNT 320 kg에 대응하는 전함 보다 낮았으며 그 이상 탄두 중량을 지닌 어뢰에 취약하다. 하지만 요크타운과 호넷 모두 대응 능력 이상의 어뢰에 피격당해 항해 능력을 상실했지만 순식간에 침몰한 경우는 없었다. 최후에 I-168의 뇌격으로 대미지 컨트롤과 인양을 포기하고 침몰하기 시작한 요크타운이 가라앉는 데도 오래 걸렸다. 이건 동생인 호넷도 마찬가지였으며 엔터프라이즈는 피격 당한적이 있는데 불발이었다.역시 명성대로 강운함이다.

8.2 후치다 미츠오

본 해전에서 항모 아카기의 항공대장으로 참전한 후치다 미츠오(당시 계급 : 중좌)는 참전 직전 받았던 맹장 수술 후유증에다 아카기에서 탈출하던 도중 입은 부상이 겹치는 바람에, 더이상 비행 임무에 나서지 못하고 지상근무에 종사하다가 패전을 맞았다. 미군 포로 생활을 하면서 개신교로 개종하여 선교사로 여생을 보냈으며, 훗날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일제의 식민통치를 사과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대로 끝났다면 굳이 별도의 항목을 할애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훗날 후치다 미츠오는 미드웨이 해전사의 연구에 오랫 동안 영향을 끼친 존재가 되었다.

진주만 공격과 미드웨이 해전에 중견급 간부로 참전했고, 전쟁 후반기에는 주요 부대들의 참모를 지낸 후치다 대좌(종전시 계급)의 경력은 전후 미군의 이목을 끌었고, 심문과정에서 보여준 후치다의 품성과 언변은 미군 관계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면서 전후 처리과정에서 관련 자료 정리 작업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은 훗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전문가들과 쉽게 접촉하여 인맥을 쌓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자연스레 태평양 전사 연구분야에서 후치다의 영향력도 높아지게 되었다.

이후, 전쟁의 상흔이 조금씩 아물어가던 1951년에 후치다는 그 유명한 "ミッドウェー"(영문명 "Midway: The Battle That Doomed Japan, the Japanese Navy's Story" 1953년에 미국에 출간됨.)를 출간하였고 이 책은 일본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에서는 '그 당시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이겼을텐데...'라는 식의 자기만족을 선사했고, 미국에서는 당시 참전한 미군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시의 적군이 해전에 참전했던 자국 장병들을 모든 불리한 조건들을 뒤집어 버리고 완승을 가져오는 기적을 일으킨 영웅으로 묘사하고 추켜세웠으니 인기가 없을리가[74]...... 거기에다 위에서 언급된 배경이 더해지자 후치다의 저서는 순식간에 미드웨이 해전사의 바이블이 되면서 많은 연구가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미드웨이 해전사에 있어서 후치다의 권위도 공고해졌다.

그러나 본 문서의 곳곳을 잘 살펴봤다면 유달리 과거의 통설이었다는 식으로 기술된 내용이 많이 보일 것이다.
그 내용들의 출처는 다름 아닌 그의 저서였다. 본문에서 그 내용들이 부정된 것을 보면 짐작하겠지만, 그 저서의 내용은 곳곳에 오류투성이였다. 알류샨 공격이 양동작전이라든가, 당시 일본 해군의 함대간 교신문제, 정찰과 관련된 내용들, 함재기의 무장전환 및 피격 당시와 피격 직후의 상황과 같은 함선의 전반적인 상황, 나구모 제독의 추태와 야마구치 제독의 활약, 미드웨이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의 괴멸적 피해 등등 수많은 부분들이 후치다의 착각이나 오해, 심지어는 창작과 과장으로 채워진 내용들이었다. 사실 이건 당연하다면 당연한게 미드웨이 해전 당시 후치다 자신은 전체 함대의 말단 조직이랄 수 있는 비행대의 일원이었지 함대 전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재기 및 함선 운용과 같은 타 병과와 관련된 내용에 대한 깊이있는 지식도 없었다.[75] 저서를 출간할 당시에 참전자들을 두루 만나면서 오류를 수정하였더라면 모르겠으나 그런 정황은 없다.

따라서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해군의 구체적인 항공모함, 함재기 운용실상이 미드웨이 해전사의 연구에 반영되면서 후치다의 저서는 그 권위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일본내에서는 이미 1980년대에 해상자위대의 공식전사가 발간되면서 그 권위를 잃었고, 미국에서는 1990년대 중반부터 후치다의 저서에 나온 내용들을 본격적으로 뒤엎기 시작한 뒤 2000년대 들어서 그 권위가 완전히 사그러들었다. 오늘날 후치다의 저서는 일종의 문학서적쯤으로 취급받고 있다.

8.3 미드웨이 상륙전이 벌어졌다면?

아마 점령에 실패했을 것이다. 미군 수뇌부는 해전 3개월 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그 작은 미드웨이 섬을 요새화시킨 상태였고, 그 결과 해전 당시의 방어 태세는 약 4000여 명의 병력이 견고한 콘크리트 벙커와 참호에 의지한 채 각종 지뢰, 철조망, 기관총, 박격포, 야포, 해안포, 그리고 여러 대의 전차까지 완전 중무장한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력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상륙함(다이하츠)에서 내려 가슴 깊이의 바닷물을 무려 180~400m나 헤치고 해안까지 걸어가야 했던 일본군의 머리 위에 쏟아지도록 준비되어 있었으니 상륙 병력은 아마도 그대로 다 물고기 밥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군 함대에서 지원폭격/포격을 한다 해도 별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 자명한데, 그 때에는 일본군은 물론 심지어 미군조차 요새화된 환초 상륙전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을 때이기 때문이다. 미군도 피를 대가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이에 대한 노하우[76][77] 를 정립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미드웨이보다도 방어력이 약간많이 떨어졌던 곳이 다름아닌 타라와였다.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군의 지원능력과는 비교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빵빵한 지원함, 상륙장비와 무기, 병력(해병대 1개 사단), 지원포격과 폭격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음에도 요새화된 일본군 방어병력 2000여 명을 상대로 미군은 질 뻔 했다. 상륙전이 얼마나 어려운 작전인지 가장 극적으로 보여 주는 전투이기도 하다.[78] 일본군의 3000여명 정도 되는 육전대 병력은 철저히 요새화된 미드웨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물론, 보급을 장기 차단하고 지속적으로 타격을 가하며 계속 상륙을 시도하면 어쨌든 결국 점령할 수는 있었겠지만 코딱지만한 미드웨이 섬 하나에 그렇게 오래 전력을 투자하며 지체한다면 전체적으로는 훨씬 큰 손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일본(을 비롯한 영국, 소련 등 거의 모든 국가들)의 한계이기도 했다. 필요한 섬은 확실하게 자원을 효율적으로 때려 박아 빼앗아 버리고 그렇지 않은 섬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리는 짓거리를, 그것도 그 넓은 태평양 전체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수십 수백 번을 할 수 있는 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미국뿐이다.

