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난 코르테스

hernando-cortes-1.JPG

Hernán Cortés(1485? ~ 1547.12.2)

1 개요

스페인콩키스타도르. 후술하겠지만 관점에 따라 인류사에 남은 '정복자'와 근대 이전 최악 '학살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자는 주로 유럽에서[1], 후자는 주로 중남미에서 받는 평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에르난 코르테스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으나 코르테스는 페르난도 코르테스, 페르난 코르테스, 에르난 코르테스 등의 다양한 이름을 썼고 그가 가장 자주 썼던 이름은 페르난도 코르테스인지라 해외엔 페르난도 코르테스로 잘 알려진 경우도 있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

1485년 엑스트레마라두라 바다호스 메데인에서 마르틴 코르테스 데 몬로이와 도냐 카탈리나 피사로 알타미라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코르테스의 공식 전기작가 프란시스코 로페스 데 고마라는 코르테스의 부모가 모두 이달고 출신이며 그의 뿌리가 유서깊은 귀족이라고 주장했으나 코르테스에 비판적인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는 시종의 아들이며 가난하고 비천한 집안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일단 그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의 아버지는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바도 있고 그의 어머니도 도냐(dona) 칭호로 불리었기 때문에 최소한 귀족 출신이라는 것에 있어서는 학계에서도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바이다. 당연하지만 당시에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신분 상승을 도모할 기회는 없다시피했고 많은 스페인인들이 레콩키스타나 이웃의 이탈리아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여함으로 부귀영화를 노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마르틴 코르테스는 아들을 관리로 승진시키기 위해 코르테스가 14세이던 시절 살라망카로 유학보냈다.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체류 시절에 대해선 말이 많은데 고마라는 그가 프란시스코 데 발레라의 집에서 2년간 문법을 배웠으나 건강 문제로 중단했다고 기술했고 세르반테스 데 살라사르와 안토니오 데 솔리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으나 다만 코르테스가 질병과 적성, 경제적 궁핍으로 그만두었다고 조금 더 다른 이유를 대었다. 그런데 코르테스를 싫어했던 라스 카사스 신부는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을 땄으며 라틴어를 배워 구사할 수 있었다는 등 코르테스의 살라망카 시절을 실패로 묘사한 전기작가들관 다른 주장을 하였다. 베르날 디아스도 코르테스가 법학사 자격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부연한 바가 있으나 정작 코르테스는 자신이 법학사 자격이 있다고 말한 바가 없었다. 코르테스가 고작 2년 밖에 안되는 시간에 대학이라도 다녔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코르테스의 친척인 후안 수아레스 데 페랄타는 코르테스가 바야돌리드 시에서 법원 서기로 취직해 1년간 머물며 글과 서기의 사무에 배워 능통했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던 중 라레스 기사단의 기사인 수사 니콜라스 데 오반도 에스파뇰라 섬의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자신의 고향 엑스트레마두라 출신의 이달고들을 대거 모집하여 데려갔는데 이때 신대륙으로 향한 이달고들로 알론소 포르토카레로, 곤살로 데 산도발, 안드레스 데 타피아 그리고 코르테스가 있었다. 코르테스의 아메리카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2.2 아메리카로

1504년 코르테스는 산루카르 데 바라메다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산토도밍고에 상륙했다. 오반도 총독은 그를 아수아 시의 서기로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그곳에서 6년간 서기로 근무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집, 건축용 부지, 경작지를 보유하게 되었고 큰 수입을 얻는 등 부유해졌다. 1511년 콜럼버스의 아들인 디에고 콜론 제독은 디에고 벨라스케스에게 쿠바 정복과 통치 임무를 맡겼는데 코르테스는 300명의 쿠바 원정대에 포함되었다. 스티븐 메리맨 등은 코르테스가 쿠바 원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뒷받침되는 증언이 없는데다가 스페인의 쿠바 정복은 쿠바 원주민들이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않음으로 별것 없었기 때문에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얻은 경험으로 아즈텍을 정복했다는 일부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코르테스가 쿠바에서 맡은 임무는 행정직으로 쿠바에 건설된 바라코아 시의 알 칼데로 일했다.

