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갑인상

1 개요

二周甲引上. 2(二)주기(周)의 갑자(甲), 즉 2갑자를 끌어(引) 올렸다(上)는 뜻.

일본서기 내적으로는 쉽게 알기 힘든 문제이나, 3세기 ~ 4세기 사이의 백제 등 외국 관련 기록이 2갑자(120년) 끌어 올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화제가 된 용어. 이것으로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국의 역사를 앞당기기 위해서 3 ~ 4세기 사이의 공백을 120년 뒤의 기록을 앞당겨 메웠다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문제는 모든 일본서기의 연대가 120년씩 앞당겨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일본서기의 실제 연대를 찾는데 이주갑인상은 오히려 다른 역사 왜곡들에 비하면 고마운 지표가 되기까지 한다. 최소한 이주갑인상된 연대는 '일관적으로' 120년 올린 것이기라도 하기 때문에...

2 실상

대체로 이주갑인상이 된 걸로 보이는 시점은 3 ~ 4세기이며, 진구 황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따라서 진구 황후를 그대로 120년 내리거나 진구 황후 이전의 덴노를 120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시작은 244년(364년) 근초고왕 휘하의 백제가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 직전인 230년대에는 위나라에 조공한 기록이 나타나 히미코를 의식한 기록이 나타난다. 그 이전의 기록은 2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타 기록에서 확인하기 힘든 내정 기록이 하나 있고, 198 ~ 205년에 걸쳐 주아이 덴노와 진구 황후의 신라 정벌 기록이 나타난다.

이 부분의 정벌 기록은 도대체 연대가 어떻게 돼먹은 건지 알 수도 없게 마음대로 꼬여 있다. 파사 이사금으로 보이는 인물이 등장하긴 하는데 군주 칭호는 '매금'(= 마립간?)으로 1세기와 5세기가 융합된 기현상이 나타난다. 한편 200년의 '우류조부리지간'은 석우로와 꼭 빼닮아 있어 249/253년 인근의 기록이 섞여 들어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뜬금없이 205년에 삼국사기상 418년/삼국유사상 425년인 박제상미사흔 구출을 기록하고 있어 이 시대 기록의 정확한 역사적 출처는 더욱 미궁 속에 있다.

그 뒤로부터, 진구 황후의 후기 기록(244년 이후)은 사료적 신빙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해 연대도 대략 이주갑인상에 맞춰진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바로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연대이다. 일본서기는 근초고왕의 붕어와 근구수왕의 즉위를 254년/255년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삼국사기는 이를 375년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약 120년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이 정확하므로 결국 일본서기는 120년을 앞당겼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백제 관련 기록의 연대는 대개 이주갑인상된 것으로 보면 비교적 정확한 편이나 아신왕의 즉위를 294년(→ 414년 / 실제로는 420년)으로 기록하거나 308년(→ 428년?) 갑자기 죽은 전지왕이 누이를 일본에 보내는 기록이 나타나는 등 완벽히 정확한 기록은 아니다.

이후 일본서기 상 4세기 후반 ~ 5세기에는 삼국 및 중국과 관련된 기록이 줄어들어 연대 추정이 다시 어려워진다. 그러나 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연대가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는데(대략 안코우 덴노 ~ 유라쿠 덴노 ~ 게이타이 덴노 정도의 연대) 문제는 이것이 송서에서 중국에 조공했다고 하는 '왜 5왕'의 연대와는 또 잘 맞지 않는다는 데 있다.

애초에 120년을 끌어 올렸으므로 그 뒤의 120년은 다시 공백이어야 한다. 그러나 일본서기 상으로 적어도 공백은 없으므로, 그 중간에 등장하는 덴노들의 역사 기록은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비류백제설을 주장한 재야사학자 김성호는 태세기년(太歲紀年)을 이용해 오진 텐노 ~ 인교 텐노의 즉위연도를 복원했다고 주장하였다.

