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와라 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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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原莞爾[1]
(1889. 1. 18. ~ 1949.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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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센다이 주둔 제4연대장 이시와라 대좌.[2]

1 개요

"기관총의 효과적인 사용법은 비행기에 장비시켜 주정뱅이가 길을 걸어가면서 오줌을 갈기듯이 적 종대에 사격하는 것이다." - 육군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때 구두 시험 문제에 대한 답변
무기도 점점 개량돼서 비행기에서 폭탄을 투하하는 것이 아니라, 폭탄 자체가 하늘을 날아가 적의 도시를 파괴할 것입니다. - 미사일의 예언

현실판 이카리 겐도

일본 제국의 육군 군인이며 동시에 독특하게도 사상가이다.

그의 사상을 요약하면, '동양과 서양의 대표 국가가 준결승을 치르고 결승전(세계 최종전쟁)이 일어나고, 이긴 나라가 전 세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고, 일본을 맹주로하는 아시아연합국가가 그 최종 전쟁에서 이기면 현인신(現人神) 천황을 중심으로 전쟁이 없는 평화와, 과학기술도 발전해서 모두가 잘 사는 지상낙원인류보완계획이 올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은 국력을 길러야 한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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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이시와라 간지

야마가타현의 가난한 사무라이 집안 출신. 일본 북동부 지역은 발전이 안 된 가난한 지방으로 옛날에는 머리도 좋고 성적이 우수하지만 집안이 가난한 인재는 학비가 면제되고 국가가 먹여주고 재워주는 군사 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시와라 간지도 본인의 적성과는 상관없이 1909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1기로 입학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육사를 졸업하고 1910년 4월부터 1912년까지 조선에서 2년간 군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육군의 엘리트들이 그러듯이 1918년에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여[3] 2등 성적으로 졸업했다.[4] 그리고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들을 유학길에 오르게 해 주는 국비장학생 신분으로 독일에서 유학 생활을 하는데, 당시 유럽에서 퍼져있던 황인종 멸시 사상[5]을 접하고, 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깨닫는다.[6] 그리고 황화론의 반발로 일본과 중국이 힘을 합쳐 서양 열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학가기 직전인 1920년, 일련정종계열의 신흥종교인 국주회(国柱会)[7]의 열렬한 신도가 된다.[8] 이 국주회의 교리가 <세계최종전론>의 모티브가 된다.
독일 유학 중이었던 1923년 일본에서 일어난 관동 대지진은 니치렌 대사가 설법한 세상이 종말로 치달리는 변환기에 들어선 증거라고 믿었다.

1차대전을 겪은 직후, 일본 군부는 앞으로 전쟁이 물량전·소모전·보급전·과학전이란 교훈을 깨닫고는 있었다. 다만 그렇게 가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논리적 결과가 나와서 그 반동으로 정신력 제일주의로 후퇴해 버린 것이다.[9] 그래서 황도파 파벌은 일본이 장기전을 하면 러시아처럼 왕정이 망할 것이라며 천황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전면전은 안 될 거야 그러니 제한적인 상황에서만 이길 수 있게 알아서 기자."는 결론을 내렸다.[10] 그러나 간지가 속한 통제파는 "우리도 경제 발전으로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있다! 다만 자유방임 경제 말고 계획 경제 통제"라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통제파 장교들인 간지나 나가타 데츠잔, 스즈키 데이치나 이케다 스미히사는 "빨갱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사실 통제파라곤 해도 현실 도피일 뿐, 정작 '자원 부족의 국가 일본'란 본질적인 문제에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그러나 만주를 차지하고 그곳을 거점으로 해서 공업화를 추진해서 궁핍한 나라 일본을 풍부한 나라로 바꾸려는 급진파가 이시와라 간지였다. 그의 사상은 통제파의 주장과 엇물리는 점이 있지만, 본인의 인맥은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는 않았다.

2 잘도 이런 미치광이 신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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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본부 작전과장 시절(1935년)

1928년 1월. 육군 내부 공부 모임인 목요회에서 이시와라 간지는 〈우리의 국방방침〉이란 강연을 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세계최종전쟁론(1940)라는 소책자를 집필하였다. 세계최종전쟁론은 그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에서 이시와라는 군사적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쟁양상을 예측했는데, 국가의 총력을 기울이는 형태가 되리라 하였다. 후반부는 내용이 몹시 짧아서 사실 분량적으로는 전반부와 대등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시와라의 종교적 믿음을 후반부에 집중하여 서술하였다.

