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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 神道(しんとう))란 일본의 토착종교를 가리킨다. 한국에서는 한자를 그대로 읽어 신도라 하기도 한다.
신토를 두고 신기(神祈) 신앙이라고도 하는데, 신기란 천신지기(天神地祇)의 준말이다. 여기서 신(神)이란 하늘의 신, 즉 도래신인 아마츠카미를 뜻하고, 기(祈)란 땅의 신, 즉 토착신인 쿠니츠카미를 뜻하는 것이다.
중국의 바이두 백과에서는 '신도교'(神道敎, 선따오쟈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신도"라는 이름 자체를 일본만의 특징을 가진 고유명사로 보고 이 뒤에 "교"를 붙인 것이다. "기독+교"처럼 "신도+교".
신토는 원래 『주역』 관(觀)괘에서 “하늘의 신도(神道)를 봄에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는다. 성인이 신도로써 가르침을 베푸니 천하가 복종한다” 하여 ‘신묘한 도’라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일본의 경우 이 말의 최초 출전은 『일본서기』의 31대 요메이 덴노 즉위전기(卽位前紀: 덴노가 되기 이전의 사항을 서술한 글) 편인데, 거기에는 “덴노가 불법(佛法)을 믿고 신도를 존숭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요메이 덴노는 한반도로부터 공식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29대 긴메이 덴노의 넷째 아들인데, 이 긴메이 덴노의 둘째 아들인 30대 비다츠 덴노의 즉위전기에는 “덴노가 불법을 불신하고 중국의 문학과 역사를 귀히 여겼다”는 기록이 나오며, 또한 36대 고토쿠 덴노의 즉위전기에도 “불법을 존숭하고 신도를 경시했다”는 문구가 등장한다. 신도라는 용어가 덴노의 즉위전기와 관련하여 등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불교와의 대비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때 즉위전기와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신도를 둘러싼 어법이 후대 사가들의 평가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신도라는 용어는 요메이 덴노 및 고토쿠 덴노 당대인 6세기 말에서 7세기 중엽의 실제 용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본 서기』가 편찬된 8세기 초엽의 용법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신도라는 용어가 불교의 대비어로만 나온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인이 외래의 종교문화와의 대비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했음을 암시한다.
이처럼 신도라는 용어 자체는 『주역』 외에 『진서(晋書)』 등의 중국 고전까지 그 출처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삼국유사』를 비롯하여 특히 단군계 및 증산계 민족종교에서 ‘신명(神明)’이라든가 ‘신교(神敎)’ 등의 개념과 더불어 신도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어쨌든 일본에서 문헌상 처음 등장할 무렵의 그것은 아마도 당시 중국에서 도교가 자칭 ‘신도’라 한 것을 채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사실 일본 신토의 형성과 도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일본 내에서도 일찍부터 주목하는 연구자들이 적지 않다.
류큐(오키나와)의 전통 신앙을 가리켜 류큐 신토라는 용어를 쓰기는 하지만, 본토의 신토와는 구분된다. 류큐 신토라는 단어는 일본 제국 시기 민속학자들이 류큐의 전통 신앙에 고대 일본 신토의 요소들이 남아있다는 결론을 내리며 붙인 이름이다. 단, 본토의 신토도 류큐 왕국 시절에 이미 어느정도 전파되어 있었다.
2 설명
일본의 『국사대사전(國史大辭典)』은 신토를 다음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다. “신토란 일본 민족의 신 관념에 입각, 일본에서 발생하여 주로 일본인 사이에 전개된 전통적인 종교적 실천과 그 배경을 이루는 생활태도 및 이념 등의 총체를 가리킨다. 몇몇 예외가 있기는 하나 신토는 교조가 없는 자연발생적인 종교이며, 주로 일본인이 담지자인 민족 종교이다. 각 시대별로 다양한 신토론이 있기는 하지만, 확정적인 도그마는 없다. 신토는 정비된 신학이라든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인 가치체계, 사유형식, 행동양식으로서 일본인의 생활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정의는 기본적으로 신토를 하나의 종교로 간주하는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일본종교사전(日本宗敎事典)』의 다음과 같은 애매한 정의는 본질적으로 신토가 종교가 아닌 것으로 규정된다. “신토가 과연 종교인지 아닌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일본의 풍토에서 생겨났고 일본민족의 역사와 함께 성쇠를 거듭해 온 종교문화의 일단면으로서, 일본인의 생활감각에 밀착된 전통문화일 따름이다. 그것은 종교로서의 고유한 역사나 성격을 지니고 있지 않다. 신토의 입장에서 보면 현실의 풍토와 사회가 그 자체로 종교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토는 종교 이전의 종교이다.”
