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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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6월 30일 절정기였던 에르난 코르테스아즈텍 켐페인을 단기간에 무마시킨 전투. 에스파냐어 공식 명칭은 La noche triste(라 노체 트리스테)라고 하며, 비통한 밤으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1]

1 개요

흔히들 아스텍 제국하면 교과서적인 지식으로 인해, 에르난 코르테스에게 발견되었다가 신으로 착각하여 환영하다가 손쉽게 정복당한 나라로 비쳐지게 된다. 하지만 아스텍인들은 코르테스의 침탈행위에 맹렬히 저항하였고, 실제로 그들은 코르테스의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는 3년이라는 기간동안 아스텍인들이 코르테스의 군대에게 결코 쉽게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논증해주는 중요한 사실이 된다. 그중 슬픔의 밤(Noche Triste)사건은 코르테스 개인이나 에스파냐아메리카 정복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크리스토발 데 콜론(영문인 콜럼버스가 더 잘 알려져 있다)이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래, 유럽인들의 가장 큰 패배이자 원주민들의 가장 큰 승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갑작스럽게 아메리카 정복역사상 가장 큰 군대를 보유하게 된 코르테스가, 닷새도 안 되어 자신이 처음부터 보유했던 병력보다도 매우 뒤떨어지는 숫자로 추락하는 것을 보면, 지휘관의 잘못된 인식과 행동 여파가 얼마나 부하들에게 있어 사상 최악의 사태로 변질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좋은 상식이 될 것이다.

2 배경

1519년 2월 10일,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600여명의 에스파냐인, 300여명의 카리브 인디오(일명 안티야스), 22필의 군마, 10여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선박이 당시 미지의 땅이었던 멕시코(아나우악 땅)을 향한 원정을 시작하게된다. 아나우악 동부 해안가에 상륙한 코르테스는 당시 아나우악 땅에 거주하는 여러 원주민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굴복시켜, 소문으로만 무성한 아스텍 제국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으로 진군해 나아간다. 이에 아스텍 제국의 틀라토아니(황제)였던 모테쿠소마 2세[2]는 이러한 이방인들의 진군이 갑작스럽기 때문이었는지, 그들을 어떻게서든 저지하려고 했지만 전부 실패하였고, 결국엔 환영한다는 모습으로 코르테스를 수도 테노치티틀란에서 맞이하게 된다. 코르테스는 어떻게 해야 모테쿠소마 2세를 굴복시켜 테노치티틀란을 자신의 군주 카를로스 1세에게 바칠수 있을지 고민하던 중, 1519년 9월. 아스텍 수장중 하나인 쿠알포포카가 코르테스 부하들을 잡아가두어 에스파냐인들에게 반기를 드는 행위를 하였다. 이를 기회로 삼은 코르테스는 쿠알포포카와 관련된 모든 아스텍 귀족들을 붙잡고, 틀라토아니인 모테쿠소마 2세마저 믿을수 없다며 강제로 감금시켰다. 이윽고 아스텍제국의 중심부는 코르테스의 손아귀에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으며, 모테쿠소마 2세는 이방인 정복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했다.

모든 게 코르테스의 뜻대로 흘러가는 듯했으나, 실상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비록 코르테스의 강압적인 힘에 아스텍 귀족들은 굴복하는 척했지만, 코르테스와 그의 부하들의 신성모독[3] 및 강압적인 형벌방식[4]에 치를 떨고 있었다. 특히 에스파냐인들의 보조군인 틀락스칼라인들도 아즈텍인들을 우습게보고 다니니 증오가 더욱 커졌다. 그러자 멕시코에서 멀리 떨어진 쿠바에서는 쿠바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가 코르테스의 도를 넘은 월권행위를 용납하지 못하여, 부관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Panfilo de Narvaez)를 위시한 1200여명의 에스파냐, 카리브 인디오들로 이루어진, 일명 '코르테스 토벌군' 을 보내게 된다.

나르바에스의 군세는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400여명(그간 원정으로 줄어 있었다)보다 배는 많았었고, 코르테스는 어떻게든 이를 타파해 보기 위해 자신의 친구이자 부관이었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Pedro de Alvarado)에게 최소한의 인원(약 100여명)을 주어 틀락스칼라인들과 함께 테노치티틀란의 치안을 맡기고, 나머지 병력은 모조리 나르바에스와 격돌하기 위해 부관들에게 나누어보냈으며, 코르테스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했다.

4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이 한순간에 4분의 1정도로 줄어들게 되자, 아스텍에서는 반(反)에스파냐 중심의 귀족들로 하여금 선동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르테스가 떠나기 전, 아스텍 사제들과 귀족들은 아스텍인들의 성대한 종교적 축제인 톡스카틀(Toxcatl) 축제를 치룰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요구했고, 코르테스는 자신의 부재중 혹시나 아스텍 민심이 흐뜨러질 것을 염려하여 축제를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1520년 5월 10일(기록에 따라 다름) 톡스카틀 축제가 성대히 열리게 되었고, 테노치티틀란을 떠맡은 알바라도는 그 광경을 탐욕스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코르테스와 그의 원정군에 대한 일생일대 최악의 사고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2.1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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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초상화

신중하면서도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인 코르테스와 달리, 테노치티틀란을 맡은 알바라도는 충동적이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인물이었다.[5] 코르테스가 이런 알바라도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긴 것은 크나큰 실수였다!