이시와라 간지는 후반부에서 말법시대가 오는 시점을 계산하려고 석가모니의 열반 연도에서 더하기 빼기 계산을 한다. 그런데 이시와라는 이 중요하기 그지없는 후반부의 숫자 계산에서 일절 연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설명을 매우 두리뭉실하게 한다. 세계최종전쟁론을 다 읽어보아도 정확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난다는 소리인지 알기 어렵다.

이시와라는 어떤 불교학자의 주장을 따랐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본인이 저서를 집필할 무렵을 불멸 후 2430년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이시와라가 생각한 석가모니의 입멸 연도는 기원전 490년쯤이 된다. 이시와라가 따른 이론에서는 불멸 후 2500년 뒤에 말법시대가 온다 하므로, 대략 2010년 무렵에 말법시대가 된다. 집필 시점에서는 70년 뒤인데, 전반부에서 자기가 군사적으로 50년쯤 뒤에 큰 변동이 온다고 예측한 바와 별로 차이가 안 난다고 물타기하여 20년을 끌어당겼다. 그렇다면 말법시대는 1990년쯤이 된다.

이시와라의 종교적 계산에는 일련종 계열 종교인 국주회의 영향이 있었다. 이시와라는 국주회를 설립한 다나카 지카쿠(田中智學 1861-1939)라는 종교인의 주장을 믿었다. 다나카는 1904년 출판한 '묘종식목강의록'에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본화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는 현명한 왕과 본화를 믿지 않으려는 많은 어리석은 왕들의 다툼이 될 때에는, 여기서 세계의 큰 전쟁이 일어난다.…

(중략)

…비로소 전 세계 국가들이 참회하고 깨달아, 본화의 큰 위신력을 두려워해서, 세 가지 큰 비법의 큰 진리를 생각하게 될 것이며, 비로소 세계 각국의 왕과 신하 모두가 이 법에 귀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지카쿠는 1918년에 한 강의에서 "지금으로부터 48년 후(1966), 일천사해개귀묘법이 일어난다"라고 주장했다. 간지는 세계최종전쟁론에서 지카쿠의 주장을 신뢰하여 인용하였다. '일천사해개귀묘법'이란 천하가 법화경(여기서는 니치렌의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저 텍스트는 이시와라 버전으로 번역되어, '세계최종전론(1940)'에 다음과 같이 변해버렸다.

니치렌 성인은 장래에 대한 거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 그것이 어떤 것이냐면, 일본을 중심으로 세계에 일찍이 없던 큰 전쟁이 반드시 일어난다. 그때 혼게조교가 다시 세상에 오셔서, 본문의 계단을 일본국에 세우고, 거기서 일본의 국체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통일을 실현할 것이다. 그렇게 예언하시고 돌아간 것이다.

이시와라가 매우 두루뭉술하게 설명하였고, 앞에서 한 소리와 뒤에서 한 소리가 충돌하기도 하지만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1966년쯤 천하(동양?)가 다나카 지카쿠의 주장대로 니치렌의 가르침에 귀의한다.
  • 1970년쯤 내(이시와라) 주장대로 총력전 형태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나 동서양이 대결하며 단기간에 끝난다.
  • 법화경의 예언대로 1990년쯤 세계가 단일국가로 통일된다.

목요회에서 이시와라가 강연할 당시 동석하여 이 개소리를 듣던 통제파 장교인 나가타 데츠잔[11]은 '왜 미국과 전쟁을 해야 하나', '중국 진출같은 위험한 짓을 무릅쓰면서까지 일본이 강대국이 되어야 하는가' 같은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했다.'

이시와라는 종교인이기 때문에 일본의 전쟁수행력 따윈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일어날 것이고, 일본은 거기에 이겨야 한다'고 경전에 쓰여 있는 것이다. 그는 1918년의 강연에서 그리고 그는 일천사해개귀묘법을 위해,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장쭤린을 암살하고 만주사변을 일으킨다.[12]

이시와라는 일본이 이 최종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대국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이 풍부한 만주를 먹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실천에 옮겼다.

3 만주국

1940년에 간지가 쓰던 자전적(...) 에세이 '전쟁사대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쇼와 2년 늦가을, 이세 신궁에 참배했을때, 국위가 서방에 찬연하게 빛나는 영위를 받고서 돌아왔다.

1943년 이시와라는 자신을 찾아온 이지치 노리히코란 청년이 그 '영위'가 대체 뭐냐고 묻자 답해주었다.

