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560px
國立中央博物館 / National Museum of Korea

[[파일:/20140929_62/cafe20day_1411922033735xJUk1_JPEG/%B1%B9%B8%B3%C1%DF%BE%D3%B9%DA%B9%B0%B0%FC_%B7%CE%B0%ED_%B8%B6%C5%A9_Converted.jpg|200px]]logo_new.png
구 로고신 로고

홈페이지.
소장품 검색

1 개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0조(설립과 운영) ①국가를 대표하는 박물관과 미술관으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소속으로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을 둔다.
④문화체육관광부장관은 문화유산의 균형 있고 효율적인 수집·보존·조사·연구·전시 및 문화향유의 균형적인 증진을 꾀하기 위하여 필요한 곳에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또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지방 박물관 및 지방 미술관을 둘 수 있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舊 용산동6가 168-6번지)에 있는 대한민국 최대 규모의 국립 박물관. 한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전공자주로 저주받은 전공을 택한자들이 자주 들를 수 밖에 없는 곳으로 애칭(?) 비슷하게 국중박 국박 중박 등으로 불린다. 대중교통편으로는 서울 지하철 4호선경의중앙선 환승역이촌역에서 가깝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박물관 일반의 사업 외에 다음 각 호의 업무를 수행한다(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10조 제3항).

  • 국내외 문화재의 보존·관리
  • 국내외 박물관자료의 체계적인 보존·관리
  • 국내 다른 박물관에 대한 지도·지원 및 업무 협조
  • 국내 박물관 협력망의 구성 및 운영
  • 그 밖에 국가를 대표하는 박물관으로서의 기능 수행에 필요한 업무

2 연혁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 봐도 상당한 규모. 관람객 수 기준으로 아시아 1위, 세계 10위에 해당하며 소장 유물 약 33만 점.

역사가 꽤나 기구하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은 연혁의 시작을 순종황제가 지은 제실박물관으로 상정해 놓았다. 사실 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 컬렉션의 기초는 조선총독부 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해방 후의 덕수궁미술관, 92년 궁중유물전시관으로 분리. 현재의 국립고궁박물관), 그리고 민속학의 대하 송석하가 지은 남산의 국립민족박물관 소장품을 합친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박물관과 이왕가박물관이 모두 일제에 의하여 설립되었기 때문에 처음엔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인수 개편하여 1946년에 덕수궁 안의 석조전 건물에서 개관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최광식 관장의 취임 이후 이왕가박물관이 1909년 대한제국의 제실박물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 주목해 박물관의 시작은 제실박물관으로 보고, 2009년을 한국박물관 100주년의 해로 선포하고 몽유도원도 등을 비롯한 유물이 전시되는 대규모 특별전과 행사를 열었다.

이후 경복궁 경내의 총독부박물관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 한국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가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이 유물을 다 가져가려고 박물관 직원들을 협박해서 유물들을 포장하게 했는데, 직원들은 일부러 유물 포장 작업을 지연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자세한 일화는 박물관 초창기 직원이자 훗날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되는 최순우의 일대기를 그린 책 <혜곡 최순우> 참조. 결국 서울이 수복되면서 거의 대부분의 유물을 부산으로 옮겼는데 이때 미처 옮기지 못한 대형 중국 벽화나 양나라 미라는 훼손되었다고 전한다. 1953년 휴전 이후 서울로 오면서 경복궁 경내로 돌아왔으나 그해 10월에 경복궁 부지가 구황실재산사무총국(현 문화재청)에 넘어가자 1954년 2월부터 남산의 구 국립민족박물관 건물에 머물렀으나, 그해 6월에 남산 건물이 연합참모본부로 쓰이자 그해 11월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2월에 개관하였다.

덕수궁 시절인 1957년 12월부터 1959년 6월까지 미국 8개 도시에서 처음으로 국보급문화재 해외전시회를 가졌으며, 1961년 3월부터 1962년 5월까지 영국·프랑스·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에서 중요문화재 해외순회전시를 하여 일제 식민사관에 매몰된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소개시켜 주었고, 1968년 7월 문교부 소속에서 문화공보부 소속으로 직제가 개편된 뒤 1972년에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신축해 이전하였다. 그러나 건물이 좁고 디자인이 유치하다는 비판이 이어지자 1986년 옛 조선총독부 건물(중앙청)로 이전하고 그 해에 구 중앙청 후생관 건물(1979년 건립)을 사회교육관으로 개편하였다.