하지만, 코르테스도 짱구를 굴린 게, 아스텍인들의 성대한 의식인 톡스카틀 축제를 허락해주고, 이를 통해 나르바에스 군세를 격파하기 전까지 시간을 벌여볼 셈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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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5월 10일, 아스텍 대 신전을 중심으로 약 600여명의 최상층 고위 귀족들이 모여들었으며, 그들은 축제를 한참동안 즐기고 있었다. 한편, 알바라도와 그의 치안병들은 혹시라도 모를 아스텍인들의 행위를 감시하기 위해 축제를 주도면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축제가 호전적이고 점점 더 격렬해지면서, 알바라도와 휘하 에스파냐인들은 불안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윽고 결정타를 날린 것은 알바라도 휘하 틀락스칼라인들이[6] 제공한 잘못된 정보였다. 틀락스칼라인들은 "아스텍인들은 믿을수 없고 코르테스의 부재동안 테노치티틀란의 모든 에스파냐인들과 틀락스칼라인들을 몰살시키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7]를 내포하였고, 이에 솔깃한 알바라도는 휘하 에스파냐인들에게 무장을 갖추게 하고, 톡스카틀 축제를 즐기고 있던 아스텍 귀족들을 에워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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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가 열린 지 둘째날, 아스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이 갑자기 포위를 하자 연유를 모른 채 그러려니 했지만 이윽고, 에스파냐인들의 칼질에 축제의 현장은 살육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에스파냐인들은 먼저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들의 팔과 얼굴에 마구 칼질을 하며 죽을 때 까지 공격했다. 가수들도 심지어 구경꾼들도 모두 살해되었다. 신성한 안뜰에서 벌어진 이 살육은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나서 에스파냐 병사들은 신정의 방으로 몰려들어가 다른 사람들을 죽였다. 그들은 물을 나르거나, 말에게 사료를 가지고 오거나, 곡물을 갈거나 혹은 바닥을 닦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축제 참가자들을 모조리 공격했다. 칼에 베이고, 뒤에서 창에 찔린 사람들은 내장이 몸 바깥으로 나온 채 쓰러졌다. 머리가 날아간 사람들도 있었다. 에스파냐인들은 머리를 베고 나서도 그 머리를 산산조각 냈다. 그들이 사람들의 어깨를 치자 팔이 몸에서 떨어져나갔다. 허벅지나 장딴지를 다치는 것은 예사였다. 배에 칼을 맞은 사람들은 내장을 땅바닥에 쏟으며 죽어갔다. 일부는 빠져나온 내장을 질질 끌며 달아나려 하다가 자기 내장에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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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포르티야의 부러진 창(Broken Spear)에 따르면, 에스파냐인들의 칼솜씨에 아스텍인들의 배에 갈리면서 장기가 쏟아져 나와, 그것이 다른 아스텍 귀족들의 발에 걸릴 지경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이 학살이 잔인무도했는지 알려주는 대목일 것이다.

알바라도가 왜 이런 잔인무도한 행위를 했는지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는데, 그중 몇가지는 추려보자면 알바라도의 탐욕[8], 틀락스칼라인들의 충동질로 인한 공포[9] 그리고 심지어는 코르테스의 계획된 의도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과 코르테스가 알바라도를 문책했던 모습을 볼 때, 마지막 가설은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상태이다. 아마도 첫 번째 '탐욕' 과 두 번째 '공포' 가 번갈아 교차되어 가면서 '톡스카틀 축제' 란 크나큰 비극을 낳았을 것이다. 어쨋든 이 학살로 아스텍 귀족 600명은 죄다 몰살당했다.

한편, 타쿠바의 영주 쿠아우테목과 이스타팔라파의 영주 쿠아틀라우악은 축제당일 고위귀족들이 에스파냐인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음을 알렸으며, 이에 많은 아스텍인들이 反에스파냐쪽으로 가세하게 된다.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남은 아스텍 귀족들은 쿠아틀라우악과 쿠아우테목을 중심으로 뭉쳤고, 어떻게 하면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들, 틀락스칼라인들을 완전히 몰살시킬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특히 에스파냐인들한테 어찌못하고 쩔쩔매는 황제 모테소쿠마 2세도 증오하여 그를 폐위하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전사들을 움직여, 알바라도와 에스파냐인들의 중심부였던 악사야카틀 궁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테노치티틀란의 운하부근에 전사들을 매복시키면서, 저멀리 나르바에스의 군대와 싸우고있는 코르테스가 만약에 돌아왔을 경우, 도시 안에서 코르테스 원정군을 몰살시킬 계획을 짰다.

