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명나라)

劉綎
(? ~ 1619)

명나라의 장수. 자는 성오(省吾).

한국인들이 보기에는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장수이자 명사(明史) 열전의 평가는 탐욕스럽고 교만하나 명나라의 모든 제장 중 최고로 용맹한 맹장

강서 남창 사람으로, 13살 부터 부친인 유현을 따라 종군하였으며 마상에서 120근의 빈철도를 휘둘러 천하의 유대도로 불렸다. 선조실록에서의 유정의 말에 따르면 왜구들과도 싸운 경험이 있었다고하고, 버마 군을 상대로도 승리하였고, 나웅 등의 반란도 진압하여 사천총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때 참전하여 정유재란이여송이 병부상서 석성에 의해 탄핵당한 후 명군의 지휘권을 인계받아 총병이 되었다.

부총병일때는 이총병이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며 디스한 기록이 있으나, 본인도 2차 진주성 전투에 자신과 서로군을 보내어 지원한다고 말만하고서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1] 정유재란 때는 이순신이 해전에 연전연승하고, 마귀와 양호의 조명연합군이 직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의 진군을 막자 유정 본인은 제독으로서 남해안의 왜군을 소탕하는 전략으로 사로병진작전을 세웠다.

사로병진작전의 일환으로 순천왜성에서 본인과 수군이 힘을 합쳐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천에서 동일원시마즈 요시히로를, 마귀가 울산성에서 가토 기요마사를 쓰러트리는 작전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 작전이 성공을 거둔다면 남해안의 왜군을 모두 박멸하고 전쟁을 완벽하게 승리하는 전략이 될 했다.

그러나 만력 3거정 모두 참전하고 모두에서 공을 세운 명 최고의 명장이자. 이성량과 더불어 동이서마 혹은 서북제일의 명장이라 불렸던 마귀가 울산성 전투에서 1, 2차 전투 모두 열심히 싸웠으나 적의 원군으로 인하여 아쉽게도 울산성을 점령하지 못했고, 사천에서는 나름 영하의 난을 평정한 공이 있던 장수였던 동일원이 다수의 병력에도 불구하고 군량창고 방비도 제대로 못해서 군량을 태워먹고, 병량부족으로 조급하게 싸우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털리고 패배했다.

유정 본인은 순천에서 육로로 진군하여 먼저 계책으로 회담을 진행한다고 속이고 고니시 유키나가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고니시 유키나가 본인이 나타나지 않아서 계책이 실패한 후 벌어진 전투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뇌물을 받고서 남원에서 기생질이나 하고 남원에 관우 묘나 만들면서 전쟁을 회피한다.[2]

결국 이순신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군대를 움직이고 장도해전이 일어났는데, 이순신은 아군이 뒷통수를 친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왜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다.[3] 사로병진 작전이 실패하고 왜군은 전력을 거의 온존한채로 노량 해전이 일어나는데, 이후에는 본국으로 귀국하여 사천에서 양응룡이 반란을 일으키자 임진왜란을 함께한 장수였던 명장 마귀, 여성 장수인 진양옥과 함께 양응룡의 군대를 무찌르고 양응룡의 난을 진압한다.

이후 발호하는 후금군을 막다가 마귀의 아들도 후금군에 의해 분사하고 요동이 위협당하는 상황에서 명은 양호를 총대장으로 하고 10만의 군대를 60만이라고 뻥치면서 후금을 무찌르기 위한 전투를 준비하는데, 문제는 징비록에서 적을 경시하는 성향이 있다던 양호가 크게 많지도 않은 병력을 4개로 쪼갰다. 그 중 한 부대인 이여백의 군대는 이여백이 누르하치의 일족이었기 때문에 내통 의혹이 있었으며, 특히나 유정은 양호가 유정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꼴랑 수천명의 병력[4] 만을 편제받아 가장 험지에 보내 이 때문에 4로군인데 전쟁하기도 전에 벌써 2개 부대의 상태가 엉망진창이었다.