어떤 경우이건 위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은 신토를 일본인의 생활에 밀착된 전통문화로 본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이런 공통점에 대한 인식을 토대로 하여 일본 민속학의 창시자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1875-1962)를 비롯하여 많은 신토 연구자들은 대체로 신토를 “일본 고래의 카미(神)에 대한 신앙” 혹은 “일본인의 고유한 신앙”으로 규정해 왔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시대와 장소에 따른 가변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채 신도를 불변하는 어떤 실체로 상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이에 비해 신토를 “신사(神社)의 종교 혹은 신사에서 행해지는 의례적 행위 내지 마츠리(祭)의 종교”로 규정하는 정의는 비교적 구체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신토를 어떻게 정의내리든 간에 일본인의 일상생활 및 문화현장 속에 엄연한 실체로 존재하는 신사와 마츠리의 풍경을 부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3 카미(神)
일본인은 신토의 신(神)을 ‘카미’라고 부른다. 일본 신토에서는 ‘8백만의 카미(야오요로즈노카미)’가 있다고 말해지는데[1], 대한민국(특히 그리스도교[2])에서는 '팔백만위 제신'[3]을 모시는 종교로 이미지됐다.
이 수많은 카미들의 기원은 주로 조령(祖靈), 즉 조상신이라 할 수 있다. 예부터 일본인들은 사람이 죽은 후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사령(死靈)이 가족과 촌락을 수호하는 카미가 된다고 생각하여 숭경해 왔다. 이와 같은 조상 숭배의 관념에서 이른바 씨족신 ‘우지카미’(氏神)라는 촌락공동체의 수호신 관념이 형성되었고 이 우지카미를 중심으로 하여 신사(神社)가 발전된 것이다. 한편 후대로 내려오면서 일본 고래의 조상 숭배 관념이 불교와 결합되면서 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예컨대 현대 일본인들의 가정을 방문해 보면 ‘불단’(佛壇)이 모셔져 있는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불상 대신 조상의 위패가 안치되어 있다.
이런 조상숭배적 관념과 더불어 신토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또 하나의 축으로서 자연숭배의 관념을 들 수 있다. 모든 자연물에 영적인 존재가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적 신앙은 현재까지도 신토의 에토스(ethos)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남아 있다. 사실 신토의 카미 중에는 자연물을 신격화한 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령 일본인이 황조신으로 간주하는 아마테라스(天照大神)는 태양을 신격화한 것이고 그밖에도 달을 신격화한 츠쿠요미(月讀命), 폭풍우를 신격화한 스사노오(須佐之男命)를 비롯하여 산, 들, 강, 바다, 나무, 새, 짐승, 벌레, 풀, 금속, 돌 등의 자연물을 신격화하고 있다. 그 가운데 오늘날까지도 많은 일본인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는 자연신으로서 대표적으로 산신과 해신을 꼽을 수 있다. 일본은 국토의 7할이 산악지대인 섬나라인 만큼 일찍부터 산신과 해신에 대한 신앙이 풍부했다.
일본인은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영혼이 산으로 가서 정화된 후에 조령(조상신)이 되어 다시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온다는 민속적 관념을 가지고 있다. 일본 민속학에서는 이를 ‘산중타계신앙’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산신이란 비단 산의 신뿐만 아니라, 수목의 신, 수렵의 신, 금속의 신, 돌의 신, 불의 신, 물의 신 등을 모두 총칭하는 말이다. 또한 고대 일본인은 바다 저 건너편에 ‘도코요’(常世)라 불리는 타계가 있으며 그곳에 해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풍어와 항해의 안전을 관장하는 이런 해신 가운데 가장 인기있는 신은 에비스(惠比須)이다. 에비스는 오늘날 현대 일본사회 및 특히 상인들 사이에서 상가(商家)의 수호신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데, 오른손에 낚싯대 그리고 왼손에 도미를 들고 있는 해신의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칠복신(七福神) 가운데 하나로서 인도나 중국 기원이 아닌, 유일하게 일본 고유의 카미라는 점에서도 특징적이다.
어쨌든 신토에서 ‘카미’라고 불리는 신은 유교에서 말하는 신과도 다르고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도 다르다. 이 카미의 특색은 다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카미는 인간과 질적으로 상이한 절대 타자로서의 창조신이 아니다. 신토에서는 카미와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토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도요쿠니(豊國) 신사,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도쇼궁(東照宮), 메이지 천황을 모신 메이지 신궁, 노기 마레스케를 모신 노기(乃木)신사, 도고 헤이하치로를 모신 도고(東鄕)신사 등을 비롯하여 심지어 250여 만 전사자들을 제신으로 삼는 야스쿠니 신사의 경우처럼 인간이 사후에 카미로서 숭배되고 제사 받는 사례가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국가신도체제 하에서 천황은 살아 있는 카미(現人神)로 숭배 받았으며, 금광교(金光敎)나 천리교(天理敎) 등의 신종교 교조들 또한 살아 있는 동안에 생신(生神)으로 제사지내지기도 했다.