"눈앞에 지구의 모습이 드러났으며, 금색의 빛이 일본에서 만주를 향하여 비추었다."

그렇다. 그는 세계 최종 전쟁을 위해 만주를 침공하란 계시를 받은 것이다.
중2병이라도 전쟁을 하고 싶어
오족협화도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만주의 땅과 공업 시설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인력도 필요하다. 따라서 아시아 여러 민족이 협력해서 세계최종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시와라는 세계최종전쟁에 필요한 물자 생산 기지, 만주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모델은 당시 눈부신 경제발전을 했던 소련 5개년 계획을 따와 '제1차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한다. 그러나 만주국의 5개년 계획은 부실한 게 많았다. 1941년 결과를 보면 실제로는 전체 목표의 반 이하의 성과를 거둔 것을 보였다.그러나 당시 대공황 시기의 미국과 비교해서 1966년 쯤되면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관동군 헌병 사령관으로 부임하고 만주국에 큰 영향을 발휘하던 협화회를 대신하여 철권 통치를 시작하면서 이시와라 간지의 이상은 박살나고 말았다. 그리고 도조 히데키와의 투쟁에서 패하여 본토로 쫓겨나고 만다.

4 세계최종전론

국내에 출간된 세계최종전쟁론

그럼 과연 이런 짓거리를 하면서까지 대비해야 하는 '세계최종전'은 무엇일까.

이시와라가 상상한 세계최종전쟁은[13] 총력전이며, 단기전이다. 그는 병기의 발달로 전쟁기간이 점점 줄어들 것이라 보았다. 국지전이나 전초전은 여럿 있겠지만 전면전은 단기간에 끝난다고 주장했다.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에 진학한 엘리트 군인 출신인 이시와라 간지는 세계 전쟁사를 연구하고 분석해서, 전쟁의 양상을 지구전(소모전)과 단기 결전이 반복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현재 상태(제2차 대전)은 소모전이지만, 멀지 않아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는 단기 최종전이 발생하리라 예견했다.

러일전쟁에서는 기껏해야 기관총대포 정도였지만, 1차대전이 되자 항공기, 독가스, 잠수함, 전차가 등장했다. 무기의 파괴력은 나날이 진화해 언젠가는 대도시나 나라 자체도 한방에 부숴버릴 결전 병기가 등장할 것이라 주장했다. 당연히 '결전 병기'는 산업력과 과학력이 우월한 국가(나치 독일)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부유한 국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뭐 등장하긴 했다, 자기네들이 맞아서 그렇지

이시와라가 육군 중장, 교토 제16사단장으로 재직할 1940년 4월 29일 당시 〈세계최종전론〉인류보완계획이란 강연을 하고 강연 내용을 출판했다. 그는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을 감행할 수 있었던 이유로 독일의 과학력을 언급했다. 특히 화학 공업의 발달로 합성 석유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 덕에 독일은 다시 세계 전쟁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라 주장했다. 그리고 앞으로 30년 후 다가올 세계최종전쟁을 대비해서 일본도 첨단 과학 무기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 가지고 있는 재래식 항공기로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자유롭게 성층권에서도 행동할 수 있는 근사한 항공기를 빨리 만들어 내야 합니다. 또한 단숨에 적에게 섬멸적 타격을 줄 수 있는 결전 병기가 나와야 합니다…

(중략)

…파괴도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최후의 대결승전에서 세계의 인구는 절반이 될지 모르지만 정치적으로 세계는 하나가 됩니다…그런 놀라운 과학의 시대에는 물이나 공기 같은 단순하고 무진장한 원료로 온갖 물자가 다 생산될 수 있게 되므로 가진 나라와 못 가진 나라의 구별이 없어집니다. 놀랄만한 산업혁명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척척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근데 예언한 거 다 미국에서 만든 거 보면 역예언가인 듯

결국 이시와라 간지는 군대에서 잘리고 만다.(...)

단, 강제퇴역 당한 것은 비단 사상적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사와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관동군을 주축으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만주를 충분히 공업화한 다음에 중국 침략을 수행해야 계획이 틀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이사와라는 이에 반대하다가 도조 히데키의 미움을 사서 퇴역당하게 된 것. 이때 이시와라는 후배 장성들에게 "각하께서 (만주사변에) 하신 대로 저희는 할 뿐입니다"라는 비웃음을 샀다는 일화가 있다.

