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춘천에 위치하고 있는 춘천전투기념비1 개요
춘천-홍천 전투는 6.25 전쟁 초기 조선인민군 육군이 진공해 들어오는 것을 중동부전선인 춘천지역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민군은 단기간 내에 남한을 점령하는 데 실패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을 비롯한 UN 연합군이 국내 진입을 할 수 있는 기간을 마련하여, 국군 및 UN군, 미군의 반격의 교두보가 되었다. 사실상 춘천-홍천 전투의 전과로 인해 낙동강 방어선이 성립이 될 수 있었던 셈.
2 주요 전투 정보
3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1949년 미국은 자국내 안보전략의 수정[5]에 따라 한반도 남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주한미군 중 500명을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놓고 그 외의 전 병력의 한반도 철수를 결정하였다.
이어 1950년 1월 12일 애치슨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소위 애치슨 라인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요약하여 말하면 방위선을 알류산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으로 축소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진영(소련과 중국으로 대표되는)의 세력팽창을 저지를 목표로 한 발언이었다.
다시 말하면 방위선 내에 포함되지 않는 한국과 타이완은 방위선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공산진영의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선언이 한국전쟁의 커다란 원인 중 하나로 알려져있었으나, 전후에 공개된 소련 공문서의 내용에 의해 애치슨 라인이 끼친 영향은 크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고, 그때는 이 일로 트루먼 행정부는 사방에서 까이고 적십자사 총재로 물러나 있던 조지 C. 마셜 원수를 급히 불러와야 했다. (...)
반면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수물자와 병력 등을 지원받고 있었다.[6][7]
4 북한군의 초기 전략
북한의 김일성은 대대적인 남한진공을 통하여 남한을 공산화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미군이 재진입하여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에게는 미군의 전력이 심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8]
또한 북한군 내부에서는 박헌영의 호언장담 때문에,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남한 국군내 남아있는 남로당계열의 군인들과 남한 민중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호응할 것을 기대하고 또한 예상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그렇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여순 반란 사건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반면 국군은 약 3년간 유지되어 오던 비상경계령을 50년 6월 24일부로 해제하고, 전 장병의 약 30%정도 되는 병력이 휴가, 외출, 외박 등으로 외지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24일 저녁 육군본부 장교 클럽 낙성 파티에는 전방부대 사단장들까지 초청되었다.
따라서 북한 군부는 개전과 동시에 육군 주력 사단을 내려보내 국군의 육군 4개 사단을 서울에서 밀어내고, 춘천으로 해군 육전대 등 별동대를 우회시켜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되었다.여기엔 두 가지 플랜이 있었다. 하나는 북한군에서 자체적으로 수립한 선제타격계획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련 군사 고문단장이었던 라주바예프 장군이 제작한 반격계획이었다. 두 계획은 틀에 있어서 대동소이한데, 요지는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고 춘천-홍천 지역을 우회하여 국군의 주력 사단을 섬멸한다는 것이었다.
5 전투 전야
개전을 앞둔 2일 전 38선 남쪽 300미터 지점[9]에 길이 250미터, 폭 4미터의 모진교[10]에서 한 할아버지가 다리에 설치된 지뢰를 밟고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고를 당한 할아버지는 이남에 남아있던 아들을 만나기 위해 다리를 건너오려고 인민군 검문초소를 통과하여 다리를 건너던 중, 인민군 진공 억제를 위해 국군이 매설해두었던 지뢰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인민군 측에서는 모진교에 지뢰가 매설되었음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뢰의 매설량과 그 파괴력을 알아보기 위해 할아버지를 통과시킨 것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인민군의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 육군 6사단에서는 6.25 전쟁 개전 2주전에 사단장으로서 김종오 대령이 부임하게 되었다. 김종오 대령은 전 간부/장병의 외출 외박을 전격적으로 통제하고, 주둔지의 경계를 강화하였으며[11], 정신교육과 실질적인 전투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비전투병과인 군의관조차 포병 사격을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장병들을 동원하여 보병 및 포병 진지를 강화시키고 정보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정보활동을 지속하던 도중 강원도 화천과 양구지역에 적의 보병부대가 집결하고 수십대의 차량이 집결한 것이 확인되었다.
6 전투 경과
인민군 육군 2사단이 강원도 춘천과 경기도 가평을 경유하여 서울 동남위 방향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이는 수도권에서 북한군의 주공(主功)에 밀려 내려온 국군 사단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 섬멸하려는 계획에 입각한 행동이었다. 인민군 12사단은 춘천에 자리하고 있던 국군 6사단 7연대의 퇴로를 차단했다. 이후 홍천지역을 지나 대전을 점령 대구 지역으로 진출을 시도하였다.