2.2 늑대가 함정에 빠지다 : 테노치티틀란에 돌아온 코르테스

한편, 멕시코 동부해안에선 직접 300여명의 군대를 이끈 코르테스와 '코르테스 토벌군' 을 자처한 판필로 데 나르바에스의 1200여명의 군대와 격돌하게 된다. 하지만, 전투이전 코르테스는 나르바에스의 부관들을 황금으로 매수해 그들에게 싸울 의지를 잊게 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꼬드겼다. 쏴야 할 대포를 밀랍으로 막는 등, 나르바에스의 군대중 대부분이 코르테스에게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고, 코르테스의 기습으로 전투가 벌어졌지만, 사망 6명에 나르바에스의 부상(애꾸가 됨)으로 인해 별 힘도 안 들인 코르테스의 대승으로 끝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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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리로 코르테스는 자신의 총 4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과 나르바에스의 8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을 합하여 총 1200여명의 에스파냐 군대를 보유하였고, 군마도 96기나! 확충하게 된다.

이는 이전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군대중 숫자로 보나 질로 보나 가히 최상의 군대였으며, 이를 통해 그는 지나친 자신감과 함께, 이전의 신중함과 주도면밀함을 잃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코르테스가 나르바에스의 군대를 규합하는 동안, 테노치티틀란에서 온 원주민 전령이 커다란 소요사태에 대한 사건을 전하게 된다. 이에 코르테스는 차후 전개될 비극적인 사건(이 글의 주제인 슬픔의 밤)에 비추어 중대한 인식상의 오류를 드러내고 있는데, 바로 "아스텍인들이 함정을 파 논 도시(테노치티틀란)안으로 진군한다는 것" 이었다. 테노치티틀란은 호수위에 세워진 수상도시이고 인구도 25만명에 육박하기 때문에 지리상 익숙하지 않은 에스파냐인들이 도시안에 들어왔을 경우 함정에 빠질 것은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르바에스와의 전투에서 별 힘 안들인 승리이후 자신이 살아오면서까지를 되짚어 볼 때 가장 최상의 군대를 보유했던 그는 충분히 아스텍인들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2.3 전투의 시작

1520년 6월 24일, 코르테스의 1200여명의 에스파냐 군대+원주민 동맹군 8000명은 테노치티틀란의 인근도시 텍스코코에 도착하였으며, 테노치티틀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듣게 된다. 이윽고, 틀라토아니 모테쿠소마 2세와 부관 알바라도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접한 코르테스는 그들을 구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테노치티틀란 안으로 들어간다.

그가 돌아왔을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어떠한 환영인사 없이 매우 조용했다. 코르테스는 모테쿠소마 2세에 반기를 든 몇몇 아스텍 잔당들이 벌인 단순 소동이라 모테쿠소마 2세에게 달려가 그를 내세우면 반란은 자연스레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反에스파냐를 외치는 아스텍인들의 행위는 모테쿠소마 2세의 통제를 한참 벗어나 있었으며, 도시로 들어온 코르테스에겐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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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라도와 에스파냐인들이 거주하는 악사야카틀 궁전에 도착한 코르테스는 제일 먼저 알바라도를 문책하였다.[10] 그가 알바라도에게 "니가 뭔 짓거리를 한 줄 알어? 제정신이야?" 라면서 질책하는 동안, 궁전 안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협력했던 원주민 전령 몇 명이 아스텍인들에게 습격당해 초주검이 된 채 돌아왔고, 코르테스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채게 된다. 알바라도의 죄는 컸지만 일단 사태가 시급한 만큼[11] 사면하였으며, 아스텍인들이 어떤 행동를 취할 것인지 경계하면서 지켜보기로 하였다. 얼마 안가 대규모 아스텍 전사들이 악사야카틀을 포위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전투는 시작되었다.

궁전을 포위한 아스텍인들은 화살아틀아틀(투창기)를 쏘기 시작했는데, 코르테스의 기록에 따르면 그것이 어찌나 많은지 궁전밖으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을 정도라 적었다. 그는 부관 디에고 데 오르다스(Diego de Ordaz)에게 200여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아스텍인들의 포위망을 뜷게 하였다. 화승총병과 쇠뇌병 다수를 포함한 정예부대였고, 오르다스는 코르테스의 부관들중 여러 전투에서 보병대 지휘를 맡은 바 있는 백전노장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아스텍인들의 거센 포위망을 뜷을 수 없었으며, 순식간에 4명의 에스파냐인들이 전사하고, 오르다스 자신을 비롯한 80명의 병사들이 부상당하고 돌아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는 아스텍인들이 에스파냐인들과의 조우하면서 벌인 최초의 전투이자, 최초의 승리였다! 아스텍인들은 이 전투에서 엄페물을 이용, 에스파냐인들이 화승총과 쇠뇌를 쏘면 재빨리 숨고, 다시 그들이 장전하는 동안 공격하는 등의 계획적이고 치밀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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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다스가 패퇴한 이후 에스파냐인들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아스텍인들은 악사야카틀 궁전에 불을 놓아 에스파냐인들 전체를 태워버릴려는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에스파냐인들은 눈치채고 대포를 직접 배치하여 아스텍인들을 저지하였으며, 벽을 무너뜨려 번지는 불을 끄는데 성공하였다. 전투는 이런 식으로 소강상태로 흘러가고 있었고, 이러다가는 궁전 안의 12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과 약 8000여명의 틀락스칼라 동맹군이 먹을 식량이 매우 부족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코르테스는 직접 나가서 싸울 용맹한 병사들을 선발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아스텍인들은 전날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공격해오기 시작했고, 어찌나 많은지 화승총과 쇠뇌를 조준하지 않고 밖에다 쏘기만 해도 맞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대포를 쏘아 쓰러뜨려도 아스텍인들은 그 자리에서 금방 병력을 메웠고 이는 마치 아스텍인들은 대포를 맞아도 죽지 않은 것같은 이모탈 착시현상을 일으켰기 때문에 공포 그 자체였다고 코르테스는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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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르테스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최대한 병력을 궁전에 남겨두고 선발대를 파견하여 아스텍인들이 물밀듯이 들어오는 다리를 빼앗고, 가옥을 불태웠으며, 다수의 아스텍 전사들을 죽였다. 하지만 이러한 행위에도 아스텍인들의 피해는 매우 미미했고 오히려 이번공격에 70여명의 에스파냐인들이 다시 부상당하게 되었다.

