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진 덴노

일본의 역대 덴노
섭정15대16대
진구 황후오진 덴노닌토쿠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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応神天皇
201.12월 ~ 310.02.15 (재위 : 270.1.1~310.02.15)

1 개요

일본의 제 15대 덴노. 이름은 호무타와케노미코토(誉田別尊).

주아이 덴노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氣長足姬尊).

201년 겨울 12월에 츠쿠시(筑紫)의 가다(蚊田)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사물을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내다보았다. 하는 행동이 법도에 맞아 성스러운 징표가 있어 203년인 3살 때 황태자가 되었다.

태어날 때 팔 위에 굳은 살이 있었고 그 모양이 활을 쏠 때 착용하는 팔 보호대와 같았으며, 이는 진구 황후가 용감하게 몸단장을 하고 활 보호대를 했을 때의 모양과 같았다고 했다. 활 보호대는 호무타(褒武多)라고 불렀기에 그 이름을 높여 호메타덴노(譽田天皇)라 불렀다고 한다.

또다른 기록으로는 덴노가 황태자가 된 후에 코시국(越國)에 가서 츠누가(角鹿)의 사반대신을 참배했고 이 때 서로의 이름을 바꿔 그 대신은 이자사와케노카미(去來紗別神), 황태자는 호무타와케노미코토(譽田別尊)라고 불렀으며, 대신의 원래 이름은 호무타와케노카미(譽田別神), 황태자의 원래 이름은 이자사와케노미코토(去來紗別尊)였던 것이라고 한다.

나라~헤이안 시대 이래로 세이와 겐지(淸和源氏)를 비롯한 일본의 네임드 무가들로부터 무신(武神)으로써 열렬한 숭배를 받았던 하치만신(八幡神)과 동일시된다. 그 전까지는 오이타 지역의 농업의 신이었고 오진 덴노와는 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 정설.

2 행적

270년 1월 1일에 즉위했고 처음에는 타카키노이리비메(高城入姬), 타카키노이리비메의 동생인 오토히메(第姬), 미야누시야카히메(宮主宅媛), 오나베히메(小甂媛), 오토히메(第媛), 이토히메(糸媛), 히무카노이즈미노나가히메(日向泉長媛) 등 7명의 비를 두어 덴노는 남녀 합해서 자식 20명을 낳았으며, 271년 3월 3일에 나카츠히메(仲姬)를 황후로 삼았다.

272년 겨울 10월 3일에 에조로부터 조공을 받으면서 우마야사카노미치(廐坂道)를 만들도록 했고 11월에 바다의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자 오호하마노스쿠네(大濱宿䄲)를 파견해 그들을 평정하자 오호하마노 스쿠네를 미코토모치(宰)로 삼았다. 274년 8월 13일에 여러 나라에게 아마베(海人部), 야마모리베(山守部)를 정했고 겨울 10월에 이즈국(伊豆國)에게 배를 만들도록 해서 길이가 10장이 되는 배를 완성하자 카라노(枯野)라고 불렀으며, 275년 봄 2월에 오미국(近江國)으로 가서 우지노(莵道野)에 이르러 노래를 불렀다.

278년 여름 4월에 오호하마노 스쿠네를 츠쿠시로 보내 백성들을 감찰하게 했지만 오호하마노 스쿠네의 동생 우마시우치노 스쿠네(甘美內宿䄲)가 오호하마노 스쿠네가 츠쿠시에서 모의했다는 모함을 했고 오진 덴노는 사자를 파견해 오호하마노 스쿠네를 죽이려 했다.

그러다가 오진 덴노는 두 사람을 추궁했고 두 사람이 각자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고집하자 두 사람의 손을 탐탕(探湯)[1]하도록 했으며, 두 사람이 시키노카와(磯城川)의 물가에서 탐탕을 했다가 오호하마노 스쿠네가 이기자 우마시우치노 스쿠네를 기노아타히(紀伊直) 등의 선조에게 예민으로 주도록 했다.

280년 겨울 10월에 츠루기노이케(劒池), 가루노이케(輕池), 가노카키노이케(鹿垣池), 우마야사카노이케(廐坂池)를 만들고 히무카국(日向))의 가미나가히메(髮長媛)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자 기뻐해 찾고자 했다. 282년 봄 3월에 사람을 보내 가미나가히메를 불러 가을 9월에 오자 구와츠노무라(桑津邑)에 살게 했고 아들인 오호사자키노미코토(大鷦鷯尊)이 가미나가히메를 좋아하자 오진 덴노가 이를 알고 결혼시키기 위해 후궁에서 열린 연회 때 오호사자키노미코토에게 가미나가히메를 맺어지게 했다.