코르테스는 이곳에서 관리로서의 성공은 물론,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어냈고 목장과 금광 경영을 통해 유복한 삶을 살았다. 코르테스는 자신이 쿠바에서 얻은 아내인 카탈리나 후아레스를 위한 사치와 연회에 돈을 쓰면서 신대륙 개척 열풍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1517년~1518년 벨라스케스가 주도한 두 차례의 유카탄 반도 탐험이 대실패로 끝나고 조직된 세번째 원정대에 갑자기 대장으로 지원하면서 1518년 10월 23일 원정대 대장으로 임명되어 인디오들과 물건을 거래할 권한만을 가진 채 유카탄으로 떠났다. 사실 벨라스케스가 코르테스를 대장으로 임명한 것은 코르테스의 충성심이 확고해 보여서 였기 때문인데 이 시기 코르테스는 노골적으로 벨라스케스의 요구를 한참 넘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정복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에 코르테스의 정적들은 벨라스케스에게 로비를 하여 벨라스케스에게서 코르테스의 대장 임명 취소를 이끌어냈으나 코르테스는 벨라스케스가 내린 출항 중지를 씹고 1519년 2월 10일 600명의 스페인인, 300명의 안티야스 인디오, 12필의 말, 10문의 대포를 실은 10척의 배와 함께 유카탄 탐험에 나섰다.

신대륙을 정복해 금을 열심히 강탈하려는 야망을 품은 코르테스는 (원주민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한 원주민들과 성대한 전투를 벌이는 것으로 멕시코 정복사의 첫 단원을 시작하며, 협상이 가능한 부족에게서는 금을 뜯어내고, 아닌 부족은 그냥 무력으로 굴복시킨 다음 금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오로지 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 근처를 헤집고 다닌다. 이 와중에 포톤찬에 자리잡은 마야 계열 부족에서 말린체를 얻게 된다.

하지만,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의외겠지만, 이 탐욕스러운 이방인들을 중앙아메리카 근방의 모든 부족들이 적대한 건 아니었다. 특히 아즈텍에 핍박받던 마야나 치차멕 계열 부족들은 (이유야 어쨌건)증오스러운 아즈텍 부족들을 탈탈 털어버리는 콩키스타도르들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금과 각종 자원[2]을 제공하며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했고, 코르테스는 이 동맹을 존중할 것을 맹세하며[3] 동맹 부족들로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얻게 된다.[4] 그리고 결국 '황금으로 가득한 제국'인 아즈텍에 대한 이야기가 코르테스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백여 명의 뜨내기를 이끄는 안달루시아 촌뜨기는 인구 수백만에 수만의 군대를 가진 대제국을 털어서 황금을 잔뜩 뜯어낸다는 미친발상을 하고 만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게 있는데 이들이 고작 중대나 대대 정도에 불과한 규모의 촌놈들 집합체로 저 장대한 대제국과 맞설 생각을 하려고 했던 것에는 그만큼 자기들이 믿을만한 무기가 있기 때문이었는데 그게 다름아닌 화약. 즉, 대포였다. 제아무리 제국이라지만 기껏해야 돌로 만든 창과 나무 몽둥이가 주력무기인 놈들 상대로 총과 대포라는 결전병기라면 숫자에 상관없이 해볼만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은 금 못지 않게 헤집고 다니면서 찾아 헤맨 광물이 다름아닌 원주민들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초석이었는데 이 초석이 화약의 원료였기 때문이었다. 아즈텍 제국에서는 산꼭대기에 가야 있는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별 시답지 않은 낮은 부가가치를 가진 저질 광물 나부랭이가 이렇게 무서운 물건이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창도 같은 창이 아니었다. 아즈텍 제국은 흑요석으로 날을 만든 창이라 단단한 곳에 부딪히면 깨지기 일쑤였는데 코르테스의 창은 무려 로 만든 창이다. 단단함과 날카로움에서 비교가 안 된다. 여담이지만 이런 컬트 차이로 인해 압승을 거두는 전투 장면이 영화 천군에 나온다. 대한민국 국군조선인민군 군인들이 소총사격으로 여진족들을 싹쓸이하는 장면이다.

화약이 엄청나게 무서운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강철판도 마치 창호지를 손가락으로 뚫듯 마구 뚫어버리는 가공할 파괴력 때문이다. 이러한 파괴력은 맞는게 곧 즉사로 이어진다. 그리고 추가로 무서운 점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게 화약을 쏠 때 내는 소리다. 뻥뻥 터지는 게 마치 천둥치는 소리를 연상케 할만큼 크고 소름끼치는 소리가 난다. 화약에 맞아도 무섭고 안 맞아도 무섭다. 콩키스타도르의 입장에서는 명중되어도 적을 압도하고 빗나가도 압도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에르난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은 아무리 신뢰하는 원주민에게라더라도 절대로 화약 만드는 비법을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에르난 코르테스는 자신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만들 정도로 엄청나게 친한 여자인 말린체에게조차도 다른 소원은 다 들어줘도 오직 초석으로 화약을 만드는 비법만은 일절 안가르쳐줬다. 이유는 간단하다. 얘들이 이걸로 무장하면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해버리기 때문이다. 콩키스타도르가 비교 자체가 안되는 머릿수로 그나마 아즈텍 제국을 압도하는 유일한 무기가 초석으로 만든 화약인데 아즈텍 제국이 흑요석 몽둥이가 아니라 화약으로 무장하면 이미 GAME OVER. 절대로 가르쳐 줄 리도 없고 가르쳐 줘서도 안 된다.

