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나치오


catenacc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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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신술이 아니다!! 포토샵은 더더욱 더 아니다!!
(...) [1]

1 개요

" 가장 아름다운 축구는 0:0의 축구이다."

ㅡ 이탈리아 축구 명언

이탈리아 축구의 영혼.

축구 전술 중 하나. 1960년대 AC 밀란의 감독 네레오 로코인테르나치오날레의 감독 엘레니오 에레라로부터 정립되기 시작한 전술이다. 이탈리아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전술이다. 카테나치오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빗장'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다.

2 역사

2.1 1960년대

사실 최후방에 리베로를 두는 전술 자체는 1940년대 말 살레르니타나의 쥐세페 비아니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고, 이는 이 카테나치오 전술의 시초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가 제대로 정립되기 시작한 때는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펠레가린샤라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천재 두 명을 가지고 4-2-4 전술을 통해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요즘 축구로 따지자면 메시네이마르랑 같은 국대에서 뛰는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브라질같은 남미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인기가 약한 유럽은 브라질에게 엄청나게 고전하였고, 그들을 막기 위해 수비적인 전술들이 고안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쥐세페 비아니 감독의 뒤를 이어서 살레르니타나의 감독을 맡은 네레오 로코는 비아니감독이 고안한 카테나치오 전술을 바탕으로 살레르니타나를 세리에 A 2위까지 끌어올리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고,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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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네레오 로코 감독의 카테나치오 전술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를 두는 전술과는 달랐다. 비아니의 전술과 같은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은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두는 형태였지만, 로코감독은 이에 멈추지 않고 아예 팀의 미드필더 조반니 트라파토니[3]를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하여 수비 상황시 실질적으로 리베로 앞에 4명의 수비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19세기 축구가 아니라 20세기 축구였다. 그리고 뛰어난 협력 수비력과 커버링 실력을 가진 베테랑 수비수 체사레 말디니[4]에게 맡겼다. 또한 중원 역시 당시 세계 축구를 호령하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미드필더 디노 사니에게 볼란테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이 밀란의 전술이 무작정 수비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AC 밀란의 레전드 지아니 리베라가 전방의 3톱[5]을 보조하면서 공격하는 시스템이라 무시무시한 역습이 이어지게 되었고, [6] 이로서 1962/63시즌, 1968/69시즌 유로피언 컵(현재의 챔피언스 리그)를 들어올리는 밀란의 최초의 전성기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보고 AC 밀란의 지역 라이벌 인터 밀란의 감독 엘레니오 엘레라 역시 자신의 팀에 카테나치오를 정착시키기 시작하였다. [7] 하지만, 엘레라의 카테나치오는 밀란의 그것과는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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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엘레라 감독의 카테나치오는 당시의 일반적인 리베로 전술처럼 리베로 앞에 3명의 수비수를 놓되, 2명의 선수를 전술의 핵심으로 이용해 냈다. 지아친토 파케티[8]자이르이다. 지아친토 파케티는 수비뿐 아니라 공격에도 재능이 있어, 오버래핑을 시도해 엄청난 공격적인 움직임을 보였고[9] 따라서 인테르는 공수의 유연성을 맞출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가린샤, 펠레등의 괴물들에게 밀렸지만, 그래도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던 오른쪽 윙어 자이르에게 윙어로써 공격을 하되, 수비가담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오른쪽 풀백이 없다. 많은 활동량과 좋은 수비력을 필요로 하였지만, 자이르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냈다. 이로서 인테르는 수비시에 빠르게 5백으로 전환이 가능하였다. 또한 파케티의 오버래핑이 이어지면, 왼쪽 윙어 자리에 서던 마리오 코르소가 바르셀로나에서 온 루이스 수아레스[10]의 플레이메이킹을 도와주었고, 거기에 산드로 마쫄라가 판타지스타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이 결과 인터밀란 역시 AC밀란과 더불어 전성기를 가지게 되고[11], 세리에A와 유로피안 컵을 우승하였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같은 지역의 라이벌 팀비슷한 전술을 가지고 똑같이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역시 라이벌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이런 역사가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를 더욱 불타오르게 한것일지도.근데 지금은...... 안습

이런 카테나치오 전술은 유럽에서 엄청난 효과를 몰게 되고,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국대 안에서도 라이벌감정때문에 각 팀 선수들을 전후반 나눠서 뛰게 한건 함정 하지만 이 카테나치오 전술은 네덜란드어느 한 천재가 이끄는 토탈 풋볼에 의해 1970년대 사장되기 시작하였다.

