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클로델

Camille Clau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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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의 클로델

1 개요

카미유 클로델은 프랑스조각가오귀스트 로댕의 제자, 모델, 연인이었다.

2 출생

1864년 12월 8일 프랑스 북부 엔(Aisne)의 페레앙타르드누아(Fère-en-Tardenois)에서 등기소 소장이었던 루이즈프로스퍼 클로델 (Louise-Prosper Claudel)과 의사이자 마을 주임 사제의 조카였던 루이즈아테네즈 세르보(Louise-Athenaise Cervaux)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여동생인 루이즈(Louise)는 1866년 2월 26일, 남동생 폴은 1868년 8월 6일에 태어났다. 카미유의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한 편은 아니었다. 카미유의 부모는 19살 차이가 났으며 첫 아들이 생후 2주 만에 죽는 바람에 슬픔에 빠졌다. 카미유의 부모는 첫 아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녀에게 카미유라는 양성적인 이름을 지어 주었다.

3 성장기


14살 때의 카미유

카미유의 어머니는 유독 루이즈와 폴만 사랑했으며 그러한 편애로 훗날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 지내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카미유는 유독 폴과 가깝게 지냈는데 폴은 나중에 시인이자 외교관이 되었으며 후손이 없던 카미유의 보호자가 되었다. 카미유의 아버지는 가정문제가 모두 자신에 의해 잘못되었다는 죄책 감때문에 성격이 난폭하게 변해갔으나, 카미유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카미유를 항상 사랑해주었던 장본인이었다.

카미유는 빼어난 미모와 강한 자부심과 용기 그리고 고집이 무척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 번은 카미유가 혼자서 20kg의 진흙을 집으로 운반하려는데 어머니는 화를 내며 그걸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뺨을 여러번 때렸음에도 카미유는 어릴 적 소아마비 때문에 저는 불편한 다리를 동동 구르며 버티다가 결국 아버지가 해결해 주었다. 그만큼 까미유의 성격은 어머니와의 적대관계 역시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1876년 아버지의 전근으로 전 가족이 노장쉬르센(Nogent-sur-Seine)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3년간 거주했다. 카미유는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카미유는 주머니에 항상 작은 칼을 가지고 다니면서 과일껍질을 벗기거나 연필을 깎든지 혹은 진흙을 잘게 부수는데에 사용했다. 근처 숲 속에서 놀던 카미유는 우연히 구부정하고 울퉁불퉁하여 마치 괴물같이 생긴 '제앵'이라는 바위를 발견했다. 이 바위는 어쩌면 카미유의 조각 본능을 드러내게 한 결정적 계기였다. 카미유는 진흙으로 이 바위의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정식적인 조각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흉상이나 비스마르크다비드골리앗에 관한 이야기에 관련된 소조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런 딸의 재능을 이해하고 1879년 노장 조각가인 알프레 부셰(Alfred Boucher)에게 정식으로 조각 기초수업을 받게 해주었다.

1880년 아버지가 상파뉴의 와시쉬르블레즈(Wassy-sur-Blaise)로 전근하게 되어 아이들 교육상 수도 파리의 한 아파트를 빌려 아버지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이 살았다. 이 때 루이즈는 음악학교, 폴은 문학학교에 입학했는데 부셰는 제자 카미유를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시키기 위해 교장인 폴 뒤부아(Paul Dubois)에게 소개해 주었다. 하지만 당시 여자의 권위는 말할 것도 없이 낮았고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는 여학생을 받지 않았기에 입학은 거부당했다.

1881년 카미유는 부셰의 도움으로 사립학교인 콜라로시 아카데미(Academie Colarossi)에 입학하여 수업을 받으면서 조각에 전념했다. 작업을 위해 친구 몇몇과 함께 노트르담데샹(Notre-Dame-des-Champs) 근처에 작업실을 빌려 작업에 열중했다. 이 때 틈틈이 부셰가 카미유를 찾아와 지도를 해주었다. 1882년 카미유는 집에서 일을 도와 주는 하녀인 엘렌(Helene)을 모델로 조각 작품을 만들어 살롱[1]에 첫 출품했다.

4 로댕과의 만남

1883년 부셰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이탈리아 로마로 떠나기 전 당대의 유명한 조각가이자 친구였던 로댕에게 자신의 제자들을 위탁했다. 부세는 로댕에게 특히 카미유의 지도를 부탁했는데 이때 비로소 로댕과 카미유와의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카미유의 나이는 19세, 로댕의 나이는 43세였다.