결국에 코르테스는 이번에도 아스텍인들의 포위망을 뜷을수 없었고 하루는 또 이렇게 지나갔다. 코르테스는 어떻게 하면 아스텍인들의 돌과 투창, 화살세례를 막을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고, 이에 조선공 마르틴 로페즈(Martin Lopez)[12]장갑차처럼 병사들이 몸을 숨긴채, 전투를 행할 수 있는 전쟁병기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악사야카틀의 들보를 뜯어 목재를 한 곳에 모은 뒤, 두꺼운 널빤지가 그 위를 덮은 장갑차를 개발하게 된다.

이 목제장갑차(Ingenions)는 일명 "거북이" 라고 불렸으며, 20여명의 아군병사가 안에 들어가서 목제장갑의 보호를 받은채 안전히 사격할 수 있었고, 바퀴가 있어 전진도 가능했다. 로페스가 만든 3대의 장갑차는 위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아스텍의 바리케이드를 파괴하였으며, 병사들은 쇠뭉둥이를 소지하여 공격하는데 방해되는 가옥들을 부쉈다. 하지만 이러한 공격에도 아스텍인들의 공격은 더욱더 거세졌고, 코르테스는 이제 모테쿠소마 2세라는 최후의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

2.4 모테쿠소마 2세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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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인들의 포위를 뜷을려는 여러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코르테스는 모테쿠소마 2세라는 최후의 카드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스텍 사회는 제정일치라 틀라토아니(황제)는 신의 대리인이며, 명령을 거부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이러한 사회를 어느정도 파악한 코르테스는 모테쿠소마 2세를 불러 아스텍인의 공격을 잠시나마 중지시킬 수 있게 설득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13] 온건파인 모테쿠소마 2세는 사태가 더이상 커지는 것을 원치않았기에 코르테스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모테쿠소마 2세는 궁전의 높은 테라스에 서서 자신의 신민들이 바라보는 가운데 전투를 중지할 것을 연설하였으나, 사전에 아스텍인들이 모테쿠소마 2세의 폐위를 결정한터라 그의 명령이 먹힐리가 없었다. 오히려 분개한 아스텍 신민들에게 '매국노', '배신자'라는 욕만 먹고 돌맹이와 화살 세례를 받아 그중 날아온 돌멩이에 머리를 맞아 치명상을 입어 죽었다.

이 모테쿠소마 2세의 죽음을 야기하는 하나의 큰 사건은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의 미스터리로 남겨져 있는데, "모테쿠소마 2세가 과연 어떻게 죽었나?" 에 대해서이다.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이 사건에 대해, 당대 역사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에스파냐인들에게 던진 돌이 모르고 모테쿠소마 2세에 맞게 되었다" 고 적었으며,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 현장에 직접 있었던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모테쿠소마 2세의 부상이 치명적이지는 않았으나, 그가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또 하나의 설명으로는 모테쿠소마 2세가 코르테스에게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코르테스에게 반감을 가진 원주민 역사가나 유럽의 다른 비판가들에게 나온 주장으로, 모테쿠소마 2세와 인질들이 코르테스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몽둥이에 구타당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도 살해당하기 이전 모테쿠소마 2세가 그의 신민들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에는 어느정도 의견이 일치된 형태이다. 한편 당시 종군신부였던 프란시스코 데 아귈라르는 모테쿠소마 2세가 돌멩이에 맞은 사건 자체를 부정하면서, 코르테스의 명령으로 인해 모테쿠소마 2세가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기에 지금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여전히 진실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2.5 요피코 신전에서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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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의 카드인 모테쿠소마 2세가 죽자, 코르테스와 에스파냐인들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모테쿠소마 2세의 동생 쿠이틀라우악은 배신하고 아스텍군에게 가담하고 말았다. 그는 모테쿠소마 2세의 시신을 아스텍 포로에게 주어 아스텍 진영으로 데리고 가기로 한 뒤 어느정도 시간을 끌어보려고 했다. 이윽고 아스텍의 수장 몇 명이 코르테스와의 면담을 청했고, 코르테스는 그들과 강화를 제의했지만, 아스텍인측은 에스파냐인들과 틀락스칼라인들이 무조건 도시를 떠나라는 것이 원칙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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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 결렬되면서 전투는 다시 시작되었고, 일방적인 방어전을 취한 코르테스는 이윽고 아스텍인들의 "전투의지를 꺾을수 있는 중요한 기념물" 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하였다. 그는 에스파냐인들이 거주한 악사야카틀 궁전의 바로 맞은 편인 요피코 신전을 지목하였고, 로페스의 발명품인 장갑차를 대동한채 신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장갑차로 인해 신전에 진입은 성공했지만, 아스텍 전사들은 신전위에서 돌과 투창을 던진채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요피코 신전의 계단은 100개나 되기 때문에 중무장한 에스파냐 보병과 틀락스칼라 병사들이 올라가기기에 여간 힘든게 아니었다. 가파른 계단에다가 아스텍인들의 돌과 투창공격을 피해야되니... 직접 전투를 이끈 코르테스는 전투를 치르면서 신전을 오르는 도중, 미끄러져 하마터면 황천길을 갈 뻔했지만 부하들이 잡아주어 간신히 살아남았다. 이 전투로 인해 코르테스는 자신이 다쳤던 손을 또 다치게 되면서 나중에는 손가락 2개를 아예 못쓰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한편 이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는 에스파냐군과 틀락스칼라군 전원이 부상당했지만, 역사에 남을 맹렬한 전투이며 적이 모두 죽은 대단한 혈전이었다고 기록했다. 이 요피코 신전이 점령당한 것은 아스텍인들에게 큰 타격이었고, 아스텍 측은 코르테스와 재협상을 요구하게 된다.

