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육군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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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陸軍士官學校. 도쿄에 있던 일본육군사관학교.

1 개요

일본 육군장교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다. 기원은 1868년 교토에 세워진 병학교(兵學校)이다. 1869년에는 오사카로 이전하고 1871년엔 도쿄로 이전한다.

1874년에 육군사관학교 조례가 생기면서 1875년에 사관학생 1기가 입교한다. 이 제도는 11기까지 지속됐고 1,285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교육기간은 병과마다 달라 보병이나 기병은 2년이었고 1876년엔 3년으로 변경되었다. 포병공병은 3년이었지만 1881년에 5년으로 늘어났다. 당시의 교육 방식은 프랑스의 사관학교를 본 뜬 것이었다.

1887년에는 프로이센 식으로 사관생도를 받게 된다. 1889년에 제 1기가 입교한다. 이들은 육군유년학교를 졸업한 이들로 일병에서 상병으로 잠시 복무를 하다가 들어간다. 중학교 출신자는 12월에 생도 일병으로 입대해 이듬해 6월에 상병으로 진급한다. 1909년 일본 정부대한제국군의 장교 양성기관인 육군무관학교를 폐지한다.

1920년에는 사관학교를 둘로 나누어 육군사관학교 예과라고 불리게 되고 육군사관학교는 육군사관학교 본과로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는 졸업월의 차이로 유년학교 졸업생은 상등병으로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일등병으로 근무하다가 상등병이 된 이후 얼마 뒤 예과에 들어가는 체계였는데 이미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 적응에 큰 지장이 없던 유년학교 출신들에 비해 일반 구제중학교 출신은 생판 맨바닥에 그대로 헤딩하는 꼴이라 이로 인해 문제가 생겼기 때문.

사관학교 예과동안 2년 동안 교육을 받은 뒤에 3월에 졸업하여 4월부터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0월에 본과로 진학하는 구조가 된다. 37기부터 적용된 일이다. 본과에 가면 1년 10개월간 교육을 받은 뒤에 견습사관(상사)이 되어 다시 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한다.

1937년엔 본과가 다시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간다. 예과는 육군예과사관학교라 불린다. 육사는 가나가와의 자마로 이전하고 1938년엔 교육기간이 1년 8개월로 단축된다. 1941년에는 1년으로 단축된다. 전쟁에 인원이 부족하니 막 줄인 듯 하다. 웨스트포인트도 전시에 6개월 빨리 임관시킨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3년 6개월은 교육시켰다. 한편 육군예비사관학교라고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예비 군장교들을 교육시킨다.

항공병과는 1937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로 독립시킨다. 이들은 병으로 근무를 하지 않았다.

일본해군병학교가 철저히 학력주의에 근거하여 성적을 공표하는데 비해 육사는 그렇지 않았다. 일본 육군에서 육사 성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양성기관이 아닌 보수기관인 육군대학의 성적이 더 중요했다. 왜냐하면 일본 육군의 경우 육사 교육기간의 문제 때문에 초급장교들의 질이 낮았기 때문. 예과의 경우는 군사교육이 살짝 들어간 고급교육과정이라 정말 군사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은 1년 10개월짜리 육사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육대를 나오지 않으면 대좌까지밖에 진급할 수 없으므로 장군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였으며, 고급 지휘관이나 주요 참모로 올라갈 수도 없었다. 육대 입학 자체도 경쟁률이 매우 높았는데, 한 사단에서 육대 입학자를 몇 명이나 냈냐가 사단장의 인사 고과에 반영될 정도였다. 때문에, 몇몇 사단에서는 똘똘한 소좌들을 몇 명 선발해 일체의 과업을 면제시키고 입시 공부에만 전념케 하기도 했다. 육대 우수 졸업자는 덴노가 직접 하사한 군도를 받았다.

패전 후에는 주일미군이 점령하여 현재는 주일미군의 기지인 "캠프 자마(座間)"가 되었다. 일본육군사관학교의 부대 별칭은 상무대(相武台)였다. 2007년에 마이클 잭슨이 위문공연을 오기도 했다.