퇴역 후에는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로 재직하며 2년간 군사학을 가르쳤지만 그를 위험분자라고 판단한 도조의 명을 받은 헌병대와 특별고등경찰이 그를 감시했고 학교에 압력을 가하여 그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태평양 전쟁 당시 과달카날 전투 직전 해군이 리츠메이칸 대학에 있던 이시와라 간지를 방문해 지구전으로 변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의견을 물었는데 그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이 전쟁의 승부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다. 일본군의 작전은 이미 공격중단점을 넘어버렸다, 전투력은 원칙적으로 근거지부터 전장까지 거리의 자승에 반비례하므로 지구전을 수행하려면 시작부터 반드시 공격중단점을 확정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지나(중국)사변부터 이번 전쟁에 이르기까지 이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 도조가 일으킨 이 전쟁은 완전히 말도 안되는 전쟁이다. 도대체 실패할 것이 뻔한 전장에 부대를 파견하는 바보가 어디에 있는가?

그에 대한 해답으로 그는 다음과 같은 전략을 해군에 건의했다.

" 현대전은 제공권이 없으면 재해권을 장악할 수 없다. 지금 제공권이 이미 상대방에게 넘어간 상황이므로 아군은 즉시 과달카날 섬에서 철수해야 하며 육군도 즉각 솔로몬 군도와 비스마르크 제도 및 뉴기니를 포기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아군이 보급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쪽으로는 버마의 국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중부에서는 필리핀을 포기하고 싱가포르와 수마트라를 중심으로 하는 자원지대를 견고히 유지하며 , 또한 본토 주위의 사이판 섬, 티니안 섬과 괌 섬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해야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봤을 때 이것도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그의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도 않는다[14].


그의 저술인 세계최종전쟁론은 한국에서는 2015년 9월 길찾기에서 출간되었는데 부제인 '만주국을 세운 이시와라 간지의 망상이론'에서 보다시피 그의 '망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보기 위해 번역 후 출간된 것이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과 같은 맥락에서 나온 책이다.

뜬금없지만 이시와라가 예언한 세계최종전쟁이 일어난다던 60년대에 실제로 날뛰던 무뢰배 무리들이 있었는데, 바로 극좌파인 적군파다. 게다가 이놈들은 대전략 수립 부문에서 이시와라 책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다......

5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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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의 이시와라 간지

그 후 다들 알다시피 제2차 만주국 5개년 계획 따윈 없었다.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해 버렸으니까.

이사와라가 생각했던 것보다 사반세기나 빨리 말이다.

그리고 이사와라가 예상했던 대로 단숨에 대도시나 나라 자체도 한방에 부숴버릴 결전병기는 그 당시 산업력과 과학력이 가장 강한 나라가 개발해서 일본을 두 방으로 처절하게 보내버렸다. 결국 일본은 패망했고, 만주국나라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뭔가 위험한 사상을 가진 군인은 잘리게 되어있다. 대한민국 국군도 군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원칙상으로는 규정되어 있다. 그러니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려 하던 간지가 잘리고 만 것은 당연한 결과인 셈. 하지만 도조 히데키에게 반대하고 태평양 전쟁 기간 동안 정작 민간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상 도쿄 전범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기는 커녕, 증인으로 출석하여 도조에게 불리한 증언을 잔뜩 하고 패망으로부터 정확히 4년 뒤인 1949년 8월 15일 사망했다. 그의 유골은 일련종의 매장시설에 묻혔다.

6 평가

이렇게 보면 터무니 없는 몽상을 전개하다가 조기에 퇴장해버린 군국주의자 쯤으로 여겨지기 십상이지만(그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이시와라 간지가 전쟁 전, 후의 일본에 남긴 족적은 적지 않다. 도조 히데키와 대립하다가 잘렸다는 사실 때문에 전후에 좀 나은(?) 인물로 평가된 점이 있기도 했고, 그가 주창한 '세계의 운명을 결정짓는 최종 전쟁'이라는 개념은 전후 일본인들의 전쟁관 혹은 서브컬처 속의 종말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이시와라는 다른 일본 군인들특히 육군의 여러 인물 들 중 거의 유일하게 생각이 있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있다'라고 해서 칭찬이 아니다. 말 그대로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머리 속에 뇌세포라는 게 있어서 생각이라는 걸 하고,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던 인물이라는 뜻이다. 즉 다른 일본 군인들은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15]

이에 관해서는 이시와라 자신도 "당신과 도조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 아니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소박하나마 자신의 사상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도조 히데키는 그냥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일 뿐이므로 대립이라고 할 것도 없다." 라고 말한 바 있기도 하다. 물론 그런 이시와라가 품은 사상이라고 해봐야 절대 좋게 봐줄 수 없는 것들이긴 했지만.

