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

Auguste Rodin
(1840년 11월 12일~1917년 11월 17일)

프랑스조각가. 풀네임은 프랑수아 오귀스트 르네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근대 조각의 시조이며, 근대 조각 사상 가장 위대한 조각가이다. 그가 추구한 웅대한 예술성과 기량은 조각에 생명과 감정을 불어넣어, 예술의 자율성을 부여했다.

하급관리의 아들로 14세 때 국립공예실기학교에 입학,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다.

1864년 평생의 반려자인 재봉사 로즈 뵈레를 만났는데 로즈는 아들 오귀스트 외젠 뵈레(Auguste-Eugène Beuret)를 낳았으나, 정식으로 결혼식은 하지 않다가 로댕이 죽기 전인 1917년에 가서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처음으로 조각 전시회를 열었던 그해 살롱에 처음으로 출품한 <코가 찌그러진 사나이>는 그 생생한 사실적인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어 낙선했다. 이후 1875년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크게 영향을 받은 후 1878년 파리에 돌아와 벨기에에서 제작한 <청동시대(靑銅時代)>를 출품하였다. 이 청동시대는 또한 실제 사람에 찰흙을 붙여 모델링을 했다는 의혹을 받을 정도로 완벽했다.[1]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특별 개인전을 가져 국제적 명성을 얻은 로댕은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2] 등으로부터 찬사를 들었으며 제자 카미유 클로델과의 비극적인 사랑[3]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참고로 로댕과 카미유의 이야기는 미술계 웹툰 핑크레이디에서도 언급되었는데 연우서나의 그림체로 함께 작업한 작품에 혼자만 작가로 이름을 올린 핑크레이디 그림작가 은폐사건의 밑밥으로 깔아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으면서 이 사건이 '현대판 카미유 클로델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다. [4] 카미유의 작품은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같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게 정설이다.

그 이후의 조각계는 직간접으로 모두 로댕을 출발점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댕이 가지는 미술사적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가 의도적인 왜곡을 한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나 <깔레의 시민>을 보면 손이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더 크게 묘사가 되어있는데 이로써 더욱 효과적인 감정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이는 회화에서 인상주의가 등장하면서 사실묘사에서 벗어난 것과 필적하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사실주의 작가가 아님에도, 사실적으로 보인다는 것은, 그 만큼 조각 자체에 감정이입이 잘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실제로는 잘 취하지 않는 동작 등을 통해서, 역동성을 부여하며,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인체비례와 사실주의적 조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보여질 만큼, 정밀하다기 보다는, 몇번 덜 깎은 것 같은 조각기법은, 감정과 생기를 불어 넣는다. 예로서, 그의 걸작 중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이 자세에서 오는 '고뇌'와 조각기법에서 오는 아우라 또는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보다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7년, 온갖 병과 같이 치매까지 걸려서 77살 생일을 며칠 지내고 병원에서 발작하다가 죽었다. 죽을 당시 유언"난 신이다!" 였다고 한다. 그런데 돌보던 간호사는 귀찮다는 듯이 "맞아, 당신은 신인데 똥오줌 누고 헛소리하며 죽어가는 신이야."라고 톡쏘는 말로 답했다고 한다.

로댕의 사망 후 그의 주거 및 전재산은 만년의 작업장이었던 파리의 호텔 비롱에 그의 미술관을 개설한다는 조건으로 국가에 기증되었다. 1916년 국립로댕미술관이 발족되어 조각의 대표작은 물론 데생·수채화 등도 전시되고 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미술관에도 로댕미술관이 부설되어 있으며 로댕의 작품 가운데 《세 그림자》 《이브 흉상》 《영원한 청춘》 등은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5]

특히 유명한 작품은 위의 《생각하는 사람》이며, 이그노벨상에서는 '생각하다 떨어진 사람'으로 패러디되었다.박물관이 살아있다2에선 여신상을보고 위두박근을 자랑하는 몸짱남이라 카더라. 또다른 패러디로 타카라토미가 2013년 11월에 내놓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무슨 마약하시길래 이런생각을 했어요? 자매품으로 생각하는 걸 그만둔 사람도 있다 카더라.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화가 알퐁스 무하와 잠시 교류하기도 했는데, 무하는 이 시기 로뎅의 영향으로 잠시 조각을 하기도 했다.
  1. 이 작품이 처음 나왔을때 많은 곳에서는 엄청난 극찬을 받았으나 어느 모 예술 평론가가 신문에 투고한 글에서 석고뜨기를 했다는 음모론을 펼치며 작품 평가가 깎아 내려졌다.이로인해 프랑스와 벨기에 에서는 그가 석고뜨기 전문가로 이름이 난탓에 평가가 절하되기도 했다.로댕은 필사적으로 이 작품을 박물관에 계속 두고 싶었으나 여론 악화로 인해 내려지고 만다.그 뒤부터 로댕은 언론사를 극도로 두려워했다고..
  2. 릴케 같은경우 로댕의 조수였는데 너무 나대는 탓에 주위에서 안좋은 소릴 들었다고 한다.그래서 로댕은 릴케와 싸운후에 절교했으나 나중에 화해한다.
  3. 물론 카미유와의 사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비극적 사랑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로댕 때문에 카미유의 삶이 비극이 되는 구조라서...
  4. 단, 로댕은 스승의 입장이었고 재능이 있었지만 이 경우는 서나가 연우에게 작화를 지도했으며 연우가 서나에 비해 만화적 소양이 부족하다. 거기다가 로댕은 제자가 없어도 천재 조각가였지만 이 작자는...
  5. 로댕의 조각상이 한국에도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청동을 깎은 것이 아니라, 원본은 대리석으로 제작되었고, 대부분 본을 떠서 청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때문에, 청동상을 보면, 몇번째 에디션이라는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