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가

위서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정욱곽가동소유엽장제유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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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嘉
(170년 ~ 207년)

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조조 휘하의 책사. 는 봉효(奉孝). 영천군 양적현 사람.[1]

군략 쪽에서 굉장한 재능을 발휘하여 그의 예측이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부자에 따르면 곽가는 어려서부터 원대한 기량이 있었다. 한나라 말 장차 천하가 어지러워지려 하자 약관의 나이 때부터 이름과 행적을 숨기고 은밀히 영걸들과 교제하며 속세와 접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 중 많은 이가 그를 알지 못하고 오직 식견이 높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이들만이 그를 높게 여겼다. 나이 27세에 사도부(司徒府)에 벽소되었다.

당초 북쪽으로 가서 원소를 만나보고는 원소의 모신인 신평곽도에게 말했다.

원공(원소)은 사람을 씀의 중요한 점을 알지 못하오. 두서는 많으나 요령은 부족하며 모책을 좋아하나 결단력은 없으니 그와 더불어서 함께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오!

그리하여 마침내 그를 떠났다.

2.2 조조에게 임관

이보다 앞서 영천 사람인 희지재는 계책을 세우는 선비로서 조조가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었는데 일찍 죽었다.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희지재가 죽은 뒤로는 더불어서 함께 일을 헤아리며 의논할 자가 없소. 여남군 영천군에는 빼어난 선비가 많으니 누가 그를 뒤이을 만하오?

순욱이 곽가를 추천하니 그를 불러서 만나 천하의 일을 논하였다. 조조가 말했다.

내가 대업을 이루도록 해 줄 사람은 필히 이 사람이다.

곽가가 밖으로 나온 뒤에 또한 기뻐하며 말했다.

실로 내 주인이시다.

표문을 올려 곽가를 사공 군제주로 삼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순욱이 정욱을 천거하고, 정욱이 곽가를 추천하고. 그리고 곽가 자신은 유엽을 추천하는 형태로 조조에게 임관한다. 참고로 정사에서 곽가의 첫번째 관직이 사공 군제주인데 조조가 사공이 된 이후에 임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의외로 조조군 합류 시기가 늦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곽가에게 말했다.

본초(원소)는 기주, 청주, 병주 땅은 넓고 병사는 강한데 여러 차례 오만불손한 짓을 하였소. 내가 그를 치고자 하는데 역량상 대적할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소?

곽가가 대답하였다.

원소에게는 패배할 열 가지 요인이 있고 공에게는 승리할 수 있는 열 가지 요인이 있으니 비록 원소가 병사가 강하나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 도(道) : 원소는 예의가 형식에 사로잡히지만 조조는 자연스럽다.
  • 의(義) : 원소는 황제를 거스르나 조조는 황제를 받든다.
  • 치(治) : 원소는 관대하여 정치를 정돈할 수 없으나 조조는 엄격하다.
  • 도(度) : 원소는 시기하며 의심하고 혈연을 중시하나 조조는 재능을 중시한다.
  • 모(謀) : 원소는 모의만 하고 결단하는 것이 적으나 조조는 책략을 세우면 곧바로 행한다.
  • 덕(德) : 원소는 명예를 얻고자 겉멋을 치장하나 조조는 내실을 중시한다.
  • 인(仁) : 원소는 연민해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참상을 고려하지 않으나 조조는 염려가 두루 미친다.
  • 명(明) : 원소의 대신들은 권력을 다투어 참언이 횡행하나 조조는 그렇지 않다.
  • 문(文) : 원소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나 조조는 신상필벌한다.
  • 무(武) : 원소는 허세와 수에 의존하나 조조는 요점과 용병을 중시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가가 저 평가를 내리자 그 직후 순욱이 동조하는 것으로 나온다. 왜냐하면 정사에서 순욱도 비슷하게 4가지 승리할 이유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는 곽가의 진언으로 보고있다.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경이 말한 바와 같은 것들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소!

곽가가 또 말했다.

원소는 바야흐로 북쪽으로 공손찬을 공격하니 그가 원정하는 것을 틈타 동쪽으로 가서 여포를 취하십시오. 먼저 여포를 취하지 않았는데 원소가 우리를 침범한다면 여포가 그의 외원(外援)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옳은 말이라고 말했다.

