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툼바 전투

1 개요

Battle of Otumba(영어)
Batalla de Otumba(에스파냐어)

슬픔의 밤 사건에서 큰 피해를 입은 에르난 코르테스의 소수 원정군이 원주민 동맹국인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던 도중, 1520년 7월 7일,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의 중간지대인 오툼바 평원에서 수십배가 넘는 아스텍 대군을 맞아 기적적으로 승리했던 사건.

2 틀락스칼라로 후퇴를 계획하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온 소수의 생존자들은 후퇴하기 가장 용이한 도시인 ‘타쿠바’로 모이게 된다. 하지만 호수위의 도시 테노치티틀란은 다수의 운하와 다리로 타쿠바와 연결돼 있었기 때문에, 에스파냐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분노에 가득찬 아스텍 전사들은 연결된 다리를 건너 코르테스의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코르테스는 어느 정도 사령관으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무사히 후퇴한 나머지 부대를 서둘러 타쿠바시의 육지 쪽으로 옮기게 하였고, 자신은 서너 명의 기병과 20여 명의 에스파냐 보병과 함께, 다리에서 건너오는 수많은 아스텍 전사들을 좁은 다리폭을 이용해 방어하기에 이른다. 코르테스와 소수의 부하들이 테노치티틀란과 타쿠바를 연결하는 다리를 방어하는 사이, 나머지 원정군 생존자들은 대부분 반대편으로 옮기는 데 성공하였고, 코르테스 자신은 아스텍 전사들의 맹렬한 공격을 저지하면서 수많은 타박상을 입었지만, 목숨을 부지한 채 타쿠바 육지 쪽으로 무사히 건너갈 수 있었다.

당시 코르테스의 기록에 의하면 자신의 방어로 인해 원정군 생존자들 중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타쿠바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고, 말 한 필의 피해를 입었을 뿐이라고 한다. 그의 영웅적인 방어로 목숨을 부지한 원정군 생존자들은 타쿠바 시의 광장에 모여들었지만,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오면서 생긴 급박함과 두려움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고 있었다. 이에 코르테스는 원정군을 재정비하고 혹시라도 다시 건너올 아스텍 전사들의 재공격이 있을 것을 대비해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계획한다.

코르테스는 먼저 선봉대를 보내 혹시라도 있을 적들의 매복에 대비하고자 했으나, 그들마저 공황상태에 빠져서 길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보고할 정도였다. 코르테스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갈팡질팡하는 선봉대를 후방부대로 빼낸 뒤, 자기가 직접 선두지휘하여 길을 나아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와 반대되게 원정군의 일원으로서 아스텍 정복에 참여한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코르테스를 포함한 에스파냐인들 전체가 허둥댔고, 틀락스칼라 출신 원주민들이 일단은 자기네 국가로 돌아가서 재정비를 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하자 코르테스가 이에 따랐다고 한다. 정황상 후자의 기록이 맞을 것이다.

3 고난의 후퇴 시작. 그리고 부대정비

살아남은 원정군 생존자들은 고난과도 같은 행군을 시작하게 된다.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와의 거리는 150마일이나 떨어져 있으며, 곳곳에는 아스텍 제국의 동맹도시와 원주민 국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런 곳을 갖은 전투와 부상으로 지친 코르테스의 원정군이 무사히 뚫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코르테스는 최대한 아스텍 군대에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이 야영했던 요새에 일부러 불을 활짝 피운 뒤 어둠 속에서 퇴각하는 방식을 썼다. 하지만 이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보초를 섰던 아스텍 군대에 의해 발각됐고, 다시 일련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일단 쫓아오는 소수의 아스텍 군대를 처리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스텍인들은 더 병력을 모으기 위해 전사들을 모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코르테스는 재빨리 부대를 한 곳에 모이게 한 다음, 부상을 당했지만 거동이 가능한 자들을 중심으로 전열을 정비하였고, 거동마저 불편한 부상자들은 안전한 전방, 후방, 측면의 보호를 받도록 중앙에 세워두었다.

