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安老,1481~1537
1 개요
조선 중종 시기의 권신. 호는 희락당(希樂堂). 아버지는 김흔(金흔(言+斤))이며, 큰아버지는 영의정 김전(金銓)이다. 김전, 김흔 형제는 모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2 상세
한때는 조선 초기 최강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나이. 그가 겸직했던 직함만 치면 한명회도 능가했다. 동지경연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사, 성균관사, 이조판서, 지의금부사, 도총부 도총관을 한 번에 겸직했던 사람이다.[1]
단 조선시대는 지금의 정부구성과는 달라서 위의 겸직 중 일부는 당연히 겸직하는 직책이다.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원장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원장을 겸직하는 식. 예를 들어 학문연구기관인 홍문관 대제학은 원래 같은 뿌리에서 나온 기관인 예문관 대제학을 겸직하며, 홍문관의 종2품 제학 이상과 예문관의 정4품 응교 이상은 모두 타관이 겸직하는 직책이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비용절감을 위해 겸직을 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홍문관의 대제학은 경연에 참석하기 때문에 동지경연사라는 직함을 얻는다. 성균관 대사성은 법제상 전임직이지만 겸임하는 경우도 꽤 많아 홍문관 대제학 겸 예문관 대제학 겸 성균관 대사성 혹은 지성균관사를 문형이라고 불렀다. 아울러 춘추관은 100% 겸직으로만 이루어지는 기관으로 정2품이 겸직하는 지춘추관사 위에는 영의정과 좌 또는 우의정이 겸직하는 직책이 둘이나 있다.
오위도총부의 경우도 본래 소임없는 문무당상관을 대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대체로 문신이 겸임하게 되어있고 정2품인 도총관은 종실이나 외척이 담당하는 것이 관례였다. 게다가 군사를 움직이는 실권은 병조에 귀속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의금부 또한 종2품 동지의금부사 이상은 겸직이었다.
따라서 위를 정리하면 김안로는 1. (이조판서)로서, 다른 정2품관이 겸직하는 a.(홍문관 대제학 + 예문관 대제학 + 춘추관사 + 성균관사 + 동지경연사)를 맡고, b.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지의금부사를 겸직, c. 외척으로서 마찬가지로 겸직 직책인 도총부 도총관을 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권력을 쥐다
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임관원의 등용을 최대한 억제하고 그 빈자리에 자신이 필요로 하는 사람을 겸임시킴으로써 그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주곤 하였다. 그 첫 번째가 조광조였는데 그의 최후는 기묘사화. 그리고 조광조 다음에 남곤이 권력을 잡았지만 그도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이행, 심정, 이항 등은 그나마 능력 있던 남곤과는 달리 탐욕스럽기만 하지 특출난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에 중종이 이들을 대체할 인물을 물색하니 바로 김안로였다.
원래 김안로는 신진 관료로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의 자리에 오르는 등 승승장구했는데 그의 잔인한 성미를 경계한 남곤 등의 대신이 김안로를 탄핵하여 김안로는 유배를 가게 되었지만 남곤이 죽은 이후 자신의 아들인 부마 김희를 통해 권신이자 간신인 이행과 중종과 대비에게 싸바싸바를 하여 유배에서 풀렸고 다시 벼슬길에 오르면서 세력을 확장시켰다. 놀랍게도 그는 사림과 대간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잡았는데 훈구파 권신인 이항, 심정, 이행의 횡포에 모두가 치를 떨고 있었고 폭력적인 그들이 언제 자신들을 숙청할지 모른단 두려움 때문이었다.[2] 또한 세자의 지위가 불안해서 김안로를 끌어들여 세자의 지위를 탄탄히 하려는 의도도 있었다.[3] 대간의 지원사격, 무엇보다 중종의 버프를 받은 김안로는 이항과 심정을 사소한 실수를 꼬투리잡아 숙청했으며 자신의 집권을 도왔던 이행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정광필 등의 다른 대신들을 규합해 반격을 시도하자 잠시 권세가 주춤했지만 곧 전열을 재정비하여 이행까지 숙청했다. 숙청된 이항, 심정은 잇달아 사사되었고[4] 이행은 사사되기 전에 자연사했다. 이후 김안로는 거의 전권을 틀어쥐면서 최강의 권신으로 자리잡았다.