8.4 그 밖의 이야깃거리들

미드웨이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 니미츠 제독은 정보참모 에드윈 T. 레이턴(Edwin T. Layton) 대령[79]에게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일본 함대의 구체적인 행동예측을 요구했다. 하지만 레이턴 대령은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예측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니미츠 제독은 좀더 확실한 예측을 제출하라고 거듭 요구했고 결국 레이턴 대령은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미드웨이 현지시각으로 6월 4일 오전 6시에 북서쪽인 방위 325도, 175마일 거리에서 발견될 것"이라 답변했다. 레이턴 대령도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예측을 한 모양이었는데 실제 일본 함대는 6월 4일 오전 5시 55분, 방위 320도, 거리 180마일에서 발견됐다.

미드웨이 제도의 지상시설들은 본 전투가 끝나고 나서도 복구되지 않았다. 애초에 일본군의 추가적인 동진을 저지할 목적으로만 활용되었을 뿐, 이후 미군이 공세에 나선 뒤에도 쓰이지 않았고 결국 이스턴 섬은 지금도 △모양을 이루는 활주로 3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상태다. 다만 2015년 기준으로 이스턴 섬에 접안이 가능하도록 항만 시설이 남아있다. 그리고 본섬에는 남쪽 항공기 활주로와 동쪽 항만이 유지보수되고 있는데 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구 활주로를 방치하는 것을 보면, 이스턴 섬의 활주로 크기와 거주성이 문제가 되어 버려진 모양이다. 어차피 경제적 가치는 없잖아...

한편 알류샨에서는 더치 하버 공습에 참가한 제로센 1기가 사소한 고장으로 불시착하였는데, 제1항공함대가 대패하고 황급히 철수하는 바람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잊어버렸다. 전투가 끝난 후 주변을 정찰하던 미군의 비행정은 불시착한 일본 기체를 발견하고 조사대를 파견했는데 거의 온전한 상태의 제로센이 있었고 제로센의 정보에 목말라있던 미국은 즉시 이 기체를 인양하여 '아쿠탄 제로'로 명명해 본토로 이송했다. 미국은 기체의 고장난 부분을 수리한 다음 열심히 연구해 제로센의 장단점을 파악했으며, 이는 1942년 가을 이후 급증하는 제로센 손실로 이어졌다. 또한 해당 시점에서 이미 시제기 초도비행이 이루어진 그루먼사의 제로센 킬러 F6F 헬캣의 개선과 양산이 크게 앞당겨지기도 했다.

그리고 미드웨이 해전 이후에 다른 섬을 공략할 여유를 가진 미군은 다음 섬 지상공략에 쓰일 M4 셔먼 300대와 그에 맞는 전차병 운용병력들을 순양함, 구축함에 분승해서 8월 중순 진주만을 출발하여 9월 14일날 수에즈 운하에 도착, 사막형 위장도색을 마치고 아프리카의 영국8군에 지원됐다.

스프루언스 제독이 6월 5일 날이 밝기 전까지 계속 도망간 것을 문제삼아,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는 공격적인 성향의 윌리엄 홀시 제독이 지휘하여 깔끔하게 전멸시켜 버렸어야 된다는 투의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훗날 일본측의 자료를 열람해보니 스프루언스 제독의 판단이 지극히 옳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야마모토 제독은 항공모함들을 모두 잃은 이상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막판 뒤집기를 시도, 남은 수상함대를 싹싹 긁어모아 야간 함포전을 벌일 기세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일본의 수상함대 전력은 전함만 11척, 중순양함 13척, 경순양함 9척, 구축함 65척, 잠수함 22척
  • 미국의 수상함대 전력은 항공모함 2척(이 시점에서 요크타운은 빈사상태), 전함 0척, 중순양함 9척, 경순양함 4척, 구축함 32척, 잠수함 19척

이런 전력차로 맞붙었다가는 말 그대로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특히 함포전에서는 여전히 최강의 존재였던 전함이었으므로, 괜히 고집부리다 기껏 다 이겨놓은 해전을 단 한 번의 야전으로 한순간에 말아먹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미 함대가 계속해서 동쪽으로 빠지는 것을 알게 된 야마모토 제독은 모든 것이 끝났음을 받아들이고 날이 밝기 전에 전면 퇴각을 결정하게 된다. 날이 밝으면 미군의 항공모함과 미드웨이 섬의 항공전력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것이었고, 실제로 후미의 함대 일부는 그렇게 두들겨 맞아서 7전대의 중순양함 모가미가 중파 당하고 중순양함 미쿠마는 아예 격침당했다.

미드웨이 해전의 클라이맥스 중 클라이맥스였던 급강하 폭격기 대대의 공습과 일본 항모의 침몰 장면의 사진은 아쉽게도 전혀 남아 있지 않다.[80] 양쪽 모두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걸 찍을 겨를이 없었을 테니 당연하지만 그래도 무척 아쉬운 일. 다만 그 클라이맥스의 한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항공모함 호넷에서 출격했던 제8뇌격기대대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조지 게이 소위는 해전의 클라이맥스를 모두 지켜보고, 해전 후 30시간 가까이 바다 한복판에서 버티다가 극적으로 카탈리나 수상기에 의해 구조되어 중순양함 빈센스로 옮겨져 겨우 구조되었으며 해전이 끝나고나서는 그는 니미츠제독과 만나는 영광을 얻기도하고 미드웨이 이후에 VT-11에 재배속되 과달카날전역에서 계속해서 싸우다 1943년부터는 교관으로 복무하다 무사히 종전을 맞았으며 전후에는 해군십자장, 퍼플 하트 훈장 등의 수훈을 얻고 또한 민항사로 30년간 근무하다가 은퇴하여 자신이 겪은 미드웨이해전의 회고록을 출판하기도하며 1992년에는 항공모함미드웨이의 퇴역식에 특별초대받았으며 1994년 10월21일에는 조지아주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항년77세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서 미드웨이 근해에 뿌려졌다고한다.
그러나, 해전이 벌어진 지 반세기가 넘어가면서부터 이 부분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조지 게이 소위가 격추당한 지점과 이후 일본 함대가 격멸당할 때까지의 이동 상황 등 당시 상황과 조건들을 다 따져볼 때 조지 게이 소위는 일본 항공모함들의 최후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선전거리가 필요했던 미군에게 조지 게이의 참전 및 생환 과정은 더 없이 좋은 소재였으므로, 크게 따지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을 가능성도 있다.