코르테스는 아즈텍(금)을 찾아 열심히 서진을 시작하게 되고, 진군 도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부족들은 전부다 때려부순다. 다만 흔히 오해되는 것과 같이, 숲 속에서 움직이는 인간 형상은 모조리 과녁으로 간주하며 피로 물든 행군을 해나간 건 아니며, 가능하면 협상을 시도하려고 하였다.[5] 코르테스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항하는 부족들에게 코르테스에게 협력하라는 전언을 보내두기도 하였다. 또한 아즈텍 동맹 부족들 중에서도 코르테스에 협력하는 부족들들도 많았다. 가령 아즈텍의 동맹이었으나 그 지배를 환멸하던 한 부족장인 치코메코아틀은 코르테스를 환대하며 코르테스가 멕시코 최초의 스페인 식민지인 베라크루즈를 세우는 걸 도와준다. [6]


베라크루즈를 건설하면서 잠시 시간을 보내던 코르테스에게 몬테수마가 보낸 사절이 와, 금을 선물하며 전쟁을 피하자는 의사를 전달한다. 이 사절들은 코르테스를 신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더 많은 금을 원한다며 사신을 모욕적으로 대하며, 콩키스타도르들이 가진 화약 무기의 위력을 과시하여 쫒아낸다. 두 번째로 온 사절은 더 많은 금을 선물로 건네며, 코르테스를 테노치티틀란으로 초대한다.

하지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는 길에, 코르테스는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몬테수마의 계획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아즈텍의 통솔력이 미치지 않았던 것인지는 몰라도, 어떤 원주민들은 환대하는 반면 어떤 원주민들은 다짜고짜 기습하기 일쑤였고, 그중 가장 위험했던 것은 틀락스칼라와의 전투였다. 하지만 이후 틀락스칼라들은 아즈텍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자 코르테스의 충실한 동맹이 된다.

다시 서쪽으로 향하던 코르테스는 평소보다 많은 아즈텍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는 아즈텍의 동맹도시 촐룰라에 도착한다. 코르테스는 여기서 물자를 보충할 계획이었지만, 촐룰라가 이상할 정도로 요새화되어있는 것을 경계한 휘하 틀락스칼라인들은 반대한다. 또한 몬테수마의 사절이 말했던 바와는 달리, 도시의 지도자는 코르테스를 환영하러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 말린체가 코르테스에게 촐룰라는 사실 스페인인들이 잠든 틈을 타서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말하자, 코르테스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더 이상 확인같은 건 하지 않고 촐룰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이는 촐룰라 학살로 이어진다.[7]

요컨데, '처음 본 백인에 놀란 원주민들은 그들을 신으로 여겼으며,' 콩키스타도르들은 환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테노치티틀란으로 가서 아즈텍을 멸망시켰다. 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원주민들은 여느 원주민들이 그러하듯이 이방인에게 적개감을 느꼈으며, 이를 전투로 해결하려 했다. 심지어 코르테스 이전에 이미 원주민들은 백인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또한 콩키스타도르들도 자신들이 금을 약탈하려 여기 왔다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 않았다.

콩키스타도르들이 신으로 환대받으며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했다는 잘못된 지식은 사실 복합적인 요소와 정보의 왜곡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전설인데, 우선 몬테수마가 콩키스타도르들에게 환대하는 듯한 서신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서신이 코르테스가 아즈텍 부족들을 초개처럼 쪼개면서 테노치티틀란으로 향하는 중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고려해 보면, 이는 탐욕스러운 신을 환대하는 것이 아닌, 정복자에게 보내는 굴복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또한 코르테스 자신도, 아즈텍 정복의 정당화와 스페인 내에서의 입지 향상을 위해, 자신의 행적을 필요 이상으로 장식했다. 코르테스가 카를 5세에게 보낸 서신에는 분명 '우리들을 신으로 여겼다.'라고 명기해 놓았다. 하지만 이 역시 코르테스가 몇 번의 군사적 승리를 거둔 뒤의 일이었다.