그러다가 1995년 당시 문민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면서 소장품들이 임시로 근처 벙커에 들어가 있었다가 경복궁 경내의 구 사회교육관 건물(현 국립고궁박물관)을 개축하여 이전하였다.

이후 미군 용산기지 골프장을 돌려받아 조성된 용산가족공원 내에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서 2005년에 안착하여 비로소 세입자나 다름없는 신세를 벗어났다. 개관 기념으로 잠시 무료개방을 하다가 이듬해부터 입장료를 받았으나,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한시 무료개방을 하더니 모든 국립박물관의 입장료를 없애서 현재는 일단 무료다. 현재 앞마당에 국립한글박물관이 2014년 10월 개관하였으며 차후 주변 부지도 기증 받아 국립민속박물관을 이전하고 (지금의 이상한 건물은 폭파...) 전쟁기념관까지 연결하여 거대한 뮤지엄 파크를 만들겠다는 구상이지만... 과연 언제쯤 완성될지? 다만 현 위치가 저지대인지라 대규모의 홍수가 닥쳤을 경우 문화재가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현재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차관급 기관이며 산하에 12개의 지방 국립박물관(경주, 공주, 광주, 김해, 나주, 대구, 부여, 전주, 제주, 진주, 청주, 춘천)과 1개의 전시관(미륵사지유물전시관)을 거느리고 있는 나름 대규모의 기관이다. 참고로 국립민속박물관은 문화체육관광부 직속의 별도 기관이며, 국립고궁박물관은 문화재청 산하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과는 관련이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문화재청 산하), 대한민국역사박물관(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전쟁기념관(국방부 산하), 독립기념관(국가보훈처 산하), 국립현대미술관(문화체육관광부 산하)과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앞의 국립한글박물관 역시 마찬가지로 문화체육관광부 소속의 별도 기관이다.

건물의 모티브는 한국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볼수도 있고 귄위적이거나 사치스럽게 느끼지 않는 성벽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중앙박물관이라는 역사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2013년에 동아일보와 건축전문지 SPACE가 국내 건축가들에게 설문조사한 결과로 나온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에 17위로 랭크된 흑역사가 있다.

여담으로 호수를 끼고 계단을 올라가서 광장에 도착하면 광장계단위로 남산타워가 우뚝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은근 멋있다. 미군기지 내의 골프연습장만 보이지 않으면...

3 이야깃거리

국사책에 나오는 유물 중 많은 수[1]를 이 곳에서 소장하고 있다. 물론 건축물 같은 건 빼야 되니 절대 다수까지는 아니지만서도, 옮길 수 있는 건 정말 많다. 내부에 도 있으며[2]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등 야외에서 훼손이 될 만한 유물도 이 안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또 조선총독부가 버리고 간 중앙아시아 유물 오타니 컬렉션도 소장중이다. 오타니 컬렉션은 일본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당주이자 백작이라고 쓰고 도굴범이라고 읽는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가 현 위그르 지역의 베지클릭 석굴사원 등에서 도굴해온 벽화 및 온갖 예술품들이다.[3] 동일한 종류의 유물이 역시 베를린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 소실되었기 때문에[4] 세계 유일본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은연중에 중국이 반환을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일단은 돌려 줄 국가가 없다는 명분으로 무시하는 중.

위구르, 즉 동투르키스탄 독립 망명정부도 "중국에게 돌려줘봐야 서북공정으로 써먹을테니, 한국이 그냥 보관하길 원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겨레 21>에서 이 오타니 컬렉션에 대한 반환하자는 기사를 썼는데, "한국에서 다른 나라처럼 훔쳐서 보관하고 있느냐?!"라는 비판이나 "일제강점기 때 외국에 유출된 한국 문화재를 일본에다가 일본 것이라고 돌려주는 꼴"이라는 반격에 욕만 퍼먹었다.

다만. 이 유물들은 위구르족이 남긴 유물이 아니다. 위구르인들이 도래하기 전 한나라~당나라 사이에 중국과 실크로드 도시국가문명이 남긴 유물이 대부분으로, 위구르 족은 이슬람교로 집단 개종한 이후 이 유물들을 파괴한 민족(이슬람 특유의 우상숭배 금지 및 우상파괴를 생각해보라)이지 이 유물들을 만든 민족이 아니다. 위구르족은 유목민족이다. 실제로 이들은 당나라 후반부터 이 지역에 정착했다. 투르판 지역에서 온 유물들도 상당수지만 어디까지나 현대의 위구르인들이 사는 곳에서 온 유물들일뿐이지 그들이 자신들의 조상으로 받드는 위구르인들이 만든 건 아니다.

