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언이

尹彦頤
1090~1149
고려 중기의 문신, 정치가.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으로 유명한 윤관의 4남으로 자는 원로(元老),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1 초년기

윤관은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당시 고려 지배층이 대부분 그랬듯이 두 명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그 아들들 중 어려서부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다. 벼슬길에 오른 후 아버지 여진 정벌 때도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고 윤관이 여진족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분전하여 종결자 척준경의 원군이 올 때까지 버텨내기도 했다. 여진 정벌이 끝난 후 승진 코스를 밟으며 승승장구했는데 인종, 정지상. 권적 등과 함께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기를 즐겼다고도 한다.
정치적 성향이 중도라고 할 수 있는데, 행동으로만 보았을 때에는 김부식과 함께 묘청의 난을 진압했기에 개경파라고 할 수 있으나 칭제건원을 주장한 것을 보면 서경파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서경파와 같이 금을 정벌한다 같은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2 김부식과의 대립

하지만 그의 불행은 당시 최고실세였던 김부식과의 갈등에 있었다. 예종 시절, 예종은 개경 영통사에 대각국사 의천의 비문을 윤관으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그 비문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영통사의 승려들이 예종에게 수정할 것을 건의했다. 이 때 예종은 당시 이미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지만 당시에는 신참 관리였던 김부식에게 그 비문을 고치게 했다. 이는 윤관의 명예와 관련이 있던 일이었는데, 당시 윤관은 최고위 재상에 있었고, 김부식은 하급 관리였기 때문에 상급자인 윤관의 체면을 생각한다면 김부식이 이를 사양해야 했으나[1], 김부식은 아무 거리낌 없이 이를 받아들여 윤관의 비문을 수정해 버린다. 윤언이는 아버지의 체면을 구겨버린 이 행동에 김부식에게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뒷날 국자감에 왕이 행차하여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게 하고 윤언이로 하여금 김부식 강의의 검토관 역을 맡겼는데, 윤언이는 주역에 매우 정통했기 때문에 고려사에 김부식이 진땀을 흘렸다고 기록되었을 정도로 날카로운 질문과 반론을 통해 김부식의 체면을 어전에서 제대로 구겨버린다.

3 묘청의 난

1135년 묘청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출정을 하고 여기에 윤언이가 막료로 참가하게 되는데 김부식이 이전에 그가 정지상 등과 어울려지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반발해서 결국 양주방어사로 좌천되고 말았다. 광주목사가 된 이후에는 어마어마하게 긴 사죄문 (고려사 윤언이 열전 참고)을 올리고 나서야 1140년 개경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당시 고려의 유명한 정치가들이 대개 그랬지만 문인이었음에도 무장으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 윤언이의 무용담이 상당하다. 특히 화공이 특기였고 공성병기의 활용법을 매우 잘 알고 있어서 서경성 공성전 때 화공과 공성병기를 적극 활용해서 서경성 성문을 불태우거나 건물에 타격을 입히는 등 막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정적이자 당시 토벌군 총사령관 김부식의 견제로 인해 제대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특히 김부식은 지휘부의 작전 방향과 상관이 없는 엉뚱한 곳으로 윤언이 부대를 옮겨버리기도 했다.

4 말년과 후일담

1149년 정당문학으로서 죽었고 문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문장이 매우 뛰어나 주역의 해설서인 역해를 지었으나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자호를 금강거사라 하였다.

한편 아들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고, 그 중 윤인첨은 문신임에도 불구하고 무신집권기에도 재상의 직책에 오르고 상장군까지 되어서 중방에 참여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윤관이 무신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고, 윤언이는 무신들의 경멸대상이었던 김부식과 척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 이대로 하면 일개 하급 관리가 재상의 허물을 드러내는 꼴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