2.6 협상

아스텍측이 협상을 요구하자, 코르테스는 신전을 점령한 것에 자신감에 차서, 아스텍측에 당장 강화를 하고 군대를 철수시키라고 말했다. 이때 우리들 요구 조건 안듣어주면 도시 전체를 불살라 버리겠다는 투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코르테스는 누가 유리하고 누가 불리한지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아스텍의 중요한 요피코 신전을 점령했다 한들, 테노치티틀란은 넓디넓었고 요피코 신전과 같은 신전은 수백 개가 산재해 있었다. 코르테스의 협박에 아스텍측은 코웃음치며 오히려 코르테스에게 "우리는 다수이고 니네는 소수이기 때문에 에스파냐 한 명 죽이는데 우리 전사 2만 5천명이 희생된다해도 결국엔 우리가 이김" 이라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아스텍측은 코르테스 군대의 식량과 물자가 바닥을 기고 있음을 눈치챈 상태였기 때문에 꿀릴 게 전혀 없었다.

결국 협상은 또 결렬되었고, 빡친 코르테스는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신전을 점령한 기세를 몰아 주변 가옥들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이 공격으로 약 300채 이상의 가옥이 불탔으며, 코르테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던 바리케이드 역시 부숴지고 말았다. 아스텍인들은 코르테스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운하를 파괴하고 일부러 길을 어지럽게 퍼뜨렸지만, 코르테스를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는 오히려 테노치티틀란의 중요한 8개의 다리 가운데 4개를 점령하였으며, 수많은 가옥과 신전들을 파괴하는데 성공하였다.

사건이 긴박하게 흐르자, 놀란 아스텍 측에서는 다시 재협상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으며, 코르테스가 붙잡고있는 아스텍 고위층 귀족들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그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며 평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윽고 코르테스는 "이제 아스텍인들과 평화협정을 맺었으니, 더 이상의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선도 철거하라" 고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투에 지쳐있던 부하들도 명령을 받아들여 휴식에 들어갔다. 하지만 이는 그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2.7 후퇴를 계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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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텍인들은 사실 협상을 맺은 척하면서, 코르테스 원정군을 궤멸시킬 전사들을 모집하고 있던 중이었다. 시간이 어느정도 지나자, 대규모의 병력을 갖춘 아스텍인들은 해이해진 코르테스 군을 기습하였고 코르테스가 점령했던 4개의 다리 모두가 다시 아스텍인들에게 탈환되었다. 당시 식사중이었던 코르테스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당황했다고 기록에 적고 있다. 아스텍인들의 공격으로 수십명의 에스파냐인들과 수백명의 틀락스칼라인들이 살해당했고, 그동안 점령했던 다리와 신전은 빼앗겼다. 상황이 불리해짐을 알게 된 코르테스 휘하의 부관들 사이에서 "이 지옥같은 도시에서 빠져나갈 것" 을 권고하는 항소가 빗발쳤다. 하지만 자신이 애써 점령한 도시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은 코르테스는 그들의 주장을 무시한 채, 빼앗긴 다리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직접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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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투에서 코르테스는 아스텍인들의 기습공격을 받게 되어 하마터면 포로로 붙잡힐 뻔하였다. 이로 인해 전투에서 코르테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에스파냐인들에게서 퍼지기도 했다. 물론 헛소문으로 밝혀졌고 에스파냐인들은 다리들을 재탈환하여 도시를 빠져나갈 어느정도 역량을 확보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도시를 빠져나가는것은 사령관인 코르테스의 명령이 있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한시코 도시를 빠져나가길 거부했다.

아스텍인들이 혼란을 위해 허물어버린 다리는 공돌이 마르틴 로페스가 만든 조립식 목제 다리가 대체해 주었다. 에스파냐인들은 조립식다리를 이용해 넓은 둑길을 이동할 수 있었다.