둘째, 카미는 선악의 구분을 넘어서 있다.다시 말해 카미는 그리스도교의 유일신관에서 전제가 되어 있는 절대적으로 선한 신이 아닌, 도덕적인 선악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로 상정된다. 이는 일본인의 일반적인 신 관념을 가장 전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의 ‘카미’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의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카미란 고전(『고사기』 등을 가리킴)에 나오는 천지의 제신들을 비롯하여, 그 신들을 모시는 신사의 어령(御靈), 인간, 조류, 짐승, 초목, 바다, 산 등의 무엇이든, 범상치 않으며 은덕 있고 두려운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카미에는 이렇게 여러 종류가 있다. 가령 귀한 카미, 천한 카미, 강한 카미, 약한 카미, 좋은 카미, 나쁜 카미 등이 있으며, 그 마음도 행함도 여러가지라 어떤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다.”(『古事記傳』) 반드시 도덕적 가치에만 의존하지 않는 신토의 선악관념이 이런 신 관념과 연동함은 말할 나위 없다.
셋째, 신토에서는 추상적이거나 초월적인 신이 숭배된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일본인은 인간에게 매우 친숙하고 현실적인 카미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카미를 호칭할 때 마치 이웃집 아저씨를 대하듯이 ‘~카미상’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한다.
넷째, 카미와 인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인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에 가깝다. 즉 인간은 카미를 숭경함으로써 카미의 영위(靈威)를 높여주며, 그 대가로 카미는 인간을 지켜주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여겨졌다.
다섯째, 신토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신앙되는 카미는 전술했듯이 조상신이다. 물론 그밖에도 무수한 카미들이 있는데, 일본인들은 신사를 참배할 때 자기가 지금 예배드리는 대상이 어떤 카미인지 그 이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중요한 것은 카미가 현실적으로 인간에게 어떤 복덕을 가져다주느냐 하는 데 있고, 그 카미의 이름이나 내용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긴다. 때문에 카미의 이미지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변한다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기에서 일본을 두고 신국(神國)이라 부르는 용례가 나왔다. 원래 옛 신토적인 관점에서, 신국이란 말은 "우리는 사방각지에 있는 온갖 신들을 참 예의 바르게 잘 모시는, 예의와 도리를 아는 민족임" [4] 하는 뜻이었다. 이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 제국주의 시절이 되면, 일본은 신들이 지켜주시고 현인신이 통치하는 무진장 위대한 나라임!! 하고 자랑하는 의미로 용례가 바뀐다. 옛 신토에서 사용한 용어를 받아들이되 의미부여를 다르게 했다. 한국을 가리키던 '동방예의지국'과 어딘가 비슷한 데가 있는 말이다.
4 신사
신토의 주 건물을 신사(神社)라고 부른다. 불교의 절, 가톨릭/정교회의 성당급. 각 신사는 근대에 체계화가 이루어져 관리되고 있으며, 신사의 이름으로 그 신사의 가장 중요한 신을 유추할 수 있다. 규모가 크고 지역의 거점이 되는 신사를 '대사(大社)'로 불러 따로 구분한다. 잘 알려진 예는 이즈모타이샤. 오덕계에서는 동방 프로젝트 때문에 스와 대사도 유명하다. 덴노와 관계된 신을 모신 경우 신궁(神宮)이라고 이름한다. 대표적인 예가 이세 신궁. 하지만 옛 신토에서는 사람이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때의 신사는 사원 건물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당목과 돌탑처럼 숲의 일정한 장소에 성역을 정해놓고 신성히 여기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불교 문화가 전해지면서 거기에 영향받아, 점차 신이 거주하는 장소로 사람들이 참배하러 오는 식으로 바뀌었다.
오키나와에는 신사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곳들이 아직 남아있는데 류큐 신토에서 신성시하는 성소들인 우타키(御嶽)가 바로 그것이다. 류큐 최고의 우타키라는 세화 우타키(斎場御嶽)를 예로 들자면, 건물은 없고, 숲속 깊숙한 곳에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크기의 바위틈이 있으며 그곳에서 신들이 처음 창조한 육지인 쿠다카지마(久高島)를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다 .
5 신토의 변천
현재 여러 신들 중 태양신인 아마테라스[5]를 가장 고위의 신으로 여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신사에서 그녀를 모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지역으로 갈수록 현 신토의 중심신앙에서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방색이라 봐도 무방하다. 사실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 신토의 신 계보는 국가신토의 입김도 없다고는 할 수 없는데, 아마테라스 중심의 기기신화 자체가 천황가의 미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고, 이후 메이지 유신 시기 국가신토에서 이를 광적으로 강화하면서 더욱 굳어졌기 때문.