4 공포정치
이후 김안로는 대규모 옥사를 일으키는 등의 폭력 정치를 행하였다. 앞서 설명했듯이 그와 대립한 심정이나 이행, 이항 등의 권신 등이 비참하게 죽었다. 작서의 변으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폐서인시켰으며 곧이어 사사시켰다.[5] 복귀 1년만인 이때가 그의 절정기. 어떤 사람이 사헌부 문에 김안로의 손에 국권이 들어갔으니 백년 사직의 주인이 누구인가[6]라는 익명서가 붙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6년간 우의정, 좌의정에 오르며 승승장구했다. 자신을 따르지 않는 정광필 역시 공격해서 유배를 보냈고 살아 생전에 자신을 경계했던 남곤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아 그가 장경왕후의 묘를 잘못 쓴 죄를 뒤늦게 물어 그의 관작을 추탈하게 했다. 이때 정광필을 유배보냈을때가 자신의 마지막 위세였다. 그러고 난 뒤 몇달 안가서 쫓겨났다.
김안로는 (자신의 인맥을 바탕으로 한) 사림, 대간들과 손을 잡고 공포의 숙청 정치를 휘둘렀다. 그야말로 사림의 흑역사.[7] 그리고 권력을 잡은 그 역시 다른 권신들처럼 축재를 하면서 권세를 부렸다. 말년에는 경원대군을 등에 업은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 형제들이 급부상하는 것에 위기를 느껴 이들을 숙청하려 했지만 오히려 중종의 눈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계기만 되었다.
5 최후
결국 도를 넘어 횡포를 부리는 그에게 질린 중종은 도승지 양연에게 김안로를 없애야겠으니 여론을 조성하라는 밀지를 내렸다. 양연은 대간들을 데리고 김안로의 횡포가 심해서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왕의 기대에 부응했고, 이에 중종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김안로가 나쁜 놈이구나!" 라면서 김안로의 아들의 혼인 잔치날에 그를 기습적으로 체포하였고, 이후 그를 유배시키고 순식간에 사약을 내려 죽여버린다.
결혼식날 날벼락을 맞은 김안로의 차남이 양송당(養松堂) 김시(金禔)로, 조선전기의 문인 화가이다[8]. 집안의 상황 때문인지 과거에 응하지 않고 서화에만 전념했는데, 당시 최립(崔笠)의 문장, 한호(韓濩)의 글씨, 김시의 그림을 일컬어 삼절(三絶)이라 했을 정도로 명망이 높았다고 한다. 예술가는 역시 부자 아버지가 필요하다 김안로의 사치는 집에 단청을 칠하고 각종 서화를 수집하는 등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야담과 설화를 수집해 용천담적기라는 책을 남기기도 했다. 조선의 능덕이었단 말인가!
6 기타
- 재미있는 건 세자 시절의 인종은 어느 정도 김안로의 덕 아닌 덕을 보기도 했다. 인종의 누나이자 유일한 동복남매인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며느리였기 때문. 작서의 변 등을 통해 중종의 서장자였던 복성군이나 경빈 박씨를 제거되어 세자의 지위가 어느 정도 안정될 수 있었다. 물론 인종의 탓은 절대 아니었지만, 유학에 충실했던 인종이 정치관도 전혀 맞지 않은 희대의 권신 덕을 본 것은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 그래서인지 여인천하에서는 원자 시절의 인종을 보위하는 위치와 주로 강직한 신하 역을 맡았던 배우 김종결의 배우 보정이 합쳐져서 간신 포스보다는 인종의 열렬한 충신 포스가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결국 권력에 심취한 김안로는 여인천하에서는 세자의 누이인 효혜공주가 죽은 후 그 사실을 늦춰 고한 것 때문에 세자가 자신에게 분노를 터트리자 세자를 갈아 희빈 홍씨의 아들을 새로운 세자로 삼아 허수아비로서 마음껏 조종하려는 야욕까지 품게 된다. 또한 경빈박씨에게 누명을 씌운 사실까지 들통이 나고, 그 일에 자신의 누이를 겁박하여 강제로 동생인 자신을 저주하는 일을 시켰다고 생각하는 세자의 김안로에 대한 증오가 더욱 커졌다.