이때 보테요 푸에르토 플라타(Botello Puerto Plata)라는 에스파냐 졸병이 있었는데, 그의 점성술예언은 매우 잘 들어맞기로 코르테스의 부관들에게 소문이 좍 퍼져 있었다. 푸에르토 플라타는 자신의 예언에서 코르테스의 군대가 도시를 빠져 나가야만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하여 부관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게 되면서 도시를 빠져나가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코르테스는 한때는 자신의 영향력에 있었던 테노치티틀란의 재화를 결코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에스파냐인들은 대부분 부상당해 있었고, 원주민 동맹군도 피해가 막심했다. 특히 전투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기에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출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3 슬픔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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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0년 6월 30일 새벽, 코르테스는 지옥같은 테노치티틀란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일련의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일단은 후퇴하는데 무기와 식량을 제외하곤 방해되는 일련의 물건들을 전부 다 포기하는 게 상책이었다. 그는 아스텍이나 동맹군 원주민이 바쳐왔던 황금들을 국왕 카를로스 1세의 명분이란채 5분의 1을 빼고 나머지를 부하들에게 재량껏 가져가라고 뿌렸다. 코르테스와 처음부터 동행했던 400여명의 베테랑들과 수천의 틀락스칼라인들은 이 황금이 파멸적인 효과를 가져올 줄 잘 알고 적당히 가져가거나 아예 소지하지 않았지만, 코르테스에게 투항했던 과거 나르바에스의 휘하 병력 800여명은 황금에 대한 욕심이 강해서 자신의 갑옷과 옷속에 황금덩이를 가득 쑤셔박았다.

6월 30일 새벽은 때마침 태풍으로 인해 비바람과 강풍이 몰아닥쳤다. 아스텍인들은 이로 인해 대부분의 군대를 돌렸으니, 코르테스는 이를 천운으로 여겨 도시에서 빠져나가고자 했다. 후퇴길은 테노치티틀란의 옆 도시인 타쿠바로 행한 길을 택했으며, 이 루트는 에스파냐인들이 거주했던 곳에서 가장 가까웠기에 선정되었다. 코르테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각자의 부관들에게 지휘하도록 하였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 선봉부대 : 곤살로 데 산도발, 안토니오 데 키뇨네스, 디에고 데 오르다스
  • 중앙부대 : 사령관 에르난 코르테스, 크리스토발 데 올리드, 알론소 데 아빌라
  • 후방부대 : 페드로 데 알바라도, 후안 벨라스케스 데 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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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봉부대가 먼저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가고 이윽고 코르테스가 이끄는 중앙부대가 길을 건널 때쯤, 하필이면 이때, 물을 긷던 아스텍 여인에게 발각되게 된다. 에스파냐인들은 쇠뇌로 고발하려는 여인을 정밀사격해서 죽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바로 수많은 아스텍 전사들이 카누를 타고 오면서 후퇴하는 에스파냐인들과 틀락스칼라인들 공격하는 아스텍인들 사이에 대 혼란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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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중앙부대의 에스파냐인들은 과거 나르바에스 휘하의 투항군이 많이 포진해 있었으며, 황금을 넣어 무거운 몸으로 싸웠던 그들은 피해가 막심했다. 적들을 피해 물로 뛰어든 에스파냐인들은 황금의 무게에 가라앉는 일이 생겼으며, 수영에 능수능란한 아스텍인들에게 금방 죽거나[14] 사로잡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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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들이 설치한 다리조차 끊어질 위기에 처하지만, 원주민 짐꾼들과 아즈텍 전사들의 시체가 쌓이면서 일종의 다리를 만들어주었기에 에스파냐인들은 일명 시체다리를 통해 겨우 건너갈 수 있었다. 코르테스는 뒤도 안돌아보고 후퇴하여, 5기의 기병과 100여명의 보병이 겨우 선봉부대가 먼저 자리잡고 있는 타쿠바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공격으로 약 600에서 최대 8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과 2000에서 4000의 틀락스칼라인들이 사망했으며, 대포와 화승총은 전부 잃어버렸고, 군마들 또한 부상당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후방부대를 지휘한 알바라도와 벨라스케스 데 레온은 중앙부대가 아스텍인들의 기습에 끔살당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리는 끊어져 있었으며, 시체가 즐비한 것을 깨달은 약 80여명의 에스파냐인들은 기겁하여 그 자리에서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차라리 테노치티틀란 안에서 싸우다 죽겠다면서 내빼었다. 하지만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원인이면서 이번 사건의 큰 책임이 있는 알바라도는 둑길을 빠져나가야된다고 생각했으며, 아스텍인들의 포위를 맹렬히 뜷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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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또다른 지휘관인 벨라스케스 데 레온이 아스텍인들에게 붙잡혔지만, 알바라도는 자신의 목숨이 아까워, 그의 도움요청을 무시한 채 끊어진 다리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다리는 끊어져 있었고 폭은 사람이 눕혀 5명을 줄세울 길이 만큼 넓었다. 한마디로 인간이 도저히 뛰어넘을 거리가 아니었지만 알바라도는 해내었다!! 본인의 말에 따르면 부하들이 아스텍인들에게 쓰러지고 자신마저 잡힐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이판사판으로 자신의 기병창으로 장대높이 뛰기를 하여 반대편으로 무사히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알바라도가 도약했던 곳을 "알바라도의 도약대(Castillo de Alvarado)" 라 하여 멕시코 시티 중심가의 길의 지명으로 남아있다.

