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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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축구 연맹(UEFA) 회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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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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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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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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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리투아니아
리히텐슈타인
마케도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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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테네그로
몰도바
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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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라루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불가리아
북아일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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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리노
세르비아
스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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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스페인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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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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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라
알바니아
에스토니아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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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웨일스
이스라엘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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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조지아
지브롤터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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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코소보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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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페로 제도
포르투갈
폴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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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Die Deutsche Fußballnationalmannschaft
정식명칭Die Deutsche Fußballnationalmannschaft[1]
FIFA 코드GER
협회독일축구협회 (DFB)
연맹유럽 축구 연맹 (UEFA)
감독요아힘 뢰프 (Joachim Löw)
주장마누엘 노이어 (Manuel Neuer)
최다 출전자로타어 마테우스 (Lothar Matthäus) 150경기
최다 득점자미로슬라프 클로제 (Miroslav Klose) 71골
홈 구장없음[2]
첫 국제경기 출전VS 스위스 (3:5 패), 스위스 바젤 (1908년 4월 5일)
최다 점수차 승리VS 제정 러시아 (16:0 승), 스웨덴 스톡홀름 (1912년 7월 1일)
최다 점수차 패배VS 잉글랜드 아마추어 (0:9 패), 잉글랜드 옥스포드 (1909년 3월 16일)
월드컵출전 18회, 우승 4회 (1954, 1974, 1990, 2014)
컨페더레이션스컵출전 2회, 3위 1회 (2005)
유로출전 12회, 우승 3회 (1972, 1980, 1996)
올림픽출전 9회, 동메달 2회 (1964, 1988)[3]
별칭Die Mannschaft (더 팀)[4] Nationalmannschaft (국가대표팀), Die Nationalelf (국가의 11인)
Die DFB-Elf (DFB의 11인), Die Adler (독수리)
현 FIFA 랭킹2위
현 Elo 랭킹3위
유니폼어웨이
상의하양회색[5][6]
하의검정하양
양말검정하양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우승팀
우루과이서독브라질
1974 FIFA 월드컵 서독 우승팀
브라질서독아르헨티나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팀
아르헨티나서독브라질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우승팀
스페인독일2018년 우승팀
FIFA 월드컵 우승팀
5회 브라질
4회 이탈리아독일
2회 우루과이아르헨티나
1회 잉글랜드프랑스스페인

1 개요

Football is a simple game; 22 men chase a ball for 90 minutes and at the end, the Germans always win. - Gary Winston Lineker -

축구란 간단하다. 22명이 공을 쫓아 90분동안 달리다가, 항상 독일이 이기는 게임이다. - 게리 리네커 -

독일축구 국가대표팀을 다루는 항목. 그 어느 나라 축구 대표팀 항목보다도 유독 압도적으로 크고 아름다운 스케일을 자랑한다 흰색 상의와 검은 반바지 유니폼이 그들의 트레이드 마크. 이는 근대 독일의 전신인 옛 프로이센 국기의 색깔과 동일하다. 세컨드 유니폼은 전통적으로 초록색 상의와 흰색 반바지를 착용했으나, 빨간색 상의, 흰색 바지를 택했던 적도 있고, 근래들어서는 검은색 계열의 짙은 세컨드 유니폼이 선호되는 추세다. 로고[7]수리도 프로이센에서 사용했던 문장.

브라질에 이은 월드컵 역대 전적랭킹 2위이며, 4회의 준우승으로(1966,1982,1986,2002) 월드컵 최다 준우승국(!)이기도 하다.[8] 또한 월드컵 득점랭킹 1위 선수(미로슬라프 클로제, 16골)3위 선수(게르트 뮐러, 14골)를 보유하고 있다. 현재까지 월드컵에서 4번의 승부차기에서 모두 승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유로컵에서도 스페인과 더불어 최다 우승(3회)구소련과 함께 최다 준우승(3회)을 기록하고 있다.

2 설명

홈 경기장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대표팀 홈 경기는 국내 곳곳에 분산해서 개최한다. 1908년부터 현재까지 39개 도시에서 홈 경기를 주최하였는데 이 도시 중에는 브레슬라우, 쾨니히스베르크, 슈테틴, 보이텐 등 구 동방영토와 안슐루스에 의해 독일에 합병되었던 오스트리아 에서 1938년부터 1942년까지 3번 개최한 것도 포함된다.

상징성 때문에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알리안츠 아레나 두 곳에서 주로 경기가 개최되지만 사실 딱히 정해진 홈 그라운드는 없다. UEFA 선정 5성급 경기장도 5개[9]나 있는데다 그에 못지않은 4성급 경기장도 수두룩할 정도로 뛰어난 인프라가 갖춰져 있기 때문에 홈 경기장이 자주 바뀐다.

전통적인 축구 강호로써 한국에서는 전차군단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는 당연히 독일특산물 걸작 병기로 통하는 덕에 불리는 별칭. 현지에서 별명은 Die Mannschaft(디 만샤프트 - '더 팀'이라는 의미)이다. 그 밖에 Die DFB-Elf(디 데에프베 엘프)혹은 Die Nationalelf(디 나치오날엘프), Der Panzer(데어 판처) 정도 된다.

FIFA 월드컵 전적랭킹 2위다. 50년대 이후 계속 2위를 유지했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네 번째 우승을 달성하기 전에는 3위였던 이탈리아에 우승횟수가 하나 밀렸기 때문에 불완전한 2위로 폄하당하기도 했다.[10] 전적랭킹은 오로지 본선에서 얻은 승점으로만 따지기에 50년대 이후 이탈리아에 순위가 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승점뿐만 아니라, 결승진출 횟수, 4강 및 토너먼트 진출 횟수, 골득실 등등 우승 횟수를 제외한 모든 면에서 이탈리아를 누르고 유럽 톱을 달렸다. 우승은 4번이지만 결승 진출 8회에 4강 진출은 13회로 국가대표 팀들 전체 1위를 달리고, 부동의 1위인 브라질과의 승점 차이를 2014년에 확연히 따라잡으면서, 현재는 브라질보다 승점을 10점만 더 획득하면 절대부동의 FIFA 월드컵 전적랭킹 1위를 할 수 있다.

사방팔방에서 전부 독일이 라이벌이라 자칭한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폴란드 등이 전부 독일을 라이벌이라고 칭한다.[11] 그렇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공식 라이벌은 네덜란드. 이 두 팀이 만나면 서로 살인태클이 난무하고 침 뱉고 난리도 아니다. 현대로 오면서 분데스리가에서 뛰는 주변국 출신 선수들이 굉장히 많다보니 국대전에서 팀 동료끼리 만나는 일도 많고, 이전의 살인적인 분위기는 많이 줄었지만 메이저대회에서의 라이벌 의식은 여전하다. 또 다른 맞수이자 천적으로 꼽히는 팀은 이탈리아. 현재 시점에서 독일에게 천적이자 최고의 라이벌은 독일과 함께 4회의 월드컵 우승 기록을 가지고 있는 이탈리아[12]

가장 큰 특징은 그 특유의 꾸준함. 첫 월드컵은 불참,[13] 1950년은 2차대전 전범국으로 출전 금지되어 출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고는 이후 18번의 월드컵에 모두 출전했으며,[14]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에서 극초반에 광탈한 적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8강 이상 진출흠많무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2년 주기설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롤러코스터 같은 기복을 보여주는 프랑스, 이탈리아 등과 심히 비교되는 기록이다.[15] 특히 2002 월드컵부터는 4개 대회 연속 4강 진출이라는 전무후무한 넘사벽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꾸준함을 바탕으로 현재 월드컵 최다 경기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네이랑의 비극이라 불리는, 개최국 브라질을 7대1로 압살하며 월드컵 최다골 기록도 브라질로부터 빼앗아왔다. 그 다음 차례는 월드컵 최다 우승 기록이다

다만 이렇게 잘나가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2002년 월드컵 당시의 독일은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를 만났는데 원정가서는 잘 이긴것까지는 좋았는데 홈에서 되려 1-5로 완전히 후벼파임을 당한 적이 있었다. 더군다나 선제골까지 넣고도 이런 꼴을 당했었다.

팀 컬러는 현대로 넘어오면서 정말 많이 바뀌었는데, 과거 8, 90년대 독일의 축구가 Die Mannschaft, 즉 '팀'라는 애칭으로 불릴 정도로[16] 주장, 감독의 지휘아래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철저한 분업축구로 톱니바퀴와 같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활약했고, 압도적인 피지컬과 제공권, 선이 굵은 롱볼 축구, 중거리 슛으로 대표되지만 반면 딱딱하고 투박한 볼 키핑과 헤딩 싸움이 발군인 대신 땅볼 싸움이 취약해서 어쩔 수 없이 롱볼을 난사해야만 했던 상황 등 양날의 검 축구를 했다. 그 독일다움을 유지하였던 것이 변화하는 현대 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이는 세대교체의 실패와도 맞물려 유로 2000, 유로 2004를 망쳤고, 그 사이에 있었던 2002 월드컵은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긴 하였으나, 대진운이 많이 따라주었다는 평을 들었으며, 오히려 이는 유로 2004에서 굴욕적인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기간의 독일 대표팀은 럼펠푸스발[17]이라고 불리우며 조롱을 받았고, 2006년 자국에서 열릴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전술 변화와 세대 교체의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른바, 2004년부터 요아힘 뢰브 시대가 시작되고 많은 것이 바뀌었는데, [18] 독일의 딱딱하고 투박한 축구를 완전히 폐기처분하고 70년대 람바참바[19] 스타일로의 복귀를 꾀하였고, 브라질의 샬레이라[20]나, 스페인의 티키타카 등 다른 나라에서 재미를 본 스타일의 축구를 도입하는, 한마디로 말해 기존의 것을 완전히 내다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드는 작업을 통해 넘사벽으로 업그레이드된 팀에 기술과 스피드를 접목시켜 약점을 찾기 힘든 팀으로 변모시켰다. 특히 이 시기는 유로 2000의 대실패로 인해 독일 클럽들이 대규모로 유소년 선수 육성을 시작해 그 첫 세대가 나올 즈음이었고, 뢰브 체제에 독일 국대에 승선해 핵심으로 자리잡은 대표적인 유망주들로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루카스 포돌스키, 필립 람, 페어 메르테자커, 아르네 프리드리히, 마르셀 얀센 등이 있다. 하지만 해외의 이주민 2세들의 비중을 높인 점 역시 무시 못 할 부분인데 메수트 외질(겔젠키르헨 출신, 터키계), 사미 케디라(슈투트가르트 출신, 튀니지), 미로슬라프 클로제(폴란드), 루카스 포돌스키(폴란드), 제롬 보아텡(서베를린 출신, 가나) 등등 유럽 및 아프리카의 여러 혈통들의 올스타스러운 인원들과 토종 독일 선수들과 조합을 꾀했다. 한마디로 2010년대 이후의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은 팀 에디트의 정수를 보여준 셈이다.[21]

확 바뀐 속도감 넘치는 축구로 자국에서 열린 2006 FIFA 월드컵 독일에서 3위를 차지하며 녹슨 전차군단의 오명을 벗기 시작한 뢰브 체제의 독일은 이후 유로 2008, 2010 월드컵, 유로 2012, 2014 월드컵에서 모두 4강이나 결승에 진출하며 꾸준한 고성적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지 약점으로는 화끈한 공격력을 보여주다가도 정작 4강전부터는 상대를 너무 의식해서인지 소극적인 전술로 인해 실패를 겪는 고질적인 4강 징크스에 시달렸는데,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다시 한 번 결승에 진출하며 아르헨티나와 연장전까지 가는 결승전다운 치열한 혈투[22]끝에 마침내 우승을 차지하고 징크스를 깨뜨리는 데 성공했다.

3 역사

3.1 ~ 1992년

1930년에 개최된 제1회 우루과이 월드컵에는 불참했다.

처음 출전한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두달 전에 합병오스트리아 대표팀을 흡수하여 월드컵에 출전했다. 직전 대회인 34년 월드컵에서 독일이 3위, 오스트리아가 4위를 거둔 강팀이었기 때문에 1938년 통합 독일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사실 대회직전에 급조된 팀이기 때문에 팀웍 등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결국 졸전 끝에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했다. 시드 배정국 중 유일하게 탈락. 공식 순위는 10위. 이 대회는 독일 대표팀이 8강 안에 들지 못한 유일한 월드컵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던 월드컵은 1950년에 재개되어 브라질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독일 3국인 서독, 동독, 자를란트(자르 보호령) 대표팀은 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라는 이유로 FIFA로부터 월드컵 출전을 금지당했다. 역시 히틀러가 웬수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 후 줄리메컵을 들고 있는 주장 프리츠 발터(Fritz Walter)

