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헬무트 란(Helmut Rahn) |
생몰년 | 1929년 8월 16일~2003년 8월 14일 |
국적 | 독일 |
출신지 | 에센(Essen) |
포지션 | 윙 포워드 |
신체 조건 | 178cm |
소속 팀 | 로트바이스 에센(1951~1959) 1.FC 쾰른(1959~1960) SC 엔셰데(1960~1963) 마이데리허 SV(1963~1965) |
국가 대표 | 40경기/21골 |
1958 Ballond'or | ||
수상 레이몽 코파 | 2위 헬무트 란 | 3위 쥐스트 퐁텐 |
1 개요
Der Boss. 우베 젤러와 게르트 뮐러에 앞서 전차군단의 공격진을 이끌었던 독일 축구계의 레전드. 베른의 기적을 만들어낸 당사자.[1]
2 경력
2.1 클럽
고향이었던 에센을 연고지로 하는 SV 알텐에센 1912에 유소년 선수로 입단하여 여러 클럽을 거치다 22살이던 1951년 로트바이스 에센에서 성인 무대에 데뷔한다. 1951년부터 1959년까지 자신의 전성기를 보낸 이 클럽에서 란은 팀에게 1953년 DFB 포칼과 1955년 독일 통합 챔피언[2][3]을 선사한다. 이후 일년동안 FC 쾰른에서 뛰었던 란은 네덜란드 리그의 SC 엔셰데로 이적하였다가 1963년 독일 전국 단위의 분데스리가가 출범하자 마이데리허 SV[4]로 복귀하지만 2년 뒤인 1965년 무릎 부상으로 은퇴를 선언한다.[5]
2.2 국가대표
하지만 이런 클럽 커리어보다 그를 훨씬 유명하게 만든 것은 같은 시기 참가한 스위스 월드컵. 란은 스위스 월드컵 기간을 통틀어 4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선보이며 서독을 우승으로 이끈다. 특히나 베른의 기적으로 불리는 헝가리와의 결승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는데 팀이 2-0으로 뒤지고 있던 전반 10분에 추격골을 어시스트했으며 전반 18분과 후반 39분 각각 동점골과 역전골을 기록하면서 말 그대로 멱살잡고 하드 캐리했다. 한편 란은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도 참가해서 우베 젤러와 함께 독일 공격진을 이끌며 6골[6]을 득점했지만 팀은 4강에서 개최국 스웨덴에게, 3-4위 전에서는 쥐스트 퐁텐이 이끄는 프랑스에게 패하며 4위에 만족해야 했다. 1960년을 끝으로 란은 국가대표에서 은퇴했으며 최종 기록은 40경기 21골. 그런데 월드컵에서만 10골을 넣었다. 흠좀무
3 여생
은퇴 이후 헬무트 란은 대다수의 축구인들과는 달리 축구계에서 활동하기 보다는[7] 고향인 에센으로 돌아가서 사업[8]을 했다. 본인의 성격이 친근하고 넉살도 좋았기 때문에 사업을 꽤나 번창했다고 전해지며 오늘날까지도 에센 일대에서는 그의 사업 수완과 관련된 일화가 유머처럼 전해져온다고 한다.
4 여담
- 독일 혼혈의 가나 공격수 케빈-프린스 보아텡이 그와 혈연관계라고 한다. 정확히는 보아텡의 할아버지가 란과 가까운 친척이라고..
- 베른의 기적을 다룬 영화 <베른의 기적>에서 주인공 소년의 고향팀의 핵심선수로 활동하면서 주인공이 흠모해 마지 않는 선수로 그려진다. 그런데 영화 중간에는 월드컵 초반부에 주전으로 못뛰어서 술먹고 사고친다.[9]
그리고 이걸 수습하려고 쩔쩔 매는게 주장 프리츠 발터역..
- ↑ 동점골과 역전골을 기록했다.
- ↑ 분데스리가는 1963년 창립됐고 이전까지는 각 지역끼리 리그를 진행하여 거기서 좋은 성적을 거둔 팀끼리 다시 승부를 겨루어 독일 통합 챔피언을 결정했다.
- ↑ 이때 상대가 당시 최전성기를 구사하던 1.FC 카이저슬라우테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년이었던 19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우승을 거둔 독일 국가대표팀의 주전 11명 중 5명이 이 카이저슬라우테른 소속이었을만큼 당시 독일의 최강팀이었다.
- ↑ MSV 뒤스부르크의 옛 이름
- ↑ 베른의 기적에 참가한 서독 선수들 가운데 한스 셰퍼와 함께 가장 늦게 은퇴한 선수라고 한다.
- ↑ 대회 득점 3위.
- ↑ 그렇다고 축구계와 아예 인연을 끊었다는 거는 아니다.
- ↑ 자동차 중개업을 했다고 한다.
- ↑ 물론 실제로는 안그랬다. 진짜로 믿으면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