맥클러스키 소령은 이날의 공적으로 해군십자훈장을 수여받는다.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프리깃함인 USS 맥클러스키는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편, 당시 맥클러스키의 비행대에는 브루노 가이도라는 이름의 3등 항공기술 부사관도 있었다. 그는 지난 2월에 있던 마샬 제도 기습전에서 대담한 기지를 발휘해 치명상을 입고서 엔터프라이즈를 노리고 달려드는 일본 폭격기의 자살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이탈갑판에 있던 돈틀리스의 후방기총을 잡았고, 그걸로 카미카제[81]를 격추시켰다. 이 때 엔터프라이즈의 갑판 위에는 각종 함재용 폭탄이 널려있었는데, 그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엔터프라이즈가 끔찍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함교에서 이 장면을 본 홀시 제독은 그를 불러서 "이름이 뭔가? (브루노 가이도입니다) 계급과 직책은? (3등 항공 부사관입니다) 좋아, 가이도. 이제부터 1등 항공 부사관이야."라며 그를 진급시켰다.
불행히도 이 영웅은 격추되어 그의 조종사인 오플래허티와 함께 일본 해군에게 포로로 붙잡혔으며 일본 구축함인 마키구모에서 심문을 받았다. 참패에 격분한 일본군은 이 둘을 밧줄로 묶은 후, 다리에 무거운 걸 매달아 배 밖으로 던졌다. [82]

미군 급강하 폭격기들의 길잡이 노릇을 충실히 한 구축함 아라시의 '실적'과 관련하여, 아라시의 생존자로 구성된 아라시 전우회는 '항공모함 아카기의 호위임무를 맡고 있었고 옆에서 한 치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기록에선 최소한 두 개 부대의 증언이 일치하는데다가, 미국의 말을 긍정하여 본인들이 패전의 직접적 원인을 가져왔다고 인정할 가능성은 낮으므로 증언의 신빙성은 낮다.
한편 아라시에서도 전쟁범죄가 일어났는데, 격추당해서 표류하고 있던 미해군 제3뇌격비행대대 소속 웨줄리 프랭크 오스무스(Wesley Frank Osmus) 소위를 포로로 잡아서 심문한 뒤 6월 5일 오후에 갑판으로 끌어내 소방용 도끼처형하려 했으며, 오스무스 소위는 충격으로 배에서 떨어졌으나 난간을 붙잡고 가까스로 매달린 걸 다시 한번 밀어내 바다에 생으로 수장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종전 후 미국은 당시 아라시의 함장인 와타나베 유스마사(渡辺保正) 중좌를 전범 재판에 피고인으로 올리기 위해 찾다가 전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중지했다. 그리고, 아라시의 생존자들은 포로 살해의 책임자로 와타나베 함장과 츠토무 마츠우라(松浦勉) 포술장을 지목했다.#1#2#3
아라시는 그 후로도 전장을 달리다가 1943년 8월 7일 솔로몬 군도에서 아마기리, 하기카제, 시구레와 함께 작전 도중 미군에게 격침되었다.
(참조: 가게로급 구축함 아라시)

역사학자 시어도어 쿡 주니어 교수는 대체역사 에세이집인 만약에에서 '일본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승리했었다면'을 주제로 아래와 같이 가정하였는데, 그 내용이란게 피지,사모아,뉴기니하와이를 비롯하여 남태평양 일대를 장악하고 호주와 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며 인도와 실론을 위협했을 거라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동시에 태평양 전쟁이 교착화되어 유럽 전쟁도 보다 더 지속되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당시 일본군을 생각하면 하와이는 고사하고 위에서 말했듯이 미드웨이 섬 하나 점령하는 것도 실패했을 게 자명하고, 툴라기를 점령했던 5월의 시점에 FS작전의 목표이던 피지에는 벌써 1개사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역시 목표지점이던 사모아에도 7해병연대를 포함해서 1만 5천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으며 뉴헤브리디스의 에파테에 5800명,그리고 역시 목표지점이자 미군의 중요항구이던 뉴칼레도니아의 누메아에는 아메리칼 사단을 주축으로 하는 22000명이 배치되어 있고 호주 본토에도 2개 사단이 있기에 보급로를 지키기 위해서 1개 사단 정도는 충분히 동원할수 있고 거기에 6월 14일에 뉴질랜드에 도착한 1해병사단까지 방어에 돌릴수 있으므로 사실상 보급선 차단이라는것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또한 일본군은 실론 점령에 4개 사단 이상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중국을 주 전장으로 삼는 일본 육군은 실론 점령에 사단을 내놓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 연합함대 또한 전쟁연습을 해보았지만 결과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실론 점령을 포기하였다.
결론적으로 미드웨이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일본이 얻을수 있는것은 거의 없으며 보급선을 늘리는 자충수를 두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리고 하와이 점령보다는 차라리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는 게 더 현실성 있을 정도로 하와이는 세계에서 가장 방어가 잘된 곳이었다. 따라서 하와이가 일본에게 점령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런데 진짜로 일본군이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했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많은데, 그래봤자 지나치게 긴 보급로 덕분에 진격은 둔화되고 상륙한 병력들도 미군의 반격으로 고립되어 전멸했을 것이다.

9 미디어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의 미드웨이 부분에서는 미드웨이라고 메인 캐릭터들이 모두 미드일드의 주인공들이 나왔다. CSI : NY, House M.D., 로스트, 스타 트렉, 노다메 칸타빌레, 프리즌 브레이크, 신세기 에반게리온, 히어로, 히어로즈 등등. 심지어 야마모토 제독은 '가랏! 나구모! 미드웨이를 일드웨이로 만들어버려라!고 하기도 한다(…).

Midway_movie_poster.jpg
1976년에 유니버설 영화사에서 미국 독립기념 200주년으로 영화 '미드웨이'를 제작했다. 전편격인 도라!도라!도라!가 흥행실패를 한 원인을 분석하여 여기선 유명 배우들을 고용했다.[83] 그러다보니 제작비가 제법 늘어서 정작 전투라든지 다른 요소에서 제작비를 팍 줄였다.[84] 그래도 드라마적인 이야기를 넣어서 도라!도라! 도라! 절반이 안되는 제작비 1100만 달러로 북미 4322만 달러라는 꽤 흥행은 성공했지만 영화 고증수준은 상당히 엉망에다가[85] 다른 영화들의 장면을 짜집기했다. 이를테면 전시 선전영화인 동경 상공 30초,[86] 일본에서 제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전기 영화 태평양의 폭풍, 그리고 전작인 도라!도라!도라!이다.[87] 더군다나 전투 장면중 대부분을 1944년 당시 선전 필름을 사용했다. 별 관련없지만 음악은 존 윌리엄스.