  • 오진 텐노 - 재위 : 390년 ~ 402년(13년)
  • 닌토쿠 텐노 - 재위 : 403년 ~ 429년(27년)
  • 리추 텐노 - 재위 : 430년 ~ 435년(6년)
  • 한제이 텐노 - 재위 : 436년 ~ 441년(6년)
  • 인교 텐노 - 재위 : 442년 ~ 453년(12년)

오진텐노 재위기간이 30년, 닌토쿠텐노는 60년, 인교텐노는 30년을 더하여 120년간을 연장하여 이주갑인상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의 설이 맞는지는 검증해봐야 한다.

그리고 다시 말해 연대가 정말 마음대로 '구겨져' 들어가 있고, 이주갑인상된 기록은 그나마 그 중에는 일관적으로 '접혀' 들어간 연도이다. 때문에 정상적인 연대를 어떻게 찾아내야 할지 곤란하다. 일본서기 단독으로는 사서로서의 신빙성이 무지하게 떨어지고, 삼국사기나 중국의 역대 사서들과 꼭 비교검토를 해야 한다.

3 등장 이유

중국 사서에는 266년부터 413년까지 왜와의 접촉 기록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후 왜는 478년까지 활발히 중국과 교류하다가 502년 의 관직 수여(이 기록은 그나마 실제 왜가 조공하여 받아간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를 마지막으로 다시 100여 년 간 중국 역사서 속에서 사라진다.

그나마 6세기의 일본서기 기록은 5세기 후반 이래 역사 기록이 있었음이 확인되고(『제기(祭記)』, 『구사(舊辭)』 : 각기 고사기, 일본서기의 원형으로 추정됨) 신빙성이 나름대로 괜찮아지며 삼국사기 등과도 교점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6세기의 일본사는 3세기 후반 ~ 4세기만큼 안개 속에 있는 상태는 아니다.

사실 5세기 후반 이후 봉작을 받기 위한 왜의 조공 노력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5세기 후반 이후 역사 편찬 작업이 시작되는 것에 대해서 게이타이 덴노 계가 정변을 통하여 구 왕실을 축출했다고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3세기 후반과 4세기의 일본 열도에 대해서도 비슷한 추론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한 가지 원인 추론의 경로이다.

2세기 후반부터 3세기 후반까지의 일본은 히미코 - 이요의 통치 아래 안정된 상태이기는 했으나, 그 전과 중간에 전쟁으로 인해 어지러웠던 시기가 존재하고 왕 또한 여러 국가들의 합의로 함께 세워졌다('共立'). 이 균형이 깨졌을 때 연맹 왕권은 쉽게 분열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는데, 3세기 후반에 아마 그러한 상황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일본 열도는 다수의 국가가 병존하는 상황에 접어들었을 것이고, 조공을 통해 중국 사서에 이름을 남길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이 결과 종합적인 역사 기록을 남길 주체가 없었을 것이고, 사실 문자가 없었다고 하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으로 보면 그 전부터 역사 기록을 남길 문자 문화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있다. 왜국에서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을 때 따라서 3세기 후반 ~ 4세기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 이전까지는 구전 기록을 종합하여, 그 이후 한동안은 120년을 끌어올려 나름대로 균등한 역사 기록의 분배를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 때 일본 열도가 마냥 분열된 상태에 놓여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점이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266 ~ 413년의 공백기 사이에도 '왜국'은 신라와 활발히 전쟁을 벌이기도 하고 혼인을 맺기도 했다(287, 289, 292, 294, 295, 300, 312, 344, 345, 346년 기록). 그렇다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모종의 이유로 이 시기에 등장하는 '왜국'을 역사 속에서 지워버리고 오진 덴노부터 다시 역사를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 만약 오진 덴노부터 공백기를 넘어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면, 진구 황후기 말년에 딸려 있는 역사 기록은 또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부분은 현재로서는 새로운 사료의 발굴이 없는 한 추론의 영역으로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