4 끈질긴 아스텍 전사들의 추격

코르테스는 자신이 편성한 대열을 정비하고, 최대한 대열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강조하였다. 이 때문에 원정군은 최대한 대열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야됐기 때문에, 후퇴하는 속도가 느려졌고, 밤낮으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루종일 이동한 거리가 3 레구아(1 레구아:약 5572 미터)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이때 아스텍 전사들의 추격은 없었으며, 해질 무렵 원정군은 피라미드와 요새가 있는 언덕에 자리잡은 도시 테오칼우에야칸(Teocalhueyacan)에 이를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방어가 용이한 이 곳에서 바리케이트를 친 채 혹시라도 모를 아스텍 전사들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온지 이튿날에 되던때, 원정군은 추격해오는 아스텍 전사들의 숫자가 어마어마 하다는 것을 일련의 정보망을 통해 알게된다. 이 소식은 원정대 곳곳에 퍼져갔고 모두가 공포감에 휩싸여 잠시 동요가 있기도 했다. 날이 밝고 한 시간쯤 지났는데도 아스텍인들의 공격이 없자, 코르테스는 도시를 빠져나가 서둘러 다른곳으로 후퇴하고자 하였다. 이때 갑자기 후퇴하는 원정군을 아스텍 전사들이 기습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에스파냐 기병들이 아스텍 전사들을 제압하고자 돌격하였다. 아스텍 군대는 소수 기병의 돌진에 타격을 받았지만, 기병이 움직이기 어려운 험한 지형으로 후퇴하는 바람에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원정군은 이런식으로 아스텍 전사들의 치고빠지는 공격을 방어하면서 후퇴하였고, 곧이어 솜팡코(Tzompanco)호수가 자리잡은 테풋소틀란(Teputzotlan)이라는 상당히 큰 마을에 이를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테풋소틀란의 주민들에게 후퇴에 지친 원정군을 위한 식량과 음료를 원했지만, 정작 주민들 도시를 비운 채 전부 도망쳐 버렸다. 테풋소틀란에 도착한 원정군은 이전 아스텍 전사들의 끈질긴 추격과 전투, 고난의 후퇴 때문에 상당히 녹초가 돼있었기 때문에 코르테스는 원정군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텅 빈 도시에서 약간의 옥수수를 삶거나 구어먹어 배를 채웠다. 다음날 테풋소틀란에서 빠져나온 원정군은 다시 추격해온 아스텍 전사들과 맞붙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전적으로 틀락스칼라 원주민들의 길안내에 의지했기에 과연 길을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었으며, 원정군을 추격하는 아스텍 전사들은 틈만 나면 소리를 지르면서 기습공격을 감행하기에 불안감은 더욱 커져갔다고 한다.

원정군은 아스텍 전사들을 저지하면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해 이윽고 사카몰코(Zacamolco)라는 상당히 큰 밀집도시에 도착할수 있었다. 하지만, 사카몰코의 원주민들은 아스텍 제국에게 충성하는 도시였기에, 그들은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보자마자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으며, 사카몰코의 전사들이 원정군을 포위하려고 하자, 코르테스는 방어하기 용이한 인근 마을로 퇴각하도록 명령을 내려 진영을 갖추도록 하였다. 사카몰코에서의 전투에서 코르테스는 원주민 전사들의 투석구에 머리를 맞아 심한 부상[1]을 당했으며, 원정군 또한 부상이 없는자가 없을 정도였다.

마을로 후퇴한 원정군을 향해 수많은 사카몰코 전사들이 포위 공격을 감행했고, 원정군은 겨우겨우 막아내는 수준에 그쳤다. 그 남아 남아있던 군마들이 전부 부상당하고, 이윽고 군마 한필이 이 전투에서 죽고말았다.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말이 죽자 매우 애석하게 느꼈는데, 원정군이 너무 허기진 터라 어쩔수 없이 말을 껍질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먹어치웠다고 한다. 실제 원정군은 후퇴도중 먹을것이 너무나도 부족했기에, 들판의 야생옥수수풀을 뜯어먹어 목숨을 연맹해야 했으며, 몇몇은 이마저도 얻지 못해 허기에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원정군은 허기에 굶주려 지친 반면, 사카몰코의 전사들은 추격해온 아스텍 전사들과 연합하여더욱 더 대담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윽고 원정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의 중간지대인 오툼바(Otumba) 평원의 언덕에 까지 내몰리게 된다.

