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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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本

1 개요

일본의 신토(神道)계의 신흥종교. 오모토교(大本敎)라고도 하나, 정식 명칭은 "敎"를 붙이지 않는다. 막부 말기에서 메이지(明治)시대 관서지방에서 발생한 일본 3대 신흥종교의 하나[1]로, 1892년(메이지 25) 2월 3일[2], 당시 57세였던 데구치 나오(出口なお)라는 과부가 신들림하여 신령의 말을 하면서 시작했다. 이 신은 나오에게 신들림한 상태로 나오와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艮の金神)이라고 밝혔다.

데구치 나오는 이후 병을 낫게 하는 신력을 지닌 사람으로 아야베에서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다. 나중에 '우에다 키사부로', 훗날 '데구치 오니사부로'라고 개명하여 오모토의 성사로 불리는 사람이 나오에게 찾아와 합류하면서 비로소 오모토가 종교조직으로 발족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전은 《대본신유(大本神諭)》, 《영계 이야기(靈界物語)》. 신도 수는 17만 가량으로 평가된다.

오모토의 지명도는 한국에서는 없는 거나 다름없고 일본에서도 듣보잡에 가깝지만, 오모토 이후 나타난 대부분의 일본 신흥종교들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신흥종교계에 있어서는 큰 파장을 미친 종교이다. 예를 들면 오모토의 기관지(機關紙) 편집주간 출신이 세운 생장의 집(生長の家)이라든가, 오모토 신자 출신이 세운 세계구세교 등.

2 역사

2.1 개조開祖 데구치 나오

개조 데구치 나오의 삶에 대해서는 이 페이지를 확인하면 좋다.

데구치 나오(1837-1918)는 본디 '기리무라'가 성씨이며, 교토 후쿠치야마번에 터잡은 부유한 목수 가문의 장녀였다. 하지만 나오가 태어날 당시에 일본은 덴포 대기근 시절이라 입 하나라도 줄여보고자 부모는 아기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가 쌍수를 들고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서 겨우 살아날 수 있었다. 이후 대기근은 넘겼으나 아버지가 제대로 재산을 관리하지 못하여 가세가 기울어 빈한하게 살다가,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자 다른 집에 하녀로 들어가 돈을 벌어 병약한 모친을 수발했다.

나오의 작은이모 데구치 유리코가 자식 없이 남편과 사별하자, 나오의 모친에게 나오를 양녀로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나오는 야아베에 있는 데구치(出口)가에 입적되었고 이후로 데구치란 성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양어머니인 유리코가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나오는 아야베에 사는 목수와 결혼하였다. 이때 남편이 데구치가에 양자로 들어와 성과 이름을 모두 바꾸어 '데구치 마사고로'란 이름을 사용했다.

남편 마사고로는 목수로서는 솜씨 좋은 사람이었으나 가정을 잘 돌보지 않고 술 마시며 놀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처음 결혼할 때만 해도 남편이 신혼집을 하나 뚝딱 만들 정도로 가세에 여유가 있었지만 점차 가정이 어려워져서 조그만 집으로 몇 차례 이사를 갔다. 나오는 남편과 사이에서 자식 11명을 낳았지만, 그중 세 쌍둥이가 유아사망하여, 최종적으로는 3남 5녀가 남았다.

1885년에 남편 마사고로가 지붕에서 일하다가 떨어져서 골반을 다쳤다. 그런데 평상시에 술독에 빠져 살던 부작용인지 가벼운 중풍 증상까지 겹쳐 마사로고는 아예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못난 남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직업이 있고 수익이 있던 남편이 아예 누워버리자 당장 먹고 살 길이 급해졌다. 나오는 못 쓰는 물건들을 주워 파는 등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 그리고 남편은 그 와중에도 나오에게 술을 사오라고 요구했다. 나오는 옛날 어머니들이 그러하듯 이러한 남편의 요구에도 말없이 따랐다고 한다. 죽기 며칠 전에도 술을 한 병 달라고 해서, 나오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겨우 술을 사들고 들어가야 했다. 며칠 뒤에 남편이 사망하여 정말 쓸쓸하게 장례식을 치렀다.

재앙은 가세가 기울고 남편이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장남은 자살하려다가 실패하자 집을 떠났다. 장녀는 인근에 사는 웬 놈팡이한테 보쌈당해 어쩔 수 없이 결혼했고, 이 놈팡이는 나오네 집안을 위협하며 나노의 3남을 양자라고 데려가 바렸다. 1889년에 2녀 히사코가 무사히 결혼하는가 했더니, 이듬해에 광증이 발병했다. 1892년 1월 27일에는 장녀 요네코마저 똑같은 광증이 발병했다. 거듭되는 재앙 때문에 나오는 인근에 퍼졌던 금광교에 찾아가기도 하였으며, 훗날 이 시기를 '지옥의 가마솥에 빠진 것 같았다'라고 표현하였다. 하지만 나오에게는 아직도 어린 두 딸이 남아 있었다.