- 실록에 따르면 김안로가 개고기를 굉장히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개고기를 뇌물로 벼슬청탁도 들어주었다고 한다(정확히는 사관의 의견에 가깝다). 그래서 그 전까지는 선비들도 개고기를 즐기고는 했는데, 김안로가 죽은 뒤에는 "개고기는 김안로 같은 간사한 자나 먹는 거다."라는 말이 나돌아서 선비들이 개고기를 기피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다만 훗날 개고기 관련 기록[10]이 많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냥 설화거나 사실이더라도 잠깐의 유행이었을 것이다.[11]
- 그의 고조부가 바로 김자지 선생이다(...). 생전에 세도가들의 부패를 정면으로 비판한 상소를 여럿 올린 인재였던 고조부와는 참 다른 인생을 산 인물.
- 후자(後者)는 일본의 무장이자 정치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유사하다고 말하는데... 거의 비슷하다. 둘다 군략은 빵점인데다가 정치력은 상당하고 한때 나라를 뒤흔들었고 지위도 높았고 둘다 죽음으로 끝났다는 점이다. 몰론 후손들은 살아남아 있지만 이시다 미츠나리가 후배이라면 김안로가 선배라고 보면 된다.
- 대체역사소설 아침의 나라에서는 동조선 왕실의 지원을 받는 금강상단이 조선에서의 억압과 각종 악연을 잇는 후반기 어그로를 끄는 역할로 등장. 악연이 연결된 이들이 동조선에서 막 개발된 천보총으로 유배가던 도중에 저격하여, 금강상단에 대한 도전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표본이 되고 말았다.
- ↑ 오늘날로 치면 외교, 국방, 검찰, 교육 분야의 전권에 언론기관의 책임까지 한번에 맡았던 셈이다. 이것만 봐도 그의 권력이 얼마나 어마어마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본문에 있는대로 그가 능력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중종의 의도적인 권력 몰아주기의 결과.
- ↑ 김안로가 복권될 즈음에 대간의 일부가 심정을 탄핵했던것도 한몫했다.
- ↑ 당시 세자(훗날의 인종)의 동복누나인 효혜공주가 김안로의 며느리였다.
- ↑ 단 이항은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아서 그냥 목매서 자살했다.
- ↑ 복성군이 중종의 서장자임을 감안하면 그의 권세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다.
- ↑ 중종실록, 중종 26년(1531) 12월 10일
- ↑ 김안로의 친구 중에 하나가 기묘사화에 휘달린 김안국이다. 물론 김안국은 김안로와 행보를 같이 하지 않아 후대까지 천수를 누렸으나 이 김안국을 복권시키는데 큰 힘을 쓴 것이 바로 김안로이다. (김안로도 사실 기묘사화 때 파직당했다.) 또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중종이지만 중종에 의해 기묘사화를 주도했다고 억울한 누명을 쓴 먼저 죽은 남곤 일파인 심정, 이행 등을 박살 낸 것도 김안로가 아닌가? 대간들 다수는 김안로에 환호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동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비슷한 사례인데, 기묘사화 때 조광조의 추종자였던 이들은 각각 대윤과 소윤에 들어가 서로 물고 뜯고 사약을 건냈다. 그래서 선조 즉위기가 되면 재야에 묻힌 이를 제외하고는 피해자 가해자가 딱히 없는 진흙탕 판이 된다(...)
- ↑ 김안로는 끌려가면서도 따라오는 아들에게 "당장 혼인식장으로 돌아가거라! 이제 누가 우리 가문과 결혼을 하겠느냐! 어서 돌아가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희대의 권신, 간신이었어도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는 어쩔 수 없는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 ↑ 애초 이황의 성품을 고려하면 끌어들이려는 시도 자체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 ↑ 대표적으로 정약용이 형 정약전에게 쓴 편지에서 개고기 요리법이 나온다.
- ↑ 이후에는 개고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벼슬아치도 있었다. 이정도면 개고기를 이후엔 많이 먹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