1520년 7월 7일, 그 언덕 아래선 남은 에스파냐인들을 처리하기 위해 약 4만명에 가까운 아스텍 대군이 밀집해 있었고, 동맹국 틀락스칼라로 갈수 있는 길은 오직 그곳밖에 없음을 코르테스는 직감한다.

5 오툼바 전투 당시 코르테스 군대의 상황

5.1 코르테스가 불리한 점

코르테스가 처한 상황은 가히 절망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와 오툼바 평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아스텍 군대와의 혈전을 치렀고, '슬픔의 밤' 당시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원정군은 더욱이 수세에 몰렸다고 할 수 있다.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와 타쿠바로 퇴각한 당시 살아남은 에스파냐인 병력은 약 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이 병력 중 약 100명에 가까운 이들이 굶주림과 부상에 죽어나갔고, 나머지 400명도 부상이란 부상을 다 겪은 채 겨우 목숨만 연명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슬픔의 밤 당시의 경황상 때문에 강력한 무기인 대포와 화승총, 쇠뇌는 전부 잃어버렸으며, 가장 막강한 무기인 군마조차 부상당한 23기가 전부였다. 가장 중요한 군사들의 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다. 아스텍 제국이 대군을 보내 후퇴하는 원정군을 추격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매우 동요했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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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머리를 치료받는 코르테스

더군다나 사령관인 코르테스마저 머리를 크게 다치고 그나마 목숨을 연명하고 있는 수준이었다. 수많은 에스파냐인들이 아스텍인들의 거듭되는 기습공격을 두려워했으며, 일부는 아예 탈영을 시도하기도 했다.

5.2 코르테스가 유리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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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가 가졌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군마도, 검이나 갑옷도 아니었다. 테노치티틀란에서 무사히 탈출한 다수의 '부관들'이었다.

슬픔의 밤 사건에서 약 600에서 최대 1000여명에 이르는 에스파냐인이 떼죽음을 당했지만, 정작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코르테스의 부관들은 달랐다. 후안 벨라스케스 데 레온(Juan Velazquez de Leon)과 함장 알론소 데 에스코바르(Alonso de Escobar)같은 몇몇 중요직의 부관들이 죽기도 하였지만, 유능한 대부분 부관들이 생존함으로 이는 훗날 아스텍 제국과의 전투 판도를 크게 바꾸게 된다.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 곤살로 데 산도발(Gonzalo de Sandoval), 안드레스 데 타피아(Andres de Tapia), 크리스토발 올릿(Cristobal Olid), 후안 데 살라망카(Juan de Salamanca), 디에고 데 오르다스(Diego de Ordaz), 프란시스코 데 바르코(Francisco de Barco), 프란시스코 데 몬테호(Fransico de Montejo), 알론소 데 아빌라(Alonso de Avila),후안 데 하라미요 살바티에라(Juan de Jaramillo Salbatierra),마리아 데 에스트라다(Maria de Estrada)등의 처음 쿠바를 떠날 때의 최초 원정대 부관들이 전부 생존하였다.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오기 전 레콩퀴스타와 이탈리아 전쟁에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은 인재들이 다수 포함되었으며, 따라서 강력한 유럽식 전술에 대한 이해도가 매우 풍부하였다. 또한 처음 쿠바에서부터 시작했기에, 아나우악 땅(멕시코 중부)의 수많은 원주민 전사들과 싸워오면서 원주민들의 전술을 간파했고, 거기에 따른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들은 코르테스와 같은 신분인 이달고(Hidalgo,에스파냐의 하급귀족)가 대부분이었다. 코르테스는 비록 이들의 사령관이었지만, 부관들은 코르테스에게 이것저것 다양한 건의를 펼칠수 있었고, 거기서 나온 몇몇 '색다른 전략'은 훗날 테노치티틀란 전투 당시 엄청난 활약을 펼치게 된다.