사실 불교가 잘 나가던 전근대시기 일본에서는 본지수적[6]관념에 기초하여, 신토의 신들은 다 불교의 부처/보살의 화신이나 신중 취급을 받았다.[7]때문에 자연히 신토의 신과 신토를 불교의 부처/보살과 불교보다 하위에 놓았고, 아마테라스의 경우 대일여래(비로자나불)의 화신으로 격하했다. 이는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래되면서 불교의 부처/보살/명왕/신중을 토속신앙의 신들처럼 신의 일종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신불일체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신토의 신이 기존의 불교의 신중처럼 불법을 수호하는 하위 존재로 여겨지다 결국 인간과 마찬가지로 부처의 가르침(불교)를 통해 구원받아야 하는 존재로 격하되는 과정이 더 심해진 것으로, 최종적으로는 헤이안 시대 말기 위에서 말한 본지수적론의 등장으로 신토의 신들은 부처/보살의 화신인 명왕의 한 부류로 인식되었다. 이는 외형적으로는 신토의 격을 다소 올려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신토의 신을 부처/보살이 본지수적(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부처/보살이 모습을 바꾼 것)한 존재로 인식하고 신토를 불교의 아류이자 부분집합으로 만든 것으로, 신토에 대한 불교의 시각이 다분히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신토와 불교가 섞인 현상을 일컬어 '신불습합'이라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에 신불 판연령(神佛判然令)이 내려지며 근대 이후 신토와 불교가 명확히 구분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토의 토속신을 만물의 근원적인 존재, 부처/보살은 그 중 일부라는 관념이 생겨나 신토 측에서 주요 이론으로 삼아 불교에 대한 역관광을 시도하였으나 불교는 신토와 함께 일본의 대표 종교로 흥성하였다. 교단/교리 체계의 정밀함과 고도의 철학적 신학적 수준을 가진 불교의 종교사상의 수준은 신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난점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고, 무사정권이 성립되면서 국가적으로 신토도 옹호해주던 천황조정이 망했어요 수준이 되버리고 가마쿠라 막부~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 내부의 교단간의 충돌과 몽골의 침입, 신토와 불교의 지속적인 교섭관계에서 본지수적론에 입각한 신토의 철학이론이 정립되었으나 그것도 그 근원을 따지고 보면 불교(특히 밀교), 도교 등에서 이리저리 따 온 흔적이 역력했고, 결정적으로 신토계는 불교처럼 강력한 구심접을 가진 신토 교단이 없거나 있어도 불교에 견줄 수준은 아니었다. 물론 중세 신토(다이카 개신부터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까지)시기 일본에서는 국가 주도로 신토의 국가제사의례를 정비하였으나 이는 제사의식의 정비 수준이었지 철학/교리의 큰 발전은 아니었다. 이런 불교와 기타 종교들 간의 공존현상은 비단 일본의 신토뿐만이 아니라 근세 이전의 중국의 도교, 성리학 이전의 구유교나 한국의 토착신앙도 마찬가지였으며,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불교항목 참조.)
이런 기존의 노선이 점차 깨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근세시기 조선을 통해 일본에 주자학이 전달되면서부터였다. 신토계에서는 주자학을 받아들여 불교에 반대하는 사상을 점차 키워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유교를 중심에 놓고 신토와 불교를 순차적으로 그 하위에 두는 쥬카신토(儒家神道)[8]와 쥬카신토를 수정하여 신토가 중심이 되어 여기에 주자학의 이론을 흡수하고 불교를 배격하는 스이카 신토와 고전학에 기초하여 신토를 본격적인 교단/교리를 갖춘 종교로 발전시킨 코카쿠 신토, 민간의 신토에 대한 민간신앙을 중심으로 한 종파 신토로 나뉘게 된다.
이 중 스이카 신토와 코카쿠 신토는 덴노숭배사상에 기초한 교리 체계와 이념을 갖고 있었고, 이들의 사상은 후대에 국가신토의 성립에 영향을 매우 크게 끼치게 된다. 참고로 코카쿠 신토의 이론의 중심이 된 저 고전이란 바로 일본서기와 고사기. 종파 신토의 경우 천리교등 신토에 기초한 신종교 운동으로 이어지나, 국가신토의 시대에는 상당한 탄압을 받았다.
국가신토는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나라에서 덴노 중심의 교단을 확립한 것 으로, 그 사상적 기원은 근세시기 신토의 배불 이론을 극대화한 것이다. 당시 신토계는 현실적으로 봤을 때 당연히 불교와 여타 종교를 억눌러서 일본제국의 사상성을 강화하기 위해서 불교와 유교, 도교의 이론을 다량 흡수하는 동시에 신토의 우월성을 내세우기 위해 신토의 우월성을 일본인들의 역사에서 보이는 신토의 모습, 즉 '원초적인 일본의 종교'인 신토와, 그 신토의 신들이 갖는 단순하면서도 원초적인 순수성에 대한 극단적인 옹호를 통해 우월성을 드려내려 하였다. 당연히 국가신토는 안그래도 극단적인 이런 사상을 더 극단화시킨 물건이었으니, 그 결과는 바로 악명높은 일본의 덴노 중심주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과정에서 신토와 불교를 강제로 분리하는 신불분리 운동과 더불어 각지의 신사들을 국가신토 이론에 맞게 정립하고 재건축하는 행위가 이루어졌다. 국가신토는 근대에 만들어진 신토의 탈을 뒤집어쓴 거의 주체교급의 어용사상이라 봐도 좋을 정도이다.
