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야 사건

近江屋事件(おうみやじけん)

1 개요

케이오 3년 11월 15일,[1] 일본 교토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가 암살된 사건. 현재 숙소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건이 있었다는 증거로 비석만 놓여져 있다. 위치는 카와라마치역 근처.

사카모토 료마는 그간 숙소로 쓰고 있던 사츠마번의 테라다 가게가 막부의 주목을 받고 있어서 11월 3일 오미야(近江屋)로 숙소를 옮겼다. 11월 13일, 이토 카시타로신선조가 주목하고 있으니 토사번 저택으로 숙소를 옮기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사카모토 료마는 그대로 오미야에 계속 머무르고 있었다.

사건 당일인 11월 15일, 나카오카 신타로가 오미야를 방문해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신선조가 토사번 무사들을 살해한 삼조제찰사건[2]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밤이 되자 누군가가 토츠카와의 향사라고 자칭하며 료마를 만나기를 청했고 야마다 후지요시가 그 사람을 사카모토 료마에게로 안내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이 야마다 후지요시를 등뒤에서 칼로 내리쳤다.

방안에서 상황을 모르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는 야마다 후지요시가 칼에 맞아 지른 비명소리에 조용히 하라고 말을 했는데 이게 되려 화근이 돼버렸다. 자객이 사카모토 료마의 위치를 알아차리게 돼버린 것이다.(...) 자객은 소리 없이 사카모토 료마가 있는 방으로 가서 문을 열고 그의 이마를 칼로 내리쳤다.

이때 치명상을 입은 사카모토 료마는 나카오카 신타로의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이시카와, 칼 없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뒤 자객은 사카모토 료마의 뒷통수와 등, 가슴등을 수차례 찔러 죽였고 나카오카 신타로에게도 중상을 입힌뒤 도주했다. 야마다 후지요시는 료마가 죽은 다음 날에 사망했고, 그나마 목숨이 붙어있던 나카오카 신타로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그 역시도 이틀 뒤에 크게 구토를 한뒤 사망했다.

오미야와 토사번의 저택은 길을 마주보고 있을 정도로 가까웠지만, 워낙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인 탓에 토사번의 저택에서 도울 방법이 없었다. 토사번 사람들은 사건이 끝난 뒤에야 오미야에 나타나 료마가 암살된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암살이 워낙 갑작스러웠던 데다가, 목격자라 할수 있는 인물들이 사망한 탓에 오늘날까지도 누가 암살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한 상황이다. 다만 자객이 이요방언[3]을 쓰는것으로 미뤄 신선조의 하라다 사노스케[4]등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이 있었다.

실제로 사건 현장을 조사해보니 나온 칼집의 흔적이나 료마가 죽은 사흘후에 암살된 이토 카시타로의 증언으로 신선조가 배후로 의심을 받았다. 이요방언을 쓰는 하라다 사노스케나 북진일도류의 달인인 사카모토 료마를 살해할만한 실력을 지닌 사이토 하지메가 거론되었지만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 범인이 왼손을 쓰는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논란이 되었다. 하라다 사노스케는 창술사였고 사이토 하지메도 분명하지는 않지만 왼손잡이가 아니라는게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신선조의 오오이시 쿠와지로또한 용의선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11월 26일, 막부에 소환된 곤도 이사미도 사건에는 신선조가 개입하지 않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세간에는 사츠마번이 대정봉환 이후 막부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인 사카모토 료마에 대한 반감으로 그를 죽였다는 설도 나돌았다. 사카모토 료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각지의 영주들을 소집한 회의에서 신정부를 구성하려 했는데 사이고 다카모리나 오오쿠보 토시미츠같은 인물들은 막부를 무너뜨리려 했기 때문에 사카모토 료마를 막기 위해서 막부쪽에 그의 행방을 몰래 흘렸다는 것.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와 사츠마번 사이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에 대한 처리를 놓고 논란이 일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양측이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만 관철시키려고 한게 아니라는게 일본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이후 1869년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면서 포로 심문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오미야사건에 대한 중요한 진술이 나왔다. 후루야 사쿠사에몬과 함께 쇼호다이를 이끌었던 이마이 노부오가 료마를 암살한 것은 막신 에노모토 미치아키의 지령을 받아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이끌던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저질렀다고 밝혔다. 노부오는 당시 사건 현장에 사사키 타다사부로, 와타나베 키치타로, 와타나베 아츠시, 가츠라 하야노스케, 다카하시 야스지로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료마를 직접 살해한 인물로 가츠라 하야노스케와 다카하시 야스지로가 거론 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현장 상황을 들어 여기에 의문을 표하고 있고 나카오카 신타로를 문명한 다니 다데키는 미마와리구미의 배후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밖에 소수이긴 하지만 영국의 배후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다만 역사학자들 중에는 범인이 노린게 사카모토 료마가 아니라 나카오카 신타로일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사카모토 료마는 중요한 인물이긴 했지만 당시로선 그렇게 지명도가 높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에는 나카오카 신타로가 상당히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카오카 신타로를 죽이려다가 사카모토 료마를 죽인게 아닌가라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실제로 사카모토 료마가 나카오카 신타로를 보호하려고 그를 이시카와라고 부른것을 보면 그럴지도 모른다.