서독은 출전 금지가 풀린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당시 독일은 서독, 동독, 자를란트 3개국 대표팀으로 나눠어 출전했다. 자를란트 대표팀은 이 대회가 메이저 대회 처음이자 마지막 출전이었으며, 2년 후 서독 대표팀에 흡수되었다. 사실 이 대회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특이한 대전방식을 도입했는데, 조별 예선에서 풀리그를 거치지 않았고, 8강 이후 토너먼트에서는 조1위끼리 맞붙거나, 조2위끼리 맞붙는 방식이었다. 이에 서독은 전략인 접근을 취했는데, 조별리그에서 당시 세계 최강 헝가리와 맞붙었을 때 주전 7명을 제외한 사실상 2군을 내보내 패하고 조2위로 8강에 올랐다. 조1위로 8강에 오른 헝가리는 각조 1위인 브라질, 우르과이를 만나 혈전을 치르며 결승까지 올라와야 했지만, 서독은 토너먼트에서 조2위 국가인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를 만나 각각 2:0, 6:1로 꺾으며 손쉽게 결승에 진출했다. 결국 결승전에서 서독은 헝가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당시 마자르 군단 헝가리는 세계 최강의 축구 대표팀으로, 이날 결승전에서 서독에서 패하기 전까지 4년간 A매치 32경기 무패라는 대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1954년의 이 우승은 당시 세계 최강이던 마자르 군단 헝가리를 3대 2로 극적으로 꺾은 우승이기에[23] 결승전이 열렸던 도시 스위스 베른의 이름을 따서 베른의 기적이라 불린다. 특히 이 우승은 패전과 조국의 분단이라는 이중고(苦)에 시달렸던 독일 국민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안겨준, 독일 국민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역대급 사건이다.[24] 이후 16회 연속 대회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1958년 스웨덴 월드컵에서는 죽음의 조인 1조에 배정되어 다소 고전했지만 조1위로 8강에 진출했다. 4강전에서 개최국 스웨덴에게 패하여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 8강전에서 유고슬라비아에 패하면서 4강 진출에 실패하는 부진을 겪은 서독은 통합 프로리그의 필요성을 실감하고[25], 이듬해 1963년 분데스리가를 출범시켰다. 분데스리가는 급속도로 발전하여1990년 독일 통일로 인해 경제침체의 영향을 받을 때까지 70~80년대 세계 최고의 축구리그 중 하나로서 위용을 뽐냈다. 또 분데스리가 출범과 때를 같이 하여 54년 스위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명장 제프 헤르베르거가 물러나고 헬무트 쇤이 새로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는 우승후보라는 평에 걸맞는 경기력으로 8강에서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를 4:0으로 대파하였고, 4강에서 우승후보 소련을 만나 야신의 놀라운 선방에도 불구하고 파상공세 끝에 두 골을 넣고 결승까지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편파판정 논란을 일으키며 결승에 진출했던 개최국 잉글랜드와 만났다. 2:2 동점 상황에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고 제프 허스트의 튕겨져 나온 공이 골로 인정되는 오심[26]으로 경기는 3:2가 되었다. 만회골을 위해 총공세를 펼치던 서독은 경기 종료 1분전 수비진까지 모두 올라와 공격에 가세해 결정적 득점 찬스를 만들었으나 이 상황에서 흘러나온 공을 노마크의 허스트가 득점하면서 4:2로 경기가 종료되었다.[27]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는 3위를 기록했다. 1라운드 3경기에서 3연승한 독일은 8강전에서 잉글랜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전반전 2:0으로 끌려갔으나, 후반전 잉글랜드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고 서독이 반코트 게임으로 경기를 주도하며 두 골을 성공시켜 경기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연장전에서 마침내 역전골을 터트려 잉글랜드에 설욕하며 4강에 진출했다. 이탈리아와의 4강전은 연장전까지 이어지며 선취득점-동점-역전-재동점-재역전-재재동점-추가골이 이어지는 역대급 명승부를 펼친 끝에 4:3으로 석패하여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이것이 월드컵에서 독일이 이탈리아에 패배한 첫 경기다. 이전까지는 이탈리아와 무승부만 있었다. 이 경기에서 베켄바워는 이탈리아의 거친 파울로 쇄골이 부서지고 어깨가 탈골하는 부상을 입었으나 이미 2명을 교체한 후였기 때문에 삼각건에 의지하여 끝까지 경기에 뛰는 투혼을 발휘하여 전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게르트 뮐러는 대회에서 총 10골을 성공시켜 득점왕에 올랐고, 그해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72년 유로에서 헬무트 쇤 감독은 당시 분데스리가를 양분하던 바이에른 뮌헨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선수들을 주축으로 대표팀을 구성했다. 1970년 월드컵 대표팀 멤버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부상 등의 이유로 볼프강 오버라트, 베르티 포크츠, 볼프강 베버 등이 참여할 수 없었다. 특히 1970년 월드컵에서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한 오버라트의 공백은 적지 않은 타격이었다. 그래서 이 대회에 오버라트 대신 발탁된 것이 바로 귄터 네처였다. 네처 역시 분데스리가에서 오버라트와 쌍벽을 이룬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였지만, 오버라트에 밀려 대표팀에 승선할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은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이며 승승장구했다. 베켄바워와 네처가 경기를 조율하면서 화려한 축구를 구사했고, 전방에는 어떻게 해서든 골로 결정짓는 게르트 뮐러가 있었다. 특히 예선 플레이오프 빅매치였던 잉글랜드전 웸블리 원정경기에서 잉글랜드를 완전히 압도하면서 3:1로 승리했다. 결승전에서는 소련을 상대로 일방적인 경기를 경기를 펼치며 3:0의 대승을 거두고 유럽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에서 서독 대표팀이 보여준 창의적인 축구는 '아트사커', '람바참바 풋볼'이라 불리며 찬사를 받았다. 서독이 이런 창의적인 축구를 보인데는 판타지스타 패스마스터 귄터 네처의 역할이 컸다.[28] 유로대회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72년 발롱도르 투표 1~3위를 서독 선수들이 독식했다. (1위 프란츠 베켄바워, 공동 2위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2000년대 중반 이전 독일 축구하면 투박하고 실리적인 축구를 떠올리지만 독일 축구가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닌데 대표적으로 1972 유로 당시 서독 대표팀은 브라질에 비견되는 아트사커를 구사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1974년 서독 월드컵 우승의 주역 프란츠 베켄바워게르트 뮐러

자국에서 개최된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 '폭격기' 게르트 뮐러를 비롯해 당시 바이에른 뮌헨 전성기의 주축 멤버들과 유프 하인케스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주축들이 모인 초호화 군단을 구성했다. 당시 독일대표팀은 귄터 네처와 볼프강 오버라트라는 두명의 뛰어난 중원 플레이메이커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볼프강 오버라트는 1970 월드컵에서 주전 플레이메이커로 활약했고, 오버라트가 부상으로 빠진 1972년 유로에서는 귄터 네처가 활약하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헬무트 쇤 감독은 분데스리가에서 라이벌이었던 자존심 센 이 두 명의 플레이메이커를 공존시키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1972 유로에서 귄터 네처의 임팩트가 워낙 컸기 때문에 서독 국민들은 네처를 원했으나, 쇤 감독은 볼프강 오버라트를 1974 월드컵 주전으로 선택했다.[29] 오버라트가 중원 플레이메이커로 선택되면서 서독 대표팀의 색깔은 72년과 다소 달라졌는데, 창의성 있는 아트사커 대신 활동량과 기동력, 전사와 같은 투쟁력이 보다 강조되었다는 평을 듣는다. 독일은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올라 토탈사커로 선풍을 일으키던 요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만났다. 쇤 감독은 크루이프를 봉쇄하기 위해 대인방어에 뛰어난 포크츠를 기용하였는데, 포크츠가 크루이프를 효과적으로 봉쇄하면서 네덜란드는 예전같은 경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초반에 페널티킥을 헌납했지만 끈기있게 네덜란드를 몰아붙여 2대1[30]로 꺾고 두 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31]

1974년 월드컵 우승멤버와 비슷한 멤버구성으로 출전한 유로 1976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체코슬로바키아에 승부차기에 패해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 때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키커인 파넨카가 파넨카킥으로 골을 성공시키며 우승을 확정짓기도 했다.

디팬딩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1라운드 조별리그에서는 2차전에서 멕시코를 6:0으로 바르기도 했지만, 1차전에서 지난 대회 4강 폴란드와 0:0 무승부를 기록한데 이어 3차전에서도 튀니지의 밀집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겼다. 조2위로 2라운드(8강)에 올랐다. 그러나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이은 막장 쓰레기 대회라는 오명에 맞게 아르헨티나의 손쉬운 우승을 위해서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인지 강팀들이 모조리 A조에 묶였다. A조에 전대회 우승 및 준우승국인 서독, 네덜란드를 비롯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가 함께 묶였다. 서독은 1,2차전에서 이탈리아, 네덜란드에 각각 0:0, 2:2 무승부를 거두었다. 3차전에서 승점셔틀 오스트리아를 꺾고 4강에 오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이미 네덜란드가 2승을 선취하면서 결승 진출이 확정되었고,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두더라도 결승 진출이 좌절된 서독은 오스트리아전에서 포크츠의 자책골 등으로 2:3로 패하면서 6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1980 유로 결승 벨기에전 선발 라인업(슈마허, 칼츠, 슈틸리케, K. 푀르스터, 디츠, 슈스터, 브리겔, 뮐러, 루메니게, 흐루베슈, 알로프스)

1980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유로 1980를 앞두고 당시 대표팀에서 엄청난 활약을 했던 클라우스 피셔[32]가 부상으로 빠지고, 대체선수로 대표팀 경험이 없던 호르스트 흐루베슈가 승선하게 되면서 우려를 자아내기도 했으나, 본선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서독은 체코슬로바키아를 만나 루메니게의 골로 승리하면서 4년전 결승전 승부차기 패배를 설욕했고, 두번째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는 78-79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 클라우스 알로프스의 해트트릭으로 네덜란드를 꺾었다. 조1위로 결승에 올라 결승전에서 호르스트 흐루베슈의 골로 벨기에에 2:1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네덜란드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한 알로프스는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고, 이 대회에서 활약한 루메니게는 80년, 81년 연속으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서는 준우승을 거두었다. 아래에 서술될 히혼의 수치로 빛이 바랜 비운의 대표팀이지만 80년 유로 우승 멤버가 주축이 되어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실력이 뛰어났던 만큼 너무 자만했다는 점인데 그것이 결국 히혼의 수치라는 비극을 초래한 단초가 되었다. 이 대회 조별리그 3차전에서 히혼의 수치, 또는 알제리에서 안슐루스라 불린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라 불리는[33] 이 사건은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르헨티-칠레전 등과 더불어 월드컵의 위상에 먹칠을 가한 흑역사로 남아있다. 서독은 전세계의 지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일이라는 나라의 신뢰도에 먹칠을 가한 사건이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비판 여론도 컸다. 내막은 이렇다.

우승후보였던 서독은 조별리그 첫 상대인 알제리를 아주 우습게 봤는데, 유프 데어발 감독은 "알제리를 이기지 못하면 바로 기차타고 집으로 가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독은 만만하게 봤던 알제리에게 1-2로 패하는 이변의 희생양이 되면서 개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조별리그 2차전에서 루메니게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1 대승을 거두었지만, 알제리전의 패배가 문제가 되어 오스트리아와의 마지막 3차전을 앞둔 상황에서 아래과 같은 전적으로 조별리그 진출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순위승점
1오스트리아220030+34[34]
2알제리32015504
3서독210153+22
4칠레300338-50

서독은 3차전에서 오스트리아를 무조건 이겨야 했고, 먼저 2승을 거둔 오스트리아는 2점 차 이내로 패하면 2라운드 진출에 문제가 없는 상황이었다. 토너먼트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1~2위 따른 유불리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게르만 형제 나라 사이에 묘한 분위기 우리가 남이가 가 형성된다. 44년 전의 역사가 생각나면 지는 거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서독은 파상공세를 펼쳤고 마침내 전반 11분 서독의 호르스트 흐루베쉬가 득점하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양팀은 경기를 할 생각은 안하고 볼만 이리저리 돌리며 시간을 때웠다. 결국 그대로 경기가 끝나면서 서독과 오스트리아는 2라운드에 동반 진출했고 알제리는 2승을 거두고도 탈락했다.

순위승점
1서독320163+34
2오스트리아320131+24
3알제리32015504
4칠레300338-50

이 사건으로 서독은 알제리 뿐만아니라 전세계로부터 지탄을 받았다.네이버 캐스트 특약. 그보다 독일 자국 내부 비판이 더 컸다. 서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무엇보다도 주변국들과의 관계와 신뢰 회복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으나, 알제리에서 공개적으로 이 사건을 안슐루스(Anschluss)라고 부르며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운운했던 만큼 서독 스스로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범게르만주의의 부활로 보여질 수 있는 이 사건을 조기진화하기 위해 서독 언론 스스로 이 사건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 이 경기가 직접적인 영향을 미쳐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부터는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를 같은 시간대에 진행하는 것으로 규정이 변경되었다.[35]


▲1982 월드컵 결승 이탈리아전 선발 라인업(브라이트너, 슈틸리케, 슈마허, 브리겔, 루메니게, 피셔, 리트바르스키, B. 푀르스터, 칼츠, 드레믈러, K. 푀르스터[36])

82년 월드컵 당시 서독은 80년 유로에서 맹활약했던 알로프스가 갑작스런 부진으로 대표팀에서 탈락하고, 득점기계 클라우스 피셔가 노쇠한 상황에서 칼-하인츠 루메니게에게 크게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회 도중 루메니게가 부상을 입는 악재를 겪게 된다. 2라운드를 통과하고 준결승에서 플라티니가 이끄는 프랑스와 격돌했다. 루메니게가 부상으로 선발출장하지 못했지만 초반에 득점에 성공하여 손쉽게 풀어나가나 했더니 패널티킥을 헌납하여 동점이 되어 결국 연장전에 돌입했다. 연장전 전반에 연속으로 두 골을 먹고 3:1로 패색이 짙었으나 연장전에 교체 투입된 루메니게가 만회골을 넣었고, 이어 클라우스 피셔가 전매특허인 오버헤드킥을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어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진출했다.[37]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세비야에서의 스릴러(Thriller von Sevilla)라고 부르는 명경기. 다만 결승에서는 파올로 로시가 이끄는 이탈리아에 3:1로 패하며 준우승을 거두었다.

1984년 유로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포르트갈과 무승부, 스페인과 경기에서 패배를 하며 1승 1무 1패로 4강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고 5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4강 진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유프 데어발 감독이 자진사퇴하고 프란츠 베켄바워가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 대회가 독일 대표팀에게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닌데, 그것은 데어발 감독이 1980년 유로 우승과 1982년 월드컵 준우승을 거둔 검증된 대표팀 멤버에 수술을 가하며,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 로타어 마테우스 등 신예들을 과감히 주전으로 기용하는 세대교체를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84년 대표팀은 유로 4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당시에는 실패로 비춰졌으나 이때 세대교체로 등장한 인물들은 이후 86 월드컵 준우승에 이어 90 월드컵 우승을 이뤄내는 주역이 되었다.


▲1986년 월드컵 준결승 프랑스전 선발 라인업(슈마허, 야콥스, 브레메, 에르더, 푀르스터, 브리겔, 마테우스, 롤프, 마가트, 루메니게 (57. 푈러 교체), 알로프스)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의 첫 메이저 대회인 1986년 월드컵에서 서독은 조별리그에서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벨기에에게 2:0으로 패하는 등 1승1무1패의 성적으로 조2위를 기록했다. 사실 조별리그에서 득점보다 실점이 많았다. 그러나 16강부터 토너먼트의 강자답게 특유의 3-5-2를 바탕으로 한 톱니바퀴 같은 조직력을 바탕으로 16강전부터 준결승까지 무실점을 기록하며 결승전에 진출했다. 특히 준결승에서 1984 유로 우승국인 미셸 플라티니의 프랑스를 2:0으로 격파하면서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결승전에서는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를 맞아 2골을 연속으로 실점하며 패색이 짙었으나 후반 29분과 35분 루메니게루디 푈러의 연속골로 극적인 동점에 성공했다. 그러나 후반 39분 아르헨티나의 부루차가가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3:2로 아르헨티나가 우승을 차지했다.


