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칭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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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대국장면.

기성(棋聖)
현대바둑의 아버지

1 개요

呉清源(1914년 5월 19일 ~ 2014년 11월 30일). 바둑 기사. 본명은 오천(呉泉)이며 우리가 아는 이름인 吳淸源(일본식 발음은 고 세이겐)은 일본 유학 전 중국에 있을 때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다. 중국 시절 ‘소년 오천(吳泉)’의 스승은 고수여(顧水如), 고수여는 북경 어느 기원에서 우연히 소년 오천의 바둑을 구경하게 되고, 소년의 재주에 반해 한판 시험기를 둔 후 제자로 삼았으며, 이후 자기집으로 출퇴근시키며 소년을 가르쳤다. 하루는 오천의 어머니가 소년과 같이 와서는 소년의 이름을 지어 주십사 요청했다. 그날은 마침 고선생의 형인 淵如(연여)가 함께 있었는데, 연여가 “샘물은 맑지(泉水是的)."라고 말했다. 이어 고선생이 말하기를, “샘물은 아득한 곳에서 솟아 멀리까지 흐르지(泉水是遠流長的).”라고 말했다. 이리하여 오천은 吳淸源(오청원)이라는 또 하나의 이름이 생겼고 이후 이 이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1]

바둑 역사 최강의 기사를 논할 때, 일반적으로 이창호와 더불어 꼽힌다.

2 생애

중국 푸젠성 출신으로 세고에 겐사쿠(瀬越憲作) 九단 문하. 그래서 역시 세고에 九단의 문하인 조훈현 九단의 사형(師兄)이 된다. 또한 린하이펑 九단은 우칭위안의 문하이니 조훈현은 나이가 10살 가까이 많은 린하이펑의 사숙(師叔)뻘... 개족보? 세고에 九단의 문하생은 딱 세 명 있는데, 하시모토 우타로 九단, 우칭위안 九단, 조훈현 九단이다.

위에서도 들먹인 바, 소년 오천은 9살 꼬마 시절에 고수여 선생과의 시험기에서 5점으로 두어 패하고서 고수여 선생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 불과 이삼 년만에 바둑계 강자 대열에 끼게 되었다 한다. 오청원이 13살 때, 일본에서 프로기사 五단 井上모모와 六단 이와모토(巖本薰)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전자에게는 여러 판 이겼고(치수는 안 알려짐) 후자에게는 선둘로 이기고 지고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갓 四단의 하시모토(橋本宇太郞)가 또 중국에 왔는데 호선으로 두어 역시 이기고 지고 했다고 한다. 우리나이로 14살짜리 '애'가 프로 四단과 맞먹는다니, '바둑기술의 조기교육'이 대세가 된 요즘 기준으로 쳐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2] 더구나 당시의 일본바둑계 시각에서 보자면 중국은 바둑불모지나 다름없는데, 그 불모지에서 이런 '천연보물'이 불쑥 튀어나왔으니 일본바둑계가 얼마나 법석을 떨었을지는 짐작키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오청원은 14살에 일본으로 바둑공부를 떠나게 된다. 자상하고 좋은 기사

현재는 일본기원 명예 객원기사. 전성기에는 일본 바둑계의 제1인자로 군림해 '쇼와의 기성(棋聖)'이라고 불렸다.

1933년 기타니 미노루와 함께 '신포석(新布石)'을 창시하면서 일본 바둑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소위 '신포석의 혁명'을 계기로 일본 바둑은 그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진다.

현대적인 프로기전 제도가 정착되기 이전, 일본 정상급 기사들과의 10번기[3]에서 여러 차례 4판 차이로 이기며 치수를 선상선으로 고쳤다. 선상선은 호선과 정선의 중간 치수로 하수가 3국 가운데 1·3국에서 흑을 쥐며 이는 一단 차이에 해당한다고. 10번기를 통해 일본의 정상급 기사들을 물리치고 바둑계를 평정, 일본 바둑계의 1인자로 모두에게 인정받기에 이른다.

1939~41년 대 기타니 미노루 6국까지 5승 1패
1946~48년 대 하시모토 우타로 8국까지 6승 2패
1948~49년 대 이와모토 카오루 6국까지 5승 1패
1949~50년 고단자들과의 10번기에서 8승 1무 1패로 九단에 추천된다.
1951~52년 대 후지사와 쿠라노스케 9국까지 6승 1무 2패
1952~53년 대 후지사와 쿠라노스케 6국까지 5승 1패. 후지사와 쿠라노스케 일본기원 탈퇴. 캐삭빵 후지사와는 이미 지난 번 10번기에서 선상선으로 치수를 고쳤기에, 이 패배로 치수가 정선까지 내려가게 된다. 그야말로 치욕이었을 듯.
1953~54년 대 사카타 에이오 8국까지 6승 2패
1955~56년 대 다카가와 가쿠 8국까지 6승 2패

자타공인 일본 1인자였음에도 현대적인 프로기전에서는 우승과 인연이 없었다. 1기 (구)명인전 리그에 참여하던 도중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이 사고를 정점으로 하향세를 보이기 시작하여[4] 몇 년 사이에 큰 대회 본선에서 완전히 밀려나버렸고, 이후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사실 이보다 훨씬 전인 본인방전에서도 우승 기록이 없었던 것을 보면 타이틀과는 인연이 어지간히 없긴 했던 모양.