한국에서도 1977년 7월 15일 개봉하여 서울 관객 23만으로 당시에는 꽤 흥행에 성공했는데 80년대 나온 비디오판은 상당부분 삭제를 했다. 중간에 나오는 산호해 해전부분이나 찰턴 헤스턴의 베드신, 검열삭제 아님등을 편집했다.

[1] 그리고 가볍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캡콤의 슈팅 게임 1942는 미드웨이 해전을 넘어서 태평양 전쟁 전체를 스토리 라인으로 가지며, 그 중 첫 4개의 스테이지는 미드웨이 해전 시나리오이다. 후속작 19431943 改에는 아예 '미드웨이 해전'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다만, 게임이다 보니 고증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가서 함재기가 아닌 P-38 라이트닝이 항공모함에서 발진하는 꼴을 볼 수 있다.

1988년 미국 미니시리즈 전쟁과 추억(War and Remembrance)에서 재현한 미드웨이 부분은 상당히 명장면으로 평가된다.[88] 본작은 미 해군 헨리 대령[89] 일가를 중심으로 2차 대전에 휘말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헨리 대령의 둘째 아들이 미드웨이 해전에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한다.[90] CG가 없는 시절에 아날로그만으로 만든 작품 중에 상당한 수준이고 실시간대로 작전 상황을 재현해내었고 급강하 폭격기 조준경 사용 장면 등을 충실히 따르는 등 나름 고증에도 힘썼다. 물론 일본군이 미군식 고사포를 사용하는 건 잊자 원작에 나오는 뇌격기의 자살적 돌격부분을 재현한 것이 포인트.하이라이트 장면.4분 30초부터 엔터프라이즈 폭격기대의 공습 장면이다.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도곡리의 다리에서 항공모함 전대 사령관인 제독의 아들들이 각각 진주만 공습미드웨이 해전 때 사망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 충격으로 아내는 정신 이상으로 아기 옷 뜨개질만 하고 며느리는 집을 나갔다. 그런 이유로 주인공인 라인베커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낀다. 하지만 라인베커도 북한군에게 끔살

일본에서 제작한,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모습을 담은 동명의 영화에서 이 전투에 대한 묘사가 등장한다. 영상
마찬가지로 일본 영화인 '영원의 제로(영화)'에서도 이 전투를 묘사하고 있다.전투 전체를 묘사한 것은 아니고 아카기피격 장면 정도가 나온다. 주인공의 입을 통해 패전 원인('항모가 노출되었으면 지체하지 말고 출격부터 해야 한다', '처음부터 어뢰로 무장하고 기다렸어야지! 지금 공격당하면 끝장이야.')이 일부 나온다.
타츠노코 프로덕션 제작의 애니멘터리 결단에서는 2화부터 나오고, 거기다가 전후편으로 되어있어서 2회에 걸쳐 일본군이 처절하게 깨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참고로 1화는 바로 진주만 공습. 그러니까 미군을 폭격으로 처발라버린 다음 화부터 일본군이 무참하게 깨지는 걸 보여주는 거다!!

웹 게임 함대 콜렉션에서는 2014년 여름에 대형 이벤트로 나왔다. 이전까지의 이벤트와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이벤트이며, 난이도 면에서도 여러 가지 의미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기에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리되었다. 함대 컬렉션/이벤트/2014 여름 항목 참고. 또한 TVA에서도 미드웨이 해전을 모티브로 한 전투가 나온다. 지역명이 AF라는 것부터 MI작전, MO작전등 미드웨이 해전때 쓰던 암호문, 작전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그러나 정작 싸우지도 않고 최후방에서 대기나 타던 야마토콩고가 직접 포를 쏘고 아직 진수도 안된 다이호가 나오는 등 현실과는 큰 차이가 있는 편이다. 아무 생각 없이 봐야 되는 모에만화에 무슨 고증을 바라겠느냐만은 고증은 둘째치고 스토리부터 글렀다.

