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일본 총리 | ||||
7대 | → | 8대 | → | 9대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야마가타 아리토모 | ||
16대 | → | 17대 | → | 18대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데라우치 마사타케 | ||
오박사님
大隈(おおくま) 重信(しげのぶ) / 1838.3.11. ~ 1922.1.10.
일본의 8, 17대 총리. 총리로 기억되기보다 와세다대학의 설립자로 더 기억되는 양반. 와세다 대학에서는 아래처럼 그의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사가 현 출생으로 유년기와 청년기, 장년기를 모두 메이지 유신으로 날려먹은(…) 전형적인 메이지 유신 세대. 경제 쪽으로 유능해서 주로 재무 쪽으로 일해왔고, 더 나이가 들면서부터 외무대신으로 옮겨갔다. 외상 시절이던 메이지 22년(1889)에 외무성 입구에서 극우 테러단체인 겐요샤(玄洋社)의 폭탄테러를 당해 오른쪽 다리가 날아가는 중상을 입었다. 노년의 오쿠마를 지팡이 짚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게 이 사건 때문이다. 사고 후부터 오쿠마가 착용한 의족은 현재 와세다 대학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어찌 보면 전형적인 공무원.
총리대신 취임 후.
이토 히로부미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는데, 문부상 오자키 유키오의 자폭'공화연설'과 뒤를 이어 총리가 되는 군국주의 수꼴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적절한 방해[1]로 반년도 못 채우고 자폭.
1914년 야마모토 곤노효에의 후임으로 다시 총리 자리를 꿰찬다. 거물들이 넷이나 한꺼번에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차기 총리직은 정권교체의 주역인 공화파들의 인망을 얻고 있으면서도, 이렇다 할 업적은 없었으나 어쨌든 경험도 있고 해외에도 명성이 있으며 원로들과도 적당히 친한 오쿠마 시게노부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취임 석달 후 1차대전이 터진다. 오쿠마는 영일동맹을 명분으로 독일에게 뒤통수 선전포고를 갈겼다.[2] 독일이 정신 없는 틈을 타 독일의 아시아세력, 해상세력을 격멸한 오쿠마 정권은 독일의 중국과 태평양 지역 이권을 손아귀에 넣는다. 전승에 힘입어 초필살오의 의회해산까지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쿠마 시게노부는 권력의 정점에 서는 듯 했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오쿠마 정권은 위안스카이에게 그 유명한 21개조 요구를 내밀고 이것은 결정적인 실책이 된다. 21개조 요구의 내용이 민중에 유출되면서 중국인들이 폭발, 거대한 반일조류를 발생시키고 만다. 그리고 만약 비밀이 지켜졌더라도 오쿠마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는 흘러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은데, 우선 그 시점에서 중국 최강의 사나이였던 건 맞지만 근본적으로는 일개 군벌에 불과한 위안스카이가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들 괜히 수출만 죽쑤지 별 효과를 볼 수 없었다.[3] 거기에 중국 내부에서 극심한 혼란이 가속화되자 다른 열강들이 혹시 일본 저 놈들이 중국을 꿀꺽하고 파워업하는 게 아닌가하며 극심한 견제에 들어갔다. 명백하고도 심각한 병크였으므로 21개조 요구 이후 오쿠마의 권위는 내리막길을 걷다, 끝내 내무상에 의한 정치 스캔들이 터지자 사임하게 되었다.
1882년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 전문학교를 세웠고, 1907년부터는 죽을 때까지 아예 총장, 이사장의 자리를 모두 꿰차고 앉았다고 한다. 흠좀무.
여담으로, 역대 내각총리대신 중 가장 키가 크다.(180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