또한 무엇보다도, 아즈텍에게 압제당하던 부족들은 정말 코르테스를 신으로 여겼다. 피지배 부족 전체를 가축으로 삼고 막대한 공물을 뜯어내는것도 모자라 툭하면 포로를 끌고가 인육으로 먹어대는 아즈텍이다. 이유야 어쨌건 그런 아즈텍을 물리치겠다고 나선 콩키스타도르들은 테오티클란이나 틀락스칼라 같은 피지배 부족들에게는 메시아나 다름없었다. 콩키스타도르와 케찰코아틀을 연관지은 건 그 신격화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결과론적이지만 이런 점 때문에 코르테스는 징기스칸 같은 무리들과 엮기는 뭐하다. 흡사 한국인 입장에서는 훨씬 더 사악한 일본을 상대로 미국이 싸우면서 원폭 투하나 무차별 폭격을 좀 한 것에 비교할 수 있는 격이라. 당시 아즈텍은 그냥 지역 깡패였다.

2.3 슬픔의 밤

mxcity.mx_hernan-cortes.jpg
촐룰라를 불태운 코르테스는 드디어 테노치티틀란에 도착해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에게 환대받았다.[8] 그러나 코르테스는 몬테수마와 대면하자 그를 인질로 잡고 위협해 테노치티틀란의 중심부를 점거하고 황금을 받아낸다. 이때 몬테수마의 딸과도 눈이 맞아 그녀를 애인으로 사귄다. 하지만 점거 상태가 지속되던 중 아즈텍 병사들의 기습에 포위당하게 된다.[9] 끊임없이 몰려드는 아즈텍 전사 수만 명을 상대로 천 명의 용맹스러운 콩키스타도르와 수천 명의 틀락스칼라 전사들을 지휘해 간신히 버텨내고 있었지만, 이대로 가면 결국 전멸하리라는 판단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하기로 결정하나 야음을 틈타 몰래 이동하던 코르테스의 군대는 물을 긷던 아즈텍 여인에게 발각되고 곧 전투와 도주가 혼재된 혼란스러운 과정에서 콩키스타도르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어 처형당했고 코르테스도 끌려갈 뻔한 위기를 삼회나 겪는 대패한('슬픔의 밤', 1520.6/30) 때 천만다행으로, 아즈텍에는 애석하게도 조선 분야에 전문 기술이 있는 로페스는 생존해 후일 테노치티틀란 재공략 핵심인이 된다.

테노치티틀란에서 탈신도주할 때 병사들은 소지할 금은보화 양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는데 욕심을 부려 많은 보물을 품 속에 넣은 자는 동작이 굼뜨게 되어 거의 다 죽었다. 그나마 생존자들이 목숨을 걸고 갖고 나온 보물은 재기하려는 군자금으로 쓴다는 명목으로 모두 코르테스에게 압수됐다. 안습. 후퇴는 테노치티틀란에서 끝나지 않고 백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베라크루즈까지 이어졌다. 후퇴과정이 고난이었는데 식량부족에 시달린데다 아즈텍의 추격자들뿐만 아니라 아즈텍이 내건 현상금을 노린 주변 부족들의 공격까지 뚫으면서 나가야 했다. 이 난관을 코르테스는 부하들과 함께 질풍처럼 돌파한다. 실제로 코르테스가 승마한 채 적진에 단신으로 돌격해 창으로 적장을 꿰뚫은 덕에 전투를 반전케 한 적이 수차 있었다. 흠좀무. 아즈텍의 추격을 단념케 한 오툼바 전투도 그렇게 승리했다. 코르테스와 그자의 직속 기사들은 각종 무기에 능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정확한 투창 실력이 있었고 의심스럽지만, 그자들은 아즈텍의 유혈이 낭자한 의식인 인신공양을 목도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신전을 향해 대포를 발사해 의식을 다 때려엎고서 의식을 진행하는 사제들과 경호병들을 사살하고 의식의 제물로 희생될 예정이였던 1만 명이 넘는 아즈텍인을 살려내 귀가케 했고 얼마 후 아즈텍 원주민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코르테스는 이후 사재를 털어 자국에서 돼지를 가져와서 피의 의식을 금지케 하는 대신 돼지를 길러서 잡아먹게끔 명했다. 미화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신뢰를 얻으려는 행동일 수도 있다[10].

베라크루즈에서는 그를 싫어하는 스페인의 쿠바 식민지 총독 벨라스케스가 보낸 진압군이 와 또다시 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아즈텍에서 병력을 거의 다 잃었고 사기 역시 바닥을 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코르테스는 남은 소규모의 병력을 규합해, 같은 에스파냐군을 상대로 놀랍게도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자신의 정복군에 합류시킴으로써 귀중한 병력까지 보충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아메리카 정복이 완전한 중앙통제식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현지 정복자들이 각자 국왕으로부터 받은 허가를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이루어졌기 때문이다.[11] 정복자들은 아메리카에서 현지인과 싸워야했을 뿐만 아니라, 에스파냐 왕실에 지속적으로 편지를 보냄으로써 다른 정복자들과도 정당성을 다퉈야 했다. 오늘날 코르테스가 남긴 편지들은 그의 노련한 정치력을 보여주는 사료로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아즈텍 제국을 정복한 이래 틀락스칼라는 물론이거니와 동맹 부족은 물론이고, 아즈텍 제국의 황족을 위시한 유력 귀족들도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등 포섭 시도를 했는데 이런 점은 황제와 그 처첩을 능욕한 피사로의 무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12]

