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다케시


530918_e34d.jpg

이름오카다 다케시(岡田 武史, おかだ たけし)
생년월일1956년 8월 25일
국적일본
출신지오사카
포지션수비수
학력와세다대학
소속 팀후루카와 전기 (1980-1990)
스태프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1997-1998)
홋카이도 콘사돌레 삿포로 (1999-2001)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03-2006)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007-2010)
항저우 뤼청 (2012-2013)
국가대표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1980-1985) 24경기 1골

1 소개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에 진출시킨 감독

그리고 일본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원정에서 월드컵 16강에 진출시킨 감독

당시에는 과소평가받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재평가받는 일본의 명장

오카다 다케시는 일본의 前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이다. 그는 선수 시절 꽤나 유명한 축구 선수였으며 국가대표로도 여러번 출전했다. 이후 선수 인생을 정리한 그는 감독으로서 일본 대표팀을 2번 맡아 일본 축구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 과정에서 부침이 많아서 비난을 많이 받았고 경질 위기에 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후 일본 축구 대표팀이 지지부진하면서 사람들은 그의 지도력을 재평가하고 있다.

2 선수 경력

so-ima-column_p0009-01.jpg

다케시는 1956년 8월 25일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다케시는 초등학교 시절 오사카 구장을 본거지로 하고 있던 프로야구 구단 난카이 호크스가 운영하는 '난카이 호크스 어린이 모임'에 가입하여 투수로 활동했고 호크스 응원을 위해 오사카 구장에 자주 들락거리던 야구 소년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야구부의 선후배 관계에 적응하지 못한 그는 자신이 야구 선수로서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고 당시 멕시코 올림픽에서 훌륭한 활약을 선보인 일본 축구 대표팀에 반해 그때부터 축구로 진로를 변경했다. 그는 이 시기에 축구 선진국인 독일로 가서 축구 선수로 활동하고 싶어해 부모를 졸랐지만 주변의 만류에 결국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다케시는 덴노지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축구를 계속햇다. 덴노지 고등학교는 대학 예비학교였고 축구에는 전혀 실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진가를 발휘해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이 시기 고교생으로서 청소년 대표팀에 뽑힌 이는 오카다를 포함한 3명 뿐이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열린 선수권 대회에서 출전해 좋은 모습을 보였고 곧 덴노지 고등학교가 자랑하는 축구 선수가 되었다.

이후 다케시는 대학 시험을 봤지만 떨어지자 일년 재수하기로 했다. 이때 와세다 대학 축구부의 부장인 호리에 타다오가 "일년 재수해도 합격하는 것은 무리일 거다. 내가 추천할 테니 체육 전공을 응시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다케시는 오히려 의지를 불태우며 열심히 공부해 마침내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에서 축구부에 소속되지 않고 축구 동호회 'rice Kickers'에 들어가 축구를 취미로 즐겼다. 그러다가 일본 축구 협회 관계자들이 축구 기술을 전문적으로 갈고 닦기 위해 축구부에 들어갈 것을 권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6월에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재학하며 유니버시아드 일본 대표로 선정될 정도로 우수한 축구 선수로 각광받았고 2살 연상인 아예코와 대학생 4학년 때 결혼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다케시는 축구가 아닌 언론 쪽으로 취업하고 싶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1980년 후루카와 전기회사에 입사해 사원으로 일하는 한편 후루카와 전기 공업 축구부(제프 유나이티드 치바의 전신)에 입단했다. 그는 대학시절과 변함없이 축구 지능이 뛰어난 수비수로서 일본 리그에서 맹활약했다. 소속팀은 그의 활약을 앞세워 1985년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1986년 일본 팀 최초로 아시아 클럽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달성헀다. 그는 JSL 리그에서 1980년부터 1990년까지 10년간 활동하며 통산 189경기에 출전해 9골을 기록했다.

한편, 다케시는 1980년 6월 1일 제펜컵 에스파뇰과의 경기에서 일본 대표 선수로 데뷔했다. 그후 그는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된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게 되었다. 당초 발표된 대표팀 명단에는 다케시의 이름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마에다 히데키가 부상을 당해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되면서 다케시가 추가로 소집되었다. 대표팀은 이 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지만 준결승전에서 이라크에게 1:0으로 패배했다. 이때 다케시는 2경기에 기용되었다. 이후 1982년 11월 25일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했는데, 이 골은 그의 대표팀 경력에서 그가 기록한 유일한 골이다.