▲1988 유로 준결승 네덜란드전 선발 라인업(헤르게트, 보로프카, 콜러, 푈러, 임멜, 클린스만, 톤, 브레메, 밀, 롤프, 마테우스)

1988년 유로에서는 조1위로 4강에 올랐으나 당시 오렌지 삼총사를 비롯한 호화 멤버로 구성된 네덜란드를 맞아 페널티킥으로 선취 득점을 했으나 이후 다소 억울할 법한 페널티킥을 헌납했고 결국 2:1 역전패를 당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1990 월드컵 결승 아르헨티나전 선발 라인업(베어톨트, 일그너, 콜러, 부흐발트, 푈러, 아우겐탈러, 리트바르스키, 브레메, 헤슬러, 클린스만, 마테우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조별예선 1, 2차전에서 유고슬라비아와 아랍 에미리트를 각각 4:1, 5:1로 대파하는 가공할 만한 공격력을 보이며 우승후보 답게 조1위로 손쉽게 16강에 오르나 했더니, 16강에서는 우승후보 네덜란드와 리턴매치를 갖게 되었다. 90년 월드컵의 명경기로 꼽힌 이 경기에서 양팀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며 초반 팽팽한 경기를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루디 푈러레이카르트가 동반 퇴장을 당했는데, 동반 퇴장 이후 네덜란드가 급격히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며 서독이 일방적인 경기를 펼친 끝에 클린스만브레메의 연속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8강에서 체코슬로비키아를 1:0으로 꺾은 서독은 4강에서 잉글랜드를 쉽게 이길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잉글랜드가 강한 압박 전술로 나오자 고전하면서 승부차기 끝에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은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와의 리턴매치. 아르헨티나는 강호 브라질, 이탈리아 등을 꺾으며 결승까지 올라왔지만 86년에 비해 멤버들이 노쇠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르헨티나는 토너먼트에서 수비 위주의 역습을 노리는 전략으로 승리해 결승까지 올라왔다. 결승전에서 아르헨티나는 서독을 상대로 10백을 시전하다가 거친 수비로 연이은 퇴장을 당했고, 결국 브레메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서독이 세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루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은 특히 서독이 징크스를 안고 있던 적지에서의 우승이었던데다[38] 동독과의 통일 분위기가 한껏 조성된 상황에서 국민들의 기쁨을 배가시킨 우승이었다.[39] 주장 로타어 마테우스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그해 발롱도르와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DFB가 '서독'으로 출전한 마지막 대회이기도 하다. 대회가 끝난 후 베켄바워가 대표팀 감독에서 물러나고 수석코치였던 포크츠가 뒤를 이었다.


▲1992 유로 결승 덴마크전 선발 라인업(콜러, 일그너, 에펜베르크, 부흐발트, 헬머, 로이터, 리들레, 클린스만, 헤슬러, 브레메, 잠머)

1992년 스웨덴에서 열린 유로대회에서는 주장 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불참했고, 대표팀의 3-5-2 전술에서 클린스만과 투톱을 이루었던 루디 푈러가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부상을 당해 대회를 접는 등 전력 누수가 있었다. 본선 조별리그에서 스코틀랜드에게 2:0 승리, CIS에게 1:1 무승부, 네덜란드에게 1:3 패배로 불안하게 4강에 진출했으나, 스페인을 3:2로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변의 팀 덴마크에 패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당초 푈러클린스만의 백업 공격수로 대표팀에 승선했던 칼-하인츠 리들레는 조별리그 첫경기에서 푈러가 불의의 부상을 당하며 대회에서 아웃되자 이후 결승까지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3.2 암흑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 후 그해말에 독일은 드디어 염원이었던 동서독 통일을 이루었다. 통일 독일이 들어서면서 축구계에서는 월드챔피언인 독일 대표팀이 더욱 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그러나 통일로 인한 경제적 침체와 지지부진한 세대교체로 이전 만큼의 위용을 보여주지 못한다. 에리히 리베크의 암흑기로 대표되는 이 90년대 후반~2000년대 후반은 독일대표팀에게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할 수 있는 암흑기로, 당시 메이저 대회에서 기록한 성적들을 보면 이러하다.

1990년대에는 계속 하락세를 걸었기 때문에 녹슨 전차 군단이라는 오명을 썼다. 마테우스가 부상으로 빠지고 마티아스 잠머의 하드캐리해서 유로 1996을 우승해 통일 독일 최초로 메이저 대회를 우승하긴 했지만 1994, 1998 월드컵과 유로 2000, 2004에서 계속된 부진으로 이런 비아냥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가장 큰 이유는 독일 통일로 인한 막대한 경제적 부담으로 인한 재정 상황의 악화로 분데스리가 내 대형선수들이 유출되고, 분데스리가가 상업적으로 저평가되어있어 해외 중계가 덜 되기 때문에 자국민들 빼고는 메이저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 사람들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암흑기지만 월드컵 8강은 기본으로 진출했다는 점이 에러

사실 암흑기 시절 동안 메이저 대회 직전마다 뛰어난 자원들이 자꾸 부상에 시달리는 고질적인 비극이 매 대회 계속됐는데,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테크니션이자 전차군단 공격의 선봉격인 메멧 숄은 잦은 부상으로 유로 2000을 제외하면 메이저 대회에 제대로 출전한 적이 없다. 올리버 칸, 메멧 숄과 더불어 90년대 말~2000년대 초 바이에른 뮌헨의 전성기를 이끈 굴지의 중원사령관 슈테판 에펜베르크는 그 특유의 성깔머리로 1994년 월드컵 한국전에서 F*ck 사건으로 대표팀에서 영구 퇴출되어 이후 단 한차례도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는 도르트문트의 전설적인 리베로이자 당시 독일 대표팀 전술의 핵인 마티아스 잠머가 부상당하여, 40세를 눈앞에 둔 노장 로타어 마테우스를 써야하는 안습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처럼 주전급 선수들의 줄부상에 독일인들은 눈물을 흘렸는데 당시의 독일에 노장선수들의 후배들이 없다시피했던 안습한 역사들도 큰 몫을(?) 했다.

잘 거론되지 않지만 독일대표팀의 암흑기는 능력 있는 지도자의 부재도 한 몫했다. 암흑기의 시발점이 된 시점의 감독인 포크츠는 유로 96 우승으로 명장 소리도 듣기도 했지만, 3백을 고수하는 등 전반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뛰어나지는 않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게다가 포크츠는 선수시절 주로 상대팀 스트라이커의 전담 마크맨으로 활동하는 등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선수는 아니었기 때문에, 마테우스, 클린스만, 에펜베르크 등 자존심 강한 선수들이 즐비한 독일 대표팀에서 전임 감독 베켄바워 보다 선수 장악력이 크게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문제는 포크츠 정도의 능력과 커리어를 지닌 감독 조차 당시 독일에는 없었다는 것. 포크츠가 저조한 성적 때문에 번번히 경질설에 시달리면서도 98년까지 장기집권한 것은 사실 포크츠를 대체할 만한 마땅한 감독 후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포크츠의 후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선출할 때도 심각한 인물난을 겪어서 감독으로서 실패에 가까운 커리어를 갖고 있던 울리 슈틸리케가 유력하게 거론될 정도였다. 막판에 뒤집혀서 에리히 리베크가 감독으로, 슈틸리케가 수석 코치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리베크 역시 전형적인 분데스리가 중하위권팀 감독이었다. 리벡의 후임인 루디 푈러 역시 지도자 경력이 없는 상태에서 독일 대표팀 사령탑으로 부임했다. 푈러의 후임인 클린스만도 마찬가지. 어쨌거나 요아힘 뢰브라는 걸출한 수석코치가 있었던 클린스만 시대에 암흑기가 끝났고, 클린스만의 되를 이은 뢰브는 2020년까지 장기집권하게 될 예정이다.


▲1994 월드컵 조별리그 한국전 선발 라인업(일그너, 콜러, 베어톨트, 잠머, 에펜베르크, 부흐발트, 헤슬러, 브레메, 클린스만, 리들레, 마테우스)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부터 독일의 쇠락이 눈에 띄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독일은 전대회 우승국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별리그에서 시원찮은 경기력을 보였다. 약체 볼리비아에 1:0의 진땀승을 거두었고, 스페인전에서는 1:1 무승부, 그리고 대한민국과의 마지막 경기에서는 3:2의 진땀승을 거두고 16강에 간신히 올랐다. 16강전에서는 벨기에를 만나 3:2로 꺾고 92 유로 결승전의 설욕을 했지만,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1:2의 역전패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고 8강에서 탈락한다.[41] 1962년 칠레 월드컵 4강 진출 실패의 충격 이후 32년 만의 일이었다.

94 월드컵에서의 부진은 세대교체 실패가 주원인으로 꼽힌다. 92 유로부터 칼-하인츠 리들레, 마티아스 잠머,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새로 대표팀에 승선했으나, 나머지 멤버는 모두 90년 월드컵 우승멤버였다. 새로 합류한 리들레나 잠머도 결코 적지 않은 나이였다. 게다가 대표팀에서 가장 어린 에펜베르크[42]는 조별예선 한국전에서 불미스런 일을 일으키고 대표팀에서 퇴출되었다. 때문에 한국전 이후엔 백업멤버 바그너[43]가 출전했지만 에펜베르크의 공백을 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평균 31세가 넘는 고령의 멤버들로 구성된 독일 대표팀은 엘리뇨로 인한 폭염으로 유명했던 94년 월드컵에서 체력적인 문제를 노출하면서 똥줄 경기력으로 일관했다.


▲1996 유로 결승 체코전 선발 라인업(슈트룬츠, 잠머, 바벨, 아일츠(46분 보데), 헤슬러, 헬머, 치게, 쿤츠, 숄(69분 비어호프), 클린스만, 쾨프케)

유로 1996에서는 로타어 마테우스가 빠지고 그를 대신한 새로운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를 중심으로 공격진에는 백전노장 위르겐 클린스만과 중고신인 올리버 비어호프가 활약했다. 특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선수였던 비어호프는 이 대회에서 맹활약하며 깜짝 스타로 떠올랐다. 결승전에서 체코의 베르거가 페널티킥을 성공시키며 앞서나갔으나 교체 투입된 비어호프가 만회골을 넣어 동점을 만들었고, 연장전으로 가려던 찰라인 후반 50분 비어호프가 극적인 역전골을 넣으면서 2:1로 독일이 우승컵을 차지했다. 이로써 독일은 유로 대회 최다 우승의 기록을 세웠다.


▲1998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선발 라인업(콜러, 하만, 타르나트, 하인리히, 비어호프, 뵈른스, 마테우스, 헤슬러, 예레미스, 클린스만(주장), 쾨프케)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당시 대표팀의 핵인 리베로 잠머가 부상으로 대회에 출전할 수 없게 되자 대신 만37세의 노장 마테우스의 대표팀 승선이 결정되었다. 16강에서 멕시코에 2:1 승리를 거두는 등 그럭저럭 8강에 올라왔으나, 8강에서 독일은 크로아티아에 0:3으로 완패했다. 이 경기는 독일 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굴욕으로 언급되는 경기다.

이 경기에서 전반 막판에 뵈른스가 백태클로 퇴장당하는 역적질을 저지르며 독일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며 무너지기 시작한게 컸지만, 이 경기에서 크로아티아는 딱딱하고 투박한 독일식 축구를 어떻게 해체하는지 잘 알고 있음을 증명했다. 크로아티아 특유의 독일 약점 공략전술과 다보르 슈케르, 크로아티아LTE급 역습에 그대로 털렸다. 사실 크로아티아는 조별리그에서 아르헨티나에게 0-1로 패했고 자메이카에게도 패한 일본을 상대로 하마터면 비길뻔한 데다가 16강에서 루마니아를 상대로도 패널티킥으로 겨우 이길 정도로 4강이라고 하기 힘든 실력을 가진 팀이었다. 8강에서 크로아티아의 골들은 하나같이 절대로 빠른 슈팅이 아니었다. 그런데 독일은 수비가 너무 느려서 한개도 못막았다. 특히 이 중 2골은 바로 앞에 있는 수비수가 조금만 움직이면 될 것을 수비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다가 3골을 실점하여 탈락한 것이다. 당시의 크로아티아에게 당한 충격은 독일인들에게 거의 종말, 나라 잃은 슬픔에 가까운 충격을 줬다. 크로아티아전 패배로 8강에서 탈락한 이후 독일축구는 약 6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게 된다. 또 94년 월드컵 8강전에서 불가리아에 패한 데 이어 98년 월드컵 8강 크로아티아전 패배한 이후 독일은 한동안 동유럽 징크스, 동유럽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또 여전히 고전적인 3백을 고집해 현대 전술사의 흐름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9년 2월, 미국과의 평가전에서 0:3의 완패를 당했고 1999년 7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또 다시 미국에게 0:2의 패배를 당해 토너먼트에 진출하지 못하는 최악의 수모를 당한다.

유로 2000에서 독일은 톱시드로 A조에 배정됐다. 그러나 조별리그 첫경기인 루마니아전에서 1-1로 비기며 불안하게 시작하더니, 두번째 경기인 잉글랜드전에서 앨런 시어러의 골로 0-1로 패하고 말았다. 이날 패배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결승에서 석연찮은 판정으로 잉글랜드가 우승한 이후 처음으로 독일이 A매치에서 잉글랜드에 패한 경기였다. 그리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포르투갈의 세르지우 콘세이상에게 해트트릭을 얻어 맞으면서 3:0으로 참패했고 1무 2패로 A조 최하위로 탈락했다[44].

2002년 월드컵 유럽지역예선에서는 뮌헨 홈구장에서 잉글랜드에게 1:5으로 패하는 망신을 당해 월드컵 본선진출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전 이래 독일 국가대표 홈경기에서 70년 동안 최고실점 경기였다.[45] 이날 대패하기 전까지 26년 동안 잉글랜드를 비롯한 영연방국가의 대표팀이 독일 대표팀을 이긴 적은 단 두번밖에 없을 정도로 독일은 압도적인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잉글랜드에게 1:5로 패한 것도 충격이지만 오직 단 한 사람에게 철저하게 유린당한 것은 더욱 충격이었다.[46] 물론 이때 독일은 승점 3점 차로 조1위였고 잉글랜드는 월드컵에 나가기 위해 반드시 독일을 꺾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있었다. 이 경기 이후 상황은 바뀌어 독일이 월드컵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독일은 플레이오프에서 우크라이나를 간신히 이겨서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다.

2002 한일 월드컵에서는 메멧 숄이 부상으로 쓰러지고 독일의 기대주였던 차세대 테크니션 제바스티안 다이슬러도 부상, 거기에 레버쿠젠 3연준의 주역인 수비의 핵 옌스 노보트니마저 쓰러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끝끝내 준우승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땐 대진운이 역대급으로 워낙 좋았던데다 올리버 칸이라는 전설적인 골키퍼의 초하드캐리로 가능했다. 조별예선 첫번째 경기 사우디아라비아 전에서는 8:0의 기록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카메룬의 조별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독일이 2:0의 승리를 거두었는데 양팀 퇴장 1명씩, 경고 6명을 받은 최악의 혈전이었다. 독일은 카메룬에 승리를 거두고 16강에 진출했으나 사상 최악의 난투극과 카메룬에게 모든 면에서 밀린 최악의 졸전으로 독일인들의 맹비난을 받았다. 이 경기에서 마르코 보데의 뜬금포가 아니었으면 독일이 카메룬에 패배하고 16강에 탈락했을지도 모른다.[47] 물론 2002년의 준우승은 16강 토너먼트에서 축구계에서 강호로 인정받는 팀을 만나지 않은 최상의 대진운 탓이 크다고 말하지만 대단한 성적임은 틀림없다.