2.2 1970/80년대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의 엄청난 활약 속에서 토털 풋볼의 혁신성과 카테나치오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고 카테나치오는 그 나름대로의 변신을 하기 시작한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당시, 엔조 베아르조트감독이 세운 새로운 카테나치오 전술은 4-4-2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리베로 덕후 이탈리아 그 놈의 리베로를 포기하지 못 한 나머지 독특한 4백 라인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인 4백이 풀백 2명과 센터백 2명으로 이루어지지만, 베아르조트 감독의 카테나치오에선 1명의 리베로와 2명의 센터백이 지역 수비를 하고 왼쪽 풀백이 오버래핑을 하여 수비시에 유연하게 4백을 형성하였다. 기형 4백 4명의 미드필더라인 역시 독특하게 구성하였는데, 중앙 미드필더가 수비형 미드필더와 플레이 메이커 사이에서 보조 하는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고, 한편 오른쪽 윙어를 전진시켜 공격시 3톱을 형성시키고, 이로 인해 비는 오른쪽 풀백을 수비형 미드필더가 채워주었다.2톱은 중앙 공격수와 쉐도우 스트라이커로 이루었는데, 쉐도우 스트라이커는 왼쪽 측면으로 자주 움직여 왼쪽 풀백의 오버래핑을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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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형적인 4-4-2 전술은 그 능력을 확실히 펼칠 수 있는 선수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있다.지안루이지 부폰이전 이탈리아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인 디노 조프와 1978년 월드컵 신인왕을 타며 지잔토 파케티의 후계자 역할을 하던 안토니오 카브리니, 3백 가에타노 시레아, 클라우디오 젠틸레, 풀비오 콜로바티/쥐세페 베르고미[12]가 훌륭한 수비진을 이루었고, 프란체스코 토티 이전 로마의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하던 오른쪽 윙어 브루노 콘티, 그 외의 미들진 지안카를로 안토뇨니, 마르코 타르델리, 가브리엘레 오리알리 등의 미들진이 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1982년 월드컵의 주인공,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우승으로 이끈 영웅, 파올로 로시가 엄청난 득점력을 펼쳤고. 그 결과 1982년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우승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월드컵에는 또 다른 미친 천재가 나타나고....

2.3 199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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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AC 밀란의 감독이었던 아리고 사키는 미드필더 진에 4명을 배치해놓는 플랫 4-4-2 포메이션의 압박 전술을 고안해냈다. 이는 축구 전술사에 있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 영향으로 아리고 사키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지휘하게 되었다.

사키는 자신의 제자들이었던 AC 밀란의 포백[13]을 그대로 국가대표팀에 끌어 모았고[14], 이들은 당대 세계 최강팀으로 이름을 날리던 AC 밀란[15]의 주전 4백이었기때문에 당연히 큰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이 4백이 실제 월드컵 무대에서 가동된 것은 1차전인 아일랜드전뿐이었고 심지어 결과는 1:0 패배. 그리고 타소티는 2차전부턴 선발명단에서 제외되었다. 이어지는 2차전 노르웨이전에선 바레시가 부상으로 아웃되고 주전 골키퍼였던 삼프도리아의 수문장 지안루카 팔류카가 퇴장당하는 요지경속에 간신히 1:0 승리. 이후 타소티가 8강 스페인전때 잠깐 선발로 복귀했다가 루이스 엔리케를 팔꿈치로 가격한게 경기후 적발되어 사후징계로 나가떨어지고, 결승전인 브라질전엔 바레시가 부상에서 돌아왔나 했더니 이번엔 코스타쿠르타가 준결승전이었던 불가리아전에서의 경고누적으로 출장할 수 없게되어버렸다. 즉 밀란 4백중 월드컵 내내 자리를 지킨것은 파올로 말디니한명뿐. 그래도 바레시의 경우 결승전에서 그야말로 혼신을 다한 멋진 활약을 보여주었고, 코스타쿠르타의 경우 결승전을 제외하면 전 경기에서 자리를 지키며 평소 듣기도 했던 '바레시의 마리오네트' '바레시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선수'라는 비아냥을 헛소리로 만드는 멋진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전경기에 출장한 말디니는 대회 베스트팀에 선정. 타소티를 제외하면 다들 명성이 허명이 아닌 활약을 해주긴 했다[16].바레시와 타소티의 빈자리는 안토니오 베나리보, 로베르토 무씨, 루이지 아폴로니가 멋지게 메웠고[17] 주전 골키퍼 팔류카의 퇴장(조별예선 2차전) 및 출장정지(조별예선 3차전 및 16강전)라는 비상사태도 라치오의 수문장이었던 루카 마르케지아니가 멋지게 수습해내서 결과적으론 월드컵이 끝난 후에도 7경기 5실점이라는 준수한 수비력을 보여주었지만, 조별리그 동안 3경기 2득점이라는 빈약한 공격력으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올랐다.[18] 하지만 토너먼트가 시작하면서 로베르토 바조가 각성하였다. 로베르토 바조가 그야말로 대활약, 토너먼트에서 위기 때마다 로베르토 바조의 득점으로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19], 결승전에서 호마리우를 위세로 한 엄청난 공격진의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승부차기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승부차기에서 주장 바레시와 공격수 마싸로, 그리고 에이스 로베르토 바조가 실축, 90년 월드컵에 이어 또다시 승부차기때문에 울고 만다. 사실 마싸로가 실축한 시점에서 사실 이탈리아의 승부차기 승리는 어렵긴 했지만 그동안 팀을 하드캐리해왔던 에이스인 바조의 실축은 그야말로 온 이탈리아 축구팬들의 경악과 절망을 불러왔으며, 월드컵후 모든 비난의 화살이 영웅 바조에게 집중되었다.그외에 전술가로 기대를 모았으나 정작 월드컵동안엔 기대에 못미쳤던 감독 아리고 사키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이 대회에서 상기 이미지대로 선발멤버가 나온 적은 없다. 말디니, 알베르티니, 로베르토 바조 셋을 제외하면 멤버도 경기마다 한두명씩 바뀌었고, 조별예선 2~3차전과 16강전에선 4-3-1-2에 더 가까운 포메이션으로 나오는 등...위 이미지는 그와중 가장 많이 선발멤버로 선택을 받은 선수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저중에서 코스타쿠르타를 바레시로 바꾸면 결승전때 멤버[20] 가 되지만, 결승전을 제외하면 이 대회에선 코스타쿠르타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더 높았기에...

