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무라 야스지 | |
생애 | 1884년 5월 15일 - 1966년 9월 2일 |
출생지 | 일본도쿄도 |
사망지 | 일본도쿄도 |
복무 | 일본제국 육군 |
복무기간 | 1905년 ~ 1945년 |
최종계급 | 대장 |
근무 | 지나 파견군 북지나 방면군 |
주요참전 | 러일전쟁 중일전쟁 |
서훈내역 | 서보대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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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
1 개요
악명높은 이른바 신멸작전을 실시하며 수많은 중국인들을 학살한 일본군 중에서도 최악으로 손꼽히는 전범으로 윤리의식의 부재가 얼마나 큰 참화를 만들어내는지 말해주는 좋은 사례이다. 그러나 전후 중국에 남아있을 때 국민당과의 협조로서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넘어갔다.
2 중일전쟁 이전의 생애
1884년 도쿄에서 태어난 오카무라 야스지는 도쿄육군유년학교를 거쳐 1904년에 육사 16기로 졸업해 보병소위로 들어갔다. 오카무라 야스지의 동기로는 오카무라 야스지를 포함해서 세발 까마귀(三羽烏)라 불린 나가타 테츠잔(永田鐵山) 중장, 오바타 도시로(小畑敏四郞) 중장 외 훗날 A급 전범이 되는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대장, 이다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대장, 안도 리키치(安藤利吉)대장이 등이 있다.
1907년에 육군중위로서 육군사관학교 생도대 근무를 하던 시절, 오카무라는 중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당시 중국에서 온 유학생의 교육을 담당했다. 1910년 12월에 육군대학으로 진학한 오카무라는 재학 중 대위로 승진해 1913년에 육군대학 25기로 졸업한 후 보병 제 1연대의 중대장으로 배치되었다. 1914년부터 참모본부에서 근무하면서 6년간 베이징 주재원으로서 중국근무를 경험한 오카무라는 1921년 6월부터 반년간 유럽을 순시한 후 1922년 귀국해 보병 제 14연대 대대장으로 취임하여 1923년부터 상하이에 주재하게 되었다. 1921년 유럽시찰 당시 10월에 스위스공사관 주재무관이던 나가타 테츠잔, 러시아공사관 주재무관이던 오바타 도시로와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만난 오카무라는 다음 날에 도조 히데키가 합류하자 파벌해소 및 인사문제 해결, 군제개혁, 총동원에 관해 밀약을 맺었는데, 이 밀약내용은 현재에도 상세하게 전해지지는 않지만 훗날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검찰이 일본 군부독재의 증거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1927년 7월에 대좌로 승진한 오카무라는 보병 제 6연대장이 되었다. 다음해엔 참모본부내 전사과장, 1929년 8월부터 육군성 인사국 보좌과장으로 취임했다. 보좌과장으로 재임중에 3월 사건이 터졌는데 이것은 우가키 카즈시게(宇垣一成) 육군대신을 수반으로 하는 일부 육군사관들의 군사정권 수립의 쿠데타사건이었는데 테러 등 비합법적 수단을 동원하는 계획에 우가키가 반대함으로서 미수에 그쳤다. 이 사건에는 고이소 구니아키 군무국장, 니노미야 하루시게(二宮治重) 참모차장, 타테가와 요시즈쿠(建川美次) 참모본부 제 2부장 등 육군 고위부가 관련되어 있었기에 이 쿠데타는 은폐되었고 이 쿠데타에 관여했던 오카무라 야스지 또한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3 중일전쟁 당시
1932년 2월에 상해파견군의 부참모장으로서 전출되었다가 8월에 관동군 부참모장, 1933년 2월에 만주국주재 육군무관을 겸한 오카무라는 5월 31일에 국민정부군의 전권대표인 허잉친(何應鑽)과 탕커우협정을 체결했다. 1935년 3월에 참모본부 제 2부장으로 중앙에 복귀한 오카무라는 1936년 3월에 육군중장이 되어 제 2사단의 사단장이 되었다. 2사단은 일본 내에 있었지만 1937년 4월에 만주로 파견되어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간에 전면전으로 확대되자 1938년 6월에 신설된 제 11군 사령관으로 오카무라는 취임했다. 제 11군은 중지나파견군의 예하부대로 7개 사단과 1개의 독립혼성여단을 통괄해 1938년 10월, 우한(武漢)공략전에서 큰 활약을 했다. 오카무라는 8군의 사령관이 되어 중일 전쟁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였다. 역사학자 요시미 요시아키에 의하면 오카무라는 쇼와 천황으로부터 화학무기를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941년 4월에 대장으로 승진한 오카무라는 7월에 북지나방면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사령관 취임당시 멸공애민(滅共愛民)이란 이념으로 1941년 11월에 방화, 강간, 살인금지라는 이른바 삼계(三戒)를 주장했는데, 당시 북지나 방면군은 살인, 방화, 강간이 자행되어 풍기와 군율이 문란했기에 이를 엄수하라고 명한것이다. 하지만 1943년부터 중국 국민당에 대한 반격작전으로 군대수가 부족해져 다시 이 삼계는 유명무실화 되어버렸다.[1]
위에 적힌것과는 반대로 그를 신멸작전의 주동자로 보는 경우도 있다. 이경우 워낙 엇갈린 서술이 많아 신멸작전 항목에 서술한다.