1961년 12월 12일엔 육사 출신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기도하려고 한 것이 발각된 3무사건(三無事件)이 일어나기도 했다. 왜 3무냐면 이 쿠데타를 기도한 육사 모임인 국사회(国史会)란데서 내건 게 무세금, 무실업, 무전쟁(無税・無失業・無戦争)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쿠데타를 기도했는지 알 수 없고 쿠데타에 쓰려던 장비도 일본도와 소총 몇 개가 전부였고 체포된 인원도 13명이었다. 이중 가장 계급이 높았던 인물은 사쿠라이 타쿠타로(桜井徳太郎, 당시 64세)로 육군 소장 출신이었다. 미카미 다카시(三上卓, 당시 53세)는 5.15 사건에 참여한 일본군 해군 장교로 중좌 출신이었다.

이케구치 에칸(池口恵観, 1936-)[1]은 당시 25세로 참여했는데 중의원이었던 바바 겐지(馬場元治, 1902-1968)의 비서가 된지 2달만에 일어난 사건이라 문제가 됐는데 용케 잘 빠져나가고 지금은 불교에 입문하여 승려로 활동하고 있다. 이케구치 에칸은 당시 총리를 암살하고 군국주의일본을 부활시키려던 쿠데타에 참여했는데 정작 2012년엔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수교가 이뤄져야하며 식민지배에 사죄한다고 말했다. 이 인간은 아베 신조와도 친분이 있다.

2 한국인 출신

만주국육군군관학교와 더불어 대한민국 육군의 창군 멤버 상당수가 여기 출신이다. 초기 육군참모총장들도 일본 육사 출신이 많았다.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26기), 채병덕(49기), 신태영(26기), 정일권(55기 상당[2]), 이종찬(49기), 이형근(56기)이 일본 육사 출신이다. 백선엽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이다. 이응준은 일본 육군 대좌, 채병덕과 신태영, 이종찬은 중좌 출신이며 정일권은 만주군 대위 출신이다. 박정희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만주군육군군관학교에 들어갔으나 성적이 좋아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57기에 편입하여 1944년에 졸업했다.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엔 초대 공군참모총장김정렬이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 출신이며 장지량도 육항사 출신이다. 김창규는 일본 육사 출신이다. 8대 박원석 또한 육항사 출신이다. 대한민국 해군의 경우에는 간도 특설대 출신으로 이뤄졌던 대한민국 해병대의 인원들을 제외하면 설립 주체가 일본군과 무관했고[3], 또 일본 해군 역시 조선인에 대한 문호가 극히 좁았던 관계로[4] 일본군 출신 참모총장이 없다.

육군참모총장 가운데 일본 육사 출신은 아니지만 초대 합참의장을 지내기도 했던 이형근은 소좌 출신이며 11대 송요찬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다. 최영희는 일본 센슈대학교를 다니던 중에 일본 육군 소위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으며 장도영은 토요 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 김종오도 일본주오대 재학 중에 육군 소위로 끌려갔다. 민기식은 만주건국대학을 나온 뒤에 일본 육군 소위로 참전했다. 16대 참모총장인 김용배도 일본 육군 소위 출신이며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김계원도 일본 육군 소위로 전선에 갔다. 1969년에야 한국 육군사관학교 출신인 19대 서정철 대장이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

자세한 사항은 위키백과를 볼 것.

일반적으로 친일파로 분류되는 일본 육사 출신 조선인임에도 일본군을 거부하고 독립군으로 간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노백린(11기)과 지청천(26기), 김경천(23기) 등이 있다. 노백린은 경술국치 전에 졸업해 대한제국군에 소속되었다가 군대 해산 후 망명, 지청천은 졸업 후 일본 육군에 소속했다가 1919년에 만주로 망명, 김경천은 경술국치 전에 입학해 1911년 졸업 후 일본 육군 소위 임관을 거부했으나 '독립전쟁을 벌이려면 일본군에 들어가 군사 기밀을 빼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중위로 복무중 1919년에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 망명했다.

3 유명 동문

3.1 조선인(한국인)

3.2 일본인

3.3 중국인

  1. 법명으로 속명은 사메지마 마사즈미(鮫島正純)였다.
  2.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서 교육받다가 유학갔다.
  3. 초대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중화민국 상선학교를 졸업하고 중화민국과 독일 상선에서 항해사로 일했다.) 등 창설 멤버 대부분이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었다.
  4. 1943년에야 수병에 한해 지원을 받았고, 그나마 함정에는 배치하지 않고 육전대나 설영대(시설대), 항공대, 육상 경비대 등에만 배치했다. 해군병학교는 패전시까지 조선인의 입학을 불허했으며, 소수가 일본인 가정에 양자로 들어가 서류상 내지인(일본인)으로 분류되어 입학 및 임관한 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