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海峰(1942. 5. 6 ~ )
1 약력
일본의 프로 바둑 기사.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 출신이지만 국적은 중화민국이다.[1] 한국, 일본에서는 한자를 그대로 읽은 임해봉, 린카이호로 알려져 있다. 젊었을 때 끈질긴 기풍으로 이중 허리이창호 프로토타입라고 불렸으나, 장년 이후에는 전투적으로 바뀌었다. 동갑내기 라이벌인 오오타케 히데오와 함께 죽림(竹林)이라고도 한다.
1952년 10세 때 대만을 방문한 우칭위안과 6점 접바둑을 둔 다음 그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일본으로 오게 된다. 1956년 12세에 입단했는데 이는 당시 최연소 기록으로 훗날 조치훈이 깨뜨린다.
1965년 사카타 에이오 명인 겸 혼인보를 4-2로 이기고 23세에 당시 최연소 명인, 1968년 혼인보전에서 사카타 혼인보를 4-3으로 이기고 사카타에 이어 사상 2번째 명인 겸 혼인보가 된다. [2]
1989~93년 천원전 5연패로 명예 천원이 된 것을 포함해 통산 35개의 타이틀을 획득했으며, 2015년 8월 조치훈에 이어 사상 2번째로 1400승을 달성했다.
2 기타
1973년 이시다 요시오 도전자와의 명인전, 1983년 조치훈 혼인보와의 혼인보전에서 3연패 후 4연승으로 역전 우승했다. 일본 기전에서 3연패 후 4연승으로 뒤집은 기록은 6번 밖에 없는데 그 중 3번을 조치훈, 2번을 린하이펑이 달성했다.
1987년 故 가토 마사오 명인과의 명인전에서 0-3으로 뒤진 제4국, 1집반 정도 우세한 상황에서 두 수를 연거퍼 두는 바람에 반칙패하며 도전에 실패했다.
1993년 고마츠 히데키와의 본인방전에서 바둑에서 굉장히 드물게 나타나는 장생이 연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명인전 타이틀을 딴 직후 “바둑의 신(神)이 있다면 몇 점 정도로 버틸 수 있겠느냐” 는 기자의 질문에 “3점 정도면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여 화제가 된 바 있다.
이창호가 10대 때 "존경하는 기사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곧바로 린하이펑이라 대답했으며, 린하이펑 본인도 세계대회 결승에서 이창호에게 패한 다음 의연한 모습으로 복기에 임해 팬들의 칭송을 받았다.[3]
소년탐정 김전일 혈류실 살인사건의 범인 카이호 마나부(海峰學)가 린하이펑(林海峰)한테서 이름을 따 왔다. 한국에 번역될 때는 한자가 나오지 않고 그냥 '카이호'라고만 적어서 모르는 사람이 있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