1944년 이치고 작전에서 허난작전을 지휘한 오카무라 야스지는 8월에는 제 6 방면군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후 제 6방면군을 이끌고 연합군의 폭격기의 기지로 이용될 수 있는 남중국의 비행장들을 철저히 파괴하였다. 1944년 11월에 중국대륙의 부대를 통괄하는 지나퍼견군의 총사령관이 된 그는 병력 100만을 다스려야 하는 중책을 맡았는데 당시 우한, 광둥지역의 확보를 둘러 싼 공략은 어렵다고 판단한 대본영은 부대를 그대로 주둔하는 방침을 세웠다.
1945년 8월에 접어들자 현지에선 외국에서의 무선 등을 통해 일본이 항복할 것이라는 정보가 날아들었고 8월 11일에는 대본영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타전을 발신했다. 그러나 오카무라가 지휘하는 지나파견군은 지구전을 계획했기에 병력을 그대로 보존했기에 무조건 항복에 불복해 8월 14일에 쇼와천황에게 "수탁선언은 제국신민을 말살하는 것으로 제국신민들의 승복을 얻을 수 없다, 철저항전의 성단을 촉구한다"라는 내용을 담은 상신문을 제출했다. 하지만 다음날에 쇼와천황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기로 결정하자 오카무라 야스지는 생각을 고쳤고 장병들에게 쇼와 천황의 훈시를 따르라고 명령했다. 이후 전장에 황족들을 보내어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파견군에게 투항하거나 항복하라는 천황의 의사를 알렸다. 이에 오카무라 야스지도 1945년 8월 17일에 파견되어 온 황족 아사카노미야의 항복사실에 투항하기로 결정했고 중국군의 탕커우협정 당시의 대표였던 허잉친 대장과 만나 중국에서의 철수 및 중국정부를 지지한다는 성명과 함께 정전협상에 들어갔고, 허잉친은 일본군의 자력귀환을 인정해 오카무라 이하 일본측 장병들은 10개월에 걸쳐 일본으로 귀환했다.
4 국공내전과 장제스와의 협력
1945년 9월 9일 난징에서 열린 중국·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의 항복조인식에 참석한 오카무라 야스지
조인식에서의 오카무라 야스지
그리고 1945년 8월 16일 장제스는 오카무라 야스지에게 명령을 보내는데 그 내용은 그에게 계속 그 자리를 지키라는 것과 그 지역의 질서를 책임지고 유지하라, 그리고 모든 무기는 반드시 국민당 중앙군에게 전해줄 것이며 절대로 다른 군대에 넘겨주지 말것이며 필요하면 무력사용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오카무라 야스지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초기에, 3~400여만의 일본군과 일본교포는 중 100여만명은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2]
5 기타
이렇게 귀국한 오카무라는 1954년에 전국유족후원회의 고문으로 취임하여 1957년 5월부터 6년에 걸쳐 구 제국군인의 전국조직인 일본향우연맹의 회장을 역임하다가 1966년에 병사했다. 오카무라는 장제스를 만난 후 일본장교들을 규합하여 군사고문회인 바이단(白團)을 결성해 국공내전 및 1949년부터 약 20년간 중국 국민당 정부를 협력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고난지 30년이 흐른 2000년에 오카무라 야스지는 여성국제범죄의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또한 이전 문서에는 그가 위안부 제도의 실질적 책임자라고 했는데 그가 위안부 제도를 만든것은 애초에 1932년 상하이에 주둔할때에 일이었고 그마저도 일본 내의 여성을 모집해 장교들의 현지처 역할을 맡게 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단순한 고안자라고 봐야지(그마저도 해군에서 이미 있는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책임자라고 보기는 어렵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