전열을 재정비한 코르테스에게 슬픔의 밤으로 당한 학살을 본국에 호소함으로써 얻은 증원군까지 도착하였다. 아즈텍을 상대로 재공세에 나선 그는 먼저 아즈텍을 둘러싼 주위 부족들을 상대로 정치공세를 편다. 아즈텍은 무력으로 주위 부족을 식민화하여 막대한 조공을 받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인신공양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족들은 아즈텍에 대한 오랜 반감에 억눌려 있었다. 코르테스는 그 균열을 정확히 간파했다. 그는 이간질, 혹은 매수(아즈텍에 대한 약탈권을 보장)하여 여러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원주민병력을 지원받았다. 이 시기에 본국에서 파병되어 온 인원 중 누군가가 천연두 바이러스를 아메리카에 퍼뜨렸다. 이에 아즈텍인들이 천연두로 인해 수없이 죽어갔으나, 콩키스타도르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으므로, 아즈텍의 인구뿐만 아니라 사기에도 큰 타격을 주었다.

테노치티틀란을 포위한 정복군은 원주민을 동원해 내륙에서 만든 배를 호수에 띄워 치고 빠지는 작전을 구사했다. 당시 아즈텍의 배는 카누밖에 없었으므로 정복군의 군함이 상륙해오는 것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특히 정복군의 군함에는 대포까지 있어 포격을 당하니 피해가 엄청났다. 아즈텍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며 나중에는 테노치티틀란을 포기하고 방어가 쉬운 내륙으로 이동해 분투를 이어가지만 코르테스의 주도면밀한 공격을 당해내지 못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만다. 총인구 500만, 수도 20만[13]의 거대한 제국이 코르테스 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만 것이다.

참고로 에르난 코르테스가 베라크루스에 도착하여 테노치티틀란까지 갔던 길이 훗날 멕시코 150번 국도가 되었으며, 1962년에 이를 고속화한 도로인 멕시코 150D번 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150번 국도의 선형을 보면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 제국을 정복하러 갔던 길과 상당히 유사하다.

2.4 말년과 최후

1521년, 아즈텍을 무너뜨리고 멕시코를 건설한 코르테스는 한동안 떵떵거리며 잘 지냈다. 당시 본국 에스파냐는 한창 정권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시기였던지라 대서양 건너 식민지의 일까지 간섭할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야심만만한 젊은 새 황제 카를 5세(카를로스 1세)는 취임하자마자 곧장 독일에서의 내전과 대프랑스 전쟁, 대오스만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더더욱 신대륙에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었다. 1522년 코르테스는 공식적으로 테노치티틀란 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런 이유로, 코르테스는 1526년까지 멕시코와 쿠바에서 왕과 다름없이 지냈다. 그리고 1519년에서 1525년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자신의 무용담과 정복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을 세세하게 기록한 서한을 새 국왕에게 송달했다. 이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어 당시 아즈텍이 어떤 과정을 거쳐 무너졌는지 밝히는 귀중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 비록 그것이 정복자의 입장에 치우쳤다는 한계를 지적받고는 있지만.

하지만 처음에는 전쟁에 여념이 없어 그저 코르테스가 보내오는 막대한 공물에 만족했던 카를 5세도 전쟁이 일단락되고 나자 슬슬 코르테스의 위치에 제동을 걸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1526년 코르테스를 월권 혐의로 전격 파면했다.

당연히 코르테스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지만, 자신을 파면한 카를 5세는 시시한 쿠바 원정대나 아즈텍인들 따위와는 현격하게 격이 달랐다. 그는 스페인 본토는 물론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까지 손에 넣은 데다 이탈리아까지 석권 중인, 당대 유럽 최강의 패자였던 것이다. 파면에 대한 항거는 곧 대규모의 스페인 최정예 군대와의 전투, 즉 죽음을 의미했다.

별 수 없이 일단 귀국길에 오른 코르테스는 왕을 접견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며 왕의 환심을 얻으려 했다. 코르테스의 호방함과 아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던 카를 황제는 코르테스에게 다시 기회를 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는 멕시코로 돌아가 1540년까지 다시 10년 이상 총독으로 군림하며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

1540년, 코르테스는 예순에 가까운 노구를 이끌고 다시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유럽초콜릿을 처음으로 전파했다. 그는 드넓은 식민지를 개척하고 돌아온 자신이 당연히 큰 환대를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뜻밖에도 카를 5세의 태도는 냉담했다.