2002년 한일월드컵 결승전 독일브라질의 결승전에서 베를린에서 독일인들의 독일축구 대표팀 응원 모습이다. 결승전에서 0:2로 브라질에 패배했으나 독일인들은 독일의 예상밖의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적을 얻으며 독일인들로 하여금 4년간 최악의 암흑기를 겪은 자국 축구에 대한 희망을 얻게 해준 대회였다.

그러나 유로 2004에서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조별리그 첫 경기인 네덜란드전에서 1:1로 비길 때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약체 라트비아전에서 9백 수비를 뚫지 못하고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던 체코와의 3차전에서 1:2로 패하면서 조3위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독일 국가 대표팀이 암흑기를 겪는 동안 분데스리가 클럽들이 유럽대항전에서 폭망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독일 통일로 인한 경제난으로 분데스리가의 위상이 과거보다는 떨어졌지만 1995-96 UEFA 컵을 우승한 바이에른 뮌헨, 1996-97 시즌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무려 UEFA 챔피언스리그를 우승하고 샬케 04가 UEFA 컵을 들어올리는 등 활약을 이어갔다. 바이에른 뮌헨은 1998-99 시즌 챔스 준우승, 2000-01 시즌 챔스 우승을 달성했고 바이어 04 레버쿠젠도 2001-02 챔스 준우승의 쾌거를 올리는 등 독일 클럽들도 결코 몰락한 것이 아니었다.

3.3 2005년 ~ 현재

90년대 말부터 시작된 암흑기 시기 동안 독일 축구협회는 독일 축구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필요성을 느끼고 유소년 축구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그 결과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유소년 축구 시스템을 갖췄다는 평을 받는다. 유소년 정책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후반부터다.

2004 유로에서 2무 1패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하자 독일 축구협회는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술면에서 비판을 받아왔던 푈러 감독을 경질하고 후임 감독으로 클린스만을 내정했다. 클린스만 감독은 당시 대표팀의 부진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을 등에 업고 적극적인 개혁을 추진했는데, 당시에는 다소 생뚱맞게 비춰졌던 부분도 있어서 언론이나 축구협회와 다소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러나 개혁의 필요성에는 다들 공감하는 분위기라 결국 일단 클린스만이 하는대로 내버려 둬 보자 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클린스만은 필립 람, 슈바인슈타이거, 포돌스키, 메르데자커 등 젊은 피를 대거 주전으로 발탁하여 적극적으로 세대교체에 나섰다.[48] 클린스만호가 본격적으로 선보인 것은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였다. 독일은 4강에서 호나우지뉴, 호비뉴, 아드리아누 등이 활약한 브라질에 3-2로 석패하면서 3위에 그쳤지만, 신예 멤버들과 기존 멤버들이 조화를 이루며 골고루 활약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3위에 오르면서 부활에 성공했다. 이로써 녹슨 전차는 옛말이 되었다.

2006년 월드컵에서 세대교체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던 독일이지만, 세대교체는 계속되어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했다. 특히 2009년 U-21 우승멤버들이 대거 투입되었는데, 토마스 뮐러, 외질, 케디라, 제롬 보아텡, 노이어가 그들이다.[49] 특히 외질토마스 뮐러는 월드컵에서 맹활약하면 남아공 월드컵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다. 사실 이들 젊은피들은 대표팀에서 검증된 자원이 아니었고 독일 국내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신예들이었다. 오히려 월드컵 개막 직전 대표팀의 정신적 지주 발락이 부상으로 제외되면서 대표팀 경기력에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되자 이들 영건들의 활약으로 독일은 놀라운 경기력을 보였고 이에 대표팀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로 여겨졌던 발락은 조용히 대표팀 은퇴 수순으로 접어들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본선 조별라운드 1차전에서 독일은 호주를 4-0으로 이기면서 우승후보의 위력을 보이나 했더니 세르비아전에서 클로제가 경고누적으로 퇴장당하고 경기가 급격히 기울면서 세르비아가 1-0으로 승리하는 이변이 연출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3차전에서 가나를 1-0으로 꺾고 조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에서는 잉글랜드4대1로 대파하며 뮌헨에서 당했던 5대1굴욕을 9년만에 철저하게 갚아주었다.[50] 8강전에서는 메시, 이과인, 테베즈, 디 마리아 등 호화진용을 구축한 마라도나 감독의 아르헨티나와 격돌했다. 박빙의 승부가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뚜껑을 열어보자 독일이 충격적일 정도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4:0의 압승을 거두면서 독일은 대회에서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4강 스페인전에서는 토마스 뮐러가 경고누적으로 출전하지 못했는데 4강전에서 뮐러의 공백은 컸다. 또 16강전과 8강전에서 독일이 보여준 가공할만한 역습 패턴에 대해 철저히 분석하고 나온 스페인이 강한 전방압박과 특유의 점유율 축구로 독일의 역습을 사전에 차단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0-1로 스페인이 결승에 진출했다. 독일은 3위로 대회를 마감했다.[51]

2014 브라질 월드컵 지역예선에선 오스트리아, 스웨덴, 카자흐스탄, 아일랜드, 페로 제도랑 같은 조를 이뤄서 쉽게 본선진출을 이룰 것으로 예측되었고, 안방에서 4:0으로 앞서다가 연달아 4골을 먹히며 비긴 스웨덴 경기를 빼고 전승하면서 결국 최종예선 결과 9승 1무로 압도적인 1위로 본선 진출 확정했다.[52]

2014 브라질 월드컵 4강전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무려 7:1이라는 믿을 수 없는 스코어로 승리했다.[53] 그리고 브라질은 미네이랑의 비극. 12년 만에 결승진출에 성공한 독일은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통일 이후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강력한 디버프도 깨뜨렸다 독일팀의 학살은 양민과 양반을 가리지 않습니다. 우승의 주역은 토마스 뮐러, 마누엘 노이어, 안드레 쉬를레, 필립 람, 마리오 괴체 등.

독일이 유로 1996 우승 이후 침체기를 겪다가 2006 독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암흑기에 벗어나 다시 강호로 거듭났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2014 브라질 월드컵 전까지 18년동안 독일에 국제대회에서의 우승실적이 없었기 때문에 절대강자 수준이라 보기 힘들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강까지 올라가는 횟수는 많지만 우승은 18년동안 없었다는 것. 이러한 점으로 인하여 독일은 유로 1996을 기점으로 우승으로 가는 길목의 수문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결국 2014년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축구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면서 이러한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2014년 10월 11일 유로 2016 예선 2차전 폴란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0대2 패배를 당하였다. 이 패배는 독일과 폴란드가 맞붙기 시작한 1933년 이래 독일의 첫 패배. 이전까지는 12승 6무라는 압도적인 상대전적이었으나 1패가 추가되었다.

2016년 3월 26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벌어진 독일과 잉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2:3으로 독일이 역전패했다. 독일은 전반 43분께 토니 크로스의 선제골과 후반 12분 사미 케디라의 패스를 마리오 고메스가 골로 연결시켜 2:0으로 앞서나갔다. 이에 잉글랜드는 후반 16분 해리 케인의 추격골을 시작으로 후반 29분 제이미 바디가 동점골을, 그리고 경기종료를 앞두고 추가된 시간에 에릭 다이어가 역전골로 잉글랜드에 승리를 안겼다. 친선전이라고는 해도 독일로서는 불쾌한 패배이기도 한데 공교롭게도 이게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8강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독일이 0:2로 뒤지던 상황에서 프란츠 베켄바워의 추격골, 우베 젤러의 동점골, 그리고 연장전에서 터진 게르트 뮐러의 역전골로 3:2로 이겼었는데 이번에는 상황이 바뀌어 독일이 2:0으로 이기고 있던 경기를 잉글랜드가 뒤집었다는 것이고 그리고 결승골이 연장전이 아닌 경기종료 직전의 추가시간 상황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요아힘 뢰프 감독으로서는 유로 2016을 앞두고 예방주사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을테지만 전차군단으로서는 다시 한번 방심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2016년 3월 29일에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평가전에서 무려 4:1이란 스코어로 승리했다. 21년 만에 아주리 징크스를 격파했다.[54] 그리고 마침내 7월 3일에 열린 유로 2016 8강전에서 천적 이탈리아를 승부차기 끝에 6 : 5로 제압하고 4강에 올랐다. 그간 토너먼트에서 이탈리아만 만나면 짐을 싸야 했던 독일로서는 비록 공식기록은 무승부이긴 하지만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넘어선 것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그러나 이 경기에서 사미 케디라와 마리오 고메즈의 부상,마츠 후멜스의 경고누적 등 전력의 누수가 생겼고 결국 4강에서 프랑스에게 2:0으로 무너졌다.사족으로 독일은 58년 월드컵 4강-66년 월드컵 결승 이후 월드컵-유로 대회에서 개최국에게 진 적이 없었는데 이번 대회에서 50년만에 홈팀에게 무너지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2016년 유로 준결승전에서 개최국 프랑스에 2대0으로 패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다. 경기 시작 직후 프랑스에게 한번 공격찬스를 내준 것을 제외하면 전반내내 거의 완전히 일방적인 흐름으로 프랑스를 몰아부쳤다. 8강에서 상황에 따라 쓰리백과 포백으로 변화하면서 재미를 봤던 독일은 아예 4강에서 포백과 쓰리백을 동시에 사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센태백 바로 위에 위치한 중앙미드필더 슈바인슈타이거가 상황에 따라 센터백 사이를 오가며 수시로 포백과 쓰리백으로 변화는 모습을 보였다. 보아텡은 이전과 달리 철저히 수비적인 역할에 치중했고, 슈바인슈타이거가 마치 과거 독일 대표팀의 포어 리베로[55]를 연상하는 모습을 보이며 쓰리백 상황에서 플리이메이커로서 빌드업을 담당했다. 전반전에는 프랑스의 공격이 대부분 중원으로 넘어오기도 전에 차단되었기 때문에 제대로 막을 기회조차 별로 없었던 독일의 수비전술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거의 반코트 게임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부쳤지만 프랑스의 9백 수비를 뚫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결정적인 몇번의 찬스에서 토마스 뮐러 등 공격진이 확실히 득점으로 연결시키는데 실패했다. 오른쪽에서 활발할 침투를 했던 키미히는 결정적인 순간 노련한 에브라에게 막히거나 크로스의 정확성에서 다소간의 아쉬움을 보였다. 이대로 전반이 종료되나 했더니(...) 전반 추가시간에 슈바인슈타이거의 핸드볼 파울로 패널티킥을 먹으면서 독일 선수들은 급격한 의욕저하를 보였고 결국 후반전에 추가골을 헌납하면서 2대0으로 패했다.

2016 유로에서 독일은 가장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으나 사소한 한가지 요소인 "행운"이 부족했다는 평을 받았다.

3.4 대한민국과의 전적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상대전적은 2승 1패로 독일의 우세. 1994년 미국 월드컵 C조 최종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준결승에서 만나 두 경기 모두 독일이 승리했으나, 2004년 12월 19일 부산에서 열린 친선경기에서는 독일이 1-3 패배를 당하며 대한민국이 첫 승을 기록했다[56]. 이 승리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했어야 됐는데 참고로 이는 독일 대표팀이 사상 최초로 아시아 국가에게 패배한 기록이다. 또한 남아공 월드컵 이후 호주와의 친선 경기에서도 1-2로 패배하면서 독일을 이긴 아시아 팀이 2개로 늘었다.[57]

참고로 한국이 독일을 이긴 경기는 단순한 친선경기가 아니었다. 독일 축구협회에서 추진한 독일 국가대표팀의 아시아 투어 행사의 일환이었으며 구체적으로는 일본, 한국, 태국 등 아시아 지역의 국가대표팀들과 경기를 가지면서, 곧 열릴 예정인 2006 독일 월드컵과 자국 국가대표팀의 홍보를 꾀했던 것.[58] 일본과의 경기는 시차 적응 문제도 있고 해서 후보 선수들을 대거 내보낸 2군으로 3-0의 대승을 거뒀고, 한국과의 경기에서 비로소 분데스리가 주전 멤버들로 구성된 사실상의 최정예 멤버들을 내보냈건만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에게 골을 내줘 1:3으로 패배. 그나마 미하엘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기록해서 독일이 영패는 면했으며, 한편으로는 발락의 페널티킥을 막아내 2년 전 패배의 아픔을 복수한 이운재의 선방과 올리버 칸을 일순간 허수아비로 만든 이동국의 발리슛 득점이 경기의 묘미.

사실 이 경기 전에도 독일 축구계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는 의외로 상당했다. 분데스리가에서 이름을 날렸던 차범근 하나만으로도 충분했으며,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C조 최종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 지금은 말할 것도 없지만 당시에도 독일은 한국이 절대 넘을 수 없는 최강의 팀중 하나였으며 실제로 이 날 독일이 전반에 3-0으로 앞서며 싱겁게 끝날 것으로 여겨졌다. 승패를 따지는게 아니라 독일이 몇 골을 더 넣을 것인가를 화제로 삼았을 정도.

하지만 후반 시작 후 10분만에 경기 양상이 뒤집혔다. 황선홍홍명보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순식간에 스코어가 3-2로 좁혀졌고 설상가상으로 습도가 높은 미국의 무더위에 당시 베테랑을 빙자한 노장으로 구성된 독일 선수들이 급격한 체력 저하를 보이기 시작한 것. 어느 정도였냐하면 그 막강한 공격력의 독일이 오히려 극단적인 수비에 급급하면서 대한민국이 독일쪽 진영을 전세내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경기는 결국 독일의 3-2 승리로 끝났지만 이 때 독일 축구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당시 2골을 넣은 위르겐 클린스만이 "만약 그 날 5분만 더 경기했다면 무승부 혹은 역전패를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훗날 언급할 정도로 한국은 독일 축구계에 깊은 인상을 심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이 날 한국이 좀 더 잘했거나[59] 독일이 조금만 더 집중력을 잃었더라면 지난 대회 챔피언 독일이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역전패, 그것도 3골차를 뒤집히는 희대의 굴욕을 당할 수도 있었던 것! 만약 이게 실제로 벌어졌다면 월드컵 최대 이변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는 더욱 더 빛났겠지

그 날의 경기장면이다. 당시 2-3으로 아쉽게 패하며 조별리그에서 탈락했지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국민들의 격려와 극찬을 받았다. 지금에 봐도 옛날 경기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독일과 잘 싸웠고 디펜딩 챔피언 독일과 맞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함으로써 한국 축구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4년 후

그래서 8년 후인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에서 만나게 되자 차라리 스페인이 낫다는 반응에다가 별로 그럴 것 같진 않지만 솔직히 대한민국에게 질 수도 있다는 독일 축구팬의 발언도 나왔을 정도. 실제로 경기 내용면에서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대회 골든볼 & 야신상 수상자인 올리버 칸의 벽이 높았던데다 대한민국의 주전 선수들은 계속된 풀타임 출전과 2연속 토너먼트 연장전으로 체력이 바닥나 후반 중반 발락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면서 대한민국의 패배로 끝났다.