288년 겨울 10월에 요시노노미야(吉野宮)으로 행차했고 291년 봄 3월에 나니하(難波)에 행차해 오호스미노미야(大隅宮)에 머물렀으며, 14일에 비 에히메(兄媛)가 부모를 그리워해 서쪽을 보고 탄식하자 88명을 뱃사공으로 삼아 배를 통해 서쪽에 가도록 했다. 가을 9월 6일에는 아와지마(淡路嶋)에 사냥을 나가면서 키비(吉備)에 행차하고 아즈키시마(小豆嶋)에서 놀았으며, 10일에는 하다노(葉田)의 아시모리노미야(葦守宮)에 머물렀고 미토모와케(御友別)가 자신을 공손히 받들자 그의 자손들에게 키비를 나눠서 주었다.

306년에 사람을 오(吳)나라에 보내 봉공녀를 구하게 했고 오나라 왕으로부터 봉공녀 4명을 받았으며, 309년에는 봄 정월 8일에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大山守命), 오호사자키노미코토를 불러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 큰 아들, 작은 아들 중 누구를 더욱 사랑하냐고 질문했고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는 큰 아들, 오호사자키노미코토는 큰 아들은 성인이 되어 걱정이 없으니 작은 아들은 성인이 못될지도 몰라 가엾다는 말을 했다.

오진 덴노는 우지노와키이라츠코(菟道稚郞子)를 황태자로 하려는 마음이 있었고 두 황자의 마음을 알고자 질문한 것이라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의 답에 기뻐하지 않았다. 24일에 우지노와키이라츠코를 황태자로 삼으면서 오호야마모리노미코토에게는 산천임야를 관장하고 오호사자키노미코토에게는 황태자를 보좌해 국사를 다스리게 했다.

310년 봄 2월 15일에 아키라노미야(明宮)에서 죽었고 이 때의 나이가 110세였다고 하며, 다른 기록에는 오호스미노미야에서 죽었다고 한다. 이 때 오나라로 보낸 자들이 봉공녀를 데리고 돌아왔지만 오진 덴노가 이미 사망해 만나지 못했다.

3 기록의 왜곡

일본서기의 목적인 덴노와 유력씨족의 위엄을 높이자라는 것으로 인해 왜곡된 부분이 많이 보이는데, 왜곡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272년에 백제진사왕이 무례해서 사신을 보내고 백제에서 진사왕을 죽여 사죄했다.
  • 276년 가을 9월에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내조해서 여러 한인(韓人)을 거느려 연못인 한인지(韓人池)를 만 들었다.
  • 277년 봄 3월에 백제가 내조했다.
  • 281년 봄 2월에 백제에서 봉의공녀를 바쳤다.
  • 285년 가을 8월 6일에 백제에서 좋은 말 두 마리를 바쳤으며, 아신왕이 죽자 전지왕을 불러 나라에 돌아가도록 하면서 동한(東韓)의 땅을 돌려주었으며, 8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의 왕이 놀라서 사죄했다.
  • 288년에 국소인/쿠스히토(國樔人)[2]이 내조해 감주를 바쳤다.
  • 294년에 구이신왕이 왕에 오르면서 목만치가 국정을 잡고 왕의 어머니와 밀통해 무례한 행위를 저지르자 이를 듣고 목만치를 소환했다.
  • 297년에 고구려의 왕이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표를 올렸다. 고구려의 왕이 일본국에 교(敎)한다고 적혀있어 우지노와키이라츠코가 그 표를 읽고 노해 고구려의 사신을 꾸짖고 표문이 무례하다고 하면서 그 표를 파기했다.
  • 300년 가을 8월에 관선 중에 이즈국에서 바친 카라노가 썩어서 사용할 수 없자 담당 관리에 그 배의 목재를 땔감으로 해서 소급을 굽도록 했으며, 5백 광주리의 소금을 얻자 여러 나라에 나누어주고 배를 만들도록 해 여러 나라에서 한꺼번에 5백척의 배를 만들어 바치자 무코노미나토(務古水門)에 모았다. 이 때 신라의 조공 사신이 무코(務古)에 머무르다가 신라정에 불이 나서 그 불이 배가 있는 곳까지 번져 많은 배들이 불에 타자 신라인을 책망했으며, 신라왕이 그것을 듣고 놀라 뛰어난 장인을 바쳤다. 소금 굽는 땔나무를 태운 후에 타다 남은 재가 있어 타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그것을 헌상받았는데, 오진 덴노는 금/코토(琴)을 만들도록 했고 그 소리가 맑아서 멀리까지도 들렸다.
오진 덴노는 3세기 초부터 4세기 말까지 재위한 인물이지만 진사왕부터 구이신왕까지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해당되는 왕이기 때문에 연대상으로 맞지 않으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주갑인상 항목 참고.
  1. 죄인의 손을 열탕에 넣어 데이거나 그렇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이다.
  2. 정확히 어느 지역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백제인이라는 추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