4 피해

사령관이었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목숨을 부지한 채 테노치티틀란을 빠져나와 타쿠바에서 부대를 재정비했다. 하지만 자신이 휘하에 두었던 사상 최대의 1200여명의 에스파냐 병력은 순식간에 약 500여명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코르테스가 슬픔의 밤에서 입은 피해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가장 적은 것은 단연 코르테스가 제시한 200여명이라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일부러 피해상황을 줄이고 보고하기 위해 최소화시킨 것임이 확실함으로 맞지가 않다. 역사가 페르난데스 오비에도와 후안 카노는 1170명에 달하는 에스파냐인들이 사망했다고 하지만, 이는 코르테스가 보유했던 1200명에 근접한 수준이므로, 뒤이어 벌어질 오툼바 전투에서 남은 4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과 비교해보자면 숫자가 맞지않다.

학계에서는 대략 600에서 800여명의 에스파냐인들이 살해당했다고 보고 있으며, 원주민 동맹군의 피해는 약 2000에서 4000여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코르테스는 후퇴당일 사로잡고있던 수많은 아스텍 귀족들과 동행하였는데, 이에 타쿠바로 가는 길을 알려준 타쿠바의 영주 치말포포카가 아스텍인들과 에스파냐인들에게 뒤섞어 살해당하고, 도냐 아나로 세례명을 받고 코르테스의 애인이 되어 그의 아이를 임신하였던 모테쿠소마 2세의 딸도 이 자리에서 죽게 되었다.

이 사건을 "슬픔의 밤(Noche Triste)" 이라 부르게 된 개요는, 코르테스 원정대의 일원으로써 아스텍 정복을 직접 경험한 역사가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가 붙어준 것이다. 아메리카 발견(이라 쓰고 정복이라 읽는) 역사상 가장 많은 에스파냐인(유럽인)이 살해당한 최대, 최악의 패전이었기 때문이다. 몇몇 아동용책이나 잘못된 아스텍 지식 서적에서 '슬픔의 밤 전투' 라는 식으로 아스텍인들이 이 사건에 이름을 붙여준 마냥 쓴 모습이 몇몇 있는데, 이것은 크나 큰 오류이다.

5 코르테스는 왜 패배했나

나르바에스의 병력을 규합한 코르테스는 1200여명이라는 이전 에스파냐의 아메리카 정복역사상 최대의 병력과[15] 원주민 동맹군 병력 8000여명인 9200명을 보유하게 되면서 신중하면서 주도면밀한 모습을 잃고 자만심에 빠진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일단 그가 주력인 1200여명의 에스파냐 병력을 믿은채,[16] 함정 자체였던 테노치티틀란 중심부인 악사야카틀 궁전에 간 것 자체가 크나큰 실수였다. 아스텍인들은 그것을 노렸고, 악사야카틀 궁전에 갇힌 1200명의 에스파냐인들과 8000여명의 원주민 동맹군은 꼼짝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코르테스가 테노치티틀란 자체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는 것에서 에스파냐인들의 피해가 더 막심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아스텍측은 여러차레 강화를 요청했지만, 사태파악을 못하고 1200명의 에스파냐 병력을 믿은 코르테스는 끝까지 자신이 이길 수 있을거라고 자만했던 것이었다. 이는 일례로 그가 테노치티틀란에 처음 입성했을 때, 도시의 복잡함에 혹여나 모를 아스텍인들의 포위를 막기위해 쌍돛범선을 제작하도록했던 '초심의 신중함' 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한 아스텍인들의 변화된 전술도 한 몫을 하게 되었다. 이전에 아스텍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의 쇠뇌화승총, 대포를 매우 두려워했으며, 이에 대한 전술도 매우 부족했었다.[17] 하지만 그들은 재빨리 적응했고 바리케이드를 통한 일련의 기습공격은 오늘날의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행하는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미군에게 행한 공격과 매우 흡사했다.[18] 그들은 건물을 무너뜨러 바리케이드를 만들어 에스파냐 기병의 위력적인 돌진을 저지하였고, 나무를 깎은 기병용 창까지 만들어 에스파냐 기병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메소 아메리카 전사들은 밤에는 요괴와 악귀들이 자주 출몰한다고 생각하였기에 밤에 싸우는 것을 매우 꺼려했으나, 6월 30일 코르테스에게 행한 기습공격은 그마저도 타파한 매우 '파격적이고 조직적인 공격' 이었다.

6 이후 여파

코르테스 자신과 부관들을 포함한 모든 에스파냐인들은 저마다 경미한 부상이나마 없는 자가 없을 정도로 사태가 매우 심각했었다. 96기의 군마는 대부분 죽어[19] 23기밖에 남지않았고, 이마저 부상당해 다리를 절뚝거리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화승총과 대포는 도망친다고 모조리 다 잃어버리고 남은거라고는 쇠뇌와 에스파냐인 500여 명과 틀락스칼라인 2000여 명 정도였다.

