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18대 전지왕 부여영 | ← | 19대 구이신왕 부여구이신(?) | → | 20대 비유왕 부여비 |
시호 | 구이신왕(久爾辛王) | |
성 | 부여(扶餘) | |
휘 | 구이신(?)[1] | |
생몰년도 | 음력 | 405년 ~ 427년 12월 (23세) |
재위기간 | 음력 | 420년 3월 ~ 427년 12월 (8년) |
백제의 19대 국왕/건길지
구이요리의 신 불에 잘 구이신 왕
현실에 존재하는 데이터 말소된 왕
1 업적
전지왕의 맏아들. 어머니는 팔수부인.
이 사람을 단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개루왕, 사반왕, 책계왕, 분서왕, 계왕, 침류왕, 삼근왕, 혜왕, 법왕과 함께 업적을 한,중,일 삼국의 역사책을 모두 뒤져서 정리해도 A4 한페이지도 채울 수 없는 왕들 중 하나다. 그나마 위의 왕들 중 일부는 재위 기간이 1~3년 밖에 안 되는 왕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재위 기간이 8년이나 되지만.. 하지만 백제에서 이 분야 본좌는 사반왕
남은 기록이 너무 적어 어떤 왕이였는지 알기 힘들다.
일단 그나마 중국 측에 남은 기록들이라도 정리해보면, 구이신왕은 중국대륙의 세력과 연결하여 백제가 장악한 황해연안의 해상무역권을 유지하고, 또한 팽창하는 고구려세력에 대처하려하였다. 그것은 그전부터 형성된 백제와 남조(南朝)의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일층 강화하는 것으로 전개되었다. 구이신왕은 423년과 425년에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송나라로부터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 425년 이후는 매년 사신의 파견이 있었다. 그러나 원가 7년(430년)에 「여비(余毗, 비유왕)에 여영(余映, 전지왕)의 작호의 계승을 허락했다」라고 하여 정통성의 계승은 인정 받았지만 그외 뚜렷하게 강한 인상을 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재위 8년 동안 사신, 무역 기록을 빼면 없.다. 무슨 기록말살형같은 것이라도 있었는지 의문이 가는 수준...
다만 《일본서기》에 이러한 이유를 짐작 가능한 문구가 하나 있는데, 전지왕이 사망한 후 어린나이에 구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쓰여 있다. 이 때문에 목만치라는 인물이 국정을 장악했고, 결국은 전지왕의 어머니와 놀아나고 왕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것이 쓰여있다. 물론 일본서기기에 무조건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이게 전지왕이 아니라 구이신왕대의 일이라면 실제로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허수아비 왕이었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록이 유난히 적은 것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春三月 구이신왕이 즉위하다
八年冬十二月 구이신왕이 죽다
이게 끝. 재위 8년간 왕위에 올랐고, 사망했다 빼면 《삼국사기》에 남은 기록이 없다.
- ↑ 신라 초기 국왕들처럼 이름을 왕호를 사용한건지, 아니면 시호인지는 자세한 이름은 알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