이것을 만든 사람들은 고대 토카리인들이다. 고구려 벽화에서 자주 나오는 서역인들이 이들로서 금발, 홍발 벽안의 전형적인 백인들이었다. 현재 동투르키스탄 지역의 위구르족들이 푸른눈에 서양인들과 비슷한 외모특징을 일부 공유하고 있는 것은 위구르족들이 9세기 오아시스 도시들을 파괴한 후 재정착과정에서 강간과 통혼 등의 과정으로 그들의 피가 섞인 연유이다. 토카리인들은 불교를 숭상했으며 남북조시대 중국에서 활동하던 불교史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들 중 하나인 구마라습의 출생지도 바로 토카리인들의 오아시스 국가들 중 하나였던 쿠차였다. 물론 고대 중국문명과 한족들이 만들었다고 말할수있는 서역유물은 둔황석굴과 오르도스 지역을 기반으로 한 일부유적에 기반한게 한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위구르 지역에서 온 유물인지라 망명정부의 의견을 무시할 수도 없는 터에 그냥 한국에서 보관하고 있다. 돌려주자고 하던 이들도 "그럼, 망명정부에 가서 이거 늬들 조상이 만든 거 아니니까 중국에 돌려줘야지?" 이렇게 설득해보라는 비아냥에는 뭐라고 대꾸하지 못했다... 이렇게 치자면 중국인들도 결국 자기들이 만든게 아니니까 저 유물을 가져야할 자격이 못되기 때문이다.

6.25 전쟁 때 하마터면 잿더미가 될뻔했으나 이걸 알아본 유엔군 장교가 귀중한 문화재라고 하여 잘 보관하여 겨우 남았다고 한다. 이 당시 미국에서 눈독을 들이기도 했었다.

지적받을 만한 점도 몇 가지 있다. 수장고에 잠들어 있는 소장품이 하도 많다보니, 때로는 "없어졌다던 유물이 요기잉네?" 하는 경우도 가끔 있다고 한다. #[5] 사실 기사 후반에서 지적하듯, 그걸 다 관리 못하는 것도 잘하는 건 아니다.

소장품 중에 당연이 국보보물 등 국가지정문화재가 많다. 그러나 유물의 수준에 비해서는 또 많은 것이 아닌데, 가끔보면 교과서에도 나오는 엄청 유명한 유물도 국보나 보물이 아닌 경우가 많다. 문화재의 지정 및 등록을 담당하는 문화재청의 공식적인 해명은 문화재의 지정 및 등록은 문화재의 가치도 중요하지만 관리의 문제점이나 훼손의 가능성도 중요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 즉 아무리 좋은 문화재라도 한국에서 가장 안전하고 전문적인 관리를 받은 국립중앙박물관 안에 있으니 지정의 시급성이 떨어져 후순위로 밀린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지만 사실 이건 문화재청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이가 안좋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비슷한 일을 담당하는 두 기관이 기싸움을 하면서 서로의 조직을 늘려가고 있는데, 문화재청이 1992년 궁중유물전시관(지금의 국립고궁박물관)을 만들면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왕실유물을 대규모로 빼가 두 기관의 사이가 더 악화되었다는 것.
실제로 최근 두 기관의 협력이라고 쓰고 화해라고 읽는다을 위해 문화재청이 국립중앙박물관의 주요 소장품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고 국립중앙박물관은 여기에 협력한다는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이건 역설적으로 두 기관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반증이 된다. #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6세기 후반, 미상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또한 유물의 규모에 비해 순회전시가 잘 안 되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세계적인 박물관들은 몇 개월에서 몇 년 단위로 유물을 교체해주는데, 중박은 재개관 이후 대표 유물이 교체된 적이 거의 없다. 예외가 있다면 국보 78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으로 석가탄신일마다 서로 교대해서 전시한다. [6] 참고로 이 반가사유상들은 우리나라 문화예술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것들로, 아예 작은 방에 단독으로 전시되어 있을 정도로 특별대우를 받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문화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재로서 인정받아 외국에서 한국 관련 전시를 할 때에는 거의 빼놓치 않고 초청받는다. 다만 훼손 우려 때문에 국외전시를 나가는 것은 조심스러운 편이다. 세상만사를 통달한, 수 천 가지의 감정이 녹아난 미소가 압권으로, 전시실 안에는 이 미소를 오래도록 곱씹으라는 의도로 벤치[7]도 놓여져 있다.

