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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심
이름 | 이반 이비차 오심 (Ivan Ivica Osim) [1] |
국적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생년월일 | 1941년 5월 6일 |
출생지 |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 |
신체 조건 | 189cm, 108kg |
포지션 | 공격수 |
유스팀 | FK 젤레즈니차르 사라예보 (1954~1959) |
선수 경력 | FK 젤레즈니차르 사라예보 (1959-1968) PEC 즈볼러 (1968) RC 스트라스부르 (1970-1972) CS 스당 아들러 (1972-1975) 발랑시엔 FC (1975-1976) RC 스트라스부르 (1976-1978) |
지도자 경력 | RC 스트라스부르 (1978-1986)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1986-1992) FK 파르티잔 (1991-1992) 파나티나이코스 FC (1992-1994) SK 슈투름 그라츠 (1994-2002) 제프 유나이티드 (2003-2006)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006-2007) |
국가대표 | 16경기 8골 |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 |||||||||||
지쿠 (2002~2006) | → | 이비차 오심 (2006~2007) | → | 오카다 다케시 (2007~2010) |
목차
1 소개
유고슬라비아의 전 축구 선수, 감독으로 현재 보스니아 국적 보유.
2 선수 시절
1954년 FK 젤레르니차르 사라예보[2]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고 1959년 프로 팀으로 승격한다. 이후 스트라스부르, 발랑시엔 등 프랑스 클럽을 전전하였다.
이후 스트라스부르에서 은퇴를 한다. 통산 85득점. 여담으로 오심은 선수 시절 단 한 번도 옐로카드를 받은 적이 없다.
3 감독 커리어
3.1 초기
은퇴 후 자신의 현역 마지막 팀인 스트라스부르에서 코치를 지낸 후 감독으로 취임하여 1986년까지 역임했다.
3.2 유고슬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
유고슬라비아 대표팀 최후의 감독
오심이 대표팀에 취임했을 당시는 내전이 끝났을 때였지만 민족 간 서로 갈등이 남아있었다. 팀이 뭉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오심은 팀을 잘 추스렸고 이는 드라간 스토이코비치, 고란 부녜브체비치 등 스타 군단이 되어갔다. 결국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8강에 오르는 성과를 보여준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메이저 대회 진출 자격을 박탈당하고 오심은 대표팀을 떠난다.
3.3 파나티나이코스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쫓기듯이 파나티나이코스에 취임한[3] 오심은 그 시즌에 컵 우승을 차지한다. 1990년 월드컵과 파나티나이코스에서의 성공 이후로 레알 마드리드, FC 바이에른 뮌헨 등 빅클럽들의 감독직 제의가 쇄도했지만 오심은 슈투름 그라츠를 선택한다.
3.4 슈투름 그라츠
리그 우승 2회, 컵 대회 우승 3회, 챔피언스리그 출장 3회의 성적을 남긴, 클럽 최초의 타이틀 감독
오심 취임 당시 그라츠는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중하위권 성적이였으며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여기서 오심은 구단에 전술과 규율을 도입하였고 젊은 선수들을 과감히 기용했다. 여기에 당시 이 리그에서는 생소하던 달리는 축구를 전술로 사용하여 팀을 우승 후보로 만들고 팀을 챔피언스리그 3회 연속으로 출전시킨다.
하지만 팀은 재정난을 이유로 주력 선수들을 팔았고 성적이 안좋아지자 2001-02 시즌 종료 후 쫓겨나듯이 사임했는데, 아주 안 좋게 헤어졌다. 급료 미지급 등의 이유로 소송까지 갔는데, 이 소송에서는 오심이 이겼다.
3.5 제프 유나이티드
2003년 취임하자마자 혹독한 훈련으로 제프 유나이티드를 '달리는 팀'과 '우승 경쟁을 할 수 있는 팀'으로 만들고자 하였고, 풍족치 못한 재정 지원에도 불구하고 젊은 자원들을 욱성하고 2005년 승부차기 끝에 컵 우승으로 제프 유나이티드의 첫 타이틀을 얻게 해준다.
2006년 7월 16일, 오심이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출되자 클럽은 그의 장남이자 수석코치인 아마르 오심을 감독으로 선임하나,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야마자키 나비스코컵 예선탈락, 일왕배 1회전 탈락, J1리그 13위의 형편없는 성적으로 구단을 실망시켜 1년 만에 경질되었다.
3.6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예선 광탈한 이후 지쿠와 결별하고 제프 유나이티드에서의 성과를 인정받아 2006년 7월 21일 대표팀에 취임한 오심은 A매치 20전 12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2007년 12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회복했지만 사퇴하여 일본 국대 감독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후임은 오카다 다케시.
3.7 근황
대표팀에서 물러난 후 2009년 1월 오스트리아의 호텔에서 슈투름 그라츠 창립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일본 대표팀에 대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이후 근황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추가바람
4 스타일
끊임없이 달린다
오심은 슈투름 그라츠 취임 당시 팀이 기존에 주로 써 온 4-4-2 포메이션에 롱볼을 차고 몸싸움을 통해 골을 넣는 방식 대신 끊임없이 달린다라는 모토로 전술을 구상했는데, 이 전술을 수행하기 위해 강한 체력과 높은 전술 이해도를 필요로 하였다.
5 여담
- 본인이 말하길 축구 감독이 안됐으면 수학 교수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 PK에 대해 유독 악연이 많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8강전에서 PK에서 패배했던 기억 때문에 2005년 나비스코 컵 결승전 PK를 지켜보지 않았다.[4]
- 본인이 취임했던 클럽 팀에서 적어도 한 번 이상 타이틀을 획득하였고 단 한 번도 경질된 적이 없다.
5.1 일본과의 관계
- 최초의 인연은 1964 도쿄 올림픽 때 대표팀에 발탁되어 온 것인데, 이 때 일본의 컬러 TV를 보고 감명을 받았고, 농촌 구경 도중 낯선 외국인임에도 꺼리낌없이 배를 나눠주는 것에 감동받아 일본인에 대해 친밀감을 느꼈다고 한다. 귀국 후에도 계속 그 얘기만 했다고.
- 1991년 FK 파르티잔이 기린 챌린지컵에 초청되어 일본을 다시 방문했다. 이 때 일본 선수들의 발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6 어록
오심은 일본에서 굉장히 인기가 많았는데 특히 오심의 어록이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 얼마나 많은 인기를 끌었냐면 어록집이 50만부 가까이 팔렸을 정도. 다음은 오심의 어록 중 일부이다.
진정으로 강한 팀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제프 시절 기자들이 왜 쉴 새 없이 연습시키냐고 묻자.
휴식에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
(대표팀에 부상자가 계속 발생한다는 의문에 대해서) 토끼가 사자에게 쫓겨 도망할 때 근육 파열이 생기는가? 선수들의 준비가 부족한 것이다.
아이디어가 없는 사람도 축구는 할 수 있지만, 축구 선수는 될 수 없다.
지네딘 지단이나 데이비드 베컴, 호나우두와 같은 선수들이 모여 있으면 누가 그들을 위해 달릴 것인가? -오심이 여러 빅클럽의 제의를 거절한 이유
실수를 저질렀을 때 꾸짖더라도 계속 기용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는 경기에 계속 나가야 성장할 수 있다.
결실이라고 잘라 말하면 인생은 멈추고 만다.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한계를 만들지 말고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