1984년 LA 올림픽 최종 예선에서는 센터백으로서 활동할 예정이었지만 첫 경기를 치르기 사흘 전에 근육 경련을 겪는바람에 경기에 뛰지 못했다. 이후 그는 종종 대표팀에 뽑히긴 했지만 주로 벤치를 달구기만 했다. 다케시는 대표팀에 뽑혀봐야 벤치나 달구는 상황에 질려 대표팀에서 활동할 동기를 잃고 1985년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일본 대표팀에서 24경기에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3 감독 경력

1990 시즌이 끝난 후 선수 인생을 은퇴한 다케시는 이듬해 후루카와 축구단의 코치로 취임하면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1992년 독일로 가서 코치 연수를 받았고 1993년 귀국 후 당시 J리그 열풍에 힘입어 프로 구단으로 변모한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그는 NHK 방송국의 BS1 채널에서 1994 FIFA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의 해설을 맡았다. 그러다가 1993년 10월 28일 이라크와의 최종 예선전에서 이른바 도하의 기적을 목도한 후 "이제야 일본이 아시아 축구로서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본선 진출에 실패해서 너무나도 슬프다."라는 말을 했고, 해설 도중 눈물을 흘리며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3.1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1기

007.jpg

1995년, 다케시는 일본 축구 대표팀의 코치로 발탁되었다. 당초 다케시는 당시 대표팀 감독인 가모 슈와 안면이 없었고 지도자로서의 경험도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사했지만 주변의 권유에 결국 대표팀 코치를 맡기로 했다. 그런데 1997년 10월, 프랑스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일본 대표팀이 탈락 위기에 빠지자 가모 슈 감독이 경질되었다. 일본 축구 협회는 가모 슈 감독을 경질한 후 '2년간 대표팀과 함께 하면서 대표팀을 확실히 파악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다케시를 감독 대행으로 임명했다. 갑작스럽게 감독으로 부임한 다케시는 자신이 감독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감독 부임 후 치른 첫번째 경기인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패배 직전에 몰리던 도중 극적인 동점골로 무승부를 거두게 되자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후 축구 협회는 대회가 얼마 안남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감독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가 계속해서 감독을 맡게 했다.

jyoholbal.jpg
조흐르바루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둔 후 기뻐하고 있는 일본 선수들

이후 다케시는 "초보 감독이 뭘 할 수 있겠냐"는 언론의 비웃음을 뒤로 한 채 대표팀을 제대로 구성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특히 그는 가모 슈 감독에 의해 대표팀에서 제외된 나카야마 마사시 등을 다시 소집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일본 대표팀은 살아났고 아시아 지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후 1997년 11월 16일, 일본 대표팀은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이란과 맞붙었다. 연장전까지 치른 이 승부는 일본의 3:2 승리. 이로서 일본은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이후 일본인들은 이날의 경기를 조호르바루의 환희라고 부르고 있다.

일본 대표팀을 극적으로 월드컵 본선에 진출시킨 다케시는 공로를 인정받아 정식으로 대표팀 감독에 부임했다. 그러나 1998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직전에 치른 평가전에서 대표팀 주전 선수인 미우라 가즈요사와 기타자와 쓰요시가 부진하자, 다케시는 이들을 스쿼드에서 제외시킴으로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다케시는 월드컵 본선에서 1승 1무 1패로 승점 4점을 획득해 16강에 진출하겠다고 표명했으나 오히려 3전 전패를 당하고 조별 예선에서 광탈했다. 대회 종료 후, 다케시는 월드컵 본선에서의 부진에 책임을 지고 감독직을 사임했다.

3.2 훗카이도 콘사돌레 샷포로 시절

note-148228-i21-img.PNG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려난 후, 다케시는 반년 동안 위성 방송 WOWOW에서 이탈리아 세리에A 중계 해설을 맡았고 당시 유벤투스를 지휘했던 마르셀로 리피를 취재해 그로부터 축구관 및 축구 전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1999년 J2리그로 강등된 콘사도레 삿포로의 감독에 취임했다. 전년도에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었던 그의 부임해 주목도 및 기대치가 높았으나 취임 첫해엔 J1리그 승격 경쟁에 가세하였으나 승격에 실패하고 5위를 거두는 선에 머물렸다. 그후 다케시는 심기일전을 위해 경기를 지휘할 때 항상 착용했던 정장을 벗고 팀 유니폼을 착용했으며 팀의 전술, 선수들의 프로 의식 등을 개선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을 착수했다. 그 결과 취임 2년째인 2000년, 그는 2위 우라와 레즈와 승점 12점차 1위를 질주하며 J2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J1리그에 당당히 입성했다.