2.3 서주에서

위서에 따르면 유비가 도망오자 그를 예주목으로 삼았다. 어떤 이(정욱)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영웅의 뜻이 있으니 이제 일찍이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입니다.

조조가 이에 관하여 곽가에게 묻자 곽가가 말했다.

지금 유비에게 영웅의 명성이 있는데 궁박한 처지가 되어 자신에게 귀부한 이를 해친다면 이로 인해 현명한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지혜로운 선비들이 장차 스스로 의심을 품어 마음을 바꿔먹고 주인을 택할 것이니 공은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시겠습니까?

조조가 웃으며 그대의 말이 옳다고 말했다.

부자에 따르면 당초 유비가 항복해왔을 때 조조가 그를 손님을 대하는 예의로 대우하고 예주목으로 임명하였다. 곽가가 조조에게 말했다.

유비는 웅재가 있고 뭇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습니다. 장비와 관우는 모두 만인지적으로 그를 위하여 사력을 다합니다. 저 곽가가 보건대 유비는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사람이 아니며 그가 꾀하는 바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의당 일찍이 조치하셔야 합니다.

말 바꾸기? 이때에 조조가 영웅을 불러 모아 품어서 큰 신의를 밝히려 하니 곽가의 모책을 따르지 않았다.

삼국지연의에선 상반되는 이 두 사료를 절충해서 유비를 살리라는 진언은 그대로 곽가가 하고 유비를 죽이라는 진언은 순욱이 한 것으로 나온다.

여포를 쳐서 세 번 싸워 모두 격파하니 여포가 물러나서 굳게 지켰다.

순유전에 따르면 조조의 군은 하비까지 이르렀는데 여포가 퇴각하여 굳게 지키니,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연이어 싸우다 보니 병사들은 피로해져 조조는 돌아가려 했다. 순유와 곽가가 말했다.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데, 지금 세 번 싸워 모두 패배하였으니 그 예기(銳氣)가 쇠퇴하였습니다. 무릇 진궁에겐 지모가 있으나 더디니, 지금 여포의 기세가 다시 회복하지 못했고 진궁의 지략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때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면 여포군을 가히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이에 기수와 사수를 끌어 성쪽으로 물을 대니, 성에서 물이 넘쳐나 여포를 사로잡았다.

이후 조조는 원소와 일촉즉발의 상황에 있게되는데 갑자기 원술이 북상하여 청주의 원담과 서주에서 합류하려 하였다.

부자에 따르면 때마침 조조가 유비를 시켜 원술을 요격하게 하니 곽가가 정욱과 함께 수레를 타고 가서 조조에게 간했다.

유비를 놓아주면 변고가 생길 것입니다!

당시 유비는 이미 떠난 뒤였고 마침내 거병하여 반역하니 조조가 곽가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유비를 신속히 치려 하니, 의논하는 자들은 군이 유비를 치기 위해 출병하면 원소가 그 배후를 습격하여 진격해도 싸울 수 없고 물러서도 근거지를 잃어버리는 상황에 처할까봐 우려하였다. 조조가 이에 관해 의심하며 곽가에게 물었다. 곽가가 조조에게 권하며 말했다.

원소는 그 성정이 더디고 의심이 많으므로 설령 쳐들어오더라도 필시 빨리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비는 이제 막 거병하여 뭇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그에게 완전히 귀부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급히 공격하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이에 동쪽으로 유비를 치니 유비는 패하여 원소에게로 달아났으며 원소는 과연 출병하지 않았다.

원소전에 따르면 전풍이 원소에게 조조의 배후를 습격하라고 설득했으나, 원소의 자식의 병 때문에 사양하고 허락지 않으니,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했다.

무릇 만나기 힘든 기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그르치다니, 애석하도다!

2.4 관도대전

손책이 천리 땅을 전투하여 강동을 모두 차지하고는, 조조가 원소와 더불어 관도에서 서로 대치한다는 것을 듣고 장차 장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서 허도를 습격하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우려하니 곽가가 그를 헤아리며 말했다.

손책이 이제 막 강동을 아우르며 죽인 자들은 모두 능히 남으로 하여금 사력을 다하게 만드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손책이 경박하여 이를 방비하지 않으니 내가 보기로는 그는 필시 필부의 손에 죽을 것입니다.