특히나 유정이 조선군과 거의 함께 편제되어 있었기에 강홍립과 양호의 대화 내용이 조선왕조 실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강홍립이 유정에게 병력이 얼마냐고 묻자 서남 방면은 수 만인데 이 쪽은 수 천밖에 없다고 말하는데, 내가 이끌던 사천 지역의 강병을 요청했는데 양호와 사이가 나빠 거절당했다. 아마 양호는 나와 사이가 나쁘니 내가 죽기를 바랄 것이다. 나야 나라로 부터 받은 은혜가 있으니 나는 죽기를 각오했지만, 내 아들들은 아직 국가의 녹을 먹지 않았으니 데리고 오지 않았다.며 오로지 조선군을 의지할 뿐이라고 말하는 개안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대체 왜 이리 빨리 진군하냐고 강홍립이 묻자. 양호가 천시를 얻었다며 군령이라는데 어쩌겠냐.라고 유정이 대답했으며, 심지어 강홍립의 보고에 따르면 중국측 병력에 대포와 대기도 없었던 데다가, 지형 상태도 안 좋았다고 한다. 이에 광해군은 패배를 예측하고 조선의 군사들이 죽을테고 패배하면 저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우리 나라에도 변란이 닥칠텐데 어쩌냐며 비밀리에 비변사에 전교한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광해군이 비변사에 전교하고 바로 다음 날. 심지어 이여백이 유정에게 보낸 사로군의 마림군과 두송군이 이미 전멸했으니 유정군은 퇴각하라는 퇴각 신호까지 험한 지형이라 유정군에게 전달되지 않으면서.'아부달리 전투가 시작된다. 후금 군의 병력규모는 이전 전투와는 다르게 기록되지 않았으나 참전한 장수진이 따이샨홍타이지, 망구타이로 각기 팔기 중 한 기씩을 거느리고 있는 장수였던 것으로 보았을 때[5] 병력 규모는 2만 내외, 다만 조선의 이민환의 책중일기에는 3만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전투에 누르하치 본인이 참전하지 않았던 것만해도 후금군은 이미 승리를 자신했던 것으로 보이며, 심지어 유정 군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의 군대와도 따로 떨어져서 행군하다가 기습당해 격파당했다. 패색이 짙어지자 유정은 남아 있는 화약과 장작을 쌓고 휘하 제장들과 함께 자폭했다고 하며, 만주족 기록에는 잡아죽였다고 되어있어 분전하다 사망했다는 등의 이설은 있지만 어쨌든 처참하게 전사했다.

명군이 전멸한 후 광해군의 예측대로 조선 군 역시 9000명과 부원수 김응하가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고 후금군에게 항복. 다만 청나라 기록에는 조선 군과 명군이 함께 싸웠다고 되어 있으나 이민환의 책중일기나 명측 기록을 보면 명군이 전멸 후 조선군이 격파당한 것으로 보인다.

수전이라는 무기를 잘 썼다고 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손호균이 연기했는데 순천 왜교성 전투에서 졸전하고도 오히려 이순신을 모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졸전이나 제대로 싸우려 들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과 대립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종전 후 선조가 추켜 세워주는 자리에서 “감사합니다. 재차 나와서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이순신(李舜臣) 같은 자들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라고 말한 기록이 남아있다.(<선조실록> 1599년(선조 32년) 1월 29일)
  1. 수 만을 보내었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등에게 패배했다는 이설도 있기는 하다. 다만 징비록에는 명군이 구원하지 않았다고 하니 아무래도 지원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는 1598년 10월 6일의 내용은 권율로부터 유정의 태업을 전해듣고 분노를 금치 못하는 구절이 나온다.(...)
  3. 다만 그래도 이순신의 참가 전투답지 않게 피해가 엄청 컸는데, 왜군 함선 30척을 격파하고 3000여명을 전사시켰지만, 명 함선도 30여척이 파괴당했고 2300명이 사망해 조선군도 진린과 명군을 구원하다가 130명이 전사했다.
  4. 조선왕조 실록의 강홍립의 말에 따르면 수천, 현재 중국측의 예상 숫자는 1만 3천
  5. 추잉 사후 사실상 장남 역이었던 따이샨은 두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