이미 20년간 동거하고 자기 아들을 낳아준 여자 로즈 뵈레가 있었던[2] 로댕은 당시 19살이었던 카미유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이 때 로댕의 도움없이 루이즈를 모델로 '16세의 내 동생'을 완성했는데 로댕은 극찬했다. 훗날 카미유는 폴을 모델로 '37세의 폴 클로델'과 '42세의 폴 클로델 흉상' 을 제작하기도 했다. 또 카미유를 짝사랑하던 모델 지강티를 조각한 '지강티의 흉상'을 1885년 제작했는데 이 작품의 생명력은 말할 것도 없이 마치 살아있는 듯해 로댕은 카미유의 재능에 다시 놀라게 된다.

1885년 카미유는 가족과 상의 없이(...) 로댕의 권유로 로댕의 작업실에서 제자 겸 모델로 활동하기 시작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로댕과 카미유는 늘 함께 있으면서 애정을 키워나갔다. 24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둘의 사랑은 더욱 커져갔다. 로댕은 언제나 자신이 참석하는 모든 사교계에 카미유를 동반하고 다니며 카미유가 대단한 조각가임을 주지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미유가 작업실에 나오기 시작하자 여자 모델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왜 같은 여자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것이냐는 둥 빈정거리기 일쑤였으며 작업실 분위기는 더욱 냉랭해졌다.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건 괜찮았나 보다.

1887년 카미유는 로댕의 작업실에서 정식으로 로댕의 조수로 일하면서 로댕의 작품인 <칼레의 시민>, <지옥의 문>, <입맞춤> 등의 제작에 공동으로 참여했다. 둘은 사랑을 위해 광란의 뇌부르그로 불리우는 집과 투렌느 이즐레뜨 성을 빌렸고 이 공간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키워나갔다. 이 때 로댕은 카미유를 '공주님'이라 칭하며 거리낌없이 사랑을 표출했다. 이 시기에 카미유는 '뇌부르그의 광란', '이교도의 농지', '사쿤탈라' 등의 작품을 조각했고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5 로댕과의 불화

1888년 카미유는 살롱에서 최고상 수상하면서 작가로서 정식 인정을 받게 됨과 동시에 세인들의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부터 카미유의 작업 스타일이 보다 독창적이고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1889년 이후부터 카미유의 작가로서의 활약이 서서히 커지자 카미유와 로댕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사이의 사랑과 갈등이 심화되었다. 거기에 서로 연인사이로 발전하자 로댕의 사실상 부인이었던 로즈 뵈레의 질투심이 이들의 사이를 멀어지게 했다.

1892년 로즈 뵈레의 질투와 로댕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하여 카미유는 로댕에 대한 배신감과 마음의 상처를 안고 로댕과 헤어지며 로댕의 작업실을 나왔다. 거기에 카미유는 실질적은 작품 제작은 제자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끊임없이 사교 모음을 하던 로댕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댕과의 결별은 카미유가 예술가로서 성공하는 필요한 조력자를 한번에 잃어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로댕은 카미유가 자신의 작업실을 떠나자 유감의 뜻을 밝혔다.

6 독립

로댕과 헤어진 카미유는 음악가 클로드 드뷔시와 친분을 가지며 새로운 연인 관계로 발전할 여지가 보였지만 결국 카미유의 거부로 금방 헤어졌다. 다만 카미유의 작품 중 '왈츠'의 모델이라 카더라는 소문이 있는데 드뷔시에게 선물로 주었고 드뷔시는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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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에서의 카미유

1893년 <성숙>을 살롱에 출품해서 극찬을 받았다. 1894년 로댕의 부탁으로 벨기에 예술가협회의 전시회에 초대되어 작품 전시를 했는데 이때까지도 로댕과는 계속적인 서신 교환은 있었다. 살롱에 <로댕의 흉상>을 출품하여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로댕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99년 살롱에 자신의 역작인 대리석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전시회 중 작품을 도난당했다. 이 사건 후 카미유는 로댕이 내 것을 훔쳐갔다!라는 음모론에 퍼뜨리고 로댕을 비난함과 동시에 영원히 로댕과 멀어졌다. 카미유는 아예 부르봉가 19번지로 거처를 옮겼고 이 후 14년간 혼자 기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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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의 카미유

7 어려운 삶

1900년 <애원하는 여인>을 제작하고 1905년 알고 지내던 작품 중개상 외젠 블로의 주선으로 블로의 화랑에서 단독 작품전 개최를 제안받았다. 당시 카미유의 생활은 매우 빈곤했는데 로댕의 모델로 있을 때 로댕을 사랑한 나머지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았고 로댕으로부터 독립 후에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겨울에 연료가 끊겨 덜덜 떨다가 싸구려 와인을 연달아 흡입했고 결국 알콜 중독 증세까지 오게 되었다. 이미 카미유는 이 때 정신병자로 판명난 상태였다.

