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보신각 동종

대한민국의 보물
1호
서울 흥인지문
(서울 興仁之門)
2호
옛 보신각 동종
(舊普信閣 銅鍾)
3호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1 개요

舊普信閣 銅鍾. 조선 세조 14년, 1468년에 만들어진 보신각의 초대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2호이다.

2 내용

종의 몸체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조선의 7대 왕이었던 세조가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으로 당시 제조(提調)로 있던 황효원(黃孝源)과 감역, 김덕생, 정길산 등에게 왕명을 내려 재위 14년인 1468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총 높이 318cm로 우리나라 역사상 성덕대왕신종연복사종 다음으로 역대 세번째로 큰 초대형 범종이다.

여러번 기구한 운명에 처했던 종으로 처음에는 세조의 명으로 정릉사에 배치하였지만 이후 원각사로 옮겨졌다. 그러나 원각사가 연산군에 의해 폐사지가 된 후 중종은 원각사를 허물고 다시 김안로에게 종을 숭례문으로 옮기게 하였다. 이렇게 계속 강제로 이사다니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화재로 종루가 불타고 종 또한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광해군 때 종을 복구하여 사용하였으나 고종 6년, 1869년에 다시 한번 화재로 크게 손상을 입었다. 이후 종을 다시 고치고 고종 32년인 1895년에 종각을 새로 건설하면서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때부터 보신각종이라 불렸다.

조선이 멸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된 후에도 1985년까지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종이 너무 오래되어 계속 사용시 훼손이 우려되었기 때문에 517년만에 새 종에게 그 자리를 내주고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3 의의

오랜 세월 동안 재야의 종으로 조석을 알리는 역할로 사용된 한국 범종사상 의의가 매우 깊은 문화재이다. 다만 역사상 두 차례의 격동의 시기 때마다 우리나라와 운명공동체로 함께 불타서 지금은 몸이 많이 상한 상태이고 이에 따라 현재는 재야의 종 역할은 내려놓고 국립중앙박물관 경내로 이전된 상태이다.

21세기 최첨단시대 이전에 제작되어 지금까지 현존하고 있는 여러 대종 유물들 중, 우리나라 역사상 세번째로 큰 대형 종으로 불교 문화와 범종 제작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달했던 통일신라고려시기의 종들과 비교해보아도 종파사, 미술사적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매우 높은 완성도를 지닌 조선시기의 종이다.

세조 시기 국가적 차원에서 만들어진 종으로 화려한 띠장식과 명문이 새겨져 있고 유려한 1구의 보살상이 판각되어 있다. 여의주를 물고 날아오르는 쌍룡은 매우 역동적이고 용맹하여 당시 수준 높은 조각 기술을 가늠해볼 수 있다. 화재로 많이 훼손되어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주조 당시에는 네 구의 보살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는 등 더욱 화려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4 보물 제2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종으로, 1985년까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제야(除夜)의 종을 칠 때 사용되었다.

조선 세조 14년(1468) 만들어 신덕왕후정릉 안에 있는 정릉사에 있었으나, 그 절이 없어지면서 원각사로 옮겨졌고 임진왜란 이후 종루에 보관했다. 고종 32년(1895) 종루에 보신각이라는 현판을 걸게 되면서 보신각종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서 보관 중이다.

총 높이 3.18m, 입 지름 2.28m, 무게 19.66톤의 큰 종이며,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종 형태를 하고 있다. 음통이 없고 2마리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어깨부분에서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중간 지점부터 입구 부분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몸통에는 3줄의 굵은 띠를, 종 입구 위로는 일정한 간격으로 2줄의 띠를 두르고 있고,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있다.

이 종은 2번의 화재를 겪으면서 원형에 손상을 입고, 음향도 다소 변했으나 명문(銘文)이 남아있어 주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