장녀가 미친 증세를 보인 지 3일 후인 1월 30일(음력 설날), 나오에게 처음으로 신들림의 조짐이 나타났다. 나오가 꿈을 꾸었는데 웬 궁전에서 옥좌에 앉은 위엄 있는 사람을 두 명이나 만나고, 죽은 남편 마사고로도 만났다. 나오는 꿈속에서 남편을 만나자 너무나도 반가워 달려가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꿈을 연달아서 꾸다가 2월 3일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신들림 증상을 나타냈다.

나오는 그날 장녀를 문병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나오는 갑자기 신이 들려 그 이전까지 남들이 들어본 적이 없는 위엄 있는 남자 목소리로 말하였다. 나오가 이렇게 된 모습을 보고 집을 보던 4녀 료코와 5녀 스미코는 "엄마까지 요네코 언니처럼 미쳐버리면 우린 어떻게 되지?"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나오는 신이 들리긴 했지만 자기 의식을 잃지 않고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신들림 상태에서 나오는 스스로 '자기 몸 안에 들어온 존재'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이 존재는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이라고 밝혔으나, 나오는 "당신이 여우나 너구리의 귀신이 아니라 큰 신령인 줄 어떻게 알죠" 하며 믿지 않았다. 이에 신령은 "나는 신이다. 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삼천세계를 무너트리고 다시 세울 신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

나오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간방의 금신'이라고 칭한 존재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 훗날 오니사부로를 만나, 오니사부로가 '진혼귀신법'이라는 술법으로 잡귀가 아니라 진짜 신령이라고 판정해준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믿었다.

나오는 오니사부로를 만나기 전, 방화범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에 취조받고, 미친 여자라고 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갇히는 등 수모를 겪었다.이렇게 갇혀 있을 때 간방의 금신에게 계시를 받아 처음으로 '오후데사키'라고 하여 신령이 내리는 말을 적기 시작하였다. 이후 나오는 죽기 얼마 전까지 약 이십여 년간 오후데사키를 적었다. 나오는 본디 문맹이었으나, 오후데사키를 쓸 때만큼은 오직 히라가나로만 쓰긴 했어도 글을 쓸 수 있었다.

기껏 나오고 봤더니 집이며 세간살이가 몽땅 없어져 부득불 사위들 집에 얹혀 살기도 했다. 이후 나오는 신통한 힘으로 병을 낫운다 하여 '아야베의 금신'이라고 불리며 조금씩 추종자가 생겼다. 1898년에 '우에다 기사부로'라는, 신토를 공부한 젊은이를 만나면서 비로소 종교조직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1900년에 우에다는 나오의 5녀인 스미코와 결혼하면서 데구치가에 입적하여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郞)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나오는 오니사부로가 들어온 뒤, 교단의 대외적인 일에는 가급적 손을 끊고 종교적인 것에만 집중하였다.

1917년, 오니사부로가 나오가 그동안 쓴 오후데사키를 대본신유(大本神諭)라는 이름으로 읽기 쉽게 문장을 정리하여 출판하였다. 나오는 이듬해인 1918년, 추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2.2 사후

나오가 사망한 이후, 2대 교주는 나오의 막내딸(5녀)이자 오니사부로의 아내인 스미코가 되었다. 하지만 실제적인 영향력은 스미코보다는 오니사부로 쪽이 더 컸다. 나오가 살아있을 때부터 오니사부로는 나오와 잘 지내기도 했지만 또한 서로 충돌하기도 했고, 나오의 추종자들이 오니사부로를 명백히 적대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나오와 오니사부로는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손을 놓지 않았으며, 나오도 결국 오니사부로가 미륵 님이라고 그 권위를 인정하였다. 오모토 교단은 오니사부로가 나오와 함께 교단의 공동교조라고 인정하며, 나오가 사망한 뒤에는 스미코보다는 오니사부로가 실제적인 교주였다.
오니사부로는 신토를 공부한 사람으로 나름대로 특이한 카리스마가 있었던 듯하다. 신토에서 공부한 이런저런 술법을 오모토에 도입하여, 이것을 보고 오모토에 들어온 사람들도 많았다. 오니사부로는 나오의 피 끓는 듯한 격정이 넘치는 오후데사키의 주장을 가급적 순화하여 해석하려고 애썼다.