장소가 장소라서 은근 국제 행사를 자주 치룬다. 가끔 박물관 앞 주변을 무장한 채 돌아다니는 경찰을 볼 수 있다.

4 가이드

여느 박물관 같이 가이드 하는 선생님이 계신다. 선생님의 해설을 듣고 싶다면 시간 보고 방문하도록.
그리고 굳이 가이드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3천원에 PDP(음성 + 영상) , 1천원에 MP3(음성만 지원) 를 대여하면 된다. 게다가 무료 전시안내 앱까지 있다! 구글플레이나 앱스토어에서 국립중앙박물관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맨 위에 똑같은 이름의 앱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KTO에서 만들었고 하나는 애니모비에서 만들었다. 아무거나 하나 깔아서 쓰면 된다. 물론 상설전시관에 한하여 안내가 되지만 꽤나 유용한 앱.

5 관람 팁

기본 관람료가 공짜인 대신 주로 기획 전시실에서 하는 특별전(혹은 기획전)은 관람료가 비싸다. 값은 비싼데 그 값만큼 제 값을 하는 전시회가 그렇게 많지는 않다는 게 흠. 특히 해외 박물관 협력해서 하는 전시회 쪽은 팜플렛에 있는 게 다라는 말이 나올 만큼 부실한 케이스가 있다. 성인은 세종대왕님 한 장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가기 전에 할인 가능한 수단을 찾아보고 가는 것이 좋다.

만약 이곳에 처음 방문하였거나 역사에 관하여 잘 모른다면, 1층을 둘러보면서 기본적인 흐름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이곳을 몇 번 방문하였거나 역사에 대해 많이 아는 위키러들은 1층에서 금동대향로[8] 같은 유물 몇점만 보고 3층으로 올라가자. 3층의 조각 공예관에 있는 유물이 유물사적으로 더 가치있는 것들이다. 이후에 다리와 시간이 여유가 있으면 2층 서화관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날씨가 흐려서 햇빛이 강하지 않으면 야외전시장에서 염거화상 탑(국보 104호)을 비롯하여, 고려 태조 왕건이 가장 공을 들여세운 흥법사 진공대사탑과 석관(보물 365호), 개성에서 옮겨온 것으로 고려 석탑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남계원(국보 100호)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종으로 알려진 보신각종(보물2호)등을 관람하는 것도 괜찮다.

방해 안 받고 조용히 관람하기 상당히 어려운 곳 중에 하나이다. 방학 시즌에는 초딩들 러시, 소풍/수학여행으로 오는 학생들, 행락철에는 시골에서 올라오신 어르신들이 강림하시고 일본인을 비롯한 해외 관광객과 가족 단위까지 1년 내내 시끄러운 곳이다. 조용하게 다니고 싶으면 행락철과 소풍 기간을 피한 평일, 특히 오후 9시까지 개관하는 수요일 오후~저녁 정도가 제일 좋다.

특히나 장소가 장소이기 때문에 방학 시즌만 되면 말 그대로 초딩 천국이 된다. 특별전을 보러 가는데 방학을 끼고 하는 전시회라면 방학 시작 전에 다녀 오자. 방학 기간에 끼어서 보면 난장판 사이에서 돈만 기부할 수 있다.

해외 전시로 인해서 간판급 유물들이 사라지고 안내판만 덜렁 있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잘 알아보고 가자. 특히 뉴스에 나올 정도로 해외 전시면 어지간한 네임드급은 몽땅 다 해외로 출장[9]을 가기 때문에 막상 박물관을 가도 낚일 수도 있다.

교통편이 은근 불편하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이촌역을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쉽다.[10] 국립중앙박물관 앞을 지나는 시내버스는 서울 버스 400, 서울 버스 502 뿐이다. 모두 용산역을 경유하므로 용산역에서 오는 것도 편하다. 추후 신분당선 용산 연장구간이 완공되면 박물관 바로 앞에도 역이 생길 예정이었으나, 용산국제업무지구의 파행으로 강남~용산 구간의 착공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그마저 역 건설이 백지화되었다. (…)

겨울에 갈 때는 반드시 든든하게 입고 갈 것. 물론 뚜벅이 관람자에 한해서지만… 이촌은 한강 옆에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춥다. 아무 생각 없이 입고 나갔다가는 한강 칼바람을 맞으면서 박물관 정문 저 멀리에 보이는 본관까지 걸어가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질 것이다. 2012년 12월 27일 이촌역에서 박물관으로 연결되는 지하보도 "박물관 나들길"가 완공되어 보다 쾌적한 관람이 가능해졌다.