오툼바 전투당시 이 부관들은 대부분 보병대의 지휘를 맡았던 디에고 데 오르다스(Diego de Ordaz)를 제외한 대부분이 기병대였다. 더군다나 코르테스의 군대중 군마는 겨우 23기뿐이었기에, 따라서 23기의 기병은 코르테스와 부관들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6 오툼바 전투 당시 아스텍 군대의 상황

6.1 아스텍 제국이 유리한점

'슬픔의 밤'의 대승을 거둔 아스텍 제국은 무서운 기세로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궁지로 몰아갔다. 코르테스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면서 새로이 우에이 틀라토아니(Huey Tlatoani, 황제)직에 오른 쿠이틀라우악(Cuitlahuac)은 전사들을 대규모로 소집하여, 틀락스칼라로 후퇴 중인 코르테스를 지구 끝까지 쫓아갈 기세로 맹공격을 감행했다.

또한 제국의 각지에 파발을 보내, 테노치티틀란에서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완전히 몰아냈으며, 이들은 신 같은 것도 아닌 그저 도망자 신세라며, 동맹도시들에게 호소하여 후퇴하는 에스파냐인들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6월 30일, 슬픔의 밤 사건이 일어난 이후 오툼바 전투가 벌어지는 7월 7일까지, 틀락스칼라로 후퇴하던 코르테스는 추격하는 아스텍군과 아스텍 동맹도시 군대에게 맹공격을 당하게 된다. 하루도 쉴 틈 없이 공격을 퍼붓는 격에 100명에 가까운 에스파냐인들이 죽었으며, 사령관 코르테스를 포함한 에스파냐인들은 부상당하지 않은 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슬픔의 밤 당시 노획한 에스파냐인들의 무기(강철검과 창)는 아스텍 전사들의 힘을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에스파냐인들의 강철검은 아스텍인들을 상대로 엄청난 위력을 보였으며, 아스텍 전사들은 처음에는 검의 위력이 신이 깃든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었다. 하지만, 에스파냐인들과의 잦은 접촉 이후 그들의 무기에 대한 것들을 검증을 통해 파악하였고, 노획한 무기를 상당히 좋아하는 아스텍 전사들의 특성상, 오툼바 전투 당시 일부는 에스파냐제 무기로 무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아스텍인들은 대규모 물량러쉬가 특기였는데, 이는 코르테스나 베르날 디아스 같은 직접 전쟁을 뛰어본 사람들이나 후대 역사가들조차 강력히 인정하는 대목이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의 악사야카틀 궁전에서 아스텍 군대에게 포위될 당시, 그들의 물량러쉬에 경악하면서,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금세 전사들이 메꾸기 때문에, 마치 불사신으로 보니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였다고 기록했다. 슬픔의 밤 당시 아스텍인들은 코르테스와 면담 도중, 에스파냐 병사 1명을 죽이는데, 아스텍 전사 2만 5천명이 죽더라도, 결국엔 자신들이 이길 거라면서 아스텍 물량러쉬의 힘을 직접 말해주기도 하였다.

아스텍 황제 쿠이틀라우악은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일격에 에스파냐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대규모로 전사들을 소집하였다. 이들은 이윽고 오툼바 평원에서 진을 쳤고, 갖가지 부상으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코르테스의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

6.2 아스텍 제국이 불리한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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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 쿠아치퀘(Cuachique) 전사의 모습. 이들은 오토미식 스타일의 전사로써 아스텍 군사령관인 틀라코치칼카틀(Tlacochcalcatl)을 호위하는 임무도 떠맡은 상당한 고위전사들이다.