6.1 춘천지구
인민군 2사단 7연대는 6사단이 구축해놓은 방어선을 뚫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국군 7연대는 진지에 위치하여 방어선을 고수하였다. 7연대 2대대 심일 소위 등 5명이 특공대를 조직하여 인민군의 대전차자주포 2문을 격파하였다. [12]
다급해진 인민군은 예비전력으로 데리고 왔던 17연대를 투입하였으나 국군은 이를 격퇴하였고[13] 그 결과 춘천지구 전투만으로 인민군 2사단은 전투력의 40%를 상실하며 실질적으로 전멸하였다.6.2 인제-홍천지구
인민군 12사단은 인제남방과 큰말고개로 성공적으로 진출한 상황이었다. 적이 큰말고개를 차지함으로써 국군 6사단은 퇴로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인민군 2군단장 김광협 중장은 인제보다는 춘천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이곳을 점령하라고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인제방향에서 남하해오던 인민군 12사단은 해당 방향으로의 진출을 멈추고 춘천방향으로 공격을 전환하기 시작했다. 또한 큰말고개에 예비로 남겨두었던 인민군 12사단 휘하 미상 연대 역시 북상하면서 춘천을 압박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6.3 후퇴
개전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자, 육군본부는 6사단에게 후퇴를 명령했다.[14] 그리고 인민군 2사단과 12사단에 의해 춘천이 피탈되고 만다. 하지만 동일 오후 인민군 2개 연대를 축출해내며 다시금 원창고개를 탈환한다. 그러나 또다시(…) 투항을 가장한 인민군의 기만전술에 당해 원창고개를 내어주고 만다. 이에 아군 2연대는 큰말고개를 따라서 방어선을 구축하였고 육탄 11용사의 활약으로 적 자주포(SU-76), 전차(T-34) 10대를 격파 또는 노획하는 등의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길가에 쓰러져 죽은 시체로 위장하고 기다렸다가, 적 전차가 아군의 대전차포에 맞고 그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멈춘 순간 기습을 가했다. 우선 조달진 일병이 맨 앞에 있는 적 전차의 해치를 열고 수류탄을 까넣어 선두 전차를 날려버렸고, 선두 전차가 깨지자 나머지 전차도 멈췄으며, 맨 뒤의 전차에 탄 전차장이 고개를 내밀어 무슨 일인지 확인하려는 순간에 아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그러자 곧바로 11용사 중 한 명이 그 전차의 안에 수류탄을 까넣었고, 맨 뒤의 전차가 폭발하자 나머지 전차들은 앞뒤가 막혀 고립되었다. 그러자 적 전차들의 승무원들이 상황을 확인하려고 해치를 열고 고개를 내밀다가 총에 맞아죽고, 차례차례 뚜껑이 따이는 신세가 된다.육탄 11용사는 전원 생존했으며, 조달진 일병을 포함한 3명은 2계급 특진을, 나머지는 1계급 특진을 하게 되었다.[15]출처[16] 이렇게 국군은 선전하고 있었지만 29일밤 어떻게든 춘천을 장악하려고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의 총공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횡성과 원주, 제천을 거쳐 7월 1일 충주로 후퇴하고 만다.
7 피해
위아래가 바뀐 게 아니다!
7.1 6사단의 피해
6사단 사상자는 407명이며, 춘천을 빼앗기고 후퇴해야 했다.
7.2 인민군 제2군단의 피해
인민군 출신 귀순자의 증언에 따르면 인민군 제2군단의 사상자는 2,000여명(6사단 자체 집계로는 6,900여명)이며, 다수의 자주포가 격파되었고,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전략은 무산되었다. 이에 책임을 지고 제2군단 군단장 김광협과 2사단장 이청송, 12사단장 전우가 해임되었다.[17]
8 의의
인민군은 이 전투를 성공으로 이끌지 못하여 결국 최초 작전 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인민군 2사단은 국군 6사단의 격렬한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서울 동남방 진출이 좌절되었고, 춘천에서 약 3일간 남진을 지연당하게 된다.
이 3일의 지연은 인민군에게 대단한 악영향을 끼쳤다. 서울을 점령하고도 3일간이나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지체함으로서 국군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18] 북한군이 머뭇거리는 동안 한강 이북의 국군 장병들은 자력으로 한강을 도하하여 한강 이남에서 재편성됨으로서 전투력을 최대한 보존할 수 있었고(한강 방어선 전투참조), 여기서 얻어진 시간적인 여유는 UN군의 파병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국군은 부산 축선에 대기하고 있던 미군과 함께 전선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9 참고자료
- 역사스페셜 33회: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터리 - 북한군은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1999.6.26) #
- ↑ 현지임관출신으로 이등병에서 소장까지 진급한 최갑석 장군이 이 대대에 소속돼서 전투를 치렀다. 당시엔 장교로 임관하기 전. 이 대대는 지금은 제7보병사단에 있다..