2001시즌, 콘사도레 삿포로는 다케시의 지휘하에 전기 리그 8위(6승 3무 6패로 승점 21점), 후기 리그 14위(4승 2무 9패 승점 13점)의 성적을 거둬 최종 순위 11위를 기록, J1리그 잔류에 성공했다. 또한 다케시는 에메르손, 반도 류지, 야마세 코지, 곤노 야스유키 등 젊은 인재들을 발굴해 삿포로의 미래를 밝게 했다. 하지만 다케시는 시즌이 끝난 후 감독 직에서 물러나 해설자가 되어 해외 축구 경기 중계를 도맡았다.

3.3 요코하마 F. 마리노스 시절

954_1.jpg

다케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NHK 방송국의 축구 해설위원을 맡았다. 월드컵이 끝난 후 일본 축구 대표팀을 이끌었던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이 사임하자, 세간에서는 다케시가 차기 대표팀 감독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는 대표팀 감독에 부임하지 않았고 2003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취임 1년차에 전기 리그에서 우승하고 여세를 몰아 후기 리그도 우승하면서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이라는 대업을 이루었다. 또한 2004년에도 안정환의 활약을 앞세워 전기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J리그 역사상 최초의 3단계 리그 연패릐 위업을 이루었다.

2005년에도 우승할 것이라는 전망이 대세였지만 아시안 챔피언스리그와 A3 챔피언스컵을 동시에 치러야 하는 등 빽빽한 일정에 시달린 데다 A매치에서 주전 선수들이 여려 명 부상을 당하면서 순위가 덜어져 결국 9위에 그치고 말았다. 시즌이 끝난 뒤 사람들은 그가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이라고 관측했지만 요코하마 보드진은 그를 계속 신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다케시는 2006 시즌에 개막 4연승을 달렸지만 그후 팀 컨디션이 급격히 악화되었고 18라운드 종료 시점에서 자력 우승의 가능성이 소멸되고 말자 19라운드 오미야 전을 치룬 후 사의를 표명했다. 결국 2006년 8월 24일, 그는 3년 반에 걸친 요코하마의 지휘를 끝마치고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오카다는 자신이 사임하게 된 이유에 대해 표면적으로는 아내의 사망과 성적 부진에 따랐다고 밝혔지만 그 이면엔 팀 전력 강화 정책을 둘러싼 프런트와의 불화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나는 지도자로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고 밝히며 자신의 사임엔 성적 부진 이외에 다른 원인도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3.4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기

default_1d8c57a1b857429ee4c36894f36fac30.jpg

그후 일본 축구 협회의 특별 이사로 활동중이던 다케시는 2007년 11월에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있던 이비차 오심 감독이 급성 뇌경색으로 입원하면서 대표팀을 이끄는 것이 어렵게 되자 오노 츠요시 일본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의 선택을 받아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 무렵 우라와의 홀거 오지크들 감독도 적임자로 거론되었지만 오노는 다케시를 선택했다. 훗날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비차 오심 감독이 쌓아온 토대 위에 새로운 개성을 쌓아야 하고 강렬한 리더십과 구심력,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런 인물은 다케시 뿐이었다."고 설명햇다.

2007년 12월 7일, 다케시는 일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해 2008년부터 대표팀을 이끌게 되었다. 월드컵 통산 성적이 0승 3패인 감독이 다시 같은 국가대표팀 감독을 하게 된 것은 세계 축구 역사상 최초였다. 그는 1997년에 대표팀 감독을 맡았을 때는 간편한 츄리닝을 입어 세간의 화제를 이끌었지만 이번에는 축구협회장의 권고에 따라 정장을 착용한 채 대표팀을 이끄는 경우가 많아졌다. (물론 악천후 때는 저지 도는 그라운드 코트 차림으로 지휘했다.)

2009년 6월 6일 2010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 6차전인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일본 대표팀은 1:0 승리를 거두었다. 이로서 일본 대표팀은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어 조2위를 기록 4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달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하다가 퇴장당했는데, 이 퇴장은 그의 감독 인생 사상 최초였다.

그후 그는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일본 대표팀은 2010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국내파만 차출한 결과 중국, 북한, 대한민국과 순위경쟁을 벌여 3위에 그쳤다. 또한 2010년 4월 7일에 세르비아 대표팀과의 경기에서 3:0으로 패배했다. 이에 1000여 명에 달하는 축구 팬들은 다케시가 축구 대표팀을 잘못 이끌고 있다며 그를 해임할 것을 요구하는 연명 서명서를 제출했다. 게다가 이후 잉글랜드, 코트디부아르에게 패배를 당하는 등 월드컵 본선 경기 전까지 평가전 4연속 패배라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일본 축구팬들과 언론사들은 대표팀의 한심한 골결정력과 다케시의 잘못된 선수 기용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야후! JAPAN이 실시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 그를 지지하는 이들의 비율은 불과 16%였다. 심지어 다케시가 월드컵 도중 해임될 가능성도 높다는 예측도 제기될 지경이었다.