막대한 물량, 어느 정도 갖춘 에스파냐제 무기, 다수의 동맹군, 슬픔의 밤 승리 이후 사기가 잔뜩 오른 아스텍 제국에게 불리한 점이 단 하나 있었다. 이는 오툼바 전투 당시 코르테스는 가졌지만 아스텍 제국은 갖지 못했으며 앞으로 펼칠 전투에서도 갖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유능한 부관 또는 인재'였다.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슬픔의 밤이라는 초유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동행한 유능한 부관들은 전부 살아있었다. 하지만 아스텍 제국은 그와 완전 반대 상황이었다.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에서 약 600여 명의 아스텍 최고위 황족과 귀족들이 무참히 코르테스의 동갑 친구이자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학살당했었다. 이 때문에 아스텍인들의 反에스파냐 의식이 고착되었고, 알바라도의 생각 없는 학살은 결국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의 쓰디쓴 패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이 일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후 정복전에서 빛을 발한다. 학살당한 아스텍 최고위 귀족들은 대부분 제국내에서 군사 지휘권과 행정에 능한 인재들이었다. 이런 고위 인재들이 알바라도의 학살 때문에 전부 죽음으로써, 마치 소가 뒷걸음질 치다가 쥐잡은 것처럼 아스텍 제국의 수뇌부는 매우 열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수많은 연대기 기록자들의 기록에 의해 오툼바 전투당시 아스텍 사령관은 시우아코아틀(Ciuacoatl, 뱀여자라는 뜻)이 맡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시우아코아틀은 아스텍 제국에서 군사지휘권과 거리가 먼 직책이었으며, 오히려 오늘날의 행정장관과 비슷한 위치의 직위였다.

아스텍 군대가 대외 원정을 나갈 당시 군사지휘권은 보통 아스텍의 군사령관 직책인 틀라코치칼카틀(Tlacochcalcatl)이 전략과 지휘를 짜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알바라도의 학살이 빛을 발한건 바로 이 때문이다. 전략을 짤 틀라코치칼카틀의 직위를 맡을 자들이 죄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아스텍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시우아코아틀 직위에 있는 자를 공석인 틀라코치칼카틀 직위를 역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즉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군사령관의 직위가 공석이라 대신 행정장관을 군사령관직에 앉혔다는 어처구니 없는 뜻이다!

유능한 부관들이 전부 생존한 코르테스의 군대와 비교하자면, 가히 엄청난 차이라 할수 있겠다.

7 오툼바 전투

1520년 7월 7일, 언덕 위의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오툼바 평원 위의 대규모 아스텍 병력을 보고 기겁한다. 오툼바 전투당시 아스텍 병력은 최소 2만에서 4만명 혹은 그 이상일 거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에 비해 코르테스의 군대는 부상당하고 지친 에스파냐인 병력 400명과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 1000~2000명 남짓의 틀락스칼라인들을 포함한 원주민 동맹군이 전부였다.[2]

코르테스는 틀락스칼라로 가기 위한 길은 어쩔 수 없이 오툼바를 거쳐야 함을 파악했으며, 이윽고 언덕을 등진 채, 엄청난 물량의 아스텍 대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아스텍 전사들은 코르테스의 원정군을 양 갈래로 포위했고, 에스파냐인들과 틀락스칼라 및 동맹군으로 이루어진 코르테스의 군대는 이에 맞서게 된다.

코르테스는 부관 디에고 데 오르다스(Diego de Ordaz)에게 보병대 지휘권을 맡게 하였으며, 자신은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 중 하나로서 기병대를 지휘하였다.

당시 아스텍 군대의 위용과 코르테스 군대의 열약한 전력은 코르테스가 자신의 군주인 카를로스1세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보면 알수 있다.