나오 사후 당시 일본의 혼란한 사회상에서 오니사부로의 카리스마에 끌려, 또한 현세를 격하게 부정하는 오모토의 사상에 끌려 한때는 신도 수 100만에 달하는 거대교단이 되었다. 또한 오니사부로는 우익적인 성향을 띈 관계로, 군부 내의 급진파가 오모토 교단에 대거 입교하였다. 일본 정부가 오모토의 세력과 사상에 위협을 느껴 1921년, 1935년 두 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탄압하는데, 이를 제1, 제2차 오모토 사건이라 부른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법률을 반쯤 무시하고 오모토 교단을 탄압했다. 데구치 나오의 묘소가 감히 메이지 덴노의 능과 흡사하다 하여 파해치고 시신을 공동묘지의 길가 가까운 장소[4]에 재매장하고 나오의 배 부분에 묘표를 세웠다. 나오가 살던 집터 뒤쪽에 있는 혼구산 정상에 있던 장생전(長生殿)이라는 건물을 파괴하고 교단의 재산을 압류하였으며, 간부 중에서는 사망자도 발생하였다. 고문을 받는 도중 3대 교주의 남편인 데구치 히데마루가 정신이상에 걸리기도 하였다. 특히 2차 오모토 사건이 매우 가혹하였다. 일본 경찰은 2차 오모토 사건 당시 오모토 교단이 무장을 했으리라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극도로 주의를 기울였으나, 아무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와중에 교단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신도 수가 격감했으나, 어찌어찌 교단을 수습하여 맥이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패전 이후 오니사부로가 법원에 재심을 요청하여 무쥐 판결을 받아내었다. 탄압 과정에서 압류당한 교단의 재산을 돌려받는 소송을 걸 수도 있었으나, 오니사부로가 사회가 어려운 상황에서 이는 도리가 아니라면서 포기하였다.

1980년에는 제3대 교주의 후계 지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 교단이 3파로 분리되었다. 이중 소수파인 '오모토 신도연합회'에서는 이것을 3차 大本사건이라고 부르며 이 또한 이미 예언된 바라고 주장하지만, 다수파인 '오모토 본부'에서는 '걔네들은 우리랑은 전혀 상관없음. 오모토도 아님'이라면서 완전히 없는 취급을 한다.

3 숭배대상

데구치 나오에게 계시를 내린 신인 간방금신(艮の金神)[5], 일본식 발음으로는 '우시토라노 콘진'을 으뜸으로 모시며, 그 외에 다른 신들도 모신다. 또한 받드는 신들을 전부 가리켜 오모토스메오미카미(大本皇大御神)라고 부르는데, 바로 여기서 교명인 '오모토'(大本)이 유래했다.

그런데 간방금신은 그 이름이 상당히 이상하다. 간방(艮方)은 팔괘에서 간괘(☶)가 방위로는 북동쪽을 가리키는 데에서 북동 방향을 뜻한다. 또한 금신(金神)은 음양도에서 방위에 따라 재앙을 내리는 신을 말한며, 금신이 있는 방향으로는 나뭇가지도 자르지 않고 공사를 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간방금신이라고 하면 북동쪽에서 재앙을 내리는 신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런데 북동쪽은 일본에서 귀문(鬼門)이라 하여 매우 불길하게 여기므로, 금신 중에서도 간방금신은 더욱 꺼림직한 대상이다.

그러나 오모토에서는 민간에서 부정적으로 여기는 간방금신이야말로 '인간세상을 무너트리고 새 새상을 건설할' 올바른 신, 대신(大神)이라고 믿는다. 오모토가 금광교의 영향을 받는 부분이 바로 '금신'을 좋은 신으로 해석한다는 점이다.

쓰키히(月日)는 일본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천신인데, 간방금신이 바로 쓰키히에게 권한을 받아 본디 이 세상의 주재신이라고 한다.[6] 그러나 3천 년 전에 사악한 신들이 간방금신을 북동쪽에 봉인하였고, 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좌지우지하였다. 이런 꼴을 보고 다른 선한 신들도 이 세상에 손을 끊었으므로, 나오는 이 세상은 당연히 고통과 재앙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간방금신이야말로 이 세상에 재앙을 부르는 악신이라며 부당한 오명을 뒤집어 썼다고 했다.