스마트폰 게임 전함소녀에서 2015년 12월 10일부터 24일까지 이벤트 해역으로 등장. 적들은 당연히 참전했던 일본 함선들이며 요크타운엔터프라이즈를 얻을 수 있다. 덤으로 아라시도 얻을 수 있는데 3, 4번 해역을 돌파하는 데에는 아라시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전함 야마토에서는 현대에서 타임슬립한 주인공 쿠루스의 활약으로 일본군은 아카기와 카가를 잃었지만 야마토를 앞세워 미드웨이에 상륙한다. 하지만 미군 미첼 폭격기편대의 폭격에 퇴각하게 된다. 그리고 역사는 바뀌게 된다.[91]
  1. CV-8 호넷 항공모함에서 출격하는 SBD-3 돈틀리스. 해전 종반인 1942년 6월 6일에 모가미급 중순양함 미쿠마를 공격하러 간 3번째 공격대가 찍힌 것이라고 한다. 소속은 정찰비행대 VS-8
  2. 해군 휘하의 일개 조직에 불과한 연합함대가 왜 따로 거론되는지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반드시 참고할 것. 당시 일본군이라는 조직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보는 사람이 다 어지러울 것이다.
  3. 애초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진주만 공습을 계획할 당시 노렸던 건 미 해군의 전함이 아닌 항공모함이었다. 그러나 공습 당일 진주만에 항공모함이 없다는 보고가 들어가자 나구모 주이치를 중심으로 한 공격대가 마음대로 전함을 때려댄 것.
  4. 뉴기니 섬에 있는 뉴기니 섬 최고의 요충지 겸 항구 겸 비행장인 포트 모르즈비(Fort Moresby)를 점령하는 게 목표인 작전으로 모르즈비의 앞의 두 글자를 따 와서 MO 작전이며 일본에서는 모호작전(モ号作戦)이라고도 호칭했다. 포트 모르즈비는 호주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요충지로, 이곳을 점령한다면 호주와 미국간의 연락/보급선을 차단할 수 있었다.
  5. 하지만 MO작전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군이 미 항모 렉싱턴을 격침시키고 요크타운에게 전치 3개월 진단서를 끊는 성과는 거뒀지만, 정작 주 목표였던 포트 모르즈비 앞에서 철수하면서 허공으로 날아갔다.
  6. 피지(Fiji)와 사모아(Samoa), 뉴칼레도니아를 공략하는 작전 계획으로 피지와 사모아의 앞글자에서 따 와서 FS작전이다. 작전 목표는 호주와 하와이를 잇는 보급선을 차단해서 호주를 영연방에서 이탈시킨다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거창한 목표지만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로 인해 작전 실행이 연기됐고, 결국 취소된다.
  7. 참고로 과거에는 알류샨 열도 공격이 일종의 양동 작전으로 기획된 것처럼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모두가 하나하나의 목적을 가진 작전이었다.
  8. 일본군 내에서 미드웨이 작전이 결정되기까지의 상세한 과정은 여기를 보자.
  9. 국적불명의 쌍발기 발견이라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PBY 카탈리나 수상기가 아니며, 미 해군은 쌍발기를 운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했다
  10. 다만 몽골 제국에게 본토가 침략당한 적이 있다.
  11. 일단 미국 서해안으로 침투할 수 있다면 미국 본토가 이미 점령당하는 건 시간문제라 미국으로선 상당한 압박이 된다. 실제로 일본이 그게 가능하든 아니든.
  12. 제독은 격려차 보낸 것이었지만, 적지 않은 매체와 전문 서적에서는 죽기 전의 특진... 처럼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장렬하게 죽으라는 의미였다면 막대한 지원을 보낼 리가 없으므로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13. 당시 일본군은 비행정을 이용하여 미군의 동향을 정찰하고 있었고, 이들이 중간에 잠수함을 만나 급유를 받는 장소들이 있었는데 여기에 구축함이 버티고 있으니 정찰이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14. 이 때문에 태평양 전쟁 말기 영국군이 참전하려 하자 어니스트 킹 제독이 '다 된 밥상에 숟가락이나 얹으려고 한다'며 싫어했다고 한다. 급할 때는 도와줄 수 없다더니 다 이겨 놓으니까 그제서야 도와주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누구라도 싫어할 것이다.
  15. 夢幻の軍艦 大和(몽환의 군함 야마토) 일어 위키페디아 링크 일본 아마존 링크
  16. 작전을 짜면서 실전이 어떻게 굴러가든지 무시하고 작전대로만 수행하려 할 정도로 섬세했던 작전 계획 역시 일본군 연합함대에 있어서는 패착 중 하나로 작용한다.
  17. 사실 아카기는 본래 아마기급 순양전함 2번함으로 건조되었기 때문에 선체가 튼튼해서 지근탄, 명중탄 각각 한 발씩 맞고서도 운용 불능 상태에 빠지긴 했지만 침몰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 지휘부는 더 이상 운용은 힘들다고 생각해 자침 처분했다. 그냥 침몰만 안 했다 뿐이지 화염이 배 전체로 번지는데 폭격으로 소화기능이 마비된 상태라 불을 잡을 수가 없는, 그야말로 물 위에서 타오르는 관이나 마찬가지였다
  18. 예를 들어 야마구치 다몬은 작전의 반년 연기를 주장했고, 나구모 주이치 역시 당시 수리와 함재기 보급 등으로 전력에서 이탈해 있던 쇼카쿠즈이카쿠가 복귀한 이후에 실행해야 한다고 만류하던 상황이었다. 군령부 역시 미드웨이를 먹어도 별다른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며 FS작전을 입안하고 이를 지지하고 있었다.
  19. 이 암호도 나중에 해독된다. 일본군은 후에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암살당할 때까지도 자신들의 암호가 해독당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일부 지휘관들은 감지하고 있었으나, 지휘부의 "그냥 걔네들 모른다고 하자..."는 한마디에 계속 암호를 사용했다. 미군이 야마모토를 격추하는 것을 망설인 이유도 일본군이 암호가 해독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또 암호를 바꿀까봐서였다고 한다.
  20. 문제는 그 뿐 아니다. 항공모함 기동 부대를 전함부대의 앞으로 내세운 것도 문제가 된다. 전함이 대개 방어 중시로 만들어지는 걸 감안하면 방어력이 거의 없다시피 한 항공모함으로 주공과 탱킹을 동시에 한다는 게 되므로 상대방인 미군이 만약 잠수함으로 선제공격을 걸어오면 항공모함 기동부대 입장에서는 답이 없는 상황이 된다..(물론 이 당시 미군의 어뢰 수준이 개판이긴 했지만...) 특히 저런 먼 간격에서는 더더욱.
  21. 아래에서 서술한 니미츠 제독의 발언에서처럼 미 해군은 항공모함 한 척도 놀려둘 여유가 없을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었다. 당시 요크타운의 항공대는 요크타운 본래의 항공대가 아닌 항공모함 새러토가의 항공대였다. 그뿐 아니라 요크타운은 미드웨이 해전 도중, 일본군 함재기 편대를 레이더로 감지하고는, 항공대를 호넷엔터프라이즈로 보내 버린다. 일본군과 대조되는 미군의 급박함과 현실성을 잘 보여 주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22. 그뿐 아니라 나구모 주이치는 함대파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때문에 조약파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충돌도 잦았다.