올림픽 대표팀의 경우 2016년 8월 7일(리우 현지 기준) 리우 올림픽 축구 C조 예선에서 3:3 무승부를 기록한게 첫 대결.

4 특징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팀들에게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주거나 고전해도 승리하며,[60] 2002년 월드컵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8대0으로 대파하고, 2006년 월드컵에선 코스타리카를 4대2, 에콰도르를 3-0으로 격파했다. 2010년 월드컵에서는 호주를 4대0으로 이기기도 했다. 2014년 월드컵에서도 포르투갈을 4대0으로 학살했다.[61] 약팀으로 평가받는 팀들과의 경기에서 가끔 고전하는 강호들과 달리 독일은 기복없는 경기력과 득점력으로 자신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팀에게 절망을 안긴다.[62] 최근에는 AGAIN 2004를 기대했던 그리스가 한 골은 만회했지만 뒤이어 3골을 연달아 먹고 희망을 접었다.

반면 박빙으로 평가받는 팀에게는 의외로 고전하거나,[63] 전성기를 구가하는 팀에게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인다.[64] 게다가 1994년 이후 발칸지역 국가에게 의외로 약하다. 1994년 월드컵 8강에서 불가리아에게 1대 2로 역전패한 것을 비롯, 1998년 8강에서는 충격의 크로아티아전 0대3 대패를 당했고(유로 1996에서 2대1로 이겼지만) 유로 2008에서도 크로아티아에게 1대2 패배를 당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세르비아에게 0대1 패배를 당해 24년동안 이어지던 월드컵 조별예선 무패기록이 깨지기도 했다.

의외의 사실인데 유럽의 양대산맥인 독일과 이탈리아지만 정작 독일은 아주리 징크스로 유명하다. 유로 1988과 1996 조별예선에서 각각 1대 1, 0대 0으로 비긴 것을 제외하고는 국제대회의 중요한 고비 때마다 독일은 이탈리아를 이긴 적이 없다.(단 유로 1996에서 이탈리아는 반드시 독일을 잡아야 했지만 무승부를 거둬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 4강전에서 처절한 혈투 끝에 3대4로 패배했고 1982년 스페인 월드컵 결승전에서도 1대3으로 졌다. 이후 유로 1988과 1996에서 무승부를 거둔 두 팀은 2006년 독일월드컵 준결승(!)에서 만났고 독일은 홈 이점을 앞세워 이탈리아를 이길거라고 마음먹었지만 연장 후반에만 2골을 얻어맞고 악연에 치를 떨어야 했다. 유로 2012 4강전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일어나 독일은 복수를 외쳤지만 그동안 부진했던 발로텔리가 전반전에 선취한 2골로[65] 죽음의 조를 3승으로 통과하고 8강에서 그리스를 압살한 독일의 기세가 꺾였다. 메수트 외질의 페널티킥으로 한 골을 만회했지만 경기력은 이탈리아가 압도. 특히 유로 2012의 경우는 정말 믿기지 않을 정도의 거짓말 같은 패배였다. 왜냐하면 독일은 조별리그에서 강호 네덜란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로 유명한 포르투갈이나 무조건 다 쳐잡고 8강에서도 엄청 쉬운 그리스를 상대로 체력안배 할거 다 하고 나서 이탈리아와 맞붙은 반면 이탈리아는 조별리그부터 크로아티아에게조차 쩔쩔매며 스페인에게 크로아티아 좀 이겨달라고 애원했는데[66]스페인이 크로아티아를 제압해서야 간신히 8강에 올랐고 8강에 올라서도 잉글랜드와 승부차기까지 가서 체력 소진할거 다 소진하고 올라왔기 때문이다. 누가 생각해도 승리할 독일이 너무 어이없게 패배했던 것이다. 서독시절 5전 3무 2패 그리고 1990년 독일 통일 이후에 3전 2승 1무이다. 특히 토너먼트에서는 무조건 패했다. 여담으로 동독 대표팀도 아주리와 2번 만났는데 1무 1패를 기록했으니...과연 독일의 아주리 징크스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공식적 라이벌은 네덜란드이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라이벌이라고 해도 다른 국가들처럼 라이벌 관계가 애매하다.엄밀히 말하면 반드시 넘어야 할 숙적 정도.만약 독일이 이탈리아전 첫 승을 이루면 이탈리아 사람들 성질에 가만있을리가 없을텐데... 결국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8전 9기 끝에 유로 2016 8강전에서 숙적 이탈리아와 1: 1로 비긴 뒤 승부차기 끝에 6 : 5로 누르고 아주리 징크스을 어느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게 있는 상당히 희한한 특징이라면 푸에르토리코,[67] 폴란드,[68] 스위스,[69] 브라질,[70]라트비아,[71][72] 가나,[73] 터키[74] 등의 다른 국가 대표로도 뛸 수 있는 이주민 가정 선수들이나 귀화 선수들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대표팀을 선택하였고,[75] 조직력 하나 만큼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능가하는 팀이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탄탄한 조직력을 기반으로 여러 국제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 일례로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그 월드컵 기준으로 디펜딩 챔피언과 지난대회 준우승국임에도 불구하고 콩가루 조직력으로 극초반에 탈락했으며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역시 그 뛰어난 선수들을 갖고도 지역예선에서 콩가루 조직력을 보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지역예선에서 탈락할 뻔했다. 이런 점을 보면 단 한번도 조직력이 흐트러진 적이 없는 독일의 꾸준함이 빛난다고 볼 수 있다.

여담으로 2000년대 독일이 출전한 월드컵의 중요한 고비마다 이전 경기까지 좋은 활약을 펼쳤던 키플레이어가 없어 경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2002년 월드컵 결승전엔 8강 미국전, 4강 한국전(!)에서 결승골을 넣었던 미하엘 발락이 한국전에서 받은 경고누적으로 브라질과의 결승전에 출장하지 못했고,[76] 2006년 독일 월드컵 4강 이탈리아전엔 수비형 미드필더로써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던 토르스텐 프링스가 8강 아르헨티나전 에서 승부차기 직후 아르헨티나의 서브 스트라이커인 훌리오 크루스를 때려서 2경기 출장 정지를 당해 이탈리아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했다. 2010년 4강 스페인전에선 이전까지 4골 3도움을 기록하고 있던 독일의 괴물 신인 토마스 뮐러가 경고누적으로 인해 결장, 미드필더의 축을 상실함으로써 스페인의 점유율 축구에 휩쓸리는 원인이 되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정보지만, 2014 월드컵의 독일은 1930년 우루과이, 1934년 이탈리아, 1938년 이탈리아, 1950년 우루과이, 1958년 브라질, 1962년 브라질, 1966년 잉글랜드, 1970년 브라질여기는 무려 12승 0무 0패이지만, 1990년 서독, 1998년 프랑스에 이은 열한 번째 예선, 본선 무패 우승팀이다. 하지만, 개최국으로 우승컵을 들어올린 1930, 1966, 1998년과 전 대회 우승국이 연속 우승했던 1938, 1962 그리고 기권국이 너무 많아 자동 진출했던 1950 우승팀을 제외하면, 지역예선까지 무패로 통과하여 우승한 사례로는 다섯 번째(이탈리아 1회[77], 브라질 2회, 독일 2회)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는 월드컵에서 "우승하고 싶으면 16강 이후 본선 토너먼트에서 독일을 잡아라"라는 말이 있었다. 우승으로 가는 길목의 수문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실제로도 2002년 월드컵 이후 하나같이 독일을 쓰러뜨린 팀이 우승을 차지했다.[78] 2002년에는 브라질이 결승에서 독일을 쓰러뜨리고 우승했고, 2006년에는 이탈리아가 준결승에서 독일을 쓰러뜨리고 결승에 올라서 결승에서 프랑스를 쓰러뜨리고 우승했으며, 2010년에는 스페인이 준결승에서 독일을 쓰러뜨리고 결승에 올라서 결승에서 네덜란드를 쓰러뜨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2014년에는 아무도 독일을 이기지 못해서 독일이 우승했다.

이러한 말이 나온 것은 사실 독일이 세대교체에 성공하고 암흑기를 벗어나고 나서 2006년, 2010년 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지목되었고 실제로도 대회 기간 동안 강력한 화력을 보였던 독일이 4강에서 번번히 맥없이 나가 떨어지면서 널리 퍼진 말이기도 하다. 어느 정도는 명예로운 말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우승을 하지 못한 데 대한 오명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결국 2014년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축구 정상의 자리를 탈환하면서 이런 오명을 벗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독일은 잉글랜드나 스페인,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인기가 많은 팀이다. [[빠가 까를 만든다|하지만 독빠들이 독일은 무조건 최고라고 생각하고 너무 지나치게 우호적인 나머지 다른 팀을 좋아하는 팬들에게 민폐를 주기 때문에 안티들도 상당하다.]] 사실 독일이 축구팀으로 큰 인기를 얻은 것도 비교적 근래의 일이며, 예전에는 좋은 성적과 메이저대회에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재미없는 축구라는 오명을 쓰며 네임밸류에 비해서는 인기가 없었다. 독일 대표팀의 인기가 상승한 건 2006 독일 월드컵 4강을 시작으로 10년동안 월드컵 -유로에서 4강 이상씩 꼬박꼬박 가는 꾸준한 성적과 이 과정에서 수위급 강호를 상대로도 관광쇼를 보여주는 위엄(2010년 잉글랜드전 4:1, 아르헨티나전 4:0/2014 포르투갈전 4:0, 브라질전 7:1) 덕분이기도 하다. 이러다보니 국내 축구팬들 사이에선 '축구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독일 걱정이다' 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

5 역대전적

5.1 FIFA 월드컵

FIFA 월드컵 역대전적 서열 : 2위
★★★★②②②②③③③③④⑧⑧⑧⑧

년도결과순위승점경기득점실점
1930 우루과이 월드컵불참
1934 이탈리아 월드컵4강3위94301118
1938 프랑스 월드컵1라운드[79][80]10위1101135
1950 브라질 월드컵출전금지[81]
1954 스위스 월드컵우승[82]1위1565012514
1958 스웨덴 월드컵4강4위862221214
1962 칠레 월드컵8강7위7421142
1966 잉글랜드 월드컵준우승[83]2위136411156
1970 멕시코 월드컵4강3위1565011710
1974 서독 월드컵우승[84]1위187601134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8강6위76141105
1982 스페인 월드컵준우승[85]2위1173221210
1986 멕시코 월드컵준우승2위11732287
1990 이탈리아 월드컵우승[86]1위177520155
1994 미국 월드컵8강5위10531197
1998 프랑스 월드컵8강7위10531186
2002 한일 월드컵준우승[87]2위167511143
2006 독일 월드컵4강[88]3위167511146
2010 남아공 월드컵4강3위157502165
2014 브라질 월드컵우승[89]1위197610184
2018 러시아 월드컵미정????????
2022 카타르 월드컵미정????????
합계18회 진출(18/20[90])우승(4회)218106662020224121

브라질과 더불어 월드컵을 씹어먹는 쌍두마차.
월드컵 랭킹은 2위로서 66승 20무 20패 승점 218점을 기록 중이다.

1930년과 1950년 대회를 제외하면 모든 대회에 본선 진출을 하였으며, 그나마 1930년에는 유럽 국가 대부분 불참을 선언하면서 같이 불참했던 대회였고 1950년은 전범국가로 진출이 제한되어 있었고, 브라질과 함께 참가한 대회에서 지역예선 탈락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전 경기 토너먼트제였던 1938년 대회를 제외하면 본선에서 2라운드 탈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1930, 1938, 1950 이 세 대회를 제외하면 최하 8강이다. 브라질이나 이탈리아조차 조별리그/16강이나 2라운드 탈락 경험이 몇 번 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기록. 위의 월드컵 기록을 표기한 원문자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에 기인한다. 참고로 저건 16강 이상만 기록한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함으로써 월드컵 최초로 4연속 4강의 대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결승에 오름으로서 통산 최초 8회 결승 진출의 기록도 세웠다. 더불어 2002년부터 2014년 월드컵까지 월드컵 첫경기에서 항상 4골 이상을 터뜨리면서 산뜻하게 월드컵을 시작했다.[91]

다른 나라들과의 상대전적은 브라질 1승 1패(2002, 2014), 이탈리아 2무 3패(1962, 1970, 1978, 1982, 2006), 아르헨티나 4승 2무 1패(1958, 1966, 1986, 1990, 2006, 2010, 2014), 잉글랜드 2승 2무 1패(1966, 1970, 1982, 1990, 2010), 스페인 2승 1무 1패(1966, 1982, 1994, 2010), 프랑스 2승 1무 1패(1958, 1982, 1986, 2014), 네덜란드 2승 1무(1974, 1978, 1990), 우루과이 3승 1무(1966, 1970, 1986, 2010), 스웨덴 3승 1패(1934, 1958, 1974, 2006), 세르비아 4승 1무 2패(1954, 1958, 1962, 1974, 1990, 1998, 2006), 러시아 1승 (1966), 멕시코 2승 1무 (1978, 1986, 1998), 벨기에 2승(1934, 1994), 폴란드 2승 1무(1974, 1978, 2006), 헝가리 1승 1패(1954), 포르투갈 2승(2006, 2014), 체코 1승 1무 1패(1934, 1958, 1990), 칠레 3승(1962, 1974, 1982), 오스트리아 3승 1패(1934, 1954, 1978, 1982), 스위스 2승 1무 1패 (1938(2번), 1962, 1966), 파라과이 1승(2002), 미국 3승(1998, 2002, 2014), 덴마크 1패(1986), 한국 2승(1994, 2002), 콜롬비아 1무(1990), 크로아티아 1패(1998), 스코틀랜드 1승(1986), 카메룬 1승(2002), 코스타리카 1승(2006), 불가리아 1승 1패(1970, 1994), 터키 2승(1954(2번)), 페루 1승(1970), 가나 1승 1무(2010, 2014), 아일랜드 1무(2002), 북아일랜드 1무(1958), 에콰도르 1승(2006), 알제리 1승 1패(1982), 모로코 2승(1970, 1986), 호주 2승(1974, 2010), 사우디아라비아 1승(2002), 동독 1패(1974), 튀니지 1무(1978), 이란 1승(1998), 볼리비아 1승(1994), 아랍에미리트 1승(1990)을 기록하고 있다.

대륙별 상대전적은 유럽 33승 13무 17패, 남미 15승 4무 2패, 북중미 6승 1무, 아프리카 5승 2무 1패, 아시아 6승, 오세아니아 1승을 기록중이다.

