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木滿致. 생몰년 미상. 5세기 구이신왕 시기의 백제의 권신.
아버지인 목라근자처럼 국내나 중국의 사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오직 일본서기의 기록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실존 여부가 의심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백제기 인용이 나름대로 신뢰성이 있기에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개로왕 시기의 충신 목협만치(혹은 목례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아스카 시대 왜국의 권력 가문이었던 소가씨의 선조로 보는 설도 있다.
2 생애
근초고왕 때에 가야와 신라를 격파하여(외교적으로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다.) 백제가 가야를 포함한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백제의 장수 목라근자의 아들인데, 어머니는 신라의 여인이라고 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목만치에 대해 언급하면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기록인 '백제기(百濟記)'를 인용하면서 '아버지인 목라근자의 공로가 큰 덕분에 임나에서 일을 도맡아 보았다(벼슬)가 백제로 들어왔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임나는 가야지방 전체, 혹은 임나가야(대가야)를 말한다.
420년에 전지왕이 죽고 구이신왕이 즉위했으나, 구이신왕이 어려 목만치가 국정을 잡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목만치는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여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고 한다. 또한 왕의 나이가 어린 것을 핑계로 삼아 국정을 휘둘렀는데 그 권세의 높기가 하늘을 덮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목만치의 횡포가 대단하여 덴노가 목만치를 일본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기록이 끊어져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솔까말 구이신왕이 왜국으로 추방한 것을 덴노가 불렀다고 둘러대는 것 같다.
사실 전지왕의 죽음과 목만치의 기록은 오진 덴노기 25년에 나오는데, 오진의 재위기간은 (270 ~ 310)이기 때문에 오진의 기록에 구이신왕이 나온다는 것부터가 일본서기의 시간대가 개판이란 증거다. 자주 나타나는 이주갑인상 문제가 여기서도 나타난 것. 딱 120년 차이는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3 의문점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름 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하고 제멋대로 권세를 휘둘렀다고 하니 분명 한가닥은 하는 사람이었을텐데, 정작 삼국사기를 비롯한 국내 기록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의문점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에 쓴 사서라 누락된 것이 한둘이 아닌지라. 지못미.
또한 목만치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해도, 목만치가 덴노의 부름을 받았다는 대목은 상당히 의문이 가지 않을수가 없는 부분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은 천황 숭배사상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으며, 일본제국 중심주의가 쩔어서 외교 부분에 대해서 역시 쉽게 믿기 어렵다.[1]
4 목협만치와의 관련성
목협만치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로, 목례만치라고도 한다. 목만치가 구이신왕(재위 420~427)시기의 인물이기 때문에 개로왕(재위 455~475) 시기에 등장한 목협만치는 후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목협만치는 개로왕이 고구려군에게 참살당한 후 왕자와 함께 사태를 수습하고 수도를 웅진으로 옮기는데 기여한 인물로 나와있다. 그러나 이후로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두 인물의 이름이 매우 유사하며, 백제 조정의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시기적으로도 유사성이 있어 동인캐일인물로 보는 설이 있다.
동일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 목만치가 등장하는 《일본서기》 오진 천황 25년(서기로는 414년)이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475년)으로 양자간에 시대가 61년이나 차이가 난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369년,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써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왜병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의 군사들이)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고 했는데, 목만치가 태어났다는 「신라를 칠 때」라는 사건의 시점은 바로 여기이며, 369년에 태어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간에 백여 년이나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목협만치와 《일본서기》의 목만치의 활동 시기가 서로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일본서기》에서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2] 《삼국사기》에는 목라근자가 활약한 369년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1년전, 3년전에 해당하는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했다. 《삼국사기》 내물 이사금 18년(373년)조에 백제의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백 명을 거느리고 신라로 투항하자 근초고왕은 그들을 송환해줄 것을 신라에 요청하면서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는데, 《삼국사기》에서 366년과 368년에 맺어졌다고 한 양국간의 화친이 373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그리고 아신왕 12년인 서기 403년에야 백제는 직접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쳤다).
또한 한문 특성상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여자를 얻어서 (목만치를) 낳았다」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압축시켜 적은 기록일 가능성도 제기되는데, 우선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369년이 한창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 와중이었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굳이 전쟁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에 만사 제쳐두고 부인부터 맞아들인다는 것도 그렇고 결혼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속도위반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에 대한 보장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목라근자가 가야 평정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을 가야 지역에서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이러한 혼인관계상 부인은 「현지처」로서 젊고 예쁜 여자가 되기 십상이며 여기서 태어난 아들인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와 한참 나이 차이가 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 즉 목만치는 목협만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3]
5 소가노 마치와의 관련성
소가씨는 아스카 시대에 활약한 왜국의 권신 가문으로, 친 백제계로써 불교를 백제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소가노 마치(蘇我満智)는 소가씨의 선조로 불리는 인물이다. 소가씨 가문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마치의 고손자인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가 있다.
이 소가노 마치(소아만지)의 이름이 목협만치, 목만치와 유사하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또한 소가노 마치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이 각각 소가 가라코(蘇我韓子 한자)이고 그의 손자는 소가 고마(蘇我高麗 고려)이기 때문에 도래인이라는 의혹도 짙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워낙 소가씨의 성향부터 이름까지 도래인이라는 냄새가 짙게 나기 때문에 목만치와 관계 없이 도래인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가노 마치는 일본서기의 시간상 리추 덴노 재위 2년에 집정관이 되며 기록 위로 나오는데, 이 때가 401년이기 때문에 목만치와 목협만치와는 시간대가 맞지 않게 된다. 반면 일본서기는 이주갑인상 문제가 나타날 정도로 시간대가 개판인 만큼, 소가노 마치의 기록 시간대를 후대로 올려놓으면 된다는 의견도 있다.
또는 목만치가 왜국에 가서 벼슬을 한 후 개로왕 때 돌아왔다는 의견도 있다. 돌아온 탕아?
다만, 시간대를 후대로 한다고 해도 반박되는 근거가 4가지가 있는데,
1. 백제 명문귀족인 목만치가 굳이 자신의 성씨를 버리고 소가를 자청한다는건 이상하다는 점.
2. 일본에서 도래계 태생의 호족들이 자신의 태생을 날조하는건 8세기 이후에 나타난다는 점.
3. 삼국사기에 쓰여진 목협만치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볼 때, '목협만치가 남행하였다'라는 부분을 일본으로 향한것으로 한정지어 해석할 수 없다는 점.
4. 백제 귀족 손자의 이름에 고구려를 의미하는 高麗가 쓰인건 부자연스럽다는 점.
이 때문에 현재 일본에선 목만치=소가노 마치설은 지지하는 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