국가신토 자체는 2차대전 이후 일본의 항복과 더불어 사라졌으나, 이때 성립된 신토 이론과 교리, 신토 교단체제는 대체로 유지되고 있다. 때문에 지금도 과거 한국과 일본의 교류가 많았던 곳의 신사들은 곧잘 진구황후전설 내용을 대놓고 붙였다가 나중에 욕먹고 떼었다 말았다 하는 안습한 행동을 종종 한적이 있었으며, 일본 학계에서는 '일본의 종교 중 가장 원초적인 것은 신토가 아니라 슈겐도라능'하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9]
여담으로 2차대전 시기 국가신토의 정립으로 일본 내에서 신토가 비로소 불교의 우위에 섰다고는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한다. 이유는 일본 정부를 등에 업은 신토계의 계속된 억압[10]에 질린 불교계에서 신토계에 대해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했기 때문. 자연히 신토의 교리와 이론 상당수가 불교에서 유래한 게 많다 보니 신토계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 여기다 엎친 데 덮친격으로 일본 정부에서도 자신들을 동양의 수호자라고 자처하면서 당시 '서양의 그리스도교에 대항할 만한 동양 종교를 찾아 내세우자!'하는 계획을 실행중이었는데, 이 때 신토는 맞수가 안된다며 불교를 선정했다(...) 그리고 잔뜩 어그로 받은 대한민국은 십자가의 나라로
6 탄압
전 항목에서 상술된 각지의 신사들을 국가신토 이론에 맞게 정립하고 재건축하는 행위는 강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국가신토사상에 부합되지 않는 신사들은 강제로 폐쇄시켜버리는데 일본 전역에서 7000여 개소의 신사가 폐쇄 당한다. 신주가 폐쇄를 거부할 경우 경찰력을 동원해 신주를 체포 구금하기도 했다. 시골마을에서 대대로 주민의 신앙을 받아온 오래된 신사 같은 경우는 폐쇄에 반발해 주민들이 산이나 숲 깊숙한 곳에 임시 사당을 짓고 비밀리에 참배하는 형태로 반발했다. 일본에서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을 가다가 뜬금없이 황폐화된 작은 사당이 튀어나오는 경우는 바로 이런 경우. 시골에서 음지로 들어간 신사들은 국가 신토가 몰락하면서 다시 양지로 나오기도 했지만 종전 이후 빈곤함 혹은 젊은 세대가 잊어버려서 버려지는 신사도 많았다. 이 때 숨겨진 신사들은 시골 청년들이 징병을 피하는 대피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징병통지서에 불응하거나 직접 통지서를 갖고 징병대상자를 끌고 가려고 헌병이 마을에 나타나면 주민들이 대상자를 은폐된 신사에 숨겨두면서 징병을 피했다. 신사가 먹고 자는 숙소 역할을 해서 장기간 숨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11]
이런 맥락에서 전후 복권된 신사의 신도들은 야스쿠니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한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면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고 " 야스쿠니 신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신사의 신은 몇백년전부터 모셔온 신입니다. " 라고 애둘러 말한다. 사람을 신으로 모신 신사와는 역사와 격이 다르다는 자부심을 돌려서 말하는 것이다.
7 현대
국가신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동시에 해체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계승된 요소도 많다. 다시 말해 전후의 신토는 새로운 체제를 형성했지만, 그것은 국가신토를 상당 부분 계승하고 있다.
국가신토는 메이지 정부의 주도에 의해 급속히 형성되었고, 그 해체는 GHQ의 정책 즉 외압에 의해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GHQ의 신토 정책 중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신토와 국가의 연관성을 끊어버리고 법적으로 신토를 다른 종교와 동렬에 세운 점이다. 1945년 종교법인령이 공포되었고 다음해에 그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신토는 종교법인이 되어 불교나 그리스도교 각 종파 등과 법적으로 동일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 공포된 현행 법규의 종교법인법도 이를 답습했다. 바로 이런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 신사본청(神社本庁, 진쟈혼쵸)이었다.