독일을 상대로 승리한 적이 있는 팀은 이탈리아(3패), 세르비아(2패), 체코(1패), 스위스(1패), 헝가리(1패), 스웨덴(1패), 프랑스(1패), 잉글랜드(1패), 동독(1패), 오스트리아(1패), 알제리(1패), 덴마크(1패), 아르헨티나(1패), 불가리아(1패), 크로아티아(1패), 브라질(1패), 스페인(1패)으로 총 17팀이고, 이 중에 덴마크, 크로아티아, 동독은 독일에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대로 독일이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팀은 차례대로 아르헨티나, 세르비아(4번), 우루과이, 스웨덴, 칠레, 오스트리아, 미국(3번)이 있다. 가장 많은 승점을 획득한 팀은 최근 3연속 월드컵에서 맞붙기도 한 아르헨티나(7경기 14점)로, 2위인 세르비아(7경기 13점), 그리고 브라질:스웨덴과 더불어 월드컵에서 가장 많이 만난 팀으로 기록되어 있다.[92]

독일에게 상대전적이 앞서는 국가는 이탈리아, 덴마크, 크로아티아, 동독으로 총 네 팀 뿐이다. 이탈리아야 독일의 전통적인 천적으로 명성이 나있고, 특이하게도 동독을 상대로 1패를 기록하여 독일이 독일에 밀리는(...) 기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내적 갈등 브라질, 알제리에게도 상대전적이 밀렸지만 2014년 재대결에서 승리하면서 호각세를 보인다.

독일과 호각세를 보이는 국가는 브라질, 헝가리, 체코, 콜롬비아, 불가리아, 아일랜드, 북아일랜드, 알제리, 튀니지로 총 여덟 팀이다. 상기했듯 가장 최근 대회에서 브라질, 알제리와의 대결을 모두 이기면서 열세를 호각세로 끌어올렸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에게는 모두 상대전적이 앞선다.

한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2002년 조별리그 사우디아라비아전 8:0 승리고, 최다실점 기록은 1954년 조별리그 헝가리전 3:8 패배이다. 둘 다 8골로 같으며, 최다실점 기록을 세운 1954년엔 이렇게 대패를 당하고도 패배를 안긴 팀을 헝가리를 상대로 결승전에서 3:2로 역전하며 우승을 차지했다. 내리 두 골을 실점하고 역전승으로 우승한 것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기도 하다.

월드컵 강호답게 주요국들과의 전적에서도 앞서지만 유독 이탈리아한테는 힘을 못 쓰는 징크스가 있다. 보시다시피 이탈리아를 상대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의외로 브라질과는 월드컵 투톱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결승에서 붙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브라질/독일이 전적랭킹 3/4위인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와 4번 이상씩 만났던 걸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못 만난 격.

5.2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년도결과순위경기득점실점
1992 사우디 컨페더컵예선 탈락
1995 사우디 컨페더컵예선 탈락
1997 사우디 컨페더컵불참
1999 멕시코 컨페더컵조별리그5위310226
2001 한일 컨페더컵예선 탈락
2003 프랑스 컨페더컵불참
2005 독일 컨페더컵4강3위53111511
2009 남아공 컨페더컵예선 탈락
2013 브라질 컨페더컵예선 탈락
2017 러시아 컨페더컵본선진출???????
2021 카타르 컨페더컵????????
합계2회 진출(2/9)4강(1회-3위)84131717

5.3 UEFA 유럽 선수권 대회

UEFA 유럽 선수권 대회 순위 : 1위

년도결과순위경기득점실점
프랑스 1960불참
스페인 1964불참
이탈리아 1968예선 탈락
벨기에 1972우승1위220051
유고슬라비아 1976준우승2위211064
이탈리아 1980우승1위431063
프랑스 1984조별리그5위311122
서독 19884강3위421163
스웨덴 1992준우승2위521278
잉글랜드 1996우승1위6420103
벨기에/네덜란드 2000조별리그14위301215
포르투갈 2004조별리그12위302123
오스트리아/스위스 2008준우승2위6402107
폴란드/우크라이나 20124강3위5401106
프랑스 20164강4위632173
유로 2020????????
합계12회 진출(12/15)우승(3회)492612117248

꾸준함이 빛나는 월드컵보다는 조금 부족해 보이지만(?) 역대 전적 1위에 올라있다.

5.4 올림픽

6 동독 축구 국가대표팀

2차대전 이후 생겨난 동독의 축구팀으로서 1990년 10월 3일 서독과 재통일 하면서 사라졌다. 최고 성적은 1974년 서독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 2라운드(8강)에 진출한 것이다.

East_Germany_FA.png
동독 축구협회 엠블렘

그래도 누가 독일 아니랄까봐 국제대회에서 준수한 성적을 거둔 적이 있는데 1976년 올림픽 축구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바 있다. 프로선수 참가 금지 규정 아녔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동독은 유로 1992 지역예선에서 서독, 웨일스,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함께 5조에 편성되었다. 그러나 1990년 8월 23일에, 독일 통일을 10월 3일에 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9월 12일로 예정된 벨기에와의 예선 조별리그 첫 경기(원정)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그대로 진행하였고, 대신 친선경기로 처리하였다. 이 경기는 동독이 2-0으로 승리하였다. 동독의 예선 잔여경기는 모두 취소되었고, 대신 서독 팀이 독일팀으로 바뀌어 남은 예선을 진행하였다.

6.1 역대전적

6.1.1 FIFA 월드컵

역대 월드컵 전적 순위 : 50위

년도결과순위승점경기득점실점
1950 브라질 월드컵출전금지[93]
1954 스위스 월드컵불참
1958 스웨덴 월드컵예선탈락
1962 칠레 월드컵예선탈락
1966 잉글랜드 월드컵예선탈락
1970 멕시코 월드컵예선탈락
1974 서독 월드컵8강[94]68622255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예선탈락
1982 스페인 월드컵예선탈락
1986 멕시코 월드컵예선탈락
1990 이탈리아 월드컵예선탈락
합계8강 1회[95]1/10[96]8622256

월드컵을 밥먹듯이 나와서 기본 4강은 찍어줬던 서독과는 다르게 동독은 본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45년간 분단생활하면서 딱 한 번 본선에 나갔는데, 하필 유일한 본선진출이 서독에서 열린 월드컵이었다. 게다가 서독과 같은 조에 속했다. 같은 독일이지만 양독(兩獨)간의 미묘한 신경전은 당연히 있었고 실력을 떠나 어디가 이길까 궁금해하는 축구팬들이 많았는데, 그 막강한 서독을 동독이 1:0으로 잡는 이변을 일으키고 동독이 조 1위로 8강에 진출했다. 결승골을 넣은 선수는 위르겐 슈파르바서[97]. 서독 감독이 직접 사과를 해야할 정도로 서독 팬들에게는 충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독은 8강 2라운드에서 네덜란드, 브라질, 아르헨티나라는 괴물들을 만나 고전한 반면, 서독은 폴란드, 스웨덴, 유고슬라비아에 전승을 거두고 결승에서도 네덜란드를 잡고 우승을 차지.[98] 이 대회 이후 네 번 연속 미끄러지고 결국 서독에 흡수통일되면서 동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무대는 서독에서의 8강이란 호성적 하나만 남게 되었다.

다른 나라들과의 상대전적은 브라질 1패(1974), 서독 1승(1974), 아르헨티나 1무(1974), 네덜란드 1패(1974), 칠레 1무(1974), 호주 1승(1974)이었다.

대륙별 상대전적은 유럽 1승 1패, 남미 2무 1패, 오세아니아 1승이었다.

한 경기 최다득점 기록은 1974 조별리그 호주전 2:0 승, 최다실점 기록은 1974 2라운드 네덜란드전 0:2 패였다.

6.1.2 올림픽

6.1.3 유로컵

7 자를란트 축구 국가대표팀

2차대전 종전 직후인 1950년부터 1956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자르 보호령을 대표한 국가대표팀이다.[100] 자를란트 주민투표를 거쳐 1957년 1월 1일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사라졌다. .


자를란트 축구협회(SFV) 엠블렘

FIFA는 독일 3국(서독, 동독, 자를란트)의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출전을 금지시켰다.
1952년부터 1954년까지 헬무트 쇤이 자르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딱 한번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에 출전하였으나 예선 탈락하였다.

7.1 역대전적

7.1.1 FIFA 월드컵

연도결과순위승점경기득점실점
1950 브라질 월드컵비회원국
1954 스위스 월드컵예선탈락
합계본선진출 없음0/2[101]-------

8 역대 감독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감독
#이름활동기간경기 수[102]득점실점승률대회 결과
1대오토 네어츠1926 - 19367042131521610460%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불참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3위
2대제프 헤어베어거1936 - 196416794264643525056.28%193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우승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4위
1962 FIFA 월드컵 칠레8강
3대헬무트 쇤1964 - 197813987312129210762.59%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준우승
유로 1968예선 탈락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3위
유로 1972우승
1974 FIFA 월드컵 서독우승
유로 1976준우승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8강
4대유프 데어발1978 - 1984674412111446065.67%유로 1980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준우승
유로 1984조별리그 탈락
5대프란츠 베켄바우어1984 - 1990663420121076151.52%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준우승
유로 1988준결승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우승
6대베르티 포크츠1990 - 19981026624122068764.71%유로 1992준우승
1994 FIFA 월드컵 미국8강
유로 1996우승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8강
7대에리히 리베크1998 - 2000663420121076151.52%유로 2000조별리그 탈락
8대루디 푈러2000 - 2004532911131095754.72%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준우승
유로 2004조별리그 탈락
9대위르겐 클린스만2004 - 2006342086814358.82%2006 FIFA 월드컵 독일3위
10대요아힘 뢰프2006 - 현재13790242332613465.69%유로 2008준우승
2010 FIFA 월드컵 남아공3위
유로 2012준우승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우승
유로 2016준우승

승률이 50% 아래로 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103]

9 역대 메이저대회 베스트 11

9.1 유로 1996

UEFA EURO 1996 독일 대표팀
FW
슈테판 쿤츠
FW
위르겐 클린스만
MF
안드레아스 묄러
MF
메멧 숄
WB
크리스티안 치게
DMF
디터 아일츠
WB
마르쿠스 바벨
DF
슈테판 프로인트
SW
마티아스 잠머
DF
토마스 헬머
GK
안드레아스 쾨프케

對 체코 2:0 승 / 對 러시아 3:0 승 / 對 이탈리아 0:0 무 / 對 크로아티아 2:1 승 / 對 잉글랜드 1:1 무 (6:5 PK승) / 對 체코 2:1 승 (골든골)

94년월드컵때부터 팀이 노쇠화되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최후의 리베로 마티아스 잠머의 활약과 중고신인 올리버 비어호프의 맹활약으로 개최국이자 엄청난 공격력을 보여준 잉글랜드를 제치고, 체코까지 잡아내며 우승을 이뤄낸 스쿼드.

9.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 FIFA World Cup 독일 대표팀
FW
올리버 비어호프
FW
위르겐 클린스만
MF
미하엘 타르나트
MF
토마스 해슬러
WB
옌스 예레미스
DMF
디트마어 하만
WB
외르그 하인리히
DF
위르겐 콜러
SW
로타어 마테우스
DF
크리스티안 뵈른스
GK
안드레아스 쾨프케

對 미국 2:0 승 / 對 유고슬라비아 2:2 무 / 對 이란 2:0 승 / 對 멕시코 2:1 승 / 對 크로아티아 0:3 패
지난 유로대회 우승덕분에 결국 세대교체를 실패한 스쿼드. 노쇠화의 정점을 보여주는 것이, 클린스만이 아직도 주장이자 부동의 공격수이며, 90년대까지 독일축구의 상징이자 중심인 리베로자리 역시, 마티아스 잠머보다 6살이나 더 나이가 많은 로타어 마테우스가 복귀를 한것만 봐도 알수 있다. 결국 8강에서 탈락. 오히려 8강을 간게 노장들의 클래스 덕분.

9.3 유로 2000

UEFA EURO 2000 독일 대표팀
FW
파울로 링크
FW
카르스텐 얀커
MF
디트마어 하만
MF
메멧 숄
WB
크리스티안 치게
DMF
옌스 예레미스
WB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DF
옌스 노보트니
SW
로타어 마테우스
DF
토마스 링케
GK
올리버 칸

對 루마니아 1:1 무 / 對 잉글랜드 0:1 패 / 對 포르투갈 0:3 패
독일 축구의 암흑기. 지난 98 월드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감독 역시 독일 역사상 최단기간 감독을 맡게되는 에리히 리베크. 유로 대회 역사상 최강팀인 독일이 거둔 가장 안좋은 성적이다. 특히나 포르투갈에게 당한 0:3 패배는 치욕적이었다. 독일 최고의 재능인 제바스티안 다이슬러가 제대로 출장한 처음이자 마지막 대회.

9.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6 FIFA World Cup 독일 대표팀
FW
미로슬라프 클로제
FW
올리버 뇌빌
MF
미하엘 발락
MF
베른트 슈나이더
WB
크리스티안 치게
DMF
디트마어 하만
WB
토어스텐 프링스
DF
크리스토프 메첼더
DF
카르스텐 라멜로프
DF
토마스 링케
GK
올리버 칸

對 사우디아라비아 8:0 승 / 對 아일랜드 1:1 무 / 對 카메룬 2:0 승 / 對 파라과이 1:0 승 / 對 미국 1:0 승 / 對 대한민국 1:0 승 / 對 브라질 0:2 패

상대한 팀만봐도 결승전 브라질을 제외하고는 이름난 강호가 전혀 없는 꿀대진의 결과 준우승을 차지했다. 90년대 노장들이 모두 정리가 되었고, 다시 독일이 강호로 발돋움하는 세대로 가는 과도기적단계의 스쿼드다.

