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칼리가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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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테리 닮았다

최고의 순간에 주역이 되지 못한 비운의 수비수

이름움베르토 칼리가리스
(Umberto Caligaris)
생년월일1901년 7월 26일
사망년월일1940년 10월 19일
국적이탈리아
출신지카살레 몬페라토[1]
포지션수비수
신체조건175cm / 70kg
등번호-[2]
소속팀AS 카살레(1919~1928)
유벤투스 FC(1928~1935)
브레시아 칼치오(1935~1937)
국가대표59경기 / 0골
감독브레시아 칼치오(1935~1937)
유벤투스 FC(1937~1940)

1 선수 생활

1919년에 데뷔한 칼리가리스는 지역팀인 AS 카살레에서 데뷔했다. 지역 라이벌인 발렌사나와의 경기에서 첫 선을 보인 그는 데뷔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지금이야 세리에 A에서 보기 참으로 힘든 팀이지만 칼리가리스가 데뷔하기 전인 1913~14 시즌에는 이탈리아 1부리그에서 우승한 적도 있는 나름 강팀이었다. 하지만 카살레의 역대 최고 스타인 칼리가리스가 들어왔어도 세리에 A 우승은 칼리가리스가 있을 때도 그래왔고 아패로도 께속 못했다.

하지만 카살레에서야 우승을 못했지 실력도 인정을 못받은건 아니라서 1922년에는 아주리 유니폼도 입는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비르지니오 로세타땜빵으로 발탁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로세타에 비해 능력이 모자라지 않다는 것을 곧 증명해냈고, 로세타의 복귀 이후에는 2년간 로세타와 라이트 풀백의 자리를 놓고 경쟁했었다. 게다가 승자는 오히려 칼리가리스였다. 로세타를 밀어내고 라이트 풀백 자리를 차지한 것. 2년 후 이 문제는 이탈리아 축구 역사 초기의 전설적인 수비수 렌조 데 베키[3]가 은퇴한 후에 칼리가리스가 데 베키의 자리였던 레프트 풀백으로 포지션을 바꾸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칼리가리스는 경쟁자였던 로세타, 새로 들어온 잔피에로 콤비 등과 함께 대표팀에서 견고한 수비진을 구축했고, 아예 1928년에는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이후에 라이문도 오르시와 같이 유벤투스 FC로 팀을 옮겼다.[4] 이렇게 이탈리아 대표팀 선수들을 채워서 팀 스쿼드의 질을 끌어올린 유벤투스는 당장에 새로 창설된 세리에 A의 강자로 떠올랐고 이들의 활약으로 유벤투스는 1930년부터 35년까지 5년 연속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2 아쉬운 월드컵

칼리가리스는 월드컵 준비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주장인데다 소속팀도 이탈리아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어느덧 칼리가리스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서 60회 출전을 앞두고 있었다.[5]

하지만 칼리가리스의 명예로운 마지막을 막은 팀이 바로 당시 유럽에서 매우 잘 나가던 오스트리아였고, 그들은 토리노에서 총력전을 펼친 이탈리아를 4:2로 깨뜨렸다. 이후에 칼리가리스는 대표팀에 소집은 되었지만 다시는 경기장에 나서지는 못했고, 월드컵 명단에도 역시 선발되었지만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 주장완장 역시 로세타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3 사망

월드컵이 끝나고 1935년에는 브레시아 칼치오에 플레잉 코치로 자리를 옮겼고, 2년간 더 활약한 뒤 유벤투스의 감독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1940년 칼리가리스는 39세란 젊은 나이에 사망했는데 옛 동료들인 로세타와 콤비등과 함께 운동장에서 축구 시합을 하다 갑자기 쓰러졌고 병원으로 신속히 옮겼지만 이미 동맥류로 사망한 뒤였다.

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수비수로서는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을 정도로 수비에 관해서는 일가견이 있는 선수였다.
그의 A매치 출전 기록인 59회는 지아친토 파케티가 돌파하는데 37년이 걸렸다.

5 수상

5.1 클럽

세리에 A 우승 5회: 1930~31, 1931~32, 1932~33, 1933~34, 1934~35(이상 유벤투스)

5.2 국가대표

월드컵 우승 1회: 1934

올림픽 3위 1회: 1928
  1. 피아몬테 주 소속으로 토리노 동쪽에 있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렌조 데 베키는 1894년생이니 대략 아르투르 프리덴라이히, 파울리노 알칸타라등과 비슷한 나잇대의 선수이다. AC 밀란에서 데뷔했지만 제노아에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고, A매치에도 43경기에나 출전한 초기 이탈리아 대표팀의 간판 수비수였다. 스위퍼로써, 빅싸커의 네임드 톰 스티븐스가 매우 좋아하는 수비수이기도 하다.
  4. 물론 오르시와는 목적지가 같은 거지 동시에 팀을 옮긴 것은 아니었다.
  5. 지금이야 A매치를 정기적으로 치르고 각종 국제 대회들이 있지만 이 당시에는 새로 생긴 월드컵, 올림픽을 제외하면 A매치가 어쩌다 하는 친선 경기밖에 없었다. 브라질이나 미국 같은 경우는 1930년 언저리에 5년 동안 대표팀이 소집되지 않기도 했다. 이 시대는 A매치 출전 횟수가 50회를 넘는 선수를 찾아보기도 매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