'들판 전체를 뒤엎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인디오들이 우리(코르테스의 원정군) 앞에 운집해 있는 것을 볼수 있었습니다... 적의 공격은 너무나 거셌고 우리의 저항은 너무나 힘에 부쳤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고 우리 일행은 전부가 부상당한 상태였으며 너무나 허기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그날이 우리의 제삿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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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다스가 지휘하는 보병대가 아스텍 전사들의 공세를 막는동안,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은 4만명의 밀집된 전사들을 향해 맹렬히 돌격하였다. 아스텍 전사들은 기병대의 갑작스러운 돌격에 대처하지 못했고, 코르테스와 23기의 기병들은 아스텍 전사들의 대규모 인파속에서 화려한 장신구와 깃털로 치장된 고위 전사들을 노리기 시작했다.[3]이윽고 코르테스를 포함한 23기의 기병들은 4만명의 인파를 해집고 들어가면서 그중 가장 화려한 깃장식과 가마를 타고 있던 아스텍 사령관 시우아코아틀(Ciuacoatl)을 발견하게 된다. 당시 종군신부 프란시스코 데 아귈라르(Frnacisco de Aguilar)는 이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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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우아코아틀의 깃발(인물이 들고있는것)

'코르테스는 인디언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길을 헤쳐나갈때 황금방패로 치장한 적의 지휘관을 잡아 죽이는 놀라운 솜씨를 선보였다. 전사들은 눈여겨보지도 않고, 인디오들의 총 사령관(시우아코아틀)에게 창을 한번 휘둘러 살해했다.그무렵 디에고 데 오르다스가 지휘하는 우리의 보병대는 인디오들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그때 코르테스 사령관이 적의 사령관을 죽이자 적들은 퇴각하기 시작하면서 우리에게 길을 터주었다. 우리를 추격하는 적도 거의없었다.'

아스텍 총사령관이었던 시우아코아틀이 어이없게 비명횡사하자. 이에 주변의 아스텍 전사들은 황급히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메소 아메리카 전투는 사령관이 죽거나 큰 부상을 입으면 신의 뜻이라 여겨 퇴각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스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에게 맞서 여러가지 전술을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틀에 박힌 자신들의 관례를 버리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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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오르다스가 이끄는 보병대는 아스텍 군대의 물량에 완전 포위됐지만, 에르난 코르테스가 죽은 시우아코아틀을 상징하는 깃발을 들고 말을 타면서 돌격하자, 총사령관이 죽었음을 깨달은 나머지 아스텍 전사들 역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한순간에 물러나듯이 아스텍 전사들은 후퇴하였고, 지칠 대로 지친 코르테스의 원정대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다.

8 코르테스는 어떻게 승리 할수 있었나

오툼바 전투에서의 전력차는 코르테스의 원정군이 절대적으로 열약한 상황이었다. 아무런 전략 없이 싸우다간 그냥 골로 갈 전력차였다. 하지만, 코르테스에게는 그동안 생사를 동고동락한 부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메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전투방식과 전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오툼바 전투에서 보듯이 코르테스와 부관들은 아스텍 고위간부들은 화려한 장식을 치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일반 병사들은 그냥 지나친 채 고작 23기의 기병으로 4만 명의 인파를 헤집고 들어가 군지휘관들을 살해하였으며, 이윽고 총사령관인 시우아코아틀마저 전사했다. 아스텍인들은 일련의 전투와 슬픔의 밤의 승리를 통해 에스파냐식 기병 전술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 평원에서 기병대를 상대한 것은 오툼바 전투가 처음이었다. 오툼바 평원에서 비록 군마들은 전부 부상당했지만, 코르테스와 부관들로 이루어진 23기의 기병들은 불사신과 같은 전투력으로 삼국지에서나 볼 수 있는 무쌍을 펼쳤다.

아스텍인들은 일명 '꽃의 전쟁'이라는 메소 아메리카식 관습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 이들은 코르테스와 그의 기병들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으려고 했기 때문에 매우 소극적인 공격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설령 그런 방식으로 싸운다 할지라도 오툼바 전투같은 경우 머릿수에서 워낙에 차이났으므로 아무 전략없이 그냥 밀어붙이기만 해도 이겼을텐데 총사령관이 전사했다고 관습대로 그냥 후퇴해버려서 코르테스를 잡을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렸다. 이는 아스텍 군대 스스로의 자멸로 나아갔다.

9 양측의 피해

코르테스의 군대의 사상자는 60~75명으로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가 말해주고 있다. 아스텍 군대의 사상자는 정확하진 않지만 최소 1만에서 2만 명으로 추정된다.