2.4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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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쿼드만 놓고보면 역대급이다. 스쿼드에 비해 경기력은 좀 별로였다는것이 함정[21] 1998년, 2002년 월드컵[22]에 4강조차 못 들어가는 신세가 되면서 카테나치오를 대표로 하는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위상은 많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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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칼치오폴리가 터지고 나서,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불살러 버리겠다는 작정으로 치열하게 뛰었고, 그 결과 지안루이지 부폰파비오 칸나바로가 지키는 이탈리아 수비진은 7경기에서 단 2실점[23] 만을 거두며 2006년 월드컵을 우승하며 카테나치오의 위력을 계속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그말싫 그래도 유로2012는 그나마 잘했다. 하지만 이때도 네스타는 조별리그 초반에 부상으로 실려 나갔다(...). 그 자리를 마테라치가 메꿨고, 수비적인 측면에서나 공격 셋피스 측면에서나 잘 해주었다. 가장 잘한 것은 결승전에서 지단에게 패드립을 날려 박치기를 유도해서 우승할 수 있었다.
  1. 위 사진은 EURO 2012 당시 이탈리아 선수단 vs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당시 이니에스타의 위엄과 이탈리아의 선전을 한 번에 보여주는 짤(...). 참고로 게시판에 올라온 사진 파일 제목이 "세상에서 제일 몸값 비싼 백댄서" 이다. 그와중에 마르키시오 졸귀
  2. 상기 이미지에 오타가 있는데, 최전방 공격수 알파티니는 알파티니가 아니라 알타피니(José Altafini)다(...)
  3. 훗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감독직을 맡는다. 그리고 한국한테 역대급 경기를 보이면서 파올로 말디니의 국대 은퇴경기를 지휘했다.
  4. 파올로 말디니의 아버지이다.
  5. 그 3톱의 한 명인 조세 알타피니는 당대 최고의 골잡이 중 한 명이었다.
  6. 참고로 이 전술의 경우 수비하는 선수의 수가 많아서 공격하는 선수의 숫자가 적어 상대적으로 리베라의 역할이 막중하였는데, 리베라는 그 임무를 완수해냈다. 말 그대로 판타지스타.
  7. 스페인 출신의 그는 스페인의 공격 축구 전술을 밀었지만, 카테나치오한데 밀려버리고(...) 결국 AC 밀란처럼 카테나치오를 사용하였다.
  8. 당시 인테르와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장
  9. 1955/56 시즌에는 두자릿 수 득점을 올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지잔토 파케티는 현대 풀백 오버래핑의 시초이자 현대 풀백의 아버지로 평가된다.
  10. 스페인 최초의 발롱도르 수상자로 우루과이의 루이스 수아레스와는 동명이인.
  11. 당시 라 그랑데 인테르(la grande inter)라 불리우며 la grande 호칭을 받은 유이한 팀이다. (나머지 하나는 토리노)
  12. 베르고미는 콜로바티가 부상당했던 브라질전에서 그대신 교체투입된이후 결승까지 출장. 콜로바티도 그 경기에서만 결장했을뿐 준결승전, 결승전에 모두 출장하였다. 브라질전에서 젠틸레가 옐로우카드를 적립하여 준결승전인 폴란드전에 결장하게 되자 폴란드전에선 시레아와 신예 베르고미, 그리고 부상을 회복한 콜로바티가 출장했고, 결승전인 독일전에선 플레이메이커였던 안토뇨니가 결장한대신 카브리니, 젠틸레, 시레아, 콜로바티, 베르고미로 이어지는 수비라인이 총출동하는 진풍경속에 독일을 3:1로 일축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13. 파올로 말디니, 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르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14. 말디니와 바레시는 사키가 이탈리아 감독이 되기전부터 이미 대표팀에 뽑혀왔으나, 코스타쿠르타와 타소티는 이전에는 쟁쟁한 다른 팀 선수들(주세페 베르고미, 리카르도 페리 등등)때문에 선발되지 못했었다.
