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군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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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식명칭은 육군대학교(陸軍大学校)였다. 1883년에 세워졌으며 1945년에 폐지됐다. 일본은 육군사관학교의 성적이 아닌 육군대학의 성적이 중요했다. 영관급에서 장성으로 진급하기 위해서는 육군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각 부대 지휘관들은 영관급 장교들에게 공부를 시켰고 얼마나 육대에 입학을 시켰냐가 지휘관의 실적이 되었다.[1] 지휘관참모를 교육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가 정작 지휘관의 실적을 판단하는 수단으로 변해버린 점을 볼 때 당시 일본군의 파벌과 집단사고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가늠할 수 있겠다.
일본 육군, 아니 일본군 전체에서 육군대학은 최고의 교육 코스였고 A급 전범 28명 중 대부분이 육대 출신이었던 것만 봐도 최고위급 까지 올라갈려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육대를 나와야 했다. 또한 일본군에는 중위, 대위로 승진하기위한 최소 기간은 각 2년, 소좌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4년이 필요했다. 하지만 육대출신은 최소 기간이 지나면 반드시 승진 시켜주었다. 이에 '10년 인사'라는 말이 있는데 졸업후 10년이면 대좌 진급은 기본빵이고, 그 다음 장군이 되느냐 마느냐는 각자의 인사관계에 달렸다는 것이다.

2 역사

육대는 참모의 필요성 때문에 생겼다. 지휘관은 이미 생긴 육군사관학교에서 배출하고 있었다. 성적이 우수한 몇명은 유럽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참모본부가 생기기는 했는데 참모를 길러내기 위해 육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당시 참모학을 전공하고 참모증서를 획득한 사람은 프랑스 육대 출신의 고사카 지히로 중위 단 1명 뿐이였다. 1883년 창설기에는 잠시 프랑스인 교관을 썼다. 이후 육대의 모델은 프랑스와 프러시아를 저울질 하다가 보불전쟁의 결과를 보고 프러시아를 선택 하였다. 이에 1885년 프러시아에서 보내준 메르켈 소령을 초빙하여 육대를 창설 하였다. 메르켈 소령의 도상 훈련 중심의 교육 방식은 이후 육대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여담으로 이시와라 간지와 도조 히데노리는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본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대의 창설 교관이였던 메르켈 소령은 전쟁론을 이해 못해서 딱히 아는척 안하고 그냥 얼렁뚱땅 넘어갔다고 한다.

3 학제

학생들은 28세 이하의 보병/기병 소위, 1년 이상 복무한 30세 이하의 포병/공병 중위가 대상이였다. 이러한 제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군수병과는 아예 모집 안했다는 것이고, 이후 일본군이 군수때문에 망하는 단초가 된다. 그바람에 군수계통은 기병 병과로 입교하였다. 또한 60기까지 졸업생 3,016명중에서 1기 도조히데노리, 2기 다니다 후미이에(헌병 중장) 딱 2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육사출신이였다. 심지어 거의 대부분이 육군에서 운영하는 유년학교 출신이였다.

초기에는 보병/기병은 3년, 포병과 공병은 2년이었지만(포병/공병은 수학을 잘하니 한과목 덜 공부해도 된다는 이유로) 이후 둘다 3년으로 통일된다. 수업은 크게 보통학과 군사학이 있었다. 보통학은 '교통, 역사, 수학, 통계, 국제공법, 법률, 외국어(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중국어)'등 608시간이였다. 군사학은 학과와 술과가 있는데 학과는 '마학, 위생, 회계, 병기, 건축, 참모학 요강, 전사, 전술, 해전술, 지형, 모형, 요새전술'등 1,796시간이였다. 술과는 '참관, 야외측량, 현지전술, 참모연습 야영, 전사여행, 기층근무, 추계연습, 특별대연습 참가'등 304시간이며 여기에 술과에 해당하는 마馬술 806시간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전술에 비해 전사와 참모요강 교육시간이 매우 적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여단/사단급 부지휘관의 양성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상급부대인 군/방면군에 이르게 되면 늘 상호견제와 동맥경화의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는 육군대학의 교육 방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4 폐단

개개인의 능력을 제쳐두고, 육대 출신이 군의 요직을 전부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요지경인데, 한술 더 떠서 군도조(軍刀組. 군토쿠미)라는 것도 있었다. 성적 상위 6등 까지만 덴노가 직접 은사의 군도를 하사하기 때문에 군도조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부족한지 1~5등까지의 군도조만 쳐주고 6등은 군도조로 안쳐주는 희한한 폐습도 있었다. 이들 군도조가 일본 육군의 주요 보직을 독점한다. 거기다 상위 12~13등까지 해외 유학의 기회가 주어졌는데 군도조는 스스로 선택한 나라에 유학 할 수 있었다.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시하라 칸지(차석 졸업), 자칭 '작전의 신' 쓰지 마사노부 등이 전부 군도조 출신이다. 특이한 예외라면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 도조 히데노리는 유일하게 육사를 졸업 안하고도 육군 대학을 가서 1기 수석으로 졸업했다. 이후 중장으로 제대 했는데[2], 육대 수석 출신이 대장을 못 단 것이 매우 이례적이다. 다르게 보자면 도조 히데노리는 매우 무능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육대 수석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장까지 진급한 것이다. 즉 실제 실력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할 지라도 육대 성적만으로 못해도 중장까지는 밀어주는 것이다.

해군의 경우 해군대학교에서 해먹 넘버(hammock Number)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말 사관학교 안에 해먹이 설치 되어 있는건 아니지만 대략 사관학교 내의 석차라는 느낌으로 불려줬다. 즉 해먹 넘버 1이라면 수석 졸업이라는 뜻이다.

1945년 일본 육사가 폐지되는 등 일본군이 해체되는 가운데 폐지되었다. 육상자위대 간부학교가 현재 육상자위대의 대위에서 영관 장교들을 대상으로 보수교육을 실시하는데 육군대학을 그 전신으로 삼고 있지는 않아 별개다. 단 육상자위대 간부학교장(중장) 2대부터 10대까지의 인원들이 일본 육군대학 출신이긴 했다.

해당문서에 나와있다시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 조선인은 꽤 많았던 것에 비해 육대는 영친왕 이은(중장, 35기), 이건(중좌, 51기, 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 이우(중좌, 원폭 사망 후 대좌추서, 54기)등 왕공족 외에는 홍사익(중장, 35기) 단 1명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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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재수, 삼수까지 해가며 육대에 입학하는건 정말 흔한 일이었다. 합격률은 10%
  2. 그것도 러일전쟁 당시 8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아무 실적을 못내서 중장으로 승진시켜주면서 당일 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