9.5 유로 2004 포르투갈

UEFA EURO 2004 독일 대표팀
FW
케빈 쿠라니
MF
토어스텐 프링스
MF
미하엘 발락
MF
디트마어 하만
MF
베른트 슈나이더
DMF
프랑크 바우만
DF
필립 람
DF
옌스 노보트니
DF
크리스티안 뵈른스
DF
아르네 프리드리히
GK
올리버 칸

對 네덜란드 1:1 무 / 對 라트비아 0:0 무 / 對 체코 1:2 패

9.6 2006 FIFA 월드컵 독일

2006 FIFA World Cup 독일 대표팀
FW
미로슬라프 클로제
FW
루카스 포돌스키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미하엘 발락
MF
토어스텐 프링스
MF
베른트 슈나이더
DF
필립 람
DF
크리스토프 메첼더
DF
페어 메르테자커
DF
아르네 프리드리히
GK
옌스 레만

對 코스타리카 4:2 승 / 對 폴란드 1:0 승 / 對 에콰도르 3:0 승 / 對 스웨덴 2:0 승 / 對 아르헨티나 1:1 무(4:2 PK승) / 對 이탈리아 0:2 패 / 對 포르투갈 3:1 승

9.7 유로 2008

UEFA EURO 2008 독일 대표팀
FW
미로슬라프 클로제
MF
루카스 포돌스키
MF
미하엘 발락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토어스텐 프링스
MF
토마스 히츨슈페르거
DF
필립 람
DF
크리스토프 메첼더
DF
페어 메르테자커
DF
클레멘스 프리츠
GK
옌스 레만

對 폴란드 2:0 승[105] / 對 크로아티아 1:2 패 / 對 오스트리아 1:0 승 / 對 포르투갈 3:2 승 / 對 터키 3:2 승 / 對 스페인 0:1 패

9.8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2010 FIFA World Cup 독일 대표팀
FW
미로슬라프 클로제
MF
루카스 포돌스키
MF
메수트 외질
MF
토마스 뮐러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사미 케디라
DF
제롬 보아텡
DF
아르네 프리드리히
DF
페어 메르테자커
DF
필립 람
GK
마누엘 노이어

對 오스트레일리아 4:0 승 / 對 세르비아 0:1 패 / 對 가나 1:0 승 / 對 잉글랜드 4:1 승 / 對 아르헨티나 4:0 승 / 對 스페인 0:1 패 / 對 우루과이 3:2 승

9.9 UEFA 유로 2012 폴란드/우크라이나

UEFA EURO 2012 독일 대표팀
FW
마리오 고메즈
MF
메수트 외질
MF
토니 크로스
MF
토마스 뮐러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사미 케디라
DF
필립 람
DF
마츠 후멜스
DF
페어 메르테자커
DF
제롬 보아텡
GK
마누엘 노이어

對 포르투갈 1:0 승 / 對 네덜란드 2:1 승 / 對 덴마크 2:1 승 / 對 그리스 4:2 승 / 對 이탈리아 1:2 패

9.10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FIFA World Cup 2014 독일 대표팀
MF
메수트 외질
FW
미로슬라프 클로제[106]
MF
토마스 뮐러
MF
토니 크로스
MF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MF
사미 케디라
DF
베네딕트 회베데스
DF
마츠 후멜스
DF
제롬 보아텡
DF
필립 람
GK
마누엘 노이어

對 포르투갈 4:0 승 / 對 가나 2:2 무 / 對 미국 1:0 승 / 對 알제리 2:1 승 / 對 프랑스 1:0 승 / 對 브라질 7:1 승 / 對 아르헨티나 1:0 승

9.11 유로 2016

UEFA EURO 2016 독일 대표팀
FW
마리오 고메즈[107]
MF
율리안 드락슬러
MF
메수트 외질
MF
토마스 뮐러
MF
토니 크로스
MF
사미 케디라[108]
DF
요나스 헥토르
DF
마츠 후멜스
DF
제롬 보아텡
DF
요슈아 킴미히
GK
마누엘 노이어

對 우크라이나 2:0 승 / 對 폴란드 0:0 무 / 對 북아일랜드 1:0 승 / 對 슬로바키아 3:0 승 / 對 이탈리아 1:1 무 (6:5 pk승) / 對 프랑스 0:2 패

10 선수단 목록

독일 국가대표팀 스쿼드[110]
등번호포지션이름생년월일출장득점소속팀
1GK마누엘 노이어 (주장)1986년 3월 27일720FC 바이에른 뮌헨
12GK베른트 레노1992년 3월 4일20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22GK마르크-안드레 테어 슈테겐1992년 4월 30일70FC 바르셀로나
2DF슈코드란 무스타피1992년 4월 17일131아스날 FC
3DF요나스 헥터1990년 5월 27일2211.FC 쾰른
4DF베네딕트 회베데스1988년 2월 29일412FC 샬케 04
5DF마츠 후멜스1988년 12월 16일514FC 바이에른 뮌헨
11DF제바스티안 루디1990년 2월 28일110TSG 1899 호펜하임
14DF조슈아 키미히1995년 2월 8일71FC 바이에른 뮌헨
17DF제롬 보아텡1988년 9월 3일651FC 바이에른 뮌헨
6MF사미 케디라1987년 4월 4일665유벤투스 FC
7MF율리안 드락슬러1993년 9월 20일252VfL 볼프스부르크
8MF토니 크로스1990년 1월 4일7211레알 마드리드 CF
10MF메주트 외질1988년 10월 15일8121아스날 FC
13MF토마스 뮐러1989년 9월 13일7934FC 바이에른 뮌헨
15MF율리안 바이글1995년 9월 8일30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6MF율리안 브란트1996년 5월 2일30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18MF막스 마이어1995년 9월 18일31FC 샬케 04
21MF일카이 귄도안1990년 10월 24일164맨체스터 시티 FC
19FW마리오 괴체1992년 6월 3일5817BV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FW케빈 폴란트1992년 7월 30일70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23FW마리오 고메즈1985년 7월 10일6829VfL 볼프스부르크
출처 : 위키피디아 독일판, 마지막 수정 일자 : 2016년 9월 30일

11 청소년 대표팀

1981년 FIFA U-20 월드컵 에서 우승했다.

2007년 FIFA U-17 월드컵에서는 4강전에서 탈락했다.

12 사건사고

12.1 서독시절, 정부 차원의 금지약물 지원 의혹

2013년 독일 홈볼트 대학 연구진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4 스위스 월드컵, 1966 잉글랜드 월드컵, 1976 몬트리올 올림픽 등 굵직한 대회에서 정부 차원의 금지약물 복용을 지원해줬다고 한다.[111] "서독서 70년대까지 국가가 도핑 주도"

독일축구협회는 이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상태.

