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츠 발터


이름프리드리히 '프리츠' 발터(Friedrich 'Fritz' Walter)
생몰년1920년 10월 31일~2002년 6월 17일
국적독일
출신지카이저슬라우테른
포지션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소속 팀1.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37~1959)
국가 대표61경기/33골


1 개요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장

지금의 독일 축구를 만들어낸 캡틴.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1.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레전드. 베른의 기적을 만들어 낸 주연. 프란츠 베켄바우어, 로타르 마테우스, 미하엘 발락, 필립 람으로 이어지는 디 만샤프트(Die Mannschaft)의 전설적인 주장 계보의 첫 장에 자리하고 있는 인물.


2 생애

1920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 출생한다. 그의 부모님은 1.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경기장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고, 이런 환경 속에서 프리츠 발터는 열렬한 카이저슬라우테른의 팬으로 성장하게 된다. 8살의 나이로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유스에 입단한 발터는 17살의 나이에 처음 프로에 데뷔하게 되고 이후 39살의 나이로 은퇴하는 시점까지 프리츠 발터는 2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오로지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만 머무른다.[1] 20살이 되는 1940년에는 제프 헤어베어거가 이끄는 독일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루마니아와 가진 데뷔전을 해트트릭으로 장식한다. 이렇게 그의 앞날은 밝아보였다. 하지만...

2차 대전이 격화되면서 운동 선수들도 징집의 대상이 되기 시작하고 1942년 발터는 공수부대에 입대해야만 했다. 결국 종전할 무렵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히고 만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시베리아를 비롯한 각종 오지의 굴라크로 끌려가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강제노역에 종사[2]해야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하늘이 그를 돕는다. 발터의 축구 실력에 감탄한 헝가리 포로감시원이 소련군에게 발터가 독일 본토 출신이 아니라 자를란트 출신[3]이라고 말을 해줬던 것.[4] 덕분에 다른 전우들이 굴라크로 끌려갈 때 발터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독일로 돌아온 발터는 다시 고향팀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소속으로 뛰면서 카이저슬라우테른의 리가 우승을 두 차례(1951, 1953) 이끌고, 여전히 뛰어난 발터의 모습에 헤어베어거 감독은 1951년 그를 다시 국가대표팀으로 발탁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장자리를 맡긴다.[5] 이후 10년만에 다시 출전한 스위스 월드컵에서 발터가 이끄는 독일은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세기의 대역전극을 선보이며 헝가리를 꺾고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포로수용소에서 헝가리인 감시원이 소련군에게 거짓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그렇지만 1956년 헝가리에서 소련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 헝가리 국가대표팀이 자국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자 발터는 그들의 게임을 주선해주는 한편으로 그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기도 하는 등 결코 헝가리 감시원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잊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한편 발터는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도 출전하여 독일의 4강 진출을 이끌었지만 이 대회에서 큰 부상을 당하기도 했고 본인의 나이도 이미 40을 바라보고 있던 차라 이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팀에서 은퇴한다. 이어 다음해인 1959년에는 아예 축구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 이후 독일 축구에서 가장 위대한 네 명의 주장 중 하나[6]로 선출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던 발터는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던 2002년 6월 17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3 여담

  • 동생인 오트마르(Ottmar Walter, 1924~2013)도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독일 국가대표팀의 레전드 중 하나로 베른의 기적 당시 함께 했다. 해군으로 참전했던 오트마르는 전쟁 중 무릎에 큰 부상을 입었고 결국 이 부상으로 4살 많은 형보다도 빨리 은퇴해야 했다.

카이저슬라우테른의 홈구장 앞에 놓여진 동상. 1954년 베른의 기적 당시 카이저슬라우테른 소속이었던 다섯 명의 선수들이다.
왼쪽부터 베르너 립리히, 프리츠 발터, 베르너 콜마이어, 호르스트 에켈, 오트마르 발터
  • 1985년 그의 공적을 기려 카이저슬라우테른은 자신들의 홈구장을 프리츠 발터 슈타디온(Fritz Walter Stadion)으로 개칭했다.
  • 특히나 비가 오는 악천후일때 더더욱 무시무시한 실력을 자랑해서 당시 독일 축구계에서는 비가 오면 프리츠 발터의 날씨(Fritz-Walter-Wetter)라고 부르는게 유행했다고 한다. 덧붙여서 베른의 기적 때도 비가 무척 쏟아지던, 프리츠 발터의 날씨 상황에서 벌어진 경기였다.
  • 1980년대 VfB 슈투트가르트에서 활약한 동명 이인의 축구선수가 있다. 서로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었다고. 그래서 보통 슈투트가르트에서 뛴 프리츠 발터를 '프리츠 발터 주니어'라고 부르면서 구분한다고 한다. 이름마저 콩라인
  1. 해외클럽에서 이적제의가 오기도 했었지만 고향을 떠나기 싫었고, 가족들의 만류도 있었던데다가 독일 국가대표팀의 주장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주는 책임감 때문에 다 거절했다고 한다.
  2. 여담이지만 이렇게 강제노역에 종사한 독일군 포로의 평균 수명이 5년 안팎이었다. 사실상 사형선고나 마찬가지.
  3. 자를란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지역은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이고 문화적으로도 독일과 프랑스적인 요소가 공존한다. 덧붙여 꽤나 공업이 발달한 지대이기도 해서 이 지역에 침을 흘리던 프랑스는 여차하면 자기들과 합병하려고 1차대전 이후 이 지역을 자치구로 만들었지만 히틀러에 매력에 반한(?) 자를란트 인들이 독일로 돌아가기를 결정해 무산.. 하지만 의지의 프랑스는 포기하지 않고 2차대전 직후에도 다시 자를란트를 자치구역으로 만들었다. 덧붙이자면 이 자를란트는 50년대 중반 독일이 경제적으로 부활에 성공하자 다시 독일로의 귀환을 선택한다. 프랑스 지못미
  4. 혹은 히틀러에 의해 강제적으로 독일에 합병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고 말을 했다는 소문도 있다. 정확히 아는 사람이 추가바람.
  5. 다만 전범국이라서 1953년까지 국제대회 출전은 불가능했다. 안습
  6. 나머지는 60년대 독일 국가대표팀을 이끈 우베 젤러, 70년대를 이끈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우어, 90년대의 로타르 마테우스 그리고 여자축구의 베티나 비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