  23. 물론 나구모 주이치 제독은 조함에 관해서도 전문가이긴 하다. 진주만 공습에서도 나구모 주이치 제독이 기동함대 대장을 맡았는데, 공습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배는 반드시 살려서 돌아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미드웨이에서도 그 거대한 아카기의 키를 붙잡고 아카기를 향해 오는 어뢰를 몽땅 다 피했을 정도니... 조함에 대해서는 확실히 실력이 있었던 듯
  24. 야마구치 다몬이라면 몰라도 오자와 지사부로는 나구모 주이치 이후 함대의 사령관을 맡아 필리핀 해 해전에 참전한다.
  25. 이런 헝클어지는 걸 싫어할 정도의 섬세한 작전 계획들이 나중에 최대의 패착이 된다.
  26. 함대별로 서로 떨어져 있어서 나구모 제독의 제1항공함대 외에는 전선 투입이 제대로 되지않았다.
  27. 이중에 호쇼 등의 일부 노후된 함선은 실질적으로 전력에 도움이 안되기에 뒤에 빠져 있었고, 다수의 전함, 경항공모함을 포함한 섬 공략 부대는 뒤에 따라오고 있었기에 대응이 늦어져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28. 이때까지도 야마토를 비밀 병기로 숨기고 싶어했던 일본 군부 때문에 대부분의 함선이 제대로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야마토의 존재는 이미 일본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 정도로 퍼져 있어, 스파이 등에 의해 연합국도 거대한 전함의 존재 정도는 알고 있던 때라 딱히 숨기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29. 적은 숫자의 함재기와 노후를 이유로 후방으로 밀려났다. 단지 제1, 2항공전대가 송두리째 전멸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중에 호쇼의 함재기 파일럿이 공중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전투에는 참여한듯 하다. 혹은 전투 후에 상황 파악을 위해 급히 파견됐거나.
  30. 콰잘린 환초에서 대기
  31. 콰잘린 환초에서 대기
  32.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 당시 커티스 르메이가 전임인 헤이우드 셰퍼드 핸셀이 하고 있던 주간 정밀 폭격이 아닌, 야간 절멸 폭격이라는 방법을 쓴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33. 미드웨이 해전의 영화화를 위해 전투 현장에 있었고 중상을 입었다.
  34. 면적만 따지면 프랑스의 국토 면적과 얼추 비슷하다.
  35. 보통 특정 단위 부대의 피해 상황에 대해 전멸로 치는 기준이 바로 20% 전후이다. 유럽전선 미군 폭격기 부대 최악의 날로 기록되는 슈바인푸르트 공습 당시의 피해율이 20%를 넘어섰었고, 이후 미군 폭격기 부대는 한동안 정상적인 작전에 나서기 어려웠던 바가 있다.
  36. 원래 VT-8은 어벤저로 기종 변경을 실시했으나 기종 변경을 끝내고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엔 이미 모함이 출격한 뒤였다. 한 대의 기체도 아쉬웠던 니미츠 제독은 이들 중 일부를 미드웨이로 보냈고, 이렇게 미드웨이로 간 어벤저들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최초로 실전을 치르게 된다.
  37. 과달카날 전투의 메인 무대였던 헨더슨 비행장이 바로 이 사람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38. 출격한 16기 중 헨더스 소령을 포함한 6기는 일본 함대 공격 전에 초계하던 제로센에 격추되었고, 남은 10대가 히류 공격을 시도했으며, 이후 퇴각 중 2기가 추가로 제로센에 격추되었다.
  39. 웃긴 건 이때 미군 폭격기들이 찍은 폭격 장면들이 꽤나 그럴싸해서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육군은 이 사진을 근거로 '미드웨이에서 일본군 때려잡은 건 우리 폭격기들이다.'라고 철썩같이 믿고 떠들어댔다. 전쟁 중에 아군과의 괜한 불화를 원치 않았던 미 해군은 그냥 웃어넘겼지만, 전쟁이 끝난 뒤 진상이 알려지면서 미 육군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40. 이 폭격 정확도 문제는 나중에 일본 본토 공습에서도 군수시설을 노린 정밀 폭격이 아닌 '도시 지우기'로 대변되는 초토화 폭격으로 바뀌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41. 뇌격의 경우 제대로 맞기만 한다면 함의 선체 구조 자체를 직접 파괴할 수 있는 반면, 급강하 폭격은 상부 구조물에 집중되는 공격 방식의 특성상 선체 자체에 영향을 주기 어렵다.
  42. 세계 최초의 핵추진 잠수함 노틸러스(SSN-571)가 아니라 나왈급 잠수함의 2번함이다.
  43. 훗날 당시의 아라시 승조원들은 자신들은 뒤쳐진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복수의 미군 보고서는 이를 부정하고 있다. 상세는 후술
  44. 대표적으로 링 중령은 자신이 사관실에 들어왔을 때 일어나지 않은 조종사들을 육지로 내쫓았다. 미드웨이 해전을 앞두고 호놀룰루에서 엔터프라이즈와 요크타운의 비행 부대원들은 매일 저녁 외출하여 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나날을 즐켰지만, 호넷 비행 부대원들은 링 중령의 지시로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45. 이 승진은 미드웨이 해전 이전에 결정된 것이기 때문에 미처 대령은 미드웨이 해전 당시 함선 내에서 이미 제독이라 불리고 있었다.
  46. 그의 증조부모 중에 네이티브 아메리칸인 샤이엔족이 있었다. 윌르론 소령은 자신의 인디언의 직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47. 2차대전 중반까지 미 해군의 어뢰는 종류 불문하고 신뢰성이 형편없기 짝이 없었다. 어뢰 투하 조건은 저속에 저고도로 똑바로 비행해야 하는 등 지나치게 까다로워서 뇌격기들을 적기와 대공 포화에 고스란히 노출시켰고, 그렇게 투하한 어뢰도 엉뚱한 데로 항주하거나, 불발이 속출했다. 당시 미군의 어뢰가 가진 극악한 신뢰성은 잠수함에도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어떤 잠수함은 적 함대에 파고들어 6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모두 불발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개발국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그걸 개발했는데, 불발일 리가 없다능! 너님들 실력이 허접한 거라능!"라면서 뻗대고 있었다. 열받은 잠수함대에서는 "만일 병기국에서 어뢰를 똑바로 안 만들어 줄 것 같으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에 함선을 잡아 끌어당겨 구멍을 낼 갈고리 장대를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며 악담을 퍼부어댔고(이 악담(...)을 퍼부은 인물이 당시 잠수함대 사령관인 찰스 록우드 제독이다. 자세한 내막은 어뢰 스캔들 문서를 참고.) 뇌격기 조종사들 역시 "ㅅㅂ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그냥 철갑탄 쓸란다."해서 한동안 함선을 상대로도 일반 폭격기마냥 통상적인 수평 폭격만 해댔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었다시피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전과가 영 신통치 않았지만, 최소한 생환 가능성은 뇌격보다 훨씬 나았다. 어뢰 개발 관련 인사들이 물갈이되고 어뢰 자체의 개량이 이뤄진 이후에도 항공 어뢰에 대한 불신은 높았고, 이 불신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다이호쇼카쿠를 어뢰로 잡고 나서야 겨우 해소된다.