  15. 더구나 월드컵 바로 직전시즌인 93-94시즌 챔피언스리그의 우승팀이자 세리에 A 우승팀이기도 했다. 해당시즌 세리에 A에서는 엽기적인 저득점축구를 했으나 그와 동시에 실점또한 매우 적은 짠물축구를 하여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16. 사실 타소티의 경우, 1960년생으로 당시 이미 만 34세의 노장이었으므로 온전한 활약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있긴 했다. 이미 직전시즌 리그에서도 상당시간의 출장시간을 크리스티안 파누치와 분담했던 상황. 더구나 당시 미국 월드컵은 무더위가 극심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대회였다.(같은 대표팀 선수이자 밀란의 후배였던 당시 24세의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도 더위로 인한 컨디션 저하로 고생했을정도) 그래도 스페인전에서의 그 엘보우는 쉴드가 안되긴 하지만(...)
  17. 2차전에선 타소티 대신 베나리보가 라이트백으로 선발 출장, 바레시마저 아웃된 3차전부턴 말디니가 센터백으로 이동하고 베나리보가 레프트백, 아폴로니/무씨가 라이트백으로 뛰었다.(아폴로니는 3차전, 무씨는 16강/4강/결승전에 선발출장) 특히 베나리보는 다른 역대 이탈리아 수비수들에 뒤지지않는 멋진 퍼포먼스를 선보였으며 무씨가 16강전의 활약이외엔 불안하긴 했지만 결승전에서 무씨 대신 교체된 아폴로니 역시 좋은 활약을 펼쳐주었다.
  18. 심지어 조별리그 3위였다(...) 본선 32강인 현행제도하에선 여지없이 탈락이었겠지만 당시는 본선 24강 6개조중 1,2위팀 총 12팀이 16강 진출에 남은 4자리를 각조 3위팀중 상위 4팀이 차지하는 방식이었기에 그야말로 간신히 턱걸이로 16강 진출... 그것도 턱걸이중의 턱걸이였다.
  19. 물론 앞에서 언급한 수비진의 힘도 있었고, 로베르토 도나도니, 디노 바조, 데메트리오 알베르티니, 니콜라 베르티등의 미드필더진의 활약도 있었다. 다만 바조 파트너였던 여러 공격수들은 다른 선수들만큼의 존재감을 못냈다(...)
  20. 그리고 도나도니와 베르티의 위치가 바뀌어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442 플랫 포메이션의 경우 대체적으로 상기 이미지와 같이 도나도니가 왼쪽, 베르티가 오른쪽에 섰으나 결승전때만은 왠지 베르티가 왼쪽, 도나도니가 오른쪽에 섰다. 뭐 이 둘의 경우 위치에 크게 구애받지않는 선수들이었긴 하지만. 도나도니는 좌 우 중앙 가리지않고 다 뛸 수 있던 선수고, 베르티는 이 대회에선 다른 선수들이 만족스럽지 못해 상대적으로 제일 많이 선택되긴 했지만 원래는 측면보다는 중앙지향적인 선수였다.
  21. 2002년 16강전을 시청한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긴게 용하다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그덕분에 매수드립도 나왔다. 물론 톰마시의 골든골 논란이 좀 있긴 하다만... 아무튼 그에 대한 반박과 까내리기등이 겹쳐 이탈리아는 영원히 고통받는다.
  22. 근데 저때 네스타 못 나왔다. 칸나바로도 마찬가지. 그래서 크로아티아, 한국 등이 이길 수 있었던 것. 당시 16강전에서 네스타의 빈자리에 크리스티안 파누치가 들어왔고... 그 파누치가 패널티 진영에서 공을 받다 넘어지는 어마어마한 실책을 범해 설기현에게 동점골을 먹혔다.
  23. 그것도 1골은 자책골이고 1골은 PK다! 사실상 필드골은 단 한 번도 안 먹혔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