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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후반기, 정유재란 중에 발생한 조명연합군과 왜군간의 전투. 총 두 차례에 걸쳐 벌어져서 1, 2차로 구분되며 그중 유명한 것이 제1차 울산성 전투이다.
1 배경
재침 이후 전면적인 총공세와 수륙양공책을 펼치던 일본의 계획이,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수 없는 어느 먼치킨 제독에 의해 좌절되자, 일본군은 전면적으로 후퇴, 해안가에 왜성들을 쌓고 농성모드로 돌입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일본군 지휘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어했으나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철수불가와 재북상을 계속 독촉하고 있었던지라….
이런 연유로 일본군 상당수가 여전히 조선 남부에 남아있었고, 이들이 남아있는 이상 전쟁은 끝날 수가 없었다. 조명연합군은 이들을 모조리 격파하여 전쟁을 끝내겠다고 결의했다.
특히 많은 왜성들 중 최우선적으로 울산 왜성, 당시 도산성이 지목되었는데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도산성은 일본의 조선침략 본거지가 되어버린 부산에 매우 가까워 함락만 시킨다면 부산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었고, 일본의 조선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었다. 단, 이를 반대로 적용하면 부산의 일본 증원군이 빠른 시일 내에 쏟아져 쇄도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기에 이들을 저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둘째,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장군은 가토 기요마사였다. 전쟁 첫 해,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에 서서 조선 조정에 악몽같이 기억된 인물로, 그나마 대명협상을 주도하여 유화적으로 보인 고니시와 달리, 가토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조선 입장에선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준 장본인이어서 가토를 쳐잡자는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실제 조선 조정은 고니시가 웅거한 순천성과 가토가 웅거한 도산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벌이다 최종적으로 도산성을 결정했다.
2 제1차 울산성 전투
제1차 울산성 전투 | ||
날짜 | ||
1597년 음력 12월 23일 ~ 1598년 음력 1월 4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울산왜성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명 제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권율 양호 정기룡 김귀희 장운익 마귀 천만리 |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나베시마 나오시게 다치바나 무네시게 모리 가쓰노부 아사노 나가마사 아사노 요시나가 하치스카 이에마사 하라다 노부타네†[1] 아소누마 모토히데† 레이제 모토미쓰† 츠노시 이에요리† |
병력 | 조선군 1만 1500명 명나라군 3만 6000명 총병력 4만 7500명 | 울산성 주둔군 1만 6000명 구원병 8만 명 |
피해 규모 | 총 1만 6000명 전사 | 1만 5500명 전사 |
결과 | ||
일본의 구원군으로 인한 조명연합군의 퇴각. |
2.1 전투준비
울산성 공략을 위해 조명연합군은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다.
직접적인 공성에 투입되는 병력만 해도, 부총병 양호가 이끄는 명군이 기록에 따라 어느정도 차이는 있으나 최소 3만에 최대 4만 4천에 이르렀다. 여기에 전쟁 첫 해를 제외하면 대규모 지상군을 동원하지 못한 조선군도 도원수 권율을 최고지휘관으로 하여 약 1만여 명을 투입했다. 조명연합군이 단일전투에 이정도로 병력을 집중투입한 것은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의 제4차 평양성 전투 이후 처음이었다.
연합군 본영은 경주에 설치되었으며, 예상되는 일본군의 원병을 차단할 길목들이 선정되었고, 정예병력과 군량, 화포 등이 속속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명군은 호남 지방으로 별동을 보내어 순천성 등 호남지방 왜성들을 공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일본군을 낚기 위한 작전이었다.
가토 기요마사도 바보는 아니어서 성을 증축하고 주변 성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조명연합군의 공세에 대비했다. 특히 도산성은 명량해전 패배와 그 이후의 후퇴 직후 급히 축조에 들어간 가토의 새 본거지로 방어력이 높았으며 전투를 얼마 남기지 않고 완공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의 목표가 정확히 자신인지를 확신하지 못했고, 무엇보다 당시 각 성에 웅거한 일본군 장수들은 한결같이 자기가 목표가 될까 두려워 연계에 소극적이었다.(…) 덕분에 가토는 전투 초기 자신의 휘하 병력 1만 6천여 명만을 지휘할 수 있었다.
2.2 공방전
음력 12월 23일, 마침내 조명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가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 언양성이 함락되었으며 가장 가까운 왜성인 서생포왜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후 도산성은 조명연합군의 그물같은 포위를 당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성전에서 조명연합군은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왜성 공성이라는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기존의 공성전은 일본군이 점령한 조선의 성에 대한 탈환전이었다면, 이 전투는 일본군이 축성한 왜성에 대한 공성전이었다. 참고로 일본의 축성술은 전국시대에 엎치락 뒤치락하면서 성의 다른 기능은 모조리 포기하다시피하고 오로지 난공불락 하나에만 올인한 끝장나는 방어력을 주로 추구했다. 성벽 위에 높게 축조된 목재구조물에서의 조총사격 등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왜성의 방어력에 고전한 조명연합군은 일시 공세를 중지했다. 물론 일본군도 화포 집중사격이라는, 전국시대에는 경험하지 못한 화력덕후 연합군의 공격에 목재구조물 속에서 수십, 수백병이 사이좋게 불타죽기도 했지만….(…)
생각치 못한 고전과 피해에, 연합군 총사령관 양호는 전략을 변경하여 철두철미한 고사작전을 개시했다. 연합군은 성 주변의 우물을 모조리 묻어버리고 태화강의 물줄기를 빈틈없이 봉쇄했다.