  48. 원래 본 문서에 "링 중령이 일본 함대의 위치와 함종을 자세히 보고했지만, 호넷의 모든 비행대가 같이 움직이고 있다고 판단하여 그 어디에도 중계하지 않았다."라는 서술이 나오지만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볼 때 이 부분은 미처 대령의 보고서에서 조작된 부분으로 보인다.
  49. 일례로 태치 소령이 이끌던 요크타운 소속 4기의 와일드캣 편대는 타치 위브 전술을 사용하며 4:10의 숫적 열세 속에서도 일본군 전투기들을 상대로 1대가 격추당하는 동안 3대의 제로센을 격추하며 분전, 일본군 전투기들을 20분 가량 저공에 붙잡아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치 소령의 편대는 2배 이상의 숫적 열세로 시종일관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군 전투기들이 와일드캣들을 추격하는 걸 포기하고 급상승해 버렸고 태치 소령과 편대원들은 위기를 벗어났다. 왜냐하면...
  50. 해당 링크 아래쪽에 노인 셋과 중년 한 명이 찍은 사진이 있는데 왼쪽 첫 번째가 '더스티 클리스' 본인으로 카가와 히류에게 명중탄을 낸 인물이고 왼쪽 두 번째는 진주만-미드웨이에도 참전한 마지막 제로센 파일럿인 '하라다 카나메'. 맨 오른쪽 인물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돌아온 어벤저의 파일럿 '해리 페리어'다. 그야말로 미드웨이 레전드 총집합.
  51. 상공을 선회하면서 전황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지휘관들의 보고서가 더 정확한 것으로 판단된다. 급강하 도중에는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다.
  52. 참고로 베스트 대위는 미 해군 최정예라는 엔터프라이즈 소속 급강하 폭격기대 중에서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실력자였다
  53. 이 공격으로 위버와 베스트 대위는 해군 십자 훈장을 수여받지만, 위버는 이날 전투에서 히류를 공격하다가 격추당해 전사했고 베스트 대위는 산소 호흡기 문제로 결핵이 발병해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이후 완쾌되었으며 2001년에 사망했다.
  54. 실제로 고속, 긴 사정거리를 지닌 산소어뢰를 이용한 구축함의 뇌격은 일본 해군의 장기이기도 했고, 이 분야에서 나구모는 매우 뛰어났다.
  55. 이것은 말은 쉬워 보일지 몰라도, 무전기 기술이 개판 5분전인 일본의 뇌격기로 하기에는, 상당한 베테랑 파일럿이 필요했다. 서로간의 소통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대공화망을 뚫고 이런 고난이도의 기술을 보여줬다는 소리. 대전 초기 일본의 파일럿들이 얼마나 정예였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단, 지속적인 전투로 조종사를 손실한 일본은 산타크루즈 해전을 마지막으로 베테랑 파일럿들을 모두 소모해버리고 만다.
  56. 대표적인 인물이 본문에도 언급한 로프톤 헨더슨 소령이다.
  57. 이 폭탄은 제6정찰비행대대의 갈라허 대위와 스톤 소위가 떨어뜨린 폭탄이었다. 이후 같은 소속의 자카드 소위가 히류에 제1명중탄을 내게 된다.
  58. 히류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에서 구축함 마키구모의 뇌격처분을 받았다. 다만 명령체계가 어떻게 꼬였는지, 히류에는 야마구치 외에도 기관장 등 다수의 생존자들이 있는 상태였고 이를 확인한 나구모 제독은 이들을 구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들이 구조되기 전에 마키구모가 어뢰를 명중시켰고, 이 생존자들은 겨우 찾아낸 9m짜리 보트에서 2주간 표류하다 겨우 미 해군에게 구조된다. 원래 이들을 구조하기로 되어 있던 구축함 타니카제는 엄청난 수의 미군기들의 공습을 받아 제대로 수색해보지도 못하고 겨우 살아 돌아갔다. 참고로 이 폭격으로 타니카제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장 많은 미군기의 공습을 받은 수상함이 되었다(...).
  59. 여기서도 아라시가 등장한다. 상세는 후술.
  60. 미국이 야마구치 제독을 높게 평가해 "다몬이 죽었으니 야마모토의 후임이 될 인물은 없다."고 야마모토 암살작전을 진행시켰다는 얘기가 있는데, 니미츠 평전 등 어떤 미국 측 기록을 뒤져봐도 다몬에 대한 언급은 없다. 애초에 이 이야기 자체가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쓴 책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미국 해군 장교가 "나가토가 있으니 일본은 침공 못한다"고 말했다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신빙성 없는 일화처럼 그냥 헛소문이다. 미국측의 자료를 보면 오히려 니미츠는 야마모토를 무능한 장수로 평가해서 야마모토를 암살하면 유능한 사람이 후임이 될까 두려워 실행을 주저했다고 회고하는 장면만 나올뿐이다.저 사실을 일본입맛에 맞게 편집을 하면 작가가 쓴 글이 될수도 있을것이다
  61. 니미츠 회고록을 보면 니미츠가 야마모토를 죽이는 작전에 주저했던 이유는 혹시 그 보다 더 유능한 사람이 임명될 수 있지 않을까 이지 야마모토가 무능하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러자 "제독님을 잃으면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라는 말을 들었다고 되어 있다. 야마모토도 일본 해군 총책임자이니 대체 불가한 인재일 것이라는 말을 돌려서 한 말.
  62. 이때 상륙한 일본 해군 육전대는 2년간 그곳에서 아무짓도 못하고 무위도식하다가 애투섬에서는 상륙한 미군과 격전 끝에 2천여명이 전멸하고, 키스카섬의 5천명은 미군 상륙 직전에 기무라 마사토미가 지휘한 구출함대에 의해 구출된다.
  63.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가 가관인데, 전국시대의 쇼군과 다이묘마냥(다른 팩트로 보면 전함과 주포의 관계라고 나오지만 솔직히 쓰면 이거다.) 항공모함과 항공대를 한 묶음으로 이해한 일본 해군의 병맛나는 사상이 원인이다. 미군은 요크타운 비행대가 모함인 요크타운이 치명타를 맞은 이후 함께 작전 중이던 엔터프라이즈, 호넷으로 옮겨가서 작전을 계속 수행했는데, 일본은 그런 게 없이 항모와 항공대를 한 세트로 결부시켜서 본 것. 즉 아카기의 항공대는 카가나 히류, 소류에 착함할 수 없었다.(게다가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등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일본군 항모들의 모습을 보면 외양이 저마다 차이가 난다. 그렇다 보니 함재기 파일럿들도 자기 함이 아니면 착함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외양이 비슷해서 다른 함에 착함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미군 함재기들의 입장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나마 요크타운 비행대도 원래 요크타운에 있던 비행대가 아니다.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요크타운 비행대는 원래 새라토가의 비행대였다.
  64. 해전 중에 대파상태에서 응급수리중 뒤늦게 전장에 도착한 일본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했으므로 굳이 따지자면 뒷북. 그러나 응급수리 상황 자체가 전투에서의 피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고 결국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침몰당했기 때문에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전투에서의 손실로 기록되어 있다. 참고로 사보섬 전투 직후 격침당한 일본 중순 카코도 요크타운과 비슷하게 전투 직후 미 잠수함의 뇌격에 당해 침몰당했지만 이쪽은 전투가 종료되어 전장에서 이탈한 후에 당했으므로 위키피디아에는 해당 전투의 손실로 기록되지 않았다.