6개월 후 블로의 화랑에서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 13점을 전시했으나, 이 날 술취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났고 블로는 단 한 점도 팔지 못했다. 여기에 카미유는 로댕과의 사이가 멀어짐으로서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고 카미유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게 되었다. 1906년 카미유는 자신의 작품들을 보이는 족족 부숴버렸고 우울증과 로댕에 대한 피해망상 으로 정신착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9년 폴이 중국 톈진에서 영사로 근무한 후 프랑스로 귀환하여 카미유를 만난 뒤 누나의 비참한 생활상을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가족들에게 알렸다. 1906년 카미유를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폴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던 것이다. 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한 아버지는 매우 충격을 받았고 이 후 아버지와 폴의 도움으로 카미유는 간신히 연명했다.

8 비참한 말로

1913년 3월 2일 아버지가 사망하고 폴이 급히 귀국하여 장례식을 치렀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주고 절대적으로 지원을 해주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카미유의 증세는 막장에 이르렀다. 매일 로댕의 집에 을 던졌으며 이게 다 로댕 때문이다., 로댕이 내 작품을 훔쳐갔다., 로댕이 음식에 독을 넣어 날 죽일려 한다. 등등 온갖 헛소리를 해대자 3월 10일 폴은 카미유를 빌에브라르(Ville-Evard) 요양소에 강제입원시켜버렸다. 이 곳은 말이 요양소이지, 정신병원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로댕은 로즈와 함께 영국 런던으로 피난했으며 카미유는 프랑스 남부 앙김(Enghiem)의 몽드베르그(Montdevergues)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카미유는 이 후 약 30년간 바깥 출입을 금지당하는 등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카미유는 폴에게 살기가 너무 힘들고 시끄럽다면서 조각을 하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폴은 묵살했다. 그 와중에 1917년 11월 17일 로댕이 사망했고 1934년 5월 3일 루이즈가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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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원에 있던 70대의 카미유

1943년 10월 19일 오후 2시 카미유는 79세의 나이로 몽드베르그 수용소에서 쓸쓸하게 사망했다. 카미유의 장례식에는 폴조차 나타나지 않았고 로댕과의 사이에서 임신을 몇 번 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별로 없으며 공식적인 후손이 없다. 무연고자라는 이유로 공동매장돼버린 카미유의 시신을 찾을 길도 없고 무덤도 없다.

카미유의 이야기는 오랫동안 묻혀 있었지만 1980년대 이 후 카미유의 작품들이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1984년 폴의 손녀이자 전기작가인 렌마리 파리가 자신의 고모할머니였던 카미유의 이야기를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라는 책으로 발매했다.

로댕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좋지 않은 소문이 많이 돌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오히려 로댕이 카미유의 작품을 표절했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둘은 같이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고 카미유가 로댕에게 자신의 진심을 담아 작품을 바치기도 했으니 서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9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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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미유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1980년대 이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988년 브뤼노 누아탕 감독에 의해 <카미유 클로델의 전기>를 원작으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영화에서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로댕을 맡았고 이자벨 아자니가 카미유를 맡았다. 특히 이자벨 아자니의 연기가 돋보였는데 카미유가 로댕을 만나게 된 19살부터 정신병원에 수용된 49살까지의 연기를 위화감없이 맡았다. 카미유가 로댕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결국 정신병원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끝나는데 마지막에 자막으로 카미유의 말로를 언급하는 것으로 끝난다. 대한민국에서는 1989년 개봉했으며 과거 KBS 명화극장SBS 영화특급에서 방영했다. 성우는 송도영(SBS)/정미숙(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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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브뤼노 뒤몽 감독에 의해 동명의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여기서 카미유는 쥘리에트 비노슈가 맡았다. 1915년 51살이었던 카미유가 정신병원에서의 사흘을 그린 영화인데 마지막에는 역시 자막으로 카미유의 말로가 언급된다. 뒤몽 영화답게 매우 건조하고 말라붙은 자연주의적 분위기가 특징. 참고로 영화에 나오는 정신병원과 환자들, 의사들은 모두 실존 정신병원과 환자들, 의사들이다. [3]

두 영화는 각각 호불호가 갈리고 평가가 각각 다르지만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카미유의 삶을 보려면 두 영화를 모두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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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9월 4일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카미유의 이야기를 다뤘다.

그 밖에 토미노 요시유키가 감독한 기동전사 Z건담의 주인공 카미유 비단은 이 카미유 클로델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이다.
  1. Salon. 1667년 시작된 프랑스의 권위있는 미술 전람회이다.
  2. 로댕은 로즈와 1917년에야 정식으로 결혼한다.
  3. 사실 뒤몽은 비노슈 같은 대배우 캐스팅은 매우 드물며 비전문 배우 기용이 잦은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