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종

朴元宗
1467(세조 13)∼1510(중종 5).

1 개요

조선의 무신. 자는 백윤(伯胤),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무술에 뛰어나서 음보로 무관[1]에 기용되었다. 1486년(성종 17) 선전관으로 있을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내승으로 승진, 오랫동안 왕의 측근이 되었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중추부지사 겸 경기도관찰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다음 평성군(平城君)에 봉해지고 도총부 도총관을 겸직하였다.

1506년 성희안, 유순정 등과 함께 연산군을 폐하고 신수근을 참살하여 중종을 옹립하는 중종반정에 주동적 역할을 맡아 정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509년 영의정에 오르고 평성부원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영의정 오른지 몇달만에 병사하고 만다.

박원종의 큰 누나는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였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연산군이 누이를 범한 것이 박원종이 반정을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다만 연산군이나 중종반정 문서에 나와있듯이 이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은 낮다. 둘째 누나는 윤여필에게 시집을 가 윤임장경왕후를 낳았다. 셋째 누나는 제안대군의 후처이다.

졸기에 따르면 반정 이후 그의 집에는 뇌물이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궁중에서 나온 이름난 창기들을 많이 차지하였으며 거처나 음식이 신하로서의 한도를 넘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반정에 기대를 품었던 사람들에겐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원종에겐 적자가 없어, 박원종이 죽은 후 그의 서자인 박운이 제사를 받들었는데, 박운은 이항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첨을 했다는 혐의로 김안로 일파의 공격을 받아 유배를 갔다.[2] 반정공신 박원종의 제사를 받드는 아들이란 점을 들어 정광필이 선처해줄 것을 청하였지만 중종은 거부하였다. 중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

2 한국 사극에서

  1. 때문에 같은 무관 출신인 유자광이 탄핵을 받아 궁지에 몰리자, 박원종을 찾아가 '문관들이 무관들을 배척하려 하니 다음엔 당신 차례일 것이다'라며 도움을 구하기도 했다. 물론 유자광이 무오사화 등으로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된지 오래인 것을 안 박원종은 이를 무시했다.
  2. 파직되어 고향에 가 있던 이항이 이 소식을 듣곤 분개하여 승정원으로 가 억울함을 토로한 것을 보면, 박운의 혐의는 김안로 일파의 무고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의 사관 역시 이항의 탐욕스러움은 일세에 비할 자가 없다고 까면서도 박운에게 뇌물을 받은 일은 증거가 확실치 않다고 기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