  65. 응급수리중이던 요크타운 호위 중 같이 격침.
  66. 하필 맞은 곳이 방화격벽인데다 미군 항공모함을 잡으려고 어뢰에 연료까지 만재한 채 출격을 준비 중이던 함재기 근처라서 화재 확산을 막을 수 없었다든지, 아니면 각각의 방화구역에 사이좋게 한발씩 맞았다든가...
  67. 여기서 일본 해군을 조금 변호한다면, 공격 중시의 해군전술 사상은 일본만의 특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원조는 범선 시대의 영국 해군으로 같은 시기의 프랑스 해군이 미국독립전쟁 당시 인도양에서 활동했던 쉬프랑 제독을 제외하면 대체로 함정 보전을 염두에 두고 교전했다면, 영국 해군은 말 그대로 닥치고 돌격인 경향이 정말 강했다. 심지어 범선 시대 말기로 접어들면 아예 전투교리로서 상대의 단종진을 돌파하는 전투법을 채용할 정도이다. 이런 경향은 19세기말에 영국 해군을 모범으로서 증기력 해군을 창설한 일본 해군에게도 전수되었고, 게다가 점감요격 전법의 교리에 깔린 사상은 항공모함과 항모 전투기 부대는 결전 초반에 소모되어도 좋은 부대였다. 이런 분위기의 조직에서 조직의 리더가 교전 회피 및 전력 보존이라는 프랑스 해군식 발상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렵다. 게다가 프랑스 해군이 역사적으로 받는 평가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68. 이에 대해 과대 평가라는 의견도 있다. 이당시 미군이 보유한 레이더의 성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데다 이를 운용하는 미군 병력들의 숙련도도 낮았기에, 일본군은 미 함대가 어렴풋이나마 보이는 지점에서 본격적인 저항에 부딪혔으며 고도와 위치 선점 등의 문제로 인해 미군 함재기들이 일본군 함재기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전투기에 의한 함대 방공이 당당히 함대 방공의 한 축이 된건 필리핀 해 해전 부터라는 평이다.
  69. 여담이지만, 이 '최고위 외교관'은 윤봉길 의사의 물통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츠 마모루이다. 시게미츠는 훗날 미주리호 함상에서의 패전 조인식에 일본 대표로 뽑힌다. 동정심 유발을 위해(...). 그러나 맥아더에게 그딴 게 먹힐 리가 없다. 여감으로 시게미츠의 조카딸이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일본인 부인인 시게미츠 하츠코이며 신격호의 일본이름도 처가를 따라서 시게미츠 다케오라는 설이 있는데 롯데 측에서는 이에 대해서 '신격호 회장의 창씨개명은 일본에서의 결혼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며, 시게미츠 하츠코의 본래 성은 다케모리 하츠코로 신격호 회장과 결혼 이후 신격호 회장의 일본식 이름의 성인 시게미츠를 따라서 바꾼 것이다.'라고 부인하고 있다. 다만 이 논쟁에 대해서는 정확한 자료가 나오지 않은 관계로 아직 진실은 오리무중.
  70. 그러나 도조 히데키 자신은 총리대신 자리만 자기 파벌의 사람에게 넘겨줬다뿐, 영향력은 계속 행사하고 있었다.
  71. 당시나 지금이나 항공모함에 승선한 함재기 조종사와 승무원들의 경우 모함에 화재 발생시 무조건 화재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대피하도록 되어 있다. 그만큼 귀중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72.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지만 일본군의 무기체계 문서에 들어가서 읽다 보면 해군만이 아니라 육군에서도 이런 병크들이 구석구석 나온다.
  73. 그러니까 엔터프라이즈와 호넷만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74. 사실 이런 시각은 군사 지식이 거의 없는 일반인들이 몇 안되는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대부분 나오는 반응이다.
  75. 이건 어느 시대, 어느나라 군인들이나 마찬가지다. 당장 자신의 임무에 필요한 정보를 체득하기에도 빠듯한데, 남의 일에 대한 것을 일일이 알아야 할 여유도 이유도 없다.
  76. 일례를 들면, 고폭탄으로 포격/폭격하는 것은 강화콘크리트 진지를 무력화시키지 못한다. 중순양상 이상급 함포의 철갑탄이나 전투기의 로켓탄으로 직격시켜야 하며, 심지어 그것조차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탄약이 내려 꽂히는 각도까지 고려해야 한다. 그 밖에 다양한 상륙부대/상륙정의 발진 순서와 진형, 1차 보급품 양륙의 순서 등 세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수도 없이 많은 노하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상륙전이다.
  77. 그리고 세바스토폴 공방전, 과달카날 전투에서 공고의 포격, 타라와 전투에서 처럼. 방어측 보병이 작정하고 호를 파고 버티면, 전함이나 구스타프가 아무리 포를 쏴도 박멸할 수가 없다.
  78. 고대로부터의 전쟁사를 따져봐도 그렇지만 상륙전이나 공성전, 요새전 같은 전투의 경우 방어측이 훨씬 유리하다.
  79. 니미츠가 진주만 공습 때 근무하던 이들 중 유임시킨 장교들 가운데, 종전까지 태평양 함대사령부 밖으로 전출되지 않은 유일한 장교였다. 그가 진주만 공습 시 가장 큰 책임을 떠안고 징계를 먹을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이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고, 그는 다행히 니미츠의 기대를 계속 충족시켜줬다.
  80. 당시 언론에 미드웨이 해전 당시 일본 항공모함 격침 장면이라고 나온 것들은 당시 상황을 재현한 디오라마였다.
  81. 따지자면 이건 카미카제라 할 수 없다. 파일럿이 자의를 가지고 적함에 돌진(물론 제정신이라면 멀쩡한 기체를 꼬라박지는 않고, 더 이상의 비행이 어려운 경우)한 경우는 카미카제라 볼 수 없다. 오히려 미군의 핸더슨 소령도 이를 시도했고, 진주만 기습 당시 이를 시도한 일본군 조종사는 미국에서 나름 정중하게 장례까지 해 주었다. 자신의 항공기가 불에 타서 추락하는 중에 공포를 이기고 돌진하는 것은 절대 쉬운 판단이 아니다.
  82. <히스토리 채널, 배틀 360(Battle 360 Degree), 미드웨이의 반격>
  83. 니미츠 제독은 헨리 폰다, 핼시 제독은 로버트 미첨, 야마모토 제독은 토시로 미후네, 그밖에 글렌 포드, 제임스 코번같은 여러 유명배우들도 나오며 기타 일본측 인물들은 나름 이름있는 동양계 미국배우가 네이티브 영어를 구사한다. 여담으로 베스트 키드에서 미야기 스승을 맡은 팻 모리타도 나왔다. 한편, 토시로 미후네는 더빙처리.
  84. 항공모함 전대가 실제 항공모함 1척으로 때운다.
  85. 영화 짜집기도 짜집기지만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애인을 기다리는 일본계 미국인 처자의 모습은???
  86. 초반부에 나오는 자료화면으로 묘사된 동경 공습 부분이 바로 그 영화이다.
  87. 잘 보면 미드웨이에 난데없이 미 전함 아리조나가 정박해있고 미드웨이 출격을 아침에 한다.
  88. 전편이 전쟁과 폭풍(The wind of war)이며, 한국에서는 KBS-1에서 심야에 전편은 1986년에 방영했고, 후편은 1989년 방영.
  89. 명 배우 '로버트 미첨'이 연기했다. 극 중에서는 후반부에 소장으로 진급. 더빙 방영판에선 성우 이봉준이 나레이션과 같이 연기했다.
  90. 참고로 이 둘째 아들의 며느리로 샤론 스톤이 나온다.
  91. 현대의 일본도 영향을 받아 홋카이도의 절반이 소련 영토가 되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