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부인

촉서 「이주비자전(二主妃子傳)」
감부인목황후경애황후유영유리유선

甘夫人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유비의 아내, 유선의 어머니. 패현 사람.

2 정사

미축전에 따르면 197년, 유비가 원술에 대항하러 나간 틈을 타서 여포가 하비를 습격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붙잡았다. 유비는 광릉의 해서 지방으로 군대를 돌렸다. 미축은 이에 유비에게 누이 미부인을 부인으로 들이고, 노객 2천 명과 금은 및 재물로써 군자금을 도왔다. 이 때 유비는 곤란하고 궁핍했으나 이에 힘입어 다시 떨칠 수 있게 되었다.

유비가 예주에 부임하여 소패에서 살 때, 감부인을 맞아 첩으로 삼았다.

선주전에 따르면 200년, 조조가 동쪽으로 유비를 정벌하자 유비가 대패했다. 조조는 그 군사들을 모두 거두고 유비의 처자를 붙잡고, 아울러 관우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유비는 본처를 여러 차례 잃었으므로, 항상 감부인이 집안일을 관리했다. 감부인이 유비를 따라 형주로 갔을 때, 유선을 낳았다. 마침 조조의 군대가 도착하여 유비를 당양 장판파까지 추격했다. 그 당시 상황이 매우 위급했으므로, 감부인과 유선을 버리고 떠났는데, 조운의 보호에 의지하여 난을 면했다. 감부인은 세상을 떠난 후, 남군에 매장되었다.

222년에 시호를 황사부인으로 추증하고 촉으로 이장시켰는데, 영구가 도착하기 전에 유비가 병사했다. 승상 제갈량이 상서를 올려 말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분에 따라 존귀해진다고 합니다. 시호의 규칙에 대해 검토했는데, 소열황후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합니다. 소열황후는 대행황제(유비)와 합장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선은 조칙을 내려 허락한다고 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감부인과 미부인 둘 다 유비의 정실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중혼에 성립된다.

두 사람 다 진작부터 유비의 부인인 상태로 등장한다. 장비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여포의 공격을 받아 서주를 잃자, 감부인과 미부인은 여포에게 붙잡혔다가 유비의 품에 돌아온다.

이후 관우, 감부인, 미부인은 조조에게 사로잡힌다. 조조가 관우의 항복을 받으며 두 부인의 안전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가면서 두 부인도 같이 유비에게 돌아간다.

장판파에서 조운은 감부인을 구하고 미부인과 아두를 찾아 동분서주한다. 미부인은 아두를 홀몸으로 지키고 있다가 조운에게 발견되자 부상당한 자신이 짐이 될 것을 우려하여 아두를 조운에게 맡기고 근처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적벽대전 이후 감부인도 병으로 죽고 주유는 미인계로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낸다.

훗날 유선이 제위를 계승하자 감부인을 소열황후로 추서하고, 미부인도 황후로 추서한다.

4 기타

감부인은 안주인 노릇을 했으나 오히려 스폰서인 미축의 누이인 미부인이 정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부인의 신분 때문에 유선이 유비의 장자이긴 하지만 온전한 적장자라고는 하기 어렵다. 감부인은 유비의 첩이었고, 유비가 황제가 되기 이전에 사망했고, 황제국 촉한이 건국되고 황후와 태후는 오의의 누이 목황후였으며, 유비의 다른 아들인 유영유리도 있었다.[1]

이렇게 놓고 보면 유선이 스무스하게 후계자가 된 것은 생각보다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유봉이 유비가 그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았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데에는 지은 죄가 큰 것도 있지만 이런 복잡한 사정도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5 미디어 믹스

  1. 삼국지연의에서 유영과 유리의 생모가 목황후로 나오는데 정사에서는 그런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