금광교(金光敎)에서 처음으로 금신의 진면목을 알아 사람들에게 전했고, 이후 나오를 통해 간방금신이 본격적으로 세상에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간방금신이 인간세상을 무너트리고 좋은 세상으로 다시 만들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오모토의 급진성, 혹은 피 끓는 듯한 격정이 느껴진다. 학자에 따라서는 나오가 쓴 오후데사키에서 직접적이진 않지만, 천황마저 저주하는 인상이 있다고 평하기도 할 정도였다.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는 나오에게 강신했다는 간방금신을 고사기일본서기에만 등장하는 쿠니노토코다치(国之常立神)[7]와 동일시하여 해석한 이후, 간방금신 대신 쿠니노토코타치를 신명으로 부르는 신자들도 많다.

1차, 2차 오모토 사건 이후 오니사부로를 필두로 한 오모토 교단은 오후데사키의 피 끓는 듯한 격정, 종말론적인 면을 가급적 숨기고 부드러운 종교가 되려고 노력했다.

4 교리

세계가 언젠가 단일화된다고 하며, 이는 이란의 바하이교와 비슷한 면이 있다. 모든 종교의 신은 이름만 다를 뿐 결국은 하나로 귀일된다고 하는 이른바 만종동근(萬宗同根)의 사상이 깔려 있다. 한편 국가신토로 대표되는 황국사관에서 천황을 현인신으로 보는 것과는 달리, 오모토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황국사관을 가졌는데 이에 따르면 천황은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주류였던 국가신토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교리었고, 당시 등장한 신토계 신흥종교들은 하나같이 이런 식으로 천황 중심주의에 반대되는 교리를 가졌던 것 때문에 일본 정부로부터 상당한 탄압을 당했다.

오니사부로의 영향으로 오모토의 교리는 나오가 처음 홀로 종교적 주장을 할 때와 비교해서 달라졌다. 현 오모토의 신관은 대충 아래와 같다.

현 오모토에서는 우주에 초월적 유일신이 있으며, 그 존재를 고대 신토에서는 (일본서기의 신대기에서 말하는) '아메노미나카누시'라고 부른다 하였다. 이 유일신은 세상을 다스리는 권한을 간방금신(쿠니노토코타치)에게 내렸으나, 다른 신들이 쿠니노토코타치의 힘을 시기하여, 아내 토요쿠모(豊雲野尊)[8], 다른 권속들과 함께 세상의 북동쪽(간방)에 봉인하였다. 그럼으로써 세상에는 악이 횡행하게 되었으나, 쿠니노토코타치는 봉인을 깨고 데구치 나오를 신탁자로 선택하여 세상에 나왔다. 또한 쿠니노토코타치의 아내인 토요쿠모는 오니사부로로 태어나 세상을 바꾸기로 하였다.

여기서 오모토 교단이 오니사부로를 데구치 나오보다 격이 더 높은 인물로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오는 신탁자지만, 오니사부로는 신이 인간으로 화생한 인물이라고 하니 격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또한 오모토에서는 데구치 나오는 여자의 몸에 남자의 영혼이 깃든 '변성남자'라고 하고, 오니사부로는 남자의 몸에 여자의 영혼이 깃든 '변성여자'라고 설명한다.

5 분파와 교주

교주는 반드시 초대 교주의 피를 이은 부녀자(여성)이어야 하며, 따라서 여계를 통해 계승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교주의 남편(물론 데릴사위)은 사실상 교단의 실권자인 경우가 많다.

  • 초대(개조) - 데구치 나오(出口なお, 일명 直, ナオ)
  • 2대 - 데구치 스미(出口すみ, 일명 澄、すみこ、澄子), 초대 교주의 5녀
    • 남편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 聖師라고 불리며 사실상 공동 교조이다. 교단에서는 '미륵 님'이라고 하면서 구세자로 여긴다. 데구치 나오와 종교적으로 정면충돌하여 서로 신들린 상태에서 크게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으며, 나오의 추종자들은 오니사부로를 (나오에게 들린 신에게 맞서는) 악신이 들렸다고 간주하고 적대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 나오가 오니사부로를 전면적으로 인정함으로써 대립이 끝났다. 사적으로는 사이도 좋아서, 나오가 죽었을 때는 오히려 (아내이자 나오의 막내딸인) 스미가 방에서 쫓아낼 정도로 슬피 울었다고 한다. 나오와 오니사부로의 관계는 장모-사위, 혹은 종교적 협력자로 단순구분할 수 없는, 굉장히 미묘한 것이었다.
  • 3대 - 데구치 나오히(出口直日), 2대 교주의 장녀.
    • 남편 데구치 히데마루(出口日出麿). 원래 이름은 다카미 모토오(高見元男)지만, 결혼하면서 장인인 오니사부로의 주장으로 개명하였다. 오니사부로는 히데마루가 데구치 나오의 요절한 차남 세이키치의 환생이라고 말하였다. 제2차 오모토 사건 때 고등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졌다. 오니사부로는 사위가 이렇게 되는 과정을 지켜보고는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