신사본청은 1946년에 신기원이 폐지된 직후에, 황전강구소, 대일본신기회, 신궁봉재회의 세 기관을 모체로 하여 조직되었다. 1996년 현재 전국 7만9천여 개소의 신사 중 99퍼센트가 신사본청 솔하에 들어와 있으며, 이세신궁이 그 본종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신사본청은 솔하 신사의 사무, 교학, 연수 등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각 도도부현에 있는 신사청은 신사본청의 지부조직으로 기능한다. 신사본청은 신사신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며 솔하 신사의 기본적인 활동방침을 결정하지만, 개개 신사의 독자성은 일정 부분 유지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신사본청은 각 신사들의 연합체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는 원래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변화가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미군의 점령시대가 끝나자 일각에서는 국가신토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와 일본 황실의 관련성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한편 일부 신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민속신앙적 측면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예전과는 달리 국가의 관리를 받지 않게 된 전후 신사의 활동은 매우 자유롭다. 그리하여 많은 신사가 액년의 액땜, 결혼식, 자동차 정화의식, 지진제 등을 적극적으로 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신장제를 행하는 신사도 있다. 이런 의례는 매년 한 차례의 대제와 월례제에 비해 잡제로 자리매김되어 있었는데, 어떤 신사의 경우에는 이런 잡제가 활동의 중심이 되어 있기도 하다. 그리고 전후의 사회변동 속에서 기업이 점하는 비율이 높아지면서 신사를 모신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과 신사의 관계는 의로 밀접한데, 가령 빌딩 건설 때 반드시 지진제를 거행한다. 또한 사내에 작은 사당이나 카미다나를 모신 풍경도 결코 낯설지 않다.
현대 일본인의 생활에 신사가 얼마만큼 밀착되어 있는가는 무엇보다 정월초에 행해지는 풍속에서도 잘 엿볼 수 있다. 가령 정초에 많은 일본인들은 현관에 ‘가도마쓰(門松)’라는 소나무 장식을 하고 시메나와(注連繩)라 불리는 금줄을 걸어 카미를 맞이한다. 또한 일본인들은 하쓰모우데(初詣)라 해서 정초에 신사를 참배하면서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이 정해진 관례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새해가 되면 그 해에 길하다고 여겨지는 방각의 신사나 사찰을 참배한다. 원래 전통적인 일본인들은 섣달 그믐날부터 각자의 우지카미 신사에서 보내면서 지난 1년 동안의 부정을 정화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오늘날에는 많이 간소화되어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가족 전체가 동네의 신사를 참배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어쨌든 이런 하쓰모우데는 현재까지도 일본의 국민적 행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황중이다. 그래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나 메이지신궁(明治神宮)과 같은 저명한 신사에는 정월의 사흘 동안만 수백만 명이 참배하는 등, 매년 일본 국민의 70% 이상이 하쓰모우데에 참여한다고 한다. 나아가 세쓰분(節分)이라 불리는 입춘 전날에도 사람들은 액풀이를 위해 신사를 참배한다.
이밖에 오늘날 일본에서 장례식은 통상 불교식으로 하지만, 성인식과 결혼식은 신토식으로 거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인생의 중요한 매듭마다 신사를 참배한다. 가령 아이가 태어나면 일정기간(통상 남아는 32일, 여아는 33일)이 지난 다음 모친과 조모가 아기를 안고 신사를 참배하여 건강한 발육과 행복을 기원한다. 이를 ‘오미야마이리(御宮參)’라 한다. 또한 아이가 3세(남녀 공통), 5세(남아), 7세(여아)가 되는 해의 11월 15일에도 신사를 참배하는데, 이런 관례를 ‘시치고산(七五三)’ 축하연이라 한다. 뿐만 아니라 성인이 된 다음 남자 25세와 42세 때, 그리고 여자 19세와 33세 때 액땜을 위해 신사를 참배하는 민속적 신토 신앙도 아직 널리 행해지고 있다. 나아가 많은 일본인의 가정에는 신단(神棚, 카미다나)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는 통상 각 신사에서 배포하는 오후다(御札)가 봉안되어 있다.
일본 신사문화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오후다는 일종의 부적으로서 명백히 도교적 습속의 흔적에 해당된다. 오마모리(御守)라고도 불리는 이 오후다에는 해당 신사의 이름과 함께 가내안전, 화재안전, 교통안전, 입시합격, 장사번창, 치병, 기타 취직이라든가 연인 혹은 운수라든가 복과 장수 등을 기원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다. 일본인들은 각자 자신에게 필요한 오후다를 사다가 그것을 몸에 지니거나 또는 전술했듯이 집안의 신단에 안치한다든가 문 입구나 기둥 같은 곳에 붙여 놓기를 좋아한다. 그럼으로써 카미의 가호를 입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한 뒤 신단 앞에 정좌하여 가미와 조상신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하루의 안녕을 기원드린다. 그밖에 입학, 진학, 졸업, 취직, 환갑 등의 날에 신단 앞에서 감사와 축하의 기원을 올리기도 한다.