더 이상 코르테스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한 카를 5세는 그에게 두번 다시 신대륙으로 갈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고국에서 그의 성공을 시기한 수많은 정적에게 시달려야 했다. 코르테스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황제에게 지위와 연금을 달라고 탄원했지만, 카를 5세는 코르테스가 멕시코에서 이룬 업적에 부담을 느껴서 줄곧 무시해왔고, 그러다 마지못해 한 번 알현을 허락하게 된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알현식 와중에서, 절차에 따라 코르테스에 스스로를 소개할 것을 요구한 카를 5세는 이런 답변을 듣는다.


전 한낱 사람입니다. 폐하의 어떤 조상들이 물려준 영토보다도 넓은 영토를 폐하께 남긴.


이 대답이 마음에 든 카를 5세는 이후 독일에서의 신구교 전쟁의 장교로 코르테스를 임명했고, 코르테스는 여기서 성공가도를 걷는다. 그러자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북아프리카 원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나, 알제리 원정 도중 폭풍을 만난 스페인 대함대는 큰 피해를 입고, 카를 5세도 죽을 뻔 하다가 살아남는다. 열이 뻗친 카를 5세는 코르테스를 비롯한 관련자들에게 책임을 물어 대거 해임한다.

코르테스는 고국의 계속되는 냉대에 멕시코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으나, 세비야에서 설사병에 걸려 1547년 12월 12일에 세상을 떠난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누에바에스파냐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기묘하게도 잉카 제국을 무너트린 프란시스코 피사로7촌 관계의 친척이다.[14][15]

그는 두 번 결혼했고[16] 6남 6녀를 두었는데, 이중 애인 말린체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르틴 코르테스[17]는 역사상 최초의 메스티조이다. 이 메스티조 마르틴 코르테스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원래대로라면 적자로 인정되지 않았어야 했지만 코르테스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었는데, 일단 코르테스가 교황에게 적자로 인정해달라고 탄원을 했기도 했을 뿐더러,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 역시 사생아였기 때문이라고(...) 덕분에 코르테스가 멕시코에 남긴 엄청난 양의 영지를 다른 형제들과 나눠가질 수 있었는데...뉴멕시코의 왕 되겠다고 형제들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가 스페인 군대에게 탈탈 털리고 땅을 빼앗긴다. 원래 사형당해야만 했으나 아버지의 후광 덕에 목숨만은 건지고 스페인으로 돌아가 카를 5세의 아들인 펠리페 2세 휘하의 군인으로 복무하다 스페인에서 죽는다. 스페인 왕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는 걸로 보아, 아버지와는 달리 고국에서 인정받았던 모양.

3 평가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엘 시드의 뒤를 잇는,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기독교화의 주역인 대영웅으로 존경받았다. 페르난데스 오비에도는 코르테스를 엘 시드와 카이사르에 맞먹는, 아니 그들을 능가하는 대영웅으로 평가했고 이탈리아의 파올로 죠비오도 코르테스를 고대와 중세의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로 높이 평가했다. 오랫동안 코르테스는 라스 카사스 신부를 비롯한 일부 인물들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대영웅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이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피정복자인 인디오들의 관점을 중시하는 수정주의, 민족주의 사관이 대두하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도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라스 카사스 신부가 그랬듯이 코르테스를 강제 개종과 제국주의적 정복을 일삼은 악당으로 인식했다. 이러한 새로운 사관이 떠오르면서 코르테스의 평가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에 이르러선 멕시코 역사가 돈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를 시작으로 대영웅과 학살자 사이의, 객관적 접근을 중시하는 제 3의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3.1 학살자인가?

코르테스에 대한 윤리적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앞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콩키스타도르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코르테스를 비롯한 콩키스타도르들의 정복행위를 제국주의와 결부시켜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며, 전근대의 다른 정복자들(칭기즈칸, 알렉산더 등)과 구분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콩키스타도르들의 행보는 전근대 다른 정복자들의 행위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차이점이라면 이들의 정복이 해당 지역에 식민지를 세워 마침내는 19세기에 절정을 이루는 제국주의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데 있다. 즉, 이들 자체는 제국주의와는 무관하며, 따라서 코르테스의 학살자라는 윤리적 평가 또한 다른 정복자들과 구별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약 코르테스를 학살자나 식민주의자 등으로 평가하여 비판하려는 이는, 언급된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더 등의 다른 문화권과 시대의 정복자들에 대한 평가에서도 예외를 둘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3.1.1 학살자가 아니다

학살자라고 까이지만 정작 코르테스에게 책임을 물만한 학살은 없다. 일단 코르테스는 빈약한 수의 사병(혹은 회유된 탈영병)이나 친척들만으로 구성된 소수의 병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럴만한 여력조차 없었고 딱히 학살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의 책임이 약간이나마 있는 학살은 초룰라(cholura) 학살이나 톡스카틀 축제의 학살 정도라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초룰라 시민들이 환대하는 척 하고 함정을 파고 있었기에 공격한 것이며, 후자는 코르테스가 아닌, 그가 나르바도와 면담하러 간 동안 지휘권을 받았던 페드로 데 알바라도의 현장판단으로 인한 학살이었다.