코르테스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한 채 동맹군인 틀락스칼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기로 마음먹었고, 이윽고 그는 지옥같은 후퇴 여정을 강행하게 된다. 특히 도망친다고 식량도 제대로 챙겨오지 못해서 식량부족으로 고생했다.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후퇴동안 약 100여명의 에스파냐 병사들이 탈진과 부상으로 쓰러지거나 사망하였으며, 코르테스가 직접 주위에 열린 야생 옥수수를 따먹거나 지쳐 쓰러진 군마를 잡아먹을 정도였다.

슬픔의 밤 이후 아스텍측에서는 反에스파냐 분위기로 고조되었으며, 이에 협력한 자들과 포로들을 모조리 참수하였다. 죽은 에스파냐 병사들과 틀락스칼라인들의 시신들도 참수하여 목을 걸어놓았다. 모테쿠소마 2세의 뒤를 이어 틀라토아니에 오른 모테소쿠마 2세의 동생 쿠아틀라우악은 조카인 모테쿠소마 2세의 아들(정신병자라 한다)을 에스파냐인들과 협력한 죄와 자신의 황권을 뒤높이기 위해 처형시킨다. 한편, 아스텍인들이 죽인 코르테스의 군대들 가운데, 나르바에스 군대의 노예였다가 코르테스 군의 소유가 된 프란시스코 에이두라라는 흑인노예가 있었는데, 이 흑인 노예가 하필이면 천연두 보균자였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는 다들 알 것이다.

코르테스의 부관들은 이 참담한 패배에 아스텍을 결코 정복하지 못할거라 했으며, 코르테스에게 멕시코 땅을 벗어나 에스파냐의 확고한 식민지인 쿠바로 되돌아가야 된다고 탄원서를 냈다. 하지만 코르테스는 그럴 경우 자신이 쿠바의 총독한테 처벌당할것이 분명하기에[20] 그들의 주장을 거부했고, 틀락스칼라로 가던 병들고 지친 400여명의 에스파냐인과 2천여명의 원주민 동맹군은 아스텍측에서 보낸 4만명의 대군을 테노치티틀란과 틀락스칼라 중간지대인 오툼바 평원에서 마주치게 된다.
  1.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2 : 정복자에서 이 전투가 시나리오로 나온다.
  2. 몬테수마 2세로 더 잘알려져 있다.
  3. 아즈텍 신들의 신상을 때려부수고 신전에 성모마리아 상을 세우게 함. 인신공양 역시 금지시켰다.
  4. 쿠알포포카는 모테쿠소마 2세와 아스텍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당했으며, 화형은 아스텍인들에게 있어 새로우면서도 매우 이해할 수 없는 형벌이었다.
  5. 이것은 후일 그가 과테말라 정복에서 행한 행위에서도 잘 보여진다.
  6. 이 사람들은 충성을 바쳤기에 특별히 에스파냐군의 검과 창을 쓰도록 허가해주었다.
  7. 아스텍인들에 대한 틀락스칼라인들의 악감정일 수도 있다. 특히 아스텍인들은 틀락스칼라인들을 착취하고 잡아먹다보니 그들 입장에선 아스텍인들이 못믿을놈들로 생각한것은 당연하다.
  8. 아스텍 귀족들의 화려한 장신구에 눈독이 듬
  9. 140여명의 병력으로 25만명의 인구를 자랑하는 테노치티틀란의 치안을 담당해야 되니... 충성하는 틀락스칼라군도 수천에 불과한 판국이라
  10. 앞서 언급한 학살 건 때문이다.
  11. 알바라도는 무식했지만 전투에서는 유능한 부관이었다. 이것은 훗날의 전투에서도 잘 나타난다.
  12. 그는 코르테스의 아스텍 정복의 1등공신이다. 또한 슬픔의 밤 당시 날 빠져나오던 코르테스가 가장 먼저 찾았던것은 로페즈의 생사여부였으며, 그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이프러스 나무 그늘에서 부하들을 잃은 죄책감에 눈물을 흘리던 코르테스가 갑자기 회심의 미소(…)를 띄우며 아스텍을 정복할 기회는 남아있다고 할 정도였다. 참고로 테노치티틀란 포위당시 활약했던 13척의 쌍돛범선도 그의 작품. 전쟁에서의 공돌이의 위대함...
  13. 일설에는 모테쿠소마 2세가 직접 나섰다고 한다
  14. 아스텍인들의 무기에 살해되거나 익사당했다.
  15. 왜냐면 그 당시 에스파냐는 인구가 고작 700만에 불과했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오스만 문제에 신경쓴다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16. 원주민 동맹군은 무장 수준이 에스파냐인들에 비하면 형편없고 근접전 담당이 주임무라서 사격병력이 궁병과 투척병을 제외하곤 적었던터라 기대도 안했다.
  17. 틀락스칼라인들은 그전부터 상대해왔던터라 두려워하지 않았다.
  18. 이스라엘군과 싸우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쓰는 전술도 이와 비슷하다.
  19. 죽은 군마들은 참수되어 죽은 에스파냐군, 틀락스칼라군과 함께 목이 내걸린다.
  20. 앞의 행동이 명백한 월권 행위라서 처벌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