개개인의 사적 생활공간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공장, 고층빌딩 및 주택과 점포 등을 건축할 때 공사 안전과 무사 완공을 천신지기에게 기원하는 의식인 지진제(地鎭祭) 또한 신도식으로 거행되는 것이 관례로 굳어져 있다. 또한 신도는 건축, 정원, 회화, 조각, 노(能), 가부키, 차(茶道)문화, 꽃꽂이, 칠기공예 등 일본문화의 저류에 흐르면서 일본인의 정신생활의 심층에서 지금도 살아 움직인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현대 일본 사회에서 신토는 굳이 특별한 종교라기보다는 하나의 생활문화라 해도 좋을 만큼 일상적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처럼 생활문화와 따로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려운 신토의 정신성에 의하면, 진리란 어디까지나 공동체의 일상적 현실 그 자체일 뿐이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선 어떤 추상적 이념이라든가 보편적 법칙 혹은 불변성이나 영원성이라는 관념이 뿌리내릴 여지가 별로 없다. 다만 ‘지금 이곳’만이 그 자체로 진리일 뿐이다. 그래서 신토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 대신 신토는 “바로 지금 현재 속의 신대(神代)”를 뜻하는 일본의 전통적 시간관념 즉 ‘영원한 지금(中今, 나카이마)’을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 신도는 생(生)을, 그리고 불교는 사(死)를 담당해 왔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8 그 외
각 신사에서 모시는 신들은 파트별로 맡은 분야가 다르고 각각 그 효험이 다르다고 한다. 주된 예를 들면 상공업과 쌀과 성공의 신인 이나리 신[12]을 모시는 이나리 신사, 학문의 신으로 받들어져 수험생들이 주로 참배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신으로 받드는 텐만구(天満宮)[13], 무술의 신이라는 하치만 신[14] 등이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이 새해에 신사참배를 갈 때는 이 점을 굳이 따지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신들의 분야나 효험 역시 시대마다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15] 지금처럼 각 신들의 전문분야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센고쿠 시대 각 신사의 하급신관들이 각지를 돌며 자기네 신사의 신의 효험을 광고하면서부터다. 일본 각지에 널려 있는 이나리 신사, 하치만 신사, 텐만구 등은 다 앞서 언급한 본사의 말사 내지는 섭사 격으로, 쉽게 말해서 멀티이다. 시라카와고의 후루데 신사 시라카와 하치만 신사도 하치만 신사의 말사(末社)에 해당한다.
신사의 여자신관인 무녀가 종교적인 의미하고는 좀 많이 다른 의미로 유명.(…)
우리나라에서, 특히 일제의 식민통치를 겪은 노인분[16]들에게는 신궁요배라던지 신사참배같은 강제 민족동화 정책 떄문에 신토나 신사는 그야말로 사교나 마교급으로 취급되고 있으니 참고하는 것이 좋다.
9 신직
신사본청에서는 신직의 직명, 계위階位, 신분을 정한다. 직명은 구지, 곤구지, 네기, 곤네기 등이 일반적이다. 그 밖에 이즈모대사는 교츠, 스미요시대사에는 쇼네기, 이세신궁이나 아츠타신궁에는 구쇼 등의 직명이 있다. 구지는 규모의 대소를 막론하고 하나의 신사에 한 사람 밖에 없으므로 회사로 말하자면 사장에 해당되는 신직이다. 계위로는 맨위부터 정淨, 명明, 정正, 직直의 네 가지가 있다. 정계는 처음부터 수여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의 실적에 의해 주어진다. 신직 양성기관인 국학원대학이나 황학관대학을 졸업하고 소정의 학점을 이수하면 명계가 주어진다. 또한 이 대학에서 약 1개월 정도 강습을 받으면 정계 혹은 직계를 부여받을 수 있다. 이 밖에 신직의 신분으로서 위로부터 특급, 1급, 2급상, 2급, 3급, 4급의 여섯 등급이 있다. 신사본청 산하의 많은 신사에서는 어떤 계외, 어떤 신분이라도 신직으로 근무할 수가 있는데, 이세신궁, 아츠타신궁, 메이지신궁 등 큰 신사의 경우에는 제사 참례시 일정한 계위가 요구되기도 한다.
10 대중문화 속의 신토
참고로 동방프로젝트에 나오는 하쿠레이 신사는 누구를 모시는지 도통 알 길이 없다. 추측이 난무하기는 하지만.[17]
사우스 파크 크리스마스 특집에선 개리슨 선생에게 엄청 까였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는 일본적인 신토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성행하고 있어 동양 판타지의 한 종류인 '음양 판타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도 할 정도이다.
신토가 일상생활과 많이 엮기다 보니까 일본 어린이용 애니에서까지도 꽤 자주 나오는 편이다. 문제는 한국어로 더빙을 할때 절 이라고 괴악하게 번역한다는 것. 절에서 손뼉치면서 절하나보지? 차라리 사당, 신당이라고 하거나, 그냥 신사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근데 우리나라 신당에서도 손뼉치고 절하지는 않는다
10.1 신토를 소재로 한 작품
- RDG 레드 데이터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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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부 시리즈[18] - 도쿄 레이븐즈
- 동방프로젝트
- 불꽃의 미라주
- 별하늘의 메모리아
- 신무월의 무녀
- 쌍계의
- 아침안개의 무녀
- 와시오 스미는 용사다
- 오늘부터 신령님
- 요괴워치
- 우리 집의 여우신령님
- 월양염
- 은여우
- 이누야샤
- 카미츄
- 칸나기
- 쿠마미코
- 이나리, 콩콩, 사랑의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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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키☆스타[19] - 노라가미
- 모노노케
- 장신소녀 마토이
11 관련 항목
- ↑ 힌두교와 비슷한 면이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예를 들어 다신교인 점은 같지만 종교 자체가 카스트와 같은 계급제도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도 희박한 편이다.
