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백제의 역대 국왕 | ||||
17대 아신왕 부여아방 | ← | 18대 전지왕 부여영 | → | 19대 구이신왕 미상 |
시호 | 전지왕(腆支王) / 진지왕(眞支王)[1] / 직지왕(直支王)[2] | |
성 | 부여(扶餘) | |
휘 | 영(映) / 전(腆) / 여영(餘映,余映)[3] | |
생몰년도 | 음력 | 390년 ~ 420년 3월 (31세) |
재위기간 | 음력 | 405년 9월 ~ 420년 3월 (16년) |
백제의 18대 국왕/건길지.
King of Battery
1 업적
아신왕의 아들. 부인은 팔수부인.[4]
선대 왕까지만 해도 외척은 진씨 집안이였는데 이때 그 지위를 잃고, 또한 해씨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는걸 보아선 진씨가 모종의 정쟁에서 패배한듯.[5] 여하튼 전지왕대부터 해씨세력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아신왕대에는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었는데, 아신왕이 갑자기 사망하자[6] 귀국하여 즉위했다. 하지만 진사왕이 광개토대왕에게 발리고 내외적으로 막장가도를 달리던 백제라 즉위과정이 절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아신왕의 아들 또는 동생인 훈해가 전지왕이 귀국할 때까지 잠시 임시 섭정을 맡고 있었는데 이사람의 동생인 설례가 반란을 일으켜 훈해를 죽이고 즉위해버렸다. 부왕의 부음을 듣고 왜에서 귀국하던 중 한성인(漢城人) 해충(解忠)으로부터 국내정세 변화와 경솔한 입국을 하지 말라는 간청을 받아들여 해도(海島)에 머물렀다. 그러자 국인(귀족)들이 설례를 죽이고 전지왕이 즉위했다.
동생 여신을 상좌평으로 임명했는데 최초의 상좌평 임명이였다.
전지왕의 즉위는 해씨세력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리하여 즉위 후 해충을 달솔(達率)로 삼고 한성의 조(租) 1,000석을 하사하였고, 해수(解須)를 내법좌평(內法佐平), 해구(解丘)를 병관좌평(兵官佐平)에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부인을 해씨집안에서 맞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진씨 왕비시대는 막을 내린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 동진(東晋)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416년에 진동장군 백제왕(鎭東將軍百濟王)의 작호를 받았으며, 왜와의 우호관계도 계속 유지하였는데, 야명주(夜明珠)를 보내온 왜의 사자를 우대하고 또 왜에 비단(白錦) 10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국인 고구려에 별다른 군사행동은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매번 발리는 소식을 일본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전지왕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구이신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때에, 구이신왕의 어머니와 정을 통한 목만치라는 사람이 정권을 휘두르고 휭포를 부렸다고 기록하였지만 국내나 중국의 기록에는 그런 내용을 찾을 수가 없어 진위성이 의심된다.
2 삼국사기 기록
一年秋九月 전지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동명왕의 사당을 배알하다
二年春二月 진에 사절을 보내 조공하다
二年秋九月 해충을 달솔로 임명하다
三年春二月 여신을 내신좌평에 임명하다
四年春一月 여신을 상좌평에 임명하다
五年 왜국에서 야명주를 보내오다
十一年夏五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二年冬十二月 동진에서 왕을 책봉하다
十三年春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三年夏四月 가뭄이 발생하여 백성들이 굶주리다
十三年秋七月 사구성을 쌓다
十四年 왜국에 사신을 보내 흰 포목을 선사하다
十五年春一月 혜성이 나타나다
十五年冬十一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 ↑ 《삼국유사》왕력의 기록.
- ↑ 《삼국사기》,《일본서기》의 기록.
- ↑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이름으로 여기선 "여"가 성.
- ↑ 해씨 집안이란 설이 과거에 유력했으나,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에선 이 설에 대해 확증할 수 없다는 선으로 상당 부분 판단을 보류하는 중이며, 일본에서 장기간 한일 관계사를 연구한 바 있고 지금도 해당 분야를 연구 중인 김현구 교수는 팔수부인이 일본 황가 혹은 귀족의 여성이라고 주장한다. 당대 백제가 일본과 상당히 혼인 관계가 잦았던 개연성을 고려해보면 이 가능성도 무시할 순 없다.
- ↑ 하지만 진씨 집안은 이때 한번 졌다고 정계에서 아웃되는게 아니라 백제 말기까지도 상당히 활약했다. 초기에 비해서는 포스가 좀 약해지지만...
- ↑ 정쟁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가능성있어 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