손책이 장강에 임하였다가 미처 장강을 건너기 전에 과연 허공의 식객에게 죽임을 당했다.

배송지는 곽가의 예측이 맞은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했다. 손책이 비록 경솔하긴 하였으나 이 경솔함이 실제로 암살까지 연결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선견지명이지만 운좋게 맞아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조조는 원소와 손책의 협공을 받아 끝장났을 것이다. 이를 곽가가 순전히 운에 맡겨 진언하고 조조가 받아들였다는 점은 매우 놀라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심하면 곽가가 손책을 암살했다는 급진적인 주장도 있지만 어떠한 증거도 없다.

2.5 하북 평정

원소가 병으로 죽은 후 원소의 두 아들 원담과 원상이 원가의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다투었다. 조조는 내분을 틈타 원담과 원상과 싸운다. 정사에는 여양 전투에서 조조군이 이긴 듯하게 적혀있는데 정황상 조조군은 여양에서 패배한 것으로 여겨진다.

제장들이 승세를 타서 나아가 공격하자고 하니 곽가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공격하면 원담과 원상은 서로 도울 것이고, 느슨하게 하면 뒷날의 다툼이 반드시 생겨날 것입니다. 남쪽으로 형주를 향하여 마치 유표를 칠 것처럼 하면서 변화가 생긴 뒤에 그들을 공격한다면 일거에 평정할 수 있습니다.

조조가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남정(南征)하여 군이 서평에 당도했을 때 과연 내분이 일어나 원담과 원상이 기주를 다투었다. 원담이 원상군에게 패하고는 달아나서 평원에 의지하고 신비를 조조에게 보내 항복을 청했다.

신비전에 따르면 신비가 조조를 만나 원담의 뜻을 전하자 조조는 매우 기뻐했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는 또 먼저 형주를 평정하고 원담과 원상으로 하여금 스스로 서로를 피폐시키도록 하려고 했다. 어느 날, 연회석에서 신비는 조조의 안색을 살피고 변화가 있음을 알았으며, 이 일을 곽가에게 말했다. 곽가가 신비의 말을 조조에게 전하자, 조조는 신비에게 질문을 했다.

조조가 돌아가 원담을 구원하고는 마침내 조조를 뒤따라 업을 평정하였다. 또 조조를 뒤따라 남피에서 원담을 공격하고 기주를 평정하였다. 곽가를 유양정후에 봉했다.

부자에 따르면 하북이 평정된 뒤에 조조가 청주, 기주, 유주의 이름난 선비들을 많이 벽소하여 점차 신하로 삼아 부리고 그들을 성사연속(省事掾屬)으로 임명하였는데 이것이 모두 곽가의 모책이었다.

싸움에서 패한 원상은 유주의 원희를 의지했으나, 유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패한 원상 등은 과거 원가와 결탁했던 오환으로 달아났다.

조조가 장차 원상 및 삼군오환(三郡烏丸)을 치려 하니, 수하들 다수는 유표가 유비를 시켜 허도를 습격하며 조조를 공격할까봐 우려하였다. 곽가가 말했다.

오환은 그들이 멀리 떨어져있는 것을 믿고 있으니 필시 방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유표는 앉아서 담소하기나 좋아하는 인물일 뿐이라 자신의 재능이 유비를 부리기에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유비에게 중임을 맡기면 그를 제어할 수 없을까 두려워하니 공이 염려하실 게 없습니다.

이에 조조가 실행에 옮겼다. 역현에 도착하니 곽가가 말했다.

병(兵)에서는 신속을 귀하게 여깁니다. 짐수레로 인해 진군이 늦어져 저들이 우리가 온다는 것을 듣게 되면 필시 방비를 할 것입니다. 짐수레는 남겨두고 가볍고 날랜 차림의 군대로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가서 출군함으로써 적이 뜻하지 못할 때에 엄습하느니만 못합니다.

여기서 유래한 고사성어가 병귀신속(兵貴神速). 이에 조조가 은밀히 노룡새를 나가 선우정으로 곧바로 향했다. 오환이 조조가 갑자기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는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어울려 싸웠다. 조조가 이를 대파하고 답돈 및 명왕(名王) 이하 여러 명을 베었다. 원상 및 원상의 형 원희는 요동으로 달아났다.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가 오환을 격파하자 어떤 이가 조조를 설득하기를, 끝까지 정벌하면 원상 형제를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조조가 말했다.