가토와 일본군에게는 악조건이었던 것은 도산성이 완공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는 성 안에 군수물자의 비축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성 안에 2만에 가까운 일본군이 먹을 식량과 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우물이 성내에 한 개도 없다는 것은 도산성 최대의 약점이었다. 더군다나 공사가 끝난지 얼마 안되어 건설에 참여한 인부들까지 상당수 남아있어서 밥만 축내고 있었다.
결국 며칠 지나지 않아 일본군은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말을 죽여 말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나마 초반의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 아예 피와 오줌을 먹었다는 말까지 있으니 충공깽. 심지어 총사령관인 가토 본인마저 천에 고인 물을 짜내어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리 막강한 군대라 해도 배고프고 갈증나면 못싸우는게 당연지사. 가토도 이를 알고 결사적으로 반격하여 태화강으로 식수조달에 나섰으나 조명연합군은 이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결사대는 출격하는 족족 개발살나서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번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기병 중심의 부대를 내보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당했다. 이후로 가토는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죽기살기 농성으로 전환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일본군의 식량사정은 최악을 달려서, 농성전의 핵심인 조총수에 한정하여 하루에 생쌀 한 홉을 지급했다. 그나마도 물이 없어서 생쌀을 먹어야 했다.
한편, 조명연합군은 포위망 유지와는 별개로 공세를 강화했다. 가까운 일본군이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세월아 내월아 포위만 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결국 28일을 기점으로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고, 가토의 일본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최후의 결사항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토는 할복을 준비한다.(…)
2.3 일본군의 구원시도와 연합군 퇴각
사람을 시켜 중국 장수가 주둔한 곳을 바라보게 하였더니, (중략) 그제서야 비로소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한 것을 알았습니다. 전탄을 지키던 절강(浙江)의 보병 기병도 장수가 이미 후퇴한 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당황하여 도망치자, 산위에 있던 적들이 줄을 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시살하였는데 보병 중에 살아서 돌아온 자가 많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기마병으로서 죽음을 당한 자도 그 얼마인지 모르며 혹은 갑옷과 투구를 내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하였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 <선조실록> |
일본군의 제1차 구원시도는 비교적 초기에 이루어졌으나 이를 예견한 연합군에 의해 태화강과 양산 방면에서 죽도록 얻어터지고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서생포왜성에서 출발한 원군은 태화강에서 말 그대로 전멸당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조명연합군의 목표가 단 하나, 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라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자신의 성에서 짱박혀있던 일본군 장수들이 일제히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1만이 넘는 병력을 이끈 나베시마 나오시게를 필두로, 모리 가쓰노부, 아사노 나가마사와 요시나가 부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하치스카 이에마사, 여기에 거리도 가장 멀고 가토와 사이가 나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출병하여 최종적으로 6~8만에 달하는 대군이 도산성으로 몰려갔다. 이때 일본군들에게는 이대로 가다간 개별 성들 단위로 각개격파당하는거 아니냐는 공포가 엄습했기에 다들 결사적으로 가토를 구원하려 했다.
한편, 구원군 본대와는 별개로 일부 저돌적인 일본군 장수들에 의해 태화강 도화 및 포위망 외부에서의 공격이 시작되는 등 전세는 급박하게 진행되었다. 이에 조명연합군도 공성군을 줄이고 주력 상당수를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하였으나 오랜 시일 전투를 치룬 연합군과 생생한 일본군의 대결은 당연히 일본군이 유리했다. 이에 연합군 지휘부는 공성 포기와 퇴각을 결정, 10여 일에 걸친 전투는 최종적으로 일본군의 승리로 끝난다.
이후 퇴각하는 연합군과 추격하는 일본 구원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는데, 조선과 명의 기록에서는 추격을 예상하고 퇴로에 복병을 설치, 추격군을 섬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무질서하게 패주하는 조명연합군을 무참히 개발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신뢰도는 아무래도 조선과 명쪽이 높으나 그래도 섬멸 수준은 아니고 자그마한 공방전 정도로 추정된다.