전술한 1980년의 내분으로 교단이 셋으로 분리되었다. 오모토(본부)는 종교법인이다. 본디 4대 교주는 장녀 나오미로 예정돼 있었으나, 교단 지휘부에서 나오미의 남편을 교단에서 추방하고, 또한 3대 교주가 장녀 나오미의 계승권을 취소하고 키요코를 새 후계자로 세움으로써 이후 오모토가 분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오모토(본부)가 전체 오모토 신자들 중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 4대 - 데구치 키요코(出口聖子), 3대 교주 부부의 3녀. [9]
  • 5대 - 데구치 쿠레나이(出口紅), 4대 교주의 이질녀이자 양녀.[10]

분파 오모토 신도연합회(大本信徒連合会)는 종교단체가 아닌 임의단체이다. 신도연합회에서는 자신들은 기존의 오모토와 별개의 종교단체를 세우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종교단체로 등록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 4대 - 데구치 나오미(出口直美), 3대 교주의 장녀

또다른 분파 애선원(愛善苑)은 (오모토의 성사인) 데구치 오니사부로를 애선원의 원주라고 주장한다. 오니사부로가 이미 죽은 사람이므로, 결국 교주를 두지 않겠다는 소리. 원리주의적인 성격이 짙다. 참고로 '애선원'이란 이름도 일본 패전 이후에 잠시 오모토 교단이 교단명으로 사용했던 이름이다. 오니사부로가 아직 살아있던 때의 애선원을 모범으로 삼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애선원이 워낙 교세가 미미하기 때문에 제외하고 오모토 2대 분파라고 하기도 한다.

6 에스페란토와의 관계

교단 차원에서 에스페란토를 후원한다. 앞서 말했듯 교리에 언젠가 세계가 단일화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2대 교주의 남편이자 실질적 교조이기도 한 데구치 오니사부로(出口王仁三郎)가 에스페란토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스페란토 전파에 공이 큰 사람을 골라 매년 '데구치상'을 수상하는데, 이게 에스페란토계에서는 꽤 권위가 있다.
  1. 교토 아야베시에서 발생했다. 다른 두 가지는 나라(奈良)의 천리교(天理敎: 이 역시 여성인 나카야마 미키가 개창했다)와 오카야마(岡山)의 금광교(金光敎)
  2. 일본에서 사용하던 음력으로는 1월 5일. 데구치 나오는 음력 1월 1일에도 신령한 꿈을 꾸는 등 조짐이 있었다고 한다.
  3. 신들림 상태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은 점이 나오가 천리교의 교조 나카야마 미키와 다른 점이다. 미키는 신들림 증상을 보일 때면 종종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4. 사람들 발에 밟히기 쉬운, 좋지 않은 곳이었다. 의도적으로 여기에 매장하였다.
  5. 우리말 번역어로 딱 정해진 것이 없어서, 사람에 따라 간금신, 간의 금신이라고 번역하기도 하고, 혹은 그냥 일본어 발음을 음역하기도 한다.
  6. 참고로 쓰키히(月日)는 오모토보다 수십 년 먼저 생긴 천리교에서도 교조 나카야마 미키가 '천리왕'이란 이름을 내세우기 전에 '쓰키히의 말씀'이라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쓰키히가 일본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천신이므로, 천리교오모토가 모두 일본 민간신앙에 영향받았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7. 이 신명은 정말로 고사기일본서기에만, 일본 땅이 만들어질 때 여러 신들이 차례로 나왔는데 그 중 쿠니노토코타치라는 신도 있었다는 정도로만 언급될 뿐 그 이외의 전승은 일절 전하지 않는다. 실제로 숭배되던 신이 아니라 고사기/일본서기의 편집자들이 책상에서 생각해낸 가상의 신격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 신명이 '국토의 영원한 존립'을 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근대의 신토주의자들이 매우 중요시하였다. 아마 데구치 오니사부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8. 오모토에서는 토요쿠모가 간방금신에 대응대는 곤방금신, 즉 남서쪽(곤방)의 금신이라고 주장한다.
  9. 결혼하긴 했으나 자식이 없어서 죽기 얼마 전에 쿠레나이를 양녀를 들였다.
  10. 데구치 쿠레나이는 3대 교주 2녀 부부의 둘째 딸이다. 따라서 본인 입장에서 데구치 키요코는 본디 작은이모가 된다. 작은이모가 양어머니가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