7 미디어

야스히코 요시카즈무지갯빛 트로츠키에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오족협화 운운하던 만주국이 일본인들의 땅도둑질 장소가 되었다고 개탄하고 지금 소련과 붙으면 중화기가 형편없는 일본군은 전멸당할 것이라고 비웃는 등 다른 일본군들보다야 아주 조금 깨어 있는 인물로 나오지만 잘 쳐봐야 무력한 몽상가다. 만주국에 트로츠키를 불러들여 소련을 치겠다는 커다란 몽상에 빠져 음모를 꾸미나 결국 부하이던 츠지 마사노부의 폭주 때문에 음모가 어그러지자 찌질거리는 모습으로 실제 인물이 잘 반영되었다는 평.

가와구치 카이지지팡구에선 난데없이 빼어난 현자 기믹으로 등장하였다. 도조와 대립했단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이시와라의 미래 예측이 비록 종교라는 미신에서 출발하였다고는 하나 일본의 평균 시대상을 앞서갔다는 면도 있고 해서. 이시와라의 문제는 초강대국과 산업세계의 대두를 예견한 것 자체가 아니라, 일본이 바로 그러한 초강대국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타국에 대한 침략과 점령을 필수로 여긴 그 사상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8 참고항목

  1. 보통 石原는 이시하라로 읽지만 이 사람의 경우는 이시와라이다. 구 가나 표기법에서는 は를 わ로 읽게 된다.
  2. 최종계급은 중장.
  3. 당시 일본 육군 장교의 최고 엘리트 코스였다.
  4. 2위로 졸업한 이유가 재미있는 건, 1등 성적 졸업자는 히로히토 덴노와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시와라는 평소 거침없는 발언을 하는 탓에 사고를 칠까 두려워 일부러 2등 성적을 주었다고 한다.
  5. 그 뿌리는 몽골의 유럽 침략부터 시작된 아시아인들이 불행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미신과 황인종을 미개인으로 깔보는 백인 우월주의 사상.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도 유대인을 황인종 취급을 했다.
  6. 그래서 파티같은 곳에 참석할 때는 일본 전통 복장을 입고, 포크와 나이프를 안쓰고 직접 지참한 젓가락을 꺼내서 먹었다고 한다.
  7. 특히 덴노를 높이 떠받드는 종파였다. 쉽게 설명하면 기독교에서 종말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라면, 이 종교에서는 그 메시아역은 부처이자 현인신 덴노. 대표적 슬로건이 팔굉일우(八紘一宇). 유명한 신자로는 미야자와 겐지가 있다.
  8. 일련종 계열은 한국에서는 창가학회가 유명하지만, 국주회는 전전에는 창가학회보다 주류였던 종파로, 창가학회와는 다른 성향의 종교다.
  9. 일본이 경제 발전을 할 시간에 미국, 영국, 소련이 놀고 먹지는 않을 테니까 뒤처진 국가는 뒤처진다는 결론이 나와 버린다.
  10. 다만, 그렇다고 군인이 대놓고 "우린 영미 못 이김"할 수는 없기 때문에 보병교전에는 "언제라도 공격, 공격", "기습을 하면", "정신력 제일"이면 이긴다고 써놓긴 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약소국을 상대할 때 내지는 제한전 시의 기준이고, 강대국과는 아예 전쟁을 하면 안 된다암묵적 불문율을 전제했다. 그러나 2.26 사건으로 황도파는 나가리되었으나 이 교리의 내막을 모르는 통제파가 그냥 이대로 간다!돼 버린 끝에…
  11. 그나마 일본군 중에 판단력은 정상적인 인물이었다
  12. 이 사건을 계기로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은 일본에 등을 돌린다.
  13.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 세계최종전쟁론은 훗날 적군파에게 영향을 준다. 역시 극과 극은 통한다(...)
  14. 그 이유로는 육군은 도조를 <도조 상등병>이라고 조롱한 이시와라의 의견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으며 해군의 경우는 만약에 육군이 다른 경우가 없으면 소련과 전쟁할 궁리를 할 것을 두려워 하였고 그렇게 되면 육군이 군사예산을 독점하는 것을 막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5. 당장, 일본 군인들의 저술이랍시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면, 자기 변명조의 회고록이나 사실관계 서술에 머무는 증언록 등을 제외하고 나름의 자기 논리에 따라 주장을 세운 저술이라는 것이 애초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