여담으로 암살당하던 저녁에 료마가 혼잣말로 "갑자기 닭고기[5]가 먹고 싶은걸보니 오늘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겠는걸"이라고 말하자 신타로가 닭고기를 사러 자리를 비웠다고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찾아온 "반가운 손님"은...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오미야 사건의 진범은, 현재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 남아있는 증거에 입각한 추론

료마가 지내던 오미야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메이지 시대에 헐려서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다고 한다. 다만 교토에는 오미야와 흡사한 형태의 건물이 남아있어서 료마 암살에 대한 추론은 가능하다. 료마가 머무르던 곳은 2층의 안쪽 깊숙한 곳이었는데 천장이 낮다는게 특징이다.

또한 교토의 국립박물관에는 료마가 암살되었을때 오미야에 걸려 있던 그림이 소장되어있다. 이 그림은 세로로 긴 족자의 형태인데 특이한 부분은 족자의 맨 끝 하단 부분에 몇방울의 혈흔이 남아있다는 점이다. 대체로 이 혈흔은 료마의 혈흔일것으로 추정한다.

방안의 구조나 족자의 혈흔등으로 판단해 본다면 료마는 살해될 당시에 서있었을수가 없어보인다. 화로를 사이에 두고 료마와 신타로가 마주보고 앉아있었을것이고 암살자도 서있기 보다는 앉아있었을 개연성이 크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특이한 부분은 료마의 유품이다. 료마는 평소에도 피스톨을 휴대하고 다녔고 데라다야 사건때는 자신을 잡으러온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도주한적도 있다. 오미야 사건 이후 촬영한 료마의 유품사진에도 분명히 피스톨이 있으나 총알이 발사된 흔적이 전혀없다. 또한 료마가 소지하고 있던 카타나의 칼집이 칼로 베인듯한 흔적이 있다. 피스톨이 발사되지 않은걸로 미루어본다면 료마가 경계태세를 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론이 나온다.

즉, 정리하자면 료마와 신타로가 앉아있던중에 어떤 사람이 찾아왔고 이 사람도 앉아있는 상황에서 료마와 신타로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사람이 갑자기 불시에 앉은채로 칼을 빼서 료마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암살자는 료마의 피스톨로 미루어본다면 료마가 경계를 전혀 하지 않은 사람이었을 개연성이 있어보인다. 불시의 습격에 료마는 피스톨을 쏠 생각을 못하고 손에 잡히는 카타나를 들고 암살자의 칼날을 막아내다가 결국 살해된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부분은 료마를 암살한 자로 지목된 가츠라 하야노스케는 특이한 검술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도류같은 검법을 썼다고 하는데 특히 코타나의 명수였다고 한다. 이런점으로 미루어본다면 사사키 타다사부로가 오미야의 좁은 구조등을 감안해서 좁은곳에서 접근전에 유리한 코타나의 명수인 가츠라를 암살 실행자로 선택했을것으로 보인다.