이는 당시 일본 바둑계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신포석등을 시험하던 우칭위안은 당연하고, 그 스승 세고에또한 급진파로서 당시 일본기원과는 불편한 관계였던 것. 그 여파로 세고에는 자신의 제자를 본인도 모르게 일본기원에서 탈퇴시킨다.[5][6] 당시 불편한 관계로 인해 요미우리 신문사소속의 우칭위안은 본인방전을 비롯한 일본기원 기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라고.[7]

다만 당시 우칭위안의 지위가 너무 우월하여 본인방에 오른 기사들 스스로가 본인방전 우승했으면 우칭위안에게 도전해야한다라고 생각했다고. 말로만 듣던 결승시드자. 코랜드 파일날? 슈퍼 한국시리즈?

1984년 현역에서 은퇴, 한때는 요미우리신문의 촉탁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문하생은 린하이펑, 루이나이웨이.

2007년 그의 인생역정을 그린 영화 <기성 오청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2014년 11월 30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3 신포석

1933년 우칭위안은 기타니 미노루와의 10번기를 치르게 되었다. 여름에 시작된 10번기는 5국을 두던 도중[8] 30수가 진행된 상태에서 잠시 중지되었는데, 이 때 포석 관련 이론서를 쓰고 있던 기타니가 우칭위안을 나가노현 지고쿠다니 온천(地獄谷温泉)[9]에 초청하여 둘은 함께 포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게 된다. 당시 기타니는 중앙과 세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포석을 구상중이었고, 우칭위안 역시 기존의 소목(小目)으로 시작되는 포석을 벗어나 화점이나 3의 3을 두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의 공동 연구는 5국의 진행이 중지된 한 달여동안 계속되었다.

시간이 약간 지난 후 우칭위안이 기타니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일본기원 편집부장인 야스나가 하지메가 우연히 동석하게 되었고, 그가 두 기사의 연구에 감히 딴지를 건 것이 계기가 되어 세 명은 밤새도록 논의를 진행, 이를 책의 형태로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그해 가을 오테아이(大手合, 승단 대회)에서 이를 실전에 옮겨 우칭위안이 1등, 기타니가 2등을 차지했고, 그들의 연구성과는 『신포석법』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10], 매진사태를 기록하는 등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신포석은 그때까지의 바둑 패러다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현대 바둑의 성립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 우칭위안은 혼인보 슈사이[11]와의 대국에서 첫 수를 천원에 두는 포석을 시도하여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첫 수 천원 착점은 신포석에서 시도한 주요 포석이었는데, 하필 일본의 전통 바둑계의 상징이자 당시 바둑계 대원로로 대접받던 혼인보 슈사이 앞에서 두었다는 점 때문에 불경한 행동이라는 비난이 있었던 것. 당시는 소목이 아니라 화점이나 3의 3에 두는 것조차 변칙으로 취급받던 시절이었으니...

4 친일파 논란

워낙 민감한 출신 때문에 중국에서는 친일파 논란에도 자주 말려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옹호론자들은 우칭위안이 바둑 기사일 뿐이므로 정치, 역사적 문제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비판론자들은 우칭위안이 일본 군부의 인사들과도 친선 바둑을 두는 등,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물론 중국계(정확히는 대만)라고 해도 일본인이니 한간 어쩌고 하는 건 좀 억지스럽지만.
  1. 이 일화의 출처는, 고수여의 훗날 제자인 진조덕(陳祖德 -전 중국기원원장, 2012년 작고)의 자서전인 초월자아(超越自我).
  2. 생각해보라. 2014년 현재 시점에 2001년생이 프로와 다이다이맞먹는다니 이게 어디 보통 일인가.
  3. 정상급 기사들 사이의 치수고치기 10번기는 당시 바둑계 최대 이벤트였고, 참여하는 기사들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대국에 임했다. 이는 당시에 '데드 매치'라 불렸는데 10번기 중 4승 차 이상이 나게 되면 상대를 '한 수 아래'로 대하는 규정 때문이다. 아래에서 나올 후지사와는 이 치수 고치기에서 세차례나 패하며 이름을 바꾸고, 한동안 칩거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굴욕인 셈이다. 이 10번기는 초장기전에 체력전이라는 이유로 오청원 이후 사라졌다가 2014년 Milly 몽백합 이세돌-구리 10번기로 부활하게 된다.
  4. 교통사고로 뇌손상을 입었고 이후 천식이나 발작 등의 후유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5. 정작 우칭위안 본인은 이 사실을 20여 년 후에야 알았다고. ㅎㄷㄷ
  6. 세고에의 다른 제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九단 역시 일본기원을 탈퇴, 이후 관서기원을 창립했다.
  7. 후지사와 구라노스케와의 10번기가 이와 관련이 있다. 후지사와는 사실상 일본기원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대국을 했으며, 이에 패하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8. 당시 프로의 중요한 대국은 며칠에 걸쳐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 경우 그 날의 대국이 끝날 때 '봉수(封手)'를 하게 된다.
  9. 지명의 뜻을 해석하면 지옥의 계곡.
  10. 세 명이 공저자로 올라갔다.
  11. 현대기전으로 바뀌기 전 세습 바둑가문이었던 혼인보 가문의 21대이자 마지막 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