최종적으로 조명연합군과 일본군은 각 1만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가토군이 500명만 빼고 다 죽을 정도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은 가토군 휘하 병력 중 멀쩡한게 500명이고 나머지는 죽거나 크고작은 부상을 입은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 즉시 가용한 전력이 500명밖에 안 남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가토군은 중상자들까지 최일선에서 싸워야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에 내몰렸었다. 결국 이 처참한 전투의 영향으로 조명 연합군이 철수하여 승리하기는 했으나 더 이상의 수성을 포기하고 잠시 서생포로 퇴각했다가 1월 22일에 히데요시의 명으로 울산성에 다시 방어진을 꾸렸다. 가토군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상처뿐인 승리.
3 제2차 울산성 전투
제2차 울산성 전투 | ||
날짜 | ||
1598년 10월 21일(음력 9월 22일) | ||
장소 | ||
조선 경상도 울산왜성 | ||
교전국1 | 교전국2 | |
교전국 | 조선 왕국 명 제국 | 쇼쿠호 일본 |
지휘관 | 김응서 선거이† 마귀 | 가토 기요마사 |
병력 | 조선군 1만 5000명 명나라군 2만 4000명 총병력 3만 9000명 | 불명 |
피해 규모 | 불명 | 불명 |
결과 | ||
일본군의 반격으로 인한 조명연합군의 퇴각. |
1차 울산성 전투에서 참가했던 명군 제독 마귀는 1차때 다 이길 수 있었는데 아까비. 다시 한 번 러시 ㄱㄱ를 외치며 약 4만의 군사를 이끌고 공세를 개시했으나 지난번과 달리 준비 제대로 한 일본군의 거센 반격에 큰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4 결과
비록 이겼지만 일본군이 느낀 위협은 매우 심각했다. 당장 표적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기껏 축조한 도산성을 포기하고 서생포로 후퇴해 종전시까지 서생포에서 웅거한다. 가토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수들도 보다 더 안전한 성으로 옮기려고 난리를 치고 기존 성의 방호력을 약간이라도 강화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이들은 본국에 공동으로 서한을 보내어 철수를 요청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히려 전면공세를 지시했다.(…) 결국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건 도요토미 사후의 일이었다.
조명연합군도 실로 오래간만에 제대로 된 공세를 펼쳤으나 목표달성에 실패했다. 이후 연합군 수뇌부는 새로운 전쟁전략을 논의하기 시작, 울산성 전투처럼 특정 진영부터 붕괴시키려는 시도가 아닌, 대군을 4개로 나누어 전 전선에서 일제히 총공세를 펼치는 사로병진책을 내세우게 된다. 이는 일본군이 일제히 울산성으로 몰려간 것에 대한 교훈이었다.
5 여담
울산성에서 아사할 뻔한 가토 기요마사는 이후 구마모토 성을 축조하면서 성내에 수십개의 우물을 파고, 다다미를 고구마줄기로 만들어 유사시 비상식량으로 쓰게끔 하는등 울산성의 뼈저린 전훈을 반영했다.트라우마 甲 정작 가토 가문이 이를 이용한건 반세기도 안되지만. 다만, 구마모토 성을 쌓는데는 가토 기요마사가 납치한 조선인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구마모토 현의 구마모토 시에는 울산정역(우루산마치역)이 있다.
울산성 전투의 처절함은 전투 당시 성내에 고립되어 있던 종군승 케이넨이 일기에 기록하면서 아주 생생히 전달되고 있다. 자기 유리한 거만 기록하는 무사나 다이묘들과 달리 케이넨은 승려였고 덕분에 일본군이 왕창 불리했던 울산성의 처절함이 고스란히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구원군의 울산 구원을 보여주는 울산성 전투도가 나베시마 가문에서 전해내려오고 있다.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울산의 가토대신 순천의 고니시를 먼저 노렸으면 이겼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울산성 전투 패전의 이유는 결국 외부 구원군 때문인데, 순천성은 육로로 외부구원군이 오기 힘들어 구원군이 오자면 바다로 오는건데…… 뭐? 왜놈이 바다에서 접근하고 있다고?[2]
6 미디어 창작물
정유재란 시기의 치열한 공성전이 펼쳐졌음에도 불구하고 울산성 전투만 다룬 창작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KBS 사극 불멸의 이순신에서 98화에 약 10~15분에 걸쳐 다루었다. 비록, 전투 장면은 후반촬영에서 겪는 가장 큰 문제인 예산부족으로 이전 전투씬을 재탕하고(이치전투, 2,3차 평양성 전투) 막사에서 고심하는 류성룡씬이 더 많이 나왔지만 갈증에 지친 일본군과 역시 갈증으로 말의 피를 마시는 가토의 모습에서 울산성 전투가 가토와 일본군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전투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징비록의 오프닝 시퀀스 중 일부는 이 항목의 서두에도 있는 '울산성 전투도 제3도'를 재현하는 데 할당되어 나올 것처럼 낚시를 했다. 그러나 드라마에 나온 분량은 정확히 3분 30초밖에 안된다. 전투씬도 이전의 전투 장면을 대부분 재활용했고 새로 찍은 장면은 얼마 안된다. 그래도 가토가 말피먹는 장면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