나는 바야흐로 공손강이 원상, 원희를 참수해 그 수급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군사들을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소.

9월, 조조가 군을 이끌고 유성으로부터 돌아오자 공손강이 원상, 원희와 속복환 등을 참수해 수급을 보내왔다.

삼국지연의에서는 곽가가 유언으로 공손강이 원상 형제의 목을 보내올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정사에서는 조조 자신이 예상한거다. 곽가를 거의 예언자급의 모사로 묘사하기 위한 연의의 창작.

2.6 죽음

당초 진군이 곽가가 바른 몸가짐을 닦지 않는다고 하며 여러 차례 조정에서 곽가를 고발하였으나 곽가의 뜻은 태연자약하였다. 조조가 그를 더욱 중히 여겼으나 진군이 정도를 지킨다 하여 또한 기쁘게 여겼다.

곽가는 매우 통달한 이로 모략과 책략을 갖추었고 사정에 밝았다. 조조가 말했다.

오직 봉효 만이 내 뜻을 잘 안다.

당시의 나이 38세로 유성으로부터 돌아온 뒤 병이 위독해지니 조조가 병문안하는 이를 번갈아 계속 보내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곽가가 죽으니 그의 상(喪)에 임하여 매우 슬퍼하며 순유 등에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나이가 모두 나와 동년배인데 오직 봉효만이 가장 젊었소. 천하의 일이 끝나면 뒷일을 그에게 맡기려고 하였는데 중년의 나이에 요절하니 이것이 운명인가 보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올렸다.

군제주 곽가는 정벌에 뒤따른 지 11년이 되었습니다. 천하를 평정하는 데에 있어 그가 도모한 공이 높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명이 짧아 사업을 다 끝내지 못했습니다. 식읍 8백 호를 늘려 예전과 합쳐 모두 1천 호가 되게 해 주십시오.

2.7 사후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곽가를 그리워하고 애도하며 말했다.

곽봉효는 나이 40세를 채우지 못했으나 나와 더불어 11년을 함께 겪었소. 그에게 뒷일을 맡기려고 하였는데 어찌 이처럼 갑작스럽게 그를 잃게 될 줄 짐작했겠소. 게다가 봉효는 바로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었소. 천하인 중에 서로가 서로를 알아주는 이가 적은 법이니 몹시 애석하고 아깝소.

또 순욱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남방에는 역병이 있어 항상 자신이 남방으로 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당 먼저 형주를 평정해야 한다고 말하였소. 이는 필히 공업을 세우고자 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이오.

시호를 내려 정후(貞侯)라고 했다. 시법에서 정(貞)은 청렴결백(?)하게 절개를 지키는 것, 큰 생각을 품고 성공을 이루는 것, 벼슬을 하면서도 만사에 굴함이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들인 곽혁이 후사를 이었다.

조조가 역병과 화공으로 인하여 적벽대전에서 패배하고 탄식하며 말했다.

곽봉효가 살아있었다면 내가 이 지경에 이르도록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자에 따르면 조조가 또 말했다.

슬프구나, 봉효여! 애통하구나, 봉효여! 아깝구나, 봉효여!

조환전에 따르면 262년, 조서를 내려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고인이 된 군제주 곽가를 제사지내도록 했다.

3 평가

3.1 부정적 평가

삼국지연의의 수혜자 중 하나인데 한국의 삼국지 팬덤에서는 의외로 곽가의 안티도 꽤 있는 편이다. 안티의 대다수는 곽가가 싫어서라기보다는 곽가빠들을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곽가가 거품이 많다며 곽푸치노라고 불리우며 깐다.

정사를 보면 연의에서 곽가의 활약이라는 것 중 실제로 다른 모사의 진언인 것이 어느 정도 보이고, 거의 맵핵을 켜놓고 있는 듯한 예측도 실제 사료에 없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좀 생각해 봐야하는 일이다. 정사 기록에 기대어볼 때 개인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기보다는 주변의 진언을 잘 통합하여 좋은 타이밍과 어법으로 조조에게 올리는 것이 잘 맞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조의 스타일에 꼭 맞아 잘 통하는 맞춤형 인재였던 셈.

