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삼국지)

1 삼국시대 의 인물

촉서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감부인목황후경애황후유영유리유선

劉理
(? ~ 244)

삼국시대 촉한의 인물로 유비의 아들이자 유선유영의 이복동생으로 자는 봉효(奉孝)[1].

221년에 유비가 황제에 즉위하자 양왕(梁王)에 봉해졌으며, 230년에는 동오와 약조해 양나라가 소속된 예주를 동오령으로 정했기 때문에 촉한령으로 정한 기주에 소속된 안평왕(安平王)으로 바꿔 봉해졌다. 하지만 244년 요절했고 도왕(悼王)으로 추증되었다.

그의 부인은 마초의 딸이며, 아들로 유윤과 유집이 있었다. 그의 뒤는 애왕(哀王) 유윤이 뒤를 이었는데, 불과 16년만에 요절하고 그 뒤는 유윤의 아들 상왕(傷王) 유승이 뒤를 이었지만 또 1년 만에 죽었다. 유승은 일찍 죽어 자손이 없었으므로 유윤의 아우 유집이 뒤를 이었다. 촉 멸망 후에 유집은 낙양으로 옮겨져 봉거도위에 임명되고 향후로 봉해졌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영과 함께 유비와 목황후 사이의 자식으로 나온다.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해 삼국지 6, 삼국지 7, 삼국지 8에 등장했으며, 전반적으로 능력치는 안습이다. 정치나 매력이 가장 높지만 이마저도 50대 정도이다.그래도 이복형에 비하면 휠씬 낫다.

2 후한 말의 인물, 유강의 아버지

劉利
(? ~ 179)

후한 말의 황족. 유강#s-1의 아버지이자 영제#s-2의 사촌.

174년에 아들 유강이 제남왕에 봉해질 때 유건의 뒤를 이어 하간왕에 봉해졌으며, 152년부터 175년부터 하간왕을 지낸 것으로 보이고 179년 12월에 죽었다. 175년 3월에 유건이 하간왕에 봉해졌다는 사실을 통해 하간왕에서 다른 봉작으로 옮겨졌다가 죽을 때 하간왕으로 언급되는 것으로 봐서는 죽기 전인 4년 사이에 하간왕으로 다시 옮겨진 것으로 보이고 그가 죽은 뒤에 하간왕은 누가 임명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중산을 떼어내 박릉군을 환제가 박릉현을 속현으로 삼아 박릉군을 신설했는데, 공표가 박릉태수를 지내던 때 그를 섬기던 관리들이 세운 공표비의 비문에 적힌 관리들이 적혀있다.

그런데 그 관리들의 출신들은 모두 박릉군에 사는 인물들로 그 옆에는 박릉군의 속현이 적혀있는데, 안평국에 속하는 안평, 남심택, 중산국에 속하는 안국, 하간국에 속하는 고양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볼 때 유리가 하간왕에 봉해진 것을 보면 하간군만 폐지하면서 하간왕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둔 것으로 보인다.

3 후한 말의 인물, 유득의 아들

劉理
(? ~ 172)

후한 말의 황족. 유득의 아들.

효환제기에서는 나오는 감릉왕 유리(劉理)로 나오며, 효영제기에서 나오는 감릉왕 유회(劉恢)와 동일인물로 제기되고 있다.

148년 6월에 청하국을 감릉국으로 이름을 고치면서 아버지인 안평효왕 유득의 봉국인 안평이 아닌 감릉위왕에 임명되었으며, 효덕황제로 추존된 장제의 아들이자 안제의 아버지인 유경의 제사를 받들면서 24년간 감릉왕을 지내다가 172년 12월에 사망했다.

왕선겸의 후한서집해교보에서 전대흔의 주석에 따르면 감릉왕의 계보에 유회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을 지적했으며, 감릉왕의 계보에 있는 감릉위왕 유리(劉理)의 몰년이 동일하게 172년이기 때문에 리(理)와 회(恢)의 음이 동일하거나 초서체가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기록될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감릉왕의 작위는 유정이 계승했다.
  1. 여담으로 곽가의 자와 한자까지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