예전에 조선총독부 건물 시절 지적 받았던 휴식 공간이 적다는 평을 의식해서인지 현재 박물관은 중간중간에 의자가 많다. 박물관 면적이 넓기 때문에 대충 둘러본다고 해도 반나절은 잡아야 한다. 장기전으로 갈 각오를 하고 관람하는 것을 추천. 또한 반드시 편한 복장으로 가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신발은 꼭 발이 편한 게 먼저다. 워낙 규모가 크기 때문에 멋낸다고 힐이나 구두 신고 보러 갔다가 얼마 보지도 않았는데 의자에 앉아서 발을 두드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 박물관 피로(museum fatigue)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박물관 내에 있는 식당은 인간이 먹을 수준이기도 모호한데 값이 착하지[11] 않다. 관람료가 공짜인 이유가 있었어 또한 박물관 경내에 있는 CU에서는 라면을 팔지 않는다. 노렸구나 식당 밥 비싸다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려고 들면 낭패를 보니 주의. 이왕이면 가기 전에 미리 든든하게 먹고 가자. 참고로 옆에 있는 미군기지 입구에 자판기가 있는데, 여기에 달러나 센트를 가져가서 과자 등을 뽑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군기지 내부는 아니어도 그 앞이라 걸리면 내쫓길 수 있으니 가지 말자. 애초에 센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이촌역 3-1 출구로 나가면 아파트 단지가 나오고 근처 상가가 있는데, 여기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을 추천. 그 유명한 동부이촌동이 여기다. 동네가 동네인지라 가격은 세지만 먹을 만 하다. 신문이나 블로그에서는 맛집이 널렸다고 하나 실제 그 정도는 아니니 낚이지 말자. 단 전반적으로 가게들이 별로 친절하지가 않다는 것은 염두에 둘 것. 단골 아니면 취급도 안해주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니 요주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국립한글박물관이 있다. 한글의 발전과정이 궁금하면 한번쯤 들려볼 만 하다. 어린이들도 이해할 수 있게 쉬운 해설이 있고 한글서적도 많아 관람할 가치가 있다. 동선도 짧아서 가볍게 보기도 편한 편.

6 기타

주한미군 골프장을 반환 후 조성된 용산가족공원도 국립중앙박물관과 연결되어 있다.

2009년에 국립중앙박물관 100주년 특별전을 했었는데 누가 한국최고최대 박물관 아니랄까봐 국내는 물론 국외의 여러 박물관, 미술관에서 엄청 귀한 전시물을 보내 축하했었다. 몽유도원도, 훈민정음 해례본, 천마도 등 평소에 보기 힘든 유물들도 100주년을 축하해주기 위해 보내져와서 전시했었다. 엔간하게 유명한 유물들도 쩌리로 보일 지경(...) 특히 이 특별전이 무려 무료라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었다. 전국의 역사학도, 미술학도는 물론 문화계통에 관심있는 사람은 남녀노소 몰려와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특히 몽유도원도는 1인당 1분만 볼 수 있도록 관람을 제한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파가 몰렸었다. 국중박의 위엄 내지는 국내 박물관에서의 위치를 잘 보여주었던 특별전.

2013년에는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20위 중 17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유홍준 교수는 중앙박물관 관람비를 더 받아야 한다면서 왜 문화재 보는 값어치를 스스로 평가절하하냐고 비난한 바 있다. 그가 들려준 일화로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온 적이 있는데 당시 2천원이란 관람비를 2천엔[12]으로 듣고 한국 돈으로 10배가 넘는 돈을 내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들은 당연히 자국 중심문화재를 보여주고 보관하니까 이 정도는 당연했다며 비싸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고. 이래야 한다면서 일본이 문화재를 아끼는 게 괜히 그런 것이냐고 일갈했었다. 유교수가 제기한 관람비 문제는 사실 굉장히 실질적인 문제로, 이게 충당이 안되면 운영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건 박물관 운영 비용 마련 가능/불가능의 문제지, 관점의 차이 운운하며 옹호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문화 복지의 차원에서 국립박물관은 무료로 운영하는 국가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런 나라들은 대부분 정치인이나 기업가들의 기부로 운영된다. 소수지만 엘리트들이 기부를 많이 하기 때문에 운영되는거란 말이다. 대영박물관이 그런 케이스다. 박물관 운영비는 기부를 받든 관람료를 받든 세금으로 충당하든 해야 하는데, 문제는 한국의 문화 관련 재정지출이 상당히 적은 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세금으로 충당하기엔 벅차 주요 박물관들이 적자 상태에 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유물들이 연구되지도 못한 채 창고에서 썩어가는 지경이다. 유교수는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박물관 입장료를 받아야 큐레이터나 연구자들에게 돈을 주고 새로운 유물을 찾아 연구를 해 새로운 전시를 선보일 수 있다. 박물관 운영은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굉장히 막대한 비용이 들어간다. 사실 유교수가 아니라도 누군가는 지적했을 문제다.