- ↑ 패전의 책임을 물어 문책 당한 후 7월 10일 이후에는 김무정 중장으로 교체됨
- ↑ 피해 책임을 물어 최현 소장으로 교체됨
- ↑ 7월 3일 이후 최춘국 소장으로 교체됨.
- ↑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국방비를 삭감함과 동시에 전시동원체제를 해제하였다. 종전 당시 1,200만명에 육박하던 미군의 병력수는 6.25 전쟁 개전시점 즈음에는 146만명으로 대폭 감소하게 된다. 이렇게 군비를 확 줄여버린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재래식 전력의 감소를 우월한 공군력과 전장에 실제로 사용하여 그 효과를 톡톡히 본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충분히 상쇄할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데 있었다. 또 그토록 비대해진 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국방비가 지출됨에 따라 미국내 여론과 언론의 몰매를 견딜 수 없었던 것도 있었다.
- ↑ 사실 엄밀하게 살펴본다면 중국과 소련은 입장이 상이했는데 당시 스탈린은 인민군의 실력이 전쟁을 치를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더러 미국과의 마찰을 두려워하여 무력 행사를 기피하였으나,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남한을 무력으로 침공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김일성은 소련에만 가면 "남조선을 해방시키려하니 스탈린 동지가 좀 도와주시라요."라고 했고, 스탈린은 내내 미적지근한 반응만을 보였다.
- ↑ 이 시기가 중국과 소련의 노선이 갈리는 중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 공산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중국은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무력투쟁을 할것을 주장했다.
- ↑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은 유럽에서 독일, 태평양에서 일본을 상대로 양면전쟁을 그것도 양쪽 다 압도적인 우위에서 벌인 무시무시한 나라다.
쇼미더머니의 힘이다 - ↑ 원래대로라면 한국군이 이 다리 전체를 완전히 확보한 상태가 맞긴 하나, 교량이 지나치게 38선에 근접해 있어서 사실상 교량 자체가 경계선 역할을 하던 상황이었다.
- ↑ 춘천 북쪽 13Km 지점에 위치한 교량으로써 북한에서 남한으로, 남한에서 북한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리였다. 그 규모가 상당했기 때문에 인마(人馬)뿐 아니라 차량 역시 이동가능하다는 점에서 남북한 모두 주시하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현재는 춘천댐의 건설로 수몰된 상태이다.
- ↑ 다만 24일 자정에 육군본부에서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외출-외박을 허용하자, 6사단에서도 외출 외박은 계속 통제하되 경계 태세는 최소한의 상태로 하향했다. 이는 너무 오랫동안 비상 경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장병들이 크게 지쳐서 조금이라도 추스릴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건의가 올라와 김종오 사단장이 이를 수락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육군본부에서 비상경계령을 해제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문제는 운이 매우 나쁘게도 북한군이 이 때 남침해 버린 것.
- ↑ 하지만 심일 소위의 전공이 조작이라는 주장이 최근 나왔다. 참조바람.
- ↑ 17연대는 지형의 제한으로 북한강 강안을 따라 진격하였고, 사전에 이 지역을 타격하는 훈련을 수십 회 실시한 6사단의 유일한 포병대대가 이를 타격, 와해되었다. 당시 아군의 포병전력은 105mm 곡사포의 공수부대용 경량화 버전 단 13문밖에 없었다.
- ↑ 다른 사단이 모두 붕괴되거나 후퇴한 상황에서 6사단만 춘천에 남아 있으면 포위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뒤의 싸움은 피난민들이 남하할 시간을 주고, 성공적인 철수를 하기 위해 시간을 버는 게 주 목적이 된다.
- ↑ 해당 전투 기록을 보면 전차대수,종류 격파 수량등이 모두 조금씩 다르다.
- ↑ 현대의 전차와 달리, 이 시대의 전차는 변변찮은 해치 잠금장치가 없었기에 밖에서 해치를 열기가 쉬웠고 T-34 전차의 경우 전차 자체의 문제로 시야 확보가 매우 어려웠는데 이 약점을 제대로 찌른 것이다. 그리고 SU-76 자주포는 원래 지붕 자체가 없이 상부가 뻥 뚫린 오픈 탑 형식의 차량이었고 한국전쟁에 투입된 차량은 얇은 철판으로 지붕을 씌우는 개량이 된 상태였으나 여전히 수류탄 등 보병화기 공격과 근접전투에 매우 취약하였다.
- ↑ 7사단이 전투 후 12사단으로 개명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최근 연구와 625 전쟁사 제2권에 의하면 7사단설은 오류라고 지적하였다.
- ↑ KBS1 역사 스페셜에 따르면 김일성은 전쟁 실패 원인이 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라며 통탄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