10 역사가들이 평가하는 오툼바 전투

오툼바 전투는 에르난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사에서 가장 경이로우면서 불가사의한 전투이다. 슬픔의 밤 이후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코르테스의 군대가 고작 일주일 뒤 모든게 불리했던 오툼바에서 대승을 거뒀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코르테스를 직접적으로 까거나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는 역사학자들도 오툼바 전투만큼은 어느정도 인정해 주는 모습이다. 코르테스 역시 자신의 군주인 카를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툼바 전투를 묘사하였다. 코르테스는 황제에게 자신으로 공로를 어느정도 보이기 위해 과장과 축소를 남발하는 편인데, 이상하게도 오툼바 전투에서의 묘사에선 그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곳에선 흔히 보이는 미사여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은 코르테스가 오툼바 전투에 관해 썼던 내용을 코르테스의 글중 '가장 겸손한 글'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11 여담

종군신부 프란시스코 데 아귈라르(Frnacisco de Aguilar)와 사령관인 에르난 코르테스 자신의 기록에서 시우아코아틀은 분명 '코르테스가 죽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 졸병이었고 은근히 코르테스를 디스하는데 일가견이 있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Bernal Diaz del Castillo)는 부관이자 기병이었던 후안 데 살라망카(Juan de Salamanca)가 시우아코아틀을 먼저 발견해 그를 죽였고, 이윽고 같이 돌격한 코르테스에게 시우아코아틀의 상징기를 전달해 주었다고 전한다.

흔히들 오툼바 전투를 아스텍 제국의 운명을 가른 전투로 평가한 사람들이 있는데, 실상은 슬픔의 밤 이후 아스텍 쪽으로 급격하게 쏠린 전력차가 오툼바 전투 이후 그나마 비등해진 것이다. 아스텍 제국은 비록 오툼바에서 패전했지만, 물량은 계속해서 뽑아낼 수 있었으며, 실제로 오툼바 전투이후로도 코르테스의 원정군은 수만 명의 아스텍 전사들과 그 동맹도시들과 싸워나가야 했다. 다만 대국적으로 보자면 이 오툼바 전투만큼 코르테스가 핀치에 몰렸던 전투가 없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아스텍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것은 맞다. 이후로도 아스텍은 지속적으로 물량을 뽑아내지만, 코르테스도 그런 아스텍에 맞서 충분히 준비한 상태로 전투에 임하게 되었으므로...

오툼바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코르테스는 이틀후인 1520년 7월 9일에서야 원주민 동맹국인 틀락스칼라로 무사 귀환할수 있었다. 당시 틀락스칼라는 4지방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연방국가였는데, 그중 가장 강력한 티사틀란(Tizatlan)의 90세의 늙은 시코텐카틀(Elder Xicotencatl)과 그의 친척중 하나인 20세의 젊은 시코텐카틀(Young Xicotencatl)이 통수권을 지니고 있었다.

젊은 시코텐가틀[4]은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들을 끝까지 반대했던 인물이었는데, 그는 테노치티틀란의 궤멸적인 패배이후 코르테스가 죽었다고 생각하였지만, 정작 코르테스는 살아서 돌아왔고 틀락스칼라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또한 코르테스는 늙은 시코텐가틀에게 틀락스칼라인들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은 아스텍의 사령관 깃발(오툼바 전투에서 탈취한 시우아코아틀의 깃발)을 선물로 건내주고선 틀락스칼라와의 영원한 동맹을 약속하였다.[5] 틀락스칼라인들은 코르테스가 가장 위급한 시기일 때 끝까지 동맹으로 남아주었기 때문에 아스텍 정복이후 코르테스에게 상당한 우대를 받았으며, 누에바 에스파냐 식민지가 완전히 자리잡을 시기에도 자치국으로서 상당한 혜택을 전수받게 된다.