의외로, 곽가가 병법을 쓰는 기록이 사실 거의 없다. 군공만 따지면 배송지가 동렬에 놓은 정욱보다 아래다. 하비성 수공 말고는 특기할 만한게 없으며 그조차도 순유와의 합작이다. 조조의 모사들 중 병법에서 두드러지는 인물은 순유다. 그러나 캐릭터성이 없다는 이유로 순유의 활약은 창작물 대부분에서 순욱과 곽가에게 양분되어 흡수되는 실정.

가끔 관도대전에서 가장 활약한 모사로 곽가를 꼽는 사람들이 있지만, 곽가는 관도대전에서 이름을 남길 만한 공훈을 세운 적이 전혀 없다. 기전체의 특성상 인물의 공적은 작은 것까지 일일히 찾아서 기록해주는 편이지만, 곽가의 경우엔 크고작은 공이라며 두루뭉실 넘어가 이름을 올릴만한 공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관도에서 가장 활약한 것은 순유이다. 실질적으로 조조가 전성기를 구가하기까지 가장 많은 역할을 한 모사나 내정 계열 인물들은 곽가가 아니라 순욱과 순유라고 보면 된다. 곽가도 어느 정도 공헌을 했다지만 그가 순욱과 순유를 능가한 건 아니었다. 배송지는 곽가와 정욱을 같은 선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대체로 적절한 평가로 보인다.

젊은 나이에 병사한 탓에 얻은 요절한 천재 이미지 및 조조의 적벽대전 패전 후 멘트 때문에 살아서 보여준 모습에 비해서 일부 팬들에게 지나칠 정도로 과대평가받는다는 것이 까임의 대표적인 이유이다.

분명 적벽에서 패한 조조가 봉효만 있었더라면이라고 부르짖는 부분은 사실이지만, 적벽대전 당시 곽가가 살아있었다고 해도 그가 전쟁을 승리로 이끌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그냥 조조가 곽가를 저렇게 높이 평가하고 신뢰했다는 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사에서 조조와 곽가가 처음으로 대면하였을 때, 서로에 대해 감탄하고 후에 조조가 봉효만이 나의 뜻을 확실히 안다고 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조조와 곽가는 서로 죽이 잘 맞았다. 조조가 적벽대전 이후 내뱉은 말은 이런 곽가에 대한 조조의 개인적 신뢰와 함께, 다른 책사들을 향한 질책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적벽대전의 패배는 책사들보다도 조조에게 불리한 여건이 상당 부분 있었고 손권과 유비가 그 틈을 잘 파고들었기에 가능했다.[2]

설령 곽가가 살아있었다 해도 패배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다. 가장 큰 이유는 위군 자체가 북방 출신이라 수상 전투 경험이 너무 없다는 점과 오군의 병사 대부분이 수상에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과거를 가진 자들이 수두룩 하여 수상전 경험이 풍부했기에 그야말로 수상 전투에는 이골이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또한 오나라 군대만이 아니라 조조와 여러 차례 부딪치며 살아남은 유비군이 손권과 손을 잡았기 때문에 손권군과 유비군의 핵심 장수들을 행태가 곽가가 있었으면 조조가 이겼을 거라는 주장의 어리석은 점이다.

사실 이 점은 연의에서 대체로 장수 위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때문에 연의를 먼저 접한 사람들도 덩달아 장수 위주의 전투를 생각하여 곽가가 있었다면 계책을 간파해서 이겼을 것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생겼다고도 할 수 있다.

3.2 긍정적 평가

정사에서도 곽가는 분명 몹시 뛰어난 인물이었다. 다만 38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과 적벽에서 패배 이후 조조가 탄식한 것 등을 빌어 만약이라는 가정에 우열을 가리려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한마디로 연의를 보고 후세 사람들이 거품을 자꾸 만드는 것. 따지고 보면 곽가도 피해자이다.

곽가는 병법가보다는 정세를 잘 파악하여 조언을 하는 역할이 더 큰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 번이나 조조에게 자신감을 북돋는 말을 해 주었고, 그의 조언이 큰 틀에 부합하는 것이 많았다.

4 미디어 믹스

  1. 순욱과는 동향이다.
  2. 적벽대전에 임하며 조조가 실책을 안한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싸울수도 없었다. 교전을 회피하고 눌러앉았다간 갓 점령되어 불안정한 형주로 유비와 손권이 나설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