- ↑ 사실 독립 운동을 위해서 참배를 거부한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은 편이다. 물론 당시 대다수 목사, 신부, 승려들은 참배를 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동양의 제사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 조상의 공경 차원에서 행한다면 가톨릭 교리에 모순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게 악용되어서 조선-일본 가톨릭에서 신사 참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대다수 개신교 종파도 사이좋게 이렇게 하였다(...). 다만 당시 조선인 신부, 목사, 승려들도 일제 앞에서는 약자에 불과했으므로 옹호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알아서(...)
- ↑ 신이나 영혼을 세는 단위는 위位이다. 제신(諸神)이란 '여러 신'을 가리키는 말. 정확히는 '팔백만(八百万)'이라 쓰고 'やおよろず(야오요로즈)'라고 읽는다. 팔백만은 실제 숫자가 아니라 '많은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숫자. 단테의 신곡에서 여러 영혼이라는 뜻으로 '일곱 영혼'이라는 표현을 사용함과 비슷하다.
- ↑ 현재 일본 신토에서는 외국계 도래신이나 외국 관련 신사들은 대부분 이름이 강제 개명되거나 신의 계보가 천황가에 유리하도록 뒤바뀌어 있다. 이는 제국주의 사상에 기초하여 천황 중심의 국가를 만드는 과정에서 형성된 국가신토의 폐해다. 대표적인 게 가라쿠니 신사로, 본래 가라쿠니를 한국(韓國)이라 썼던 것을 음이 같은 당국(唐國)으로 바꾸어 버렸다. 자세한 것은 국가신토,일본 신화항목이나 '일본신도사','일본의 신사' 등을 참조
- ↑ 현 신토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태양신. 하지만 해당 항목에 나오듯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 ↑ 부처나 보살이 중생의 교화를 위해 신이나 명왕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참조 링크 http://breakupshell.blog.me/100102177569
- ↑ 동방 프로젝트에서도 이와 관련된 대사가 있다. 동방문화첩-더블 스포일러 에서 샤메이마루 아야의 취재 코멘트 중 히지리 뱌쿠렌과 관련된 대사를 보면 본지수적이라는 말과 더불어 '대일여래 모습을 한 아마테라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이 신토의 실제 역사를 상징하는 구절이다. 해당 대사 참조링크 http://raven13th.egloos.com/5223668
- ↑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 신토임에도 신에 대환 관념은 일반적인 신토와 달리 성리학의 음양이기론에 입각해 해석한다.
- ↑ 본문내용 작성시 참조자료 : http://cafe.naver.com/thaiinfo/8345, 일본인과 천황(카리야 테츠 저), 日本佛敎史-思想史としてのアプロ-チ-(末木文美士 저, 국내 번역본 제목은 "일본불교사-사상사로서의 접근"),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김현구 저), 일본신도사(무라오카 츠네츠구 저, 박규태 역), 청소년을 위한 동양철학사(임선영 저)
- ↑ 대표적인 예가 메이지 초기에 일어난 폐불훼석(廃仏毀釈) 운동이다.
- ↑ 징병을 거부하면 비국민 취급을 받는 시절에 이게 가능한가 싶겠지만, 농업의 특성상 젊은 일손은 마을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노동력이고 메이지 유신 직후 세율책정을 위해 농지정리 사업을 벌이면서 농가가 갖고 있던 농지를 뺏거나 과한 세금을 부과되는 경우가 많아 중앙정부에 반발심을 가지는 농촌이 많았다.
- ↑ 총본산은 교토의 후시미이나리타이샤(伏見稲荷大社)
- ↑ 총본산은 교토의 기타노덴만구(北野天満宮)와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의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満宮). 다자이후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천되어 갔던 곳이다.
- ↑ 응신천황을 신체로 한다. 총본산은 오이타 현 우사 시의 우사신궁(宇佐神宮)
- ↑ 동방구문구수에서 야사카 카나코가 시대에 맞춰 자신의 신덕을 바꾸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것은 여기에 기초한다.
- ↑ 그중 기독교 계통에서 다신교에 대한 이질성이 더해져 거부감이 강하다.
- ↑ 야쿠모 유카리가 내 신사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지만 이후로 자세한 것이 나온 적은 없다. 해당 항목 참조.
- ↑ 조연 캐릭터 중 쥬몬지 카호의 집안(10씩 커지는 4대 집안중 신사의 쥬몬지)이 신사. 이를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도 여러개 있다.
- ↑ 주연 캐릭터 중 히이라기 자매네 집이 신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