위에 언급한 입장료 무료 정책과 함께, 일본인 관광객들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관련하여 많이 놀라는 게 전시실 내에서의 사진 촬영이 자유롭다는 거.. 물론 유물 훼손 및 타인의 관람 방해를 막기 위해 플래시와 삼각대는 금지되지만, 단지 박물관에서 사진을 촬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수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감격(?)하고 있다고... 구글 및 일본 포털 사이트에 '国立中央博物館 撮影'을 가지고 검색해 봐도 관련 여행기들이 우수수 검색된다. 실제로 일본의 국립박물관들은 훔쳐간 문화재 들킬까봐 사진 촬영 자체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이러한 정책이 일본인에게는 꽤 색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13]

런닝맨 180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촬영되었다.

1박2일 536화 의 국보 전국 일주에서 데프콘, 정준영, 김주혁 팀이 주사위를 굴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특히 길게 촬영하였다. 굳이 국립중앙박물관 외에도 다양한 국보들이 게임에 엮여 재미있게 소개되니 관심있으면 골라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1. 그리고 그 많은 수를 제외한 나머지 상당수는 간송미술관 또는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에 있다. 고서의 경우 서울대학교규장각에도 꽤나 존재한다.
  2. 국보 86호인 경천사 10층 석탑. 경기도 개풍군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반출되었다가 경복궁으로 환수했었던 탑이다. 환수 이후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것이 확인되어 장기적으로 탑 복원 공사가 이루어졌고, 산성비 등으로 인한 훼손을 우려하여 내부로 옮겼다.
  3. 이 오타니 컬렉션은 오타니 개인의 재정문제로 3분되어 떠도는 것 중 한 갈래가 총독부에 흘러들어와 그대로 광복으로 이어지면서 국립중앙박물관의 소장품이 된 것. 다른 설로는 중국에서 국내로 옮겨와 다시 일본으로 반출 대기중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그대로 주저앉은 것이라는 설도 있다.
  4. 역시 독일인 도굴꾼 알베르트 폰 르콕이 반출하여 독일로 옮겼지만 전시할 때 다수를 박물관 벽에 박아놓아서 옮겨 볼 생각도 못 하고 연합군 폭격에 그대로 소실.
  5.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측에서는 명성황후와는 관련이 없는 유물로 추정했다. #
  6. 2015년 2월 기준으로, 국보 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전시되어 있다.
  7. 2015년 1월 현재 의자가 없다. 여기뿐만 아니라 다른 전시실도 원래 있던 의자를 왕창 빼놔서 예전처럼 뒹굴거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유물 위치도 어수선한 상태인 것을 보면 대대적인 위치 이동이 있을 듯.
  8. 당연히 모조품. 진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다.
  9. 반출하는 중박은 국위 선양이라고 하지만 국내 관람객 입장에서는 빡침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지방에 올라온 관람객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엄청난 분노다.
  10. 이촌역과 국립중앙박물관 사이에 지하보도가 있으니 그걸 이용하시기 바람. 참고로 지하보도가 4호선 사당방면 거의 끝쪽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4호선을 타고 갈 때는 당고개 방면 뒷쪽, 사당/오이도 방면 앞쪽에 타는게 좋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올땐 뭐 답이 없다. 실컷 걷는수밖에.
  11. 1층 식당 "나무"에서 낙지 비빔밥이 10,500원이고 파스타가 15,000원 선이다.
  12. 2015년 기준 약 2만원.
  13. 단 이것은 일본 한정으로, 세계적으로는 플래시나 삼각대를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 촬영을 허가하는것이 대세.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코펜하겐 국립박물관 등도 모두 사진촬영이 가능하고, 제3세계 국가들의 경우 카메라 추가요금을 받는 경우도 많다. 훔쳐간거 들킬까봐 그러는거 맞네 뭐. 그래도 영국은 양심에 찔려서 사진 허락하고 돈 안받기라도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