승자측의 기록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라 하기도 어려운 게, 코르테스는 후대의 이민자들이나 당대의 다른 유럽인들처럼 원주민을 인간 이하의 존재가 아닌, 충분히 위협스러우며 신중히 대해야 할 존재로 보았다. 이는 아즈텍 함락 이후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이 코르테스를 압도적인 전력차에도 불구하고 아즈텍에 승리를 거두게 해준 요인이었다.

그리고 학살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도 코르테스가 아메리카를 공격한 콩키스타도르들 중에서도 가장 온건했던 정복자라는것은 부정하기 힘들다. 당장 금 때문에 민간인을 대량학살해서 스페인에서도 비난을 받았던 콜럼버스나, 의도야 어찌됐든 잉카에서 학살을 벌였던 피사로 형제보다는 훨씬 온건했고 말린체의 경우를 보더라도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차별의식이 적었다. 오히려 이 정도면 제국주의 시절의 모든 정복자를 통털어도 상당히 온건한 축에 속하는 인물이다. 때문에 아즈텍을 계승했다는 멕시코 때문에 상당히 저평가 받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3.1.2 학살자가 맞다

그러나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았다는 것이 학살자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한 초롤라의 경우, 아즈텍이 함정을 팠다는 내용은 당대의 전투기록이 아니라, 이 후 코르테스 개인의 주장에 의거한다.(다만 코르테스는 카를 5세에게 보낸 보고서에 원주민들의 직접 쓴, 나후아틀어로 써진 증언을 첨부했다. 물론 말린체나 아구엘라 등, 코르테스의 원주민 친구들이 적당히 사실을 왜곡했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코르테스 나름대로는 객관성 획득을 위해 노력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아즈텍의 전투방식이나 아즈텍에 대한 스페인쪽의 지식수준으로 보았을 때, 실제 아즈텍 측이 함정을 팠고, 그 사실을 스페인 측이 미리 알았을지는 의심스럽다.

코르테스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같이 간 틀락스칼라인들(통역 담당인 말린체라는 기록도 있다.)이 알려주었다. 틀락스칼라인들이 아즈텍의 동맹인 촐룰라를 어떤 식으로 제거하고 싶어서 음모를 꾸몄다는 상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코르테스의 책임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작다면 모를까 책임을 물을만 한 학살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궤변이다. 코르테스 자신이 무장집단을 이끌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 간 정복자(또는 침략자)인 이상 그에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생겨난 모든 죽음에 대하여 코르테스에게는 명백한 책임이 있다

특히 톡스카틀 축제 학살의 경우 코르테스가 지휘권을 위임한 현장 지휘관이 저지른 학살이면 그 상위 지휘관였던 코르테스에게 당연히 감독 책임이 돌아가야 할 문제다.

4 기타

게임 그라나도 에스파다의 등장인물인 코르테스 백작은 바로 이 코르테스가 모티브다.[18]

신대륙의 비밀인 5대 원소를 찾기 위해 악행을 저질렀지만 같은 10인 귀족인 몬토로에게 배신을 당해 석화되고 만다.

닐 영의 곡인 Cortez The Killer는 이 인간의 행적을 까는 노래다.

근육맨에서는 서양인 특유의 거체로 강철갑옷을 입고 잉카제국 군사들을 아즈텍이 아니라? 죄다 레슬링 기슬로 관광보내 점령한 것으로 나온다(...)

드림웍스 애니메이션 엘도라도에도 출연한다.