12 각종 매체에서의 오툼바 전투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게임 미디블2: 토탈 워의 역사적 전투에서 에르난 코르테스의 오툼바 전투를 직접 체험해 볼수있다. 비록 게임상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고증은 약간 아니지만(예를 들어 당시 코르테스군대에게 없었던 머스킷 총병과 다수의 기병대 존재), 그래도 숫적 불리함을 모랄빵으로 승리한 오툼바 전투의 대략적인 상황을 게임에서 체감해 볼수있다.

게임에서 아스텍 군대는 총 4명의 장군이 존재하며, 코르테스 군대보다 더 많은수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엄청난 경험치의 다수의 콩퀴스타도르 기병대를 가지고 있으며, 어느정도 경험치의 로델레로,콩퀴스타도르 보병대를 지니고 있기에 전략차는 크게 불리한것도 아니다. 일단 코르테스와 콩퀴스타도르 기병대를 지정하고 망치로서, 나머지 보병대를 모루로서 지휘하면 어느정도 전략의 틀을 잡을수 있다. 이 게임에서 핵심은 4명의 아스텍 장군들은 죽여 모랄빵을 나게끔 하여 승리하도록 하는것으로써, 실제로 이를 일부러 알려주기 위해서인지 초반 동영상에서 아스텍 장군들의 모습을 여러번 비춰준다...

콜린 팔코너의 소설 '깃털달린 뱀'에서도 오툼바 전투가 상당한 분량으로 묘사된다. 소설에서 묘사에서 코르테스는 아스텍 진영으로 돌진하지만, 심각한 부상과 잡작스런 피곤함에 정신을 거의 잃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비치더니 아스텍 총 사령관의 위치를 지점해 준다. 이에 부관들이 말리는 대도 불구하고 이를 성모의 뜻으로 여긴 코르테스는 관우와 같은 돌격을 가하고 기어이 아스텍 총사령관을 죽이게 된다. 이쯤보면, 코르테스를 미화하는 소설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코르테스의 비열함과 권모술수를 까발려 주는것이 이 소설의 묘미이다. 아무리 코르테스에 대한 증오및 불신에 불구하고 '오툼바 전투만큼은 작가가 인정한 가장 경이로운 전투였기에' 이런 묘사를 했지 않을까 싶다.
  1. 코르테스는 이후의 전투에서 다시 한번 다친 머리를 또 맞는 부상에 이른다. 이때 코르테스의 부상은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이었다. 하지만 틀락스칼라 의사들의 뛰어난 두개골 절제수술로 코르테스는 원상회복할수 있었다
  2. 단, 이 원주민 동맹군은 생략해야 된다는 견해도 있다. 우선 원주민 동맹군은 틀락스칼라인들이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테노치티클란까지 동행한 틀락스칼라인들의 숫자와 슬픔의 날 당시 죽거나 포로로 잡힌 틀락스칼라인의 숫자가 각각 4000여명으로 동일하다(스페인은 600여명 정도를 잃었다.). 그리고 오툼바 전투에 대한 기록에도 원주민 동맹군에 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오툼바 전투 후의 사상자에 대한 숫자는 스페인인 72명, 그중 여자는 5명이라고 할 정도로 세세하게 기록했으면서 원주민 동맹군의 사상자는 전혀 언급이 없다. 슬픔의 밤 당시는 원주민 사상자도 기록했던 것을 볼때 굳이 생략한 건 이상한 일. 그래서 사상자가 없는 이유는 이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3. 코르테스의 부관들이 위력을 발휘한것은 이때문이다. 그들은 수차례 메소 아메리카의 다양한 원주민 전사들과 전투를 치루면서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하고 자신의 위용과 지위를 자랑하는것이 아스텍을 비롯한 원주민 지휘관들의 관례라는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4. 젊은 시코텐가틀은 늙은 시코텐가틀과 달리 끝까지 에스파냐인들을 싫어하였고, 그들과 동행하기를 거부하였다. 그때문인지 훗날 테노치티틀란 전투 당시 명령불복종으로 부관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처형 당하고만다
  5. 이 장면은 리엔소 데 틀락스칼라(Lienzo de Tlaxcala)사본의 그림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