다케시는 2010 월드컵의 목표를 4강으로 설정했지만 이렇듯 평가전에서 영 좋지 못한 경기력으로 일관하자 사람들은 그의 목표를 비현실적이라며 혹평을 퍼부었다. 계다가 조별 리그 상대가 카메룬, 네덜란드, 덴마크로 정해지자 일본 전역은 절망에 휩싸였다. 하나같이 축구 실력이 준수한 편이어서 이 세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기야마 시게키 등의 축구 평론가들은 일본 대표팀이 1승도 하지 못한 채 조별예선을 탈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렇듯 다케시는 축구 팬들과 언론의 불신과 저평가에 시달린 채 월드컵 본선에 임했다.

그러나 다케시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었다. 2010년 6월 14일에 치러진 카메룬과의 월드컵 예선 1차전에서, 일본은 전반전에 넣은 한골을 지켜내며 1:0 신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일본의 원정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승리였다. 그후 6월 19일에 열린 네덜란드 대표팀과의 경기에서는 1:0으로 패했지만 6월 24일에 열린 덴마크와의 3차전에서는 전반전에 2골을 넣은 후 시종일관 리드를 지키며 3:1로 승리햇다. 이로서 일본은 조별 예썬을 2승 1패 승점 6점을 확보하며 원정 월드컵 대회에서 최초로 16강에 진출했다.

이러한 위업을 목도한 국내외 언론은 그때까지 보여주던 비판적인 자세를 탈피하고 다케시의 지휘를 극찬했다. 또한 그들은 조별 예선에서 보여준 일본 대표팀의 탄탄한 수비력에 대해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본따 "오카나찌오"라는 별칭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 상을 중심으로 다케시에 대해 비난과 불신을 표명했던 사람들의 '사과' 표현이 잇따랐다. 급기야 "오카, 미안해요"라는 말은 2010년 신어,유행어 대상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이후 다케시는 일본 축구 사상 최초의 월드컵 8강 진출을 목표로 삼아 파라과이와 맞붙었다. 이 경기는 경기 종료까지 0:0으로 결판이 나지 않았고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지 않아 승부차기로 승부를 겨루게 되었다. 결과는 일본의 3:5 패배. 이리하여 일본은 8강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그를 명장이라고 칭송했다. 그의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계약은 2010 월드컵이 마지막으로 만료되게 되어 있었고 다케시는 파라과이와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계약을 연장할 생각이 없으며 더 이상 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에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선 다케시의 두터운 인망과 풍부한 인맥에 주목해 그를 일본 축구협회 회장으로 선임시키자는 주장이 일기도 했다.

다케시는 2010년 7월 25일에 열린 일본 축구협회 임원 회의에서 일본 축구 협회 이상에 취임했다. 이는 축구 협회 회장으로 새로 부임한 오구라 준지의 천거에 의한 것이었다. 그는 이사로 2년간 일하다가 2012년 6월 퇴임했다. 또한 2010년 8월에는 WOWOW의 축구 해설자가 되어 스페인 라리가 중계 해설을 담당했다. 이 시기에 타국으로부터(그 자신은 어느 나라인지 밝히지 않았지만 미디어에서는 카타르일 것이라고 추측햇다) 대표팀 감독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2010년 11월에는 아시아 축구 연맹으로부터 AFC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3.5 항저우 뤼청 시절

2012년, 다케시는 중국 슈퍼리그의 항저우 뤼청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성적이 지지부진하자 그는 2013년 11월 6일 계약을 1년 남기고 감독 자리를 사퇴했다. 이후 그는 당분간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밝히고 야인의 삶으로 돌아갔다.

3.6 그 후의 삶

2014년 2월, 다케시는 딜로이트 토마츠 컨설팅, 특임 수석 고문으로 취임했다. 또한 그는 일본 내각의 '선택하는 미래' 위원회 위엄으로 취임해 교육 문제에 임하고 있다. 2014년 11월 시코쿠 축구 리그 FC 이마의 운영 회사에 출자하고 이 팀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리고 2016년 3월에는 일본 축구 협회 부회장에 취임했으며 종종 축구 강연 및 J리그 경기 해설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