3 오미야 사건에 대한 다양한 설들

교토 미마와리구미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졌지만 료마 암살의 배후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뒷이야기가 나도는 상황이다.

가장 많이 회자되는것은 바로 미마와리구미의 료마 살해를 실토한 이마이 노부오에 대한것으로 이마이 노부오는 료마를 직접 살해한 인물로 가츠라 하야노스케와 나카하시 야스지로를 거론했으나 실제로는 이마이 노부오가 실행범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이마이 노부오는 료마를 죽인 범인임에도 사형되기는 커녕 오히려 근신처분을 받고 시즈오카로 갔고 그곳에서 한 마을의 촌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문제는 그가 간곳인 시즈오카. 시즈오카는 슨푸를 개명한 곳으로 도쿠가와 가문의 본거지라 할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사토를 따라 슨푸로 이동한 막부의 가신중에 하필이면 오다 이즈미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며 이 오다 이즈미가 이마이 노부오를 사주해서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오다 이즈미가 료마를 암살한 이유에 대해서는 더 복잡한 뒷이야기가 있는데 일설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조상이 바로 토사로 도망친 아케치 사마노스케이며 아케치 가문의 거성인 사카모토를 성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즉 이 이야기대로라면 오다 이즈미가 료마를 암살한것은 혼노지의 변의 복수가 된다. 물론 이는 믿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오다 가문이 아케치의 후손을 추적해서 살해하는 전통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다른 주장으로는 카츠 카이슈가 배후라는 이야기가 있다. 료마는 대정봉환이후 신정부의 내각 명단을 짜면서 희한하게도 한자리에는 이름을 쓰지 않고 동그라미만 세개 그려넣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정부의 내각 명단에는 카츠 카이슈의 이름이 들어있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 동그라미에 들어갈 이름의 정체는 바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동그라미 세개는 바로 "도쿠가와공(德川公)"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것이었고 이를 알게된 카츠 카이슈가 격노해 이마이 노부오를 사주해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카츠 카이슈와 이마이 노부오는 같은 검술 유파의 면허를 가진 인물로 이런 인연으로 이마이 노부오를 통하여 미마와리구미를 움직여 료마를 암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료마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던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저런 이유로 카츠 카이슈가 격노하여 료마를 암살하려 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같은 검술 유파의 면허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과연 정치적인 입장이 달랐던 카츠 카이슈와 이마이 노부오가 접점이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드라마 료마전에서는 그의 죽음을 각색해 료마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6]이 모여 습격해 살해당할때 요시다 토요의 (드라마에서 창작된)유언인 어째서 알아주지 않느냐는 외침과 함께 죽는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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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의 사진 중 가장 유명한 사진으로 이 때 입은 옷이 오미야 사건 때도 입고 있었으며 암살 당한 후 그 혈흔이 묻은 채로 현재도 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암살 직전에 찍은 료마의 사진을 갖고 가던 중 잃어버렸는데 그 사진을 잃어버린 당일 암살 되었다. 잃어버린 인물의 이름에 대해선 추가 바람.
  1. 양력으로는 1867년 12월 10일.
  2. 막부가 쵸슈번을 역적이라고 선포한 것을 적은 표시판을 토사번의 무사들이 떼어내버리자 신선조가 이들을 추적해 8명을 살해한 사건.
  3. 일본 ?에히메 현 일대의 방언
  4. 하라다 사노스케는 ?이요 마츠야마번 출신이다.
  5. 정확히는 샤모(軍鶏)라는 종류의 닭. 원래는 투계 품종이며 현재 일본의 샤모 음식점들 상당수는 료마 관련 물품들로 꾸며져있다.
  6. 신선조의 히지카타 토시조, 하급 출신이지만 료마의 입장이 높아지며 무시당했던 토사번의 상급무사들, 일본 최초의 해양추돌사건을 일으켜 망신살& 배상금을 물게된 기슈번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