12.2 히혼의 수치

위에서 언급된 것과 같은 내용이다. 히혼의 수치 항목 참조.
  1. Fußball-national-mannschaft가 합성된 단어이다. 더럽게 기네
  2. 독일 국가대표팀은 국립경기장이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국가대항전에 쓰일 홈 경기장은 국내 여러 경기장을 돌아가면서 사용한다. 국가대표팀은 1908년부터 현재까지 39개의 다른 도시에서 홈 경기를 치루었는데, 이들 중에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독일 영토이자 1938년부터 1942년까지 세 차례 홈경기를 주최한 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도 포함된다.
  3.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독 대표팀이 금메달을 차지한 적이 있다.
  4.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애칭 중 가장 흔한 애칭이다. 독일축구협회에서도 이 별명을 주로 사용한다.
  5. 안쪽은 형광녹색이며 유니폼을 뒤집어 착용할 수 있다. 이 페이지의 사진에서 토마스 뮐러와 안드레 쉬를레가 뒤집은 유니폼을 착용하였다. 안쪽에는 거리 축구(Bolzen. Kicken. Pöhlen)가 쓰여져 있다.
  6. 브라질 월드컵때에는 지역 클럽인 CR 플라멩구의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아 검정색 바탕에 빨강 가로 줄무늬, 어깨의 은색 삼선이 조합된 유니폼을 제조하였다. 그리고 충격과 공포를 전세계에 선사한다. 이 색깔로 고정된 것은 아니고 2년마다 새로운 어웨이 유니폼이 발표된다. 지금까지 검정색, 녹색, 빨간색, 회색 4가지 색깔의 원정 유니폼이 나왔다. 이중 서독 시절부터 2000년까지는 녹색/청록색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후 2002 월드컵때 회색이 유로 2004에서는 검은색이 처음으로 출시되었다. 빨간색은 위르겐 클린스만의 임기때 처음 등장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적색이 통계적으로 더 성공적이며, 상대에게 공포감을 더 키워준다"라고 주장한 데에서 나왔다. 유로 2016 에는 회색 어웨이 유니폼으로 결정되었다.
  7. 위의 로고는 유니폼에 달리는 로고일 뿐 독일축구협회의 로고가 아니다. 독일축구협회 로고는 화살촉 방향으로 겹쳐진 두 개(한 개는 변 하나가 끊긴)의 삼각형에 초록색 바탕을 한 문장이다.
  8. 네덜란드가 3회로 아성을 위협하고 있지만(1974, 1978, 2010) 네덜란드가 우승을 한 번도 못한 반면 독일은 1954, 1974, 1990년, 2014년 4회 우승으로 브라질에 이은 역대 월드컵 우승횟수 공동 2위에 올라 있다.
  9. 바이에른 뮌헨의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홈구장 지그날 이두나 파크, 샬케 04의 홈구장 펠틴스 아레나, 함부르크 SV의 홈구장 폴크스파르크슈타디온, 그리고 헤르타 베를린의 홈구장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
  10. 사실 이탈리아가 월드컵에서 거둔 4회의 우승 중 첫번째인 34년 자국 월드컵의 우승은 거의 강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1934 이탈리아 월드컵 문서 참조.
  11.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조별리그 2차전이 독일vs폴란드 전이었는데, 2005년 11월에 독일, 폴란드 양국 훌리건들끼리 전초전(...)을 치루고 경기 당일에는 독일 전역에서 패싸움을 벌였다. 여담으로 경기 결과는 인저리타임에 올리버 노이빌레가 만든 결승골로 독일이 1-0 신승.
  12. 독일은 현재까지 메이저급 국제대회에서 이탈리아에게 이겨본 적이 없다! 아주리 징크스항목에서 더 상세하게 언급되었지만 현재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의 전적이 5전 2무 3패에 유로컵에서의 전적이 3전 3무 1패로 도합 9전 5무 4패이다. 9번이나 겨뤘는데도 한 번도 승리해보지 못 한 점은 독일 입장에서는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물론 이탈리아도 강팀이지만 쇠락했던 때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럴 때조차도 독일은 이탈리아를 넘어서지 못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로 2012 4강전.
  13. 요즘 같이 항공교통이나 부대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여서 장거리 원정은 매우 힘든 일이었으며, 1차대전 직후 경제적 부담도 있어서 대부분 유럽의 강호들이 첫 월드컵 출전을 거부했다.
  14. 첫 대회 이래 모든 대회에 출전한 브라질(20회)에 이어 2위 기록이다.
  15. 게다가 이탈리아는 이번 대회까지 2대회 연속 조별리그 탈락으로 슬럼프에 빠졌다. 물론 6년 주기설에 따르면 다음 대회는 준우승이긴 한데...(6년마다 이탈리아가 호성적을 거두는 신기한 징크스이다.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항목 참조.)
  16. Die Mannschaft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은 뜻을 가진다. 현재는 가장 많이 쓰이는 뜻은 스포츠 팀을 지칭할 때이지만, 군대나 항공/선박 승무원, 부대원 등등을 지칭하는 뜻도 된다. 영어로 굳이 직역하면 Man + -ship(혹은 group) 정도 되는 의미.
  17. Rumpelfussball, 우리말로 직역하면 "덜컹축구"이다. 베켄바워가 유로 2000 참사를 목격하고 쏟은 비난이다. 베켄바워는 이 단어로 2001년 신조어상을 받았다.신조어로도 상을 받는 카이저의 위엄
  18. 푈러 감독의 독일이 유로 2004 광탈 이후 2006년 월드컵 종료까지 위르겐 클린스만이 감독직을 맡았지만, 실질적인 전술구상이나 선수 선발은 대부분 요아힘 뢰브가 했기에 대부분 이 시기부터 뢰브 체제로 해석한다.
  19. 70년대 독일 축구를 지칭하는 단어는 람바참바 (Rambazamba) 이다. 람바참바는 춤추며 흥겨울 때 쓰는 의성어이며, 공을 최대한 많이 잡고 경기를 지배하며 스피드를 이용해 상대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화려한 축구이다. # 독일의 유로 2012 어웨이 유니폼 안쪽에는 "1972 : 성공 스토리의 서막, 2012 : 새로운 장을 기록한다"라는 40년 전의 70년대 람바참바 축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멘트가 쓰여져 있다.
  20. Chaleira, "주전자" 축구, 드리블과 개인기를 사용하는 브라질 축구, 한국에서는 흔히 "삼바 축구"로 잘못 알려져 있다.
  21. 물론 이전에도 비독일 계통 선수들이 뽑힌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82년, 86년 월드컵에 참가했던 펠릭스 마가트는 푸에르토리코계이고, 2002 월드컵에서 야신상을 탄 올리버 칸은 라트비아계였다.
  22. 실제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세르히오 아구에로와의 충돌로 출혈을 일으켰고, 그리고 곤살로 이과인에게 절호의 찬스를 3번이나 허용하면서 하마터면 패할 뻔하기까지 했다.
  23. 조별리그에서도 서독과 헝가리가 만났는데, 8대 3으로 발렸다.더군다나 이 당시의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현재도 축구 역사상 최고의 팀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무시무시한 강팀이었다.
  24. 다만 약빨이 있었다는 의혹이 있다.
  25. 당시까지는 통합 분데스리가가 아닌, 각 지방의 레기오날리가(Regionalliga) 우승팀끼리 또 토너먼트를 벌여 우승자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26. 골로 인정되려면 골라인을 완전히 통과해야 한다. 영국 옥스포드대 공과대학과 임페이얼 칼리지의 연구 등에서도 이것이 노골임이 인정되었다.
  27. 허스트가 막판 추가 득점을 상황도 관중이 난입하는 상황이어서 논란을 야기했다.
  28. 네처는 1972 유로에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이듬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29. 귄터 네처는 1974년 월드컵 동독전에서 교체로 출전한 것이 전부였다. 1972년 유로에서 갑작스런 성공 이후 네처가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해서 폼이 떨어졌는데 이는 네처 스스로도 인정했다. 또 스타일 상 대표팀에서 네처와 베켄바워의 역할이 겹쳤고, 이때문에 베켄바워가 대표팀에서 네처를 견제했다는 썰도 있다. 네처가 레알 마드리드 선수였기 때문에 당시 서독의 쇄국정책 때문에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어디까지 네처의 폼 저하가 주 원인이었다. 쇤 감독은 월드컵 전 평가전에서 계속 네처를 기용하며 어떻게든 그를 활용해보려고 노력했다.
  30. 사실 게르트 뮐러가 한 골을 더 넣었으나, 오심으로 오프사이드가 선언되면서 골로 인정되지 않았다.
  31. 줄리메컵이 브라질에게 영구 수여된 이후 최초로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올린 팀이기도 하다.
  32. 서독 대표팀에서 통산 45경기 32골이라는 ㅎㄷㄷ한 기록을 남겼다.
  33. 차라리 1998년 월드컵 크로아티아전에 0:3으로 패한 것이 훨씬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이 될 정도
  34. 이 당시에는 이기면 승점 2점이었다.
  35. 훗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16강에서 독일과 알제리가 만났을 때는 독일이 알제리를 이겼다.
  36. 결승에서 파올로 로시를 전담 마크했다.
  37. 지금 한국 국대 감독을 맡고 있는 그 분이 키커로 나서서 실축했다. 실축하고는 그대로 푹 쓰러져 땅을 손바닥으로 치는 모습이 몹시 애잔하다...
  38. 완전 반대상황이 2006년에 펼쳐지긴 했다.
  39.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 영화 굿바이 레닌에서 이 시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있다.
  40. 그 유명한 에펜베르크법규가 시전된 대회였다. 그것도 무려 대한민국 국대 앞에서(...) 이후 독일은 에펜베르크 없이 토너먼트전을 치렀다.
  41. 8강에서 이 대회 시작전까지 무승이었던 불가리아를 만나 후반전에 마테우스의 페널티킥으로 앞서나갔으나, 스토이치코프에게 프리킥으로 얻어맞고, 레치코프의 대머리에게 역전골을 내주어 1-2로 역전패를 당해 탈락하였다.
  42. 대표팀에서 가장 어렸으나 대회 당시 만25세였다(...)
  43. 대표팀 통산 출전 6회
  44. 잉글랜드는 조3위로 동반 예선탈락했다.
  45. 70년전에 오스트리아에 0:6으로 진 적이 있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는 월드컵 4위를 기록하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던 강팀이었다.
  46. 이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선에서 독일은 준우승을 차지했고, 잉글랜드는 8강에서 브라질에게 발목이 잡혀 탈락했다.
  47. 그런데 사람들은 당시 독일의 성과를 대부분 발락과 칸의 투맨쇼로 그나마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둘이 워낙 압도적인 퍼포먼스였으니...당연하다. 베켄바워는 "칸만 빼고 독일 선수 전원을 자루에 넣어 막대기로 때릴때 맞는 사람은 맞아 싼 것이다."라는 수위높은 비난 발언도 했었다.) 2002 월드컵에서 독일은 주전들의 줄줄이 부상을 메첼더, 프링스 등 젊은 선수들의 기대 이상의 활약과 디트마르 하만의 중원조율, 미하엘 발락, 마르코 보데의 위기상황에서의 한방, 거기에 올리버 뇌빌의 기동성과 베른트 슈나이더의 창의성,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고공폭격이 더해져 의외로 밸런스 자체는 잘 잡힌 팀이었다. 워낙 구식전술을 들고나온 푈러 감독 체제하의 답답한 공격전개로 자국 팬들조차 야유했지만 4강전부터는 포백으로 과감하게 전환하는 등 2002 월드컵은 그래도 그 최악의 부상악령의 상황에서 그나마 최선의 성과를 내준 것이다.
  48. 다만 이들은 전임 푈러 감독 시절 대표팀에서 처음 승선했다. 하지만 주전으로 도약한 것은 클린스만 감독 시절이다.
  49. 후멜스회베데스도 2009 U-21 대표팀 출신이다. 이들은 2010 남아공 월드컵 스쿼드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50. 다만 2-1로 앞선 상황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골 라인을 넘은 슈팅이 골로 인정되지 않은 오심이 있었다.그래도 독일인들은 이것도 66년 결승전 오심의 리벤지라 생각하고 통쾌해했다.
  51. 토마스 뮐러남아공 월드컵 신인왕과 골든슈를 차지했다.
  52. 한편 2위인 스웨덴은 플레이오프에서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에게 털리며 탈락했다.
  53. 독일이 득점을 너무 많이 하자, 차범근은 독일이 골을 그만 넣었으면 좋겠다고 몇 번이나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외질이 8번째 득점 기회를 날려버린 건가?
  54. 이제 국제대회에서 이탈리아를 이긴다면 아주리 징크스를 완전히 격파하게 된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의 승리는 통일 독일로서 가진 대 이탈리아전 승리라는 점에서 뜻깊은 경기였다. 다만 정식 메이저 국가 대항전{FIFA 월드컵유로컵}에서의 성적은 여전히 독일의 무승이므로 이들 무대 중 하나에서 독일이 이탈리아를 이긴다면 아주리 징크스를 정복하기 되는 셈이다.
  55. 전성기의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등이 포어 리베로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들에 비해서는 보다 전형적인 리베로였던 베켄바워도 중요한 경기를 제외하면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포어 리베로와 같은 움직임을 보일 때도 많았다.
  56. 이 경기에서 한국은 차두리의 독일 선수들 3명을 떨궈버린 저돌적인 돌파력, 후반에서 터진 이동국의 그림같은 터닝슛, 그리고 미하엘 발락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이운재의 복수혈전(2002년 한일 월드컵 준결승에서 한국은 발락의 득점으로 0:1 패를 당해 결승진출이 무산되었다.) 선방의 삼신기를 시전했다.
  57. 물론 호주는 서류상 소속이 AFC일 뿐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실질적으로 아시아라고 보긴 힘들다. 백인이 다수이기 때문에 아시아라기보다는 유럽의 2~3류급 정도.
  58. 이 당시 있었던 에피소드로 유명한 해운대 굴욕(?) 사건이 있다. 일본과의 경기 후 대한민국에 도착한 독일 선수들은 부산 해운대에서 산책을 하며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타 선수들이 길을 걷고 있는데도 시민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꽃게탕집 수족관 사진도 이때 생산된 것이다.
  59. 이 당시 한국의 골결정력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조별리그 3승도 가능했다. 앞서 스페인과 볼리비아와의 경기에서도 결정적인 찬스를 여러 번 잡았고, 독일과의 경기 역시 전반 초반에 조진호가 측면에서 슛을 때릴 때 좀 더 정확했다면 아예 선제골을 기록할 수도 있었기 때문.
  60. 단 1982년 첫 출전한 알제리에게 2대1로 진 건 예외이다. 1994년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치른 미국월드컵에서도 볼리비아와 한국에게 고전했다.
  61. 포르투갈도 독일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일 뿐이다. 포르투갈은 유로 2000 이후로 독일을 상대로 매번 패했기 때문이다. 유로 8강에서 3-2로, 유로 2012에서 1-0으로 1점차 승리를 거두었지만 내용면에서 독일이 일방적으로 패고, 포르투갈이 이에 대응해 움츠려 역습하는 구도를 이루었기 때문에 독일이 일방적으로 우세했다.
  62. 잉글랜드의 경우는 데이비드 베컴의 은퇴 이후 프랑스 못지않은 하향세를 보이는 팀이고, 2010년의 아르헨티나는 가장 아르헨티나답지 못한 팀으로 디에고 마라도나가 아예 작정하고 팀을 망쳤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63. 2008년 4강에서 터키를 이기고 올라왔지만 3대 2 펠레스코어 승리를 거두었다. 2010년 월드컵 수아레즈의 신의 손으로 4강에 올라 네덜란드와 인상적인 경기를 펼친 우루과이와의 3-4위전에서도 난타전 끝에 3대 2 한골차 승리를 거두었다. 유로 2012 조별예선에서 3승을 거두고 조 1위로 올라왔지만 모두 한골차 승. 물론 네덜란드전은 전반에 2골을 미리 선취했지만. 또한 2014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만난 아르헨티나를 상대로는 연장 후반의 기나긴 혈투 끝에 승부차기 일보직전까지 가서야 마리오 괴체의 인생골로 겨우 1-0으로 이겼는데 하마터면 패할 뻔했다. 특히 안드레 쉬를레가 상대 선수인 곤살로 이과인에게 어시스트를 해주는 황당한 짓거리는 두고두고 회자될 일이며 이것을 이과인이 골인시켰으면 쉬를레는 독일 국대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64. 스페인이 세계 최강팀으로 거듭난 유로 2008의 우승 제물이 바로 독일이었다! 스페인의 1대0 승리, 그리고 2010년 남아공월드컵 4강에서 복수를 다짐했지만 푸욜의 헤딩골로 인해 다시 0대1로 패배.
  65. 그것도 마리오 발로텔리한 명이 기록했던 것.
  66. 더구나 이 당시 이탈리아는 스페인이 크로아티아를 이기고 자신들은 다득점으로 아일랜드를 이겨야 조별리그 통과가 가능했던 형편이었다. 골득실에서 크로아티아에게 뒤져있던 상황이라 크로아티아가 1골만 넣는다고 해도 이탈리아의 탈락이 기정사실화 되기 때문이었다(당시 크로아티아는 아일랜드를 3:1로 털어버려서 다득점에서 앞서가는 중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탈리아가 아일랜드를 2대0으로 이기고 헤수스 나바스가 후반 43분에 터뜨린 결승골로 스페인이 크로아티아에 1대0 신승을 거둔 후에야 간신히 8강행을 확정지은 것.
  67. 펠릭스 마가트
  68.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스 포돌스키, 피오트르 트로호프스키
  69. 올리버 노이빌레
  70. 케빈 쿠라니, 카카우
  71. 올리버 칸
  72. 조모가 라트비아 출신
  73. 게랄드 아사모아, 제롬 보아텡.
  74. 메멧 숄, 메수트 외질, 일카이 귄도안, 엠레 찬.
  75. 누군가가 메수트 외질이나 제롬 보아텡을 독일로 귀화한 선수로 잘못 설명하였는데, 이들은 각각 서독의 겔젠키르헨, 서베를린에서 태어난 이주민 2세이다.
  76. 전반전까지 독일과 브라질은 0대 0으로 경기 내용 역시 약간 브라질이 우세했어도 칸의 적절한 선방으로 대체적으로 팽팽했다. 올리버 뇌빌의 강력한 직접프리킥을 마르코스 골키퍼가 간신히 쳐내면서 브라질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어쩔수없지만 호나우두, 히바우두와 더불어 월드컵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발휘하고 있던 발락의 결장이 정말 아쉬웠던 경기.
  77. 1934년 이탈리아는 개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지역예선을 치뤘기에 여기에 포함된다.
  78. 1998년에는 크로아티아가 8강에서 독일을 쓰러뜨리고 준결승에 진출했으나 준결승에서는 하필이면 에메 자케가 이끄는 프랑스에게 걸려 패하는 바람에 3/4위전으로 밀려났지만 3/4위전에서는 네덜란드를 쓰러뜨리고 3위를 차지한 바 있다.
  79. 당시는 전 경기 토너먼트였다. 지금으로 치면 조별리그 탈락
  80. 첫 경기에서 스위스와 무재배하고 재경기 끝에 탈락. FIFA 공식 기록은 재경기까지 포함.
  81.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에 대한 징벌로 출전자격을 박탈당했다.
  82. 헝가리에 조별예선에서 3:8로 대패하고 결승전에서 3:2로 복수에 성공했다. 참고로 결승전 당시 서독 선수 전원이 암페타민 흡입한 상태였고, 헝가리는 남미의 강호 두 팀(브라질, 우루과이)와 혈전 + 패싸움 끝에 부상 선수가 다수 나온 반면, 서독은 선수 유출 없이 상대적으로 쉬운 팀(유고슬라비아, 오스트리아)을 누르고 올라왔다. 헝가리를 이긴 것이 이변이었으며, 지금도 베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83. 잉글랜드와의 결승전 연장전 세번째 골이 라인을 넘어가지 않았음에도 인정. 아직까지도 가장 논란이 많은 결승전
  84. 서독과 동독이 같은 조에 속했는데 동독이 서독을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연출했다. 그러나 서독은 토탈풋볼의 네덜란드를 누르고 우승을 가져갔다.
  85. 조별예선 첫 경기에서 알제리에 1:2로 패하는 이변을 연출. 마지막 경기에서 오스트리아와의 승부조작으로 유명했던 대회. 충격을 받은 독일 팬이 자살하고 프랑스에서 '노벨 평화상'감이란 비아냥을 날렸던 최악의 팀이었지만 결국 프랑스는 4강에서 졌고 결승에 갔다.
  86. 서독으로서 우승한, 그리고 서독으로 출전한 마지막 월드컵이었다.
  87. 지역예선에서 잉글랜드에 1:5 대패하는 등 최악의 졸전을 보이며 올라왔지만, 사우디를 무려 8:0으로 대학살한 것을 시작으로 결국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사우디전에서 클로제가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물론 역대 준우승국들 중 가장 쉬운 대진으로, 결승에 오르기까지 우승후보급 강팀을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88. 16년 전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우승이 독일, 3위가 개최국이었는데 2006 독일 대회에서는 우승이 이탈리아, 3위가 개최국이라는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다.
  89. 4강전에서 홈팀 브라질을 상대로 7:1 대승을 거두고, 클로제의 월드컵 최다골을 비롯해 최다 결승진출, 팀 최다득점까지 다양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통일 이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90.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
  91. 2002년 vs 사우디 8:0 2006년 vs 코스타리카 4:2 2010년 vs 호주 4:0 2014년 vs 포르투갈 4:0
  92. 또한 독일:아르헨티나는 월드컵 결승전 최다 매치업이기도 하다. 1986, 1990, 2014년에 맞붙어 아르헨티나가 한 번, 독일이 두 번의 우승을 가져갔다.
  93.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범죄에 대한 징벌로 출전자격을 박탈당했다.
  94. 조별예선에서 분단국 서독을 1:0으로 잡는 대이변을 연출하고 조 1위로 8강 진출, 8강 리그에서 조 3위로 탈락
  95. 2라운드
  96.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
  97.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14년 뒤인 1988년에 탈동(脫東)하여 서독으로 왔다(...).
  98. 이 때문에 서독이 일부러 동독에게 져주기 게임을 했다는 의혹이 있다.
  99. 이때는 통계 처리가 좀 복잡하다. 동독축구협회와 서독축구협회는 당시 따로 있었지만 올림픽 위원회는 독일올림픽위원회 하나였다. 그래서 독일은 지금의 영국처럼 월드컵은 따로 나가지만 올림픽은 단일 팀을 구성해야 했다. 이때 양쪽의 합의로 동서독 아마추어 대표(프로가 없는 동독은 사실상 국가대표)가 대결을 하여 이기는 팀이 독일 올림픽 대표로 지역예선에 나가기로 한 것. 맞대결에서 동독이 승리했고(1승 1패였는데 골득실에서 동독이 앞섰다.), 유럽 지역예선을 통과하여 본선 진출 후 3위를 했다. 그러므로 공식적으로 도쿄 올림픽 축구 3위 팀은 '동독'이 아니라 '독일'이다. 1956 멜버른 올림픽 때는 서독이 동독을 이기고 지역예선 통과 후 본선에 갔지만 메달을 따지 못했다. 도쿄 올림픽 공식 보고서에는 모든 경기 결과가 다 나와 있는데, 축구 지역예선 동서독 대결 결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100. 1956년까지 프랑스는 자를란트(Saarland)가 독일에 재편입되는 것을 반대했기에 자신들이 분리시켜 관리하였다.
  101. 월드컵 본선 출전 비율
  102. 승부차기 포함
  103.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감독이 1998년 차범근 감독 부임이후 슈틸리케 감독이되기까지 12명의 감독이 거쳐갔지만, 독일은 1926년 오토 네어츠 감독 부임이래 10명의 감독뿐이다.
  104. 고령으로 인해 매 경기 선발출장한게 아니라서 2,3경기는 올리버 칸이 주장으로 출전
  105. 두 골 모두 루카스 포돌스키가 넣었다. 폴란드 태생인 포돌스키는 두 번 모두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세레머니를 하지 않았다.
  106. 조별리그 1,2차전은 마리오 괴체가 선발
  107. 조별리그 1,2차전은 마리오 괴체가 선발
  108. 중도 부상으로 8강부터는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출전
  109. 부상으로 인해 폼이 완벽하지 않아 사미 케디라가 조별리그를 선발로 출전하고 마누엘 노이어가 대신 주장완장을 찼다. 슈바인슈타이거는 교체로 출장하다가 8강 이탈리아전부터 복귀했다.
  110. 2018 러시아월드컵 예선전 체코,북아일랜드전 소집명단
  111. 1954년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등의 약물 복용이 합법이기도 했고, 약물 복용에 대한 개념 자체가 정립이 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지만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있는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