5 참고문헌

  • 코르테스의 멕시코 제국 정복기 1,2권, 앙헬 고메스 저, 김원중 역, 나남, 2009년.
  1. 옛날 스페인에서는 지폐 모델로 쓰인 적도 있다.
  2. 개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 말린체를 역시 이런 식으로 얻었다.
  3. 실제로 지키긴 했다.
  4. 이전에 표류해와서 원주민들 사이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스페인 선원들과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5. 마주치는 부족마다 족족 몰살한 다음 약탈을 수행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코르테스가 지닌 인적 자원은 너무 적었고, 코르테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6. 참고로 마을을 굳이 조성한 이유는, 나중에 카를 5세에게 쿠바 총독의 명령에 불복종한 것에 대한 변명으로 '왕께 영토를 바치려고 했습니다.'라고 둘러대기 위해서였다. 나중엔 베라크루즈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영토를 갖다 바치게 되지만(...)
  7. 여기까지가 코르테스의 기록. 틀락스칼라는 자신들의 사신이 촐룰라에 갔다가 고문받은 것에 대한 복수를 코르테스가 해 줬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은 틀락스칼라인들이 코르테스를 부추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즈텍에 대한 틀락스칼라인들의 증오를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8. 여기서 몬테수마는 코르테스에게 '내 모든 것은 당신 것이요'라는 의미의 환영사를 하하지만 이게 신앙에서 비롯된건지 공포스러운 침략자를 달래고자 한 건지는 논란거리다.
  9. 일설로는, 상황을 진정시케 해 보라고 테라스에 내보낸 몬테수마마저 오히려 아즈텍 시민들이 야유하면서 던진 돌에 맞아 기절했다.
  10.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인신공양 의식에 도덕상 분개한 것이 딱히 믿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코르테스를 비롯한 유럽계 침략자의 상당수는 기독교도로서 도덕 관념이 있어서 기독교리가 금지하는 인신공양 악습에서는 충분히 분개할 만한 처지였지만, (이교도인)원주민을 살해하고 그 재물 약탈은 기독교리에 의해 금지되지 않았던 것 뿐이다. 즉, 유럽계 침략자들은 현대인과 같은 도덕 관념이 없는게 아니라, 도덕 관념이 현대인과는 다른 것이라고 봐야 한다. 이 문제는 유럽인들이 왜 하필 자신들의 종교를 내세워 침략에 나섰는지를 설명해 주는데... 종교(당시 유럽의 기독교)에 기반한 당대의 도덕은 오히려 침략 행태를 정당화 해 주는 도구로 작동했던 것. 이 구조가 고도화 되어 탄생한 개념이 바로 자신들은 이익을 위해 침략을 하는 게 아니라 원주민들을 교화시키고 보호하려고 하는 것 뿐이라고 주장하는 백인의 짐이다.
  11. 사실 그 당시는 유럽도 중앙통제식이 아닌 여전히 봉건제와 지방자치가 이루어진 판국인데 멀리 떨어진 아메리카에서 중앙통제가 이루어질턱이 없었다. 카를 5세만 해도 걸핏하면 귀족들이 말 안듣고 반란을 일으켜 골머리를 앓고 있았다. 본토에서조차 나 잘났다 너 못났다 식으로 맨날 투닥투닥거리는 판국에 지구급으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서 본토를 다스리는 왕이 뭐라 하면 그쪽 총독의 반응은 당연히 "어디서 개가 짖나?"였다.
  12. 다만 피사로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황제와 황후를 능욕한 사건도 피사로 본인이 아닌 그 동생인 곤살로 피사로가 한 일이었다.
  13. 당시 유럽에도 이런 대도시는 없었다고는 하지만 이미 흑사병의 타격을 받은 직후에도 인구 20만을 유지하던 거대도시 파리가 있다. 그밖에 제노바베네치아 등 인구 10만 이상을 유지하던 이탈리아 대도시들도 많고. 물론 고기로 먹을 수 있는 짐승도 없어서 식인으로 인구를 부양해야 했던 곳에서 저런 인구라면 굉장히 놀라운 일이긴 하다.
  14. 코르테스의 외할머니가 피사로 가문이고, 피사로의 증조부인 Fernando or Hernándo Alonso de Hinojosa가 코르테스의 외고조부이다.
  15. 그런데 딱히 신기하다고까지 할 일은 아닌게, 당시 유럽에서는 귀천상혼의 전통이 워낙 강해서 왕족은 왕족끼리, 대귀족은 대귀족끼리, 신사 계급은 신사 계급끼리 결혼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보니 유럽 각국의 왕족들이 서로 따져보면 이리저리 친족관계로 얽히고 섥힌 것처럼 같은 나라의 신사 계급끼리도 인척 관계로 연결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증조부모 집단(8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6촌, 고조부모 집단(16명)중에 겹치는 사람이 있으면 8촌인 것이나, 당시 사람들은 다산을 훌륭하게 여겼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 정도의 친족 집단 범위는 생각보다 훨씬 넓다.
  16. 첫 번째 부인은 사별했고, 말린체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말린체까지 합하면 실질적 아내는 3명이다.
  17. 첫 부인에게서 얻은 마르틴 코르테스와 동명이인이다.
  18. 풀네임이 똑같은 걸 보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