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尹瓘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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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상이 그린 표준영정.

1 개관

고려문신, 장군. 동북 9성 개척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무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전 시대의 강감찬이나 뒷날 조선시대의 김종서, 권율 등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문과에 급제한 문신이다.[1] 이들과 비슷하게 군사적 업적 때문에 무관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린 케이스. 자는 동현(同玄).

2 일생

2.1 초년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개국공신 윤신달의 후손이고 아버지 윤집형이 '검교소부도감'이라는 직책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집안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다만 검교소부도감이 그렇게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집안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2]. 어머니가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과 (태조 왕건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딸인) 낙랑공주 사이에서 낳은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므로 왕건과 경순왕의 피가 섞인 가문이긴 하지만.[3] 문종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의 즉위를 에 알린 이후 출세길이 트여 여러 내직을 거쳤다.

1104년에 여진이 강력하게 성장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북방에 진출했으나 패배,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이에 숙종에게 고려군의 문제점을 진언하고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이라는 부대를 만들어 이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은 요나라의 침입의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천리장성 밖에서도 근처에 자리잡은 여진족들에 관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근데 그 천리장성 밖 여진족들이 준동하면서[4] 천리장성을 위협하자, 아예 간접 지배가 아닌 군사적 점령을 통한 직접 지배를 고려한 것. 고구려 계승 의식에 따른 고토 수복이란 명분과 오랜 전성기를 거치며 늘어난 인구수(물론 추정)에 따른 토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2.2 여진정벌과 동북 9성 개척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출처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이다.

별무반을 편성 훈련을 시키며 침략을 준비하던 중 숙종이 죽고 예종이 즉위한다. 예종은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윤관으로 하여금 1107년에 17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함경도 일대로 출진, 그 지역의 여진족을 격파하고 그 일대에 9성을 쌓게 하였다. 9성은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숭녕·통태·진양의 9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윤관이 고려와 여진의 국경을 표시한 비석을 세웠다는 선춘령의 위치가 제일 논란이 된다. 함흥평야설, 두만강 유역설, 두만강 이북설, 함경도 일원설 등이 있는데, 이게 조선시대에도 국경 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엔 20만 대군을 앞세워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땅을 손쉽게 점령, 9성도 별 어려움 없이 세웠으며, 이 공으로 예종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개경에 가 큰 상을 받았다. 당시 조정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우리 땅 늘렸다. 하지만 얼마 안가 곧 여진족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었고, 동북 9성은 점령을 넘어 과연 그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윤관의 전략은 9성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병목 지형으로 막혀있다는 정보를 믿고 짠 것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우회루트가 여러곳 존재하는 바람에 9성이 모두 여진족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었다. 이러한 수비상의 문제점과 재정 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를 두고 윤관의 공을 시기한 조정 대신들의 모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성의 수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진족은 9성의 곳곳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한 때 길주성은 여진족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윤관과 오연총의 구원군은 여진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밤 사이에 고려군이 토벽을 쌓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고려의 방어능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에 여진족은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던데 반해 고려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있었는지도 살펴볼 부분이다.[5]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또한 9성을 돌려받은지 얼마 안 되어 이들이 곧 금이라는 신흥 제국을 건설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만큼 당시의 여진은 꽤 강했다. 그리고 금이 와는 달리 고려에 대한 외교를 온건일변도로 간 것도 동북9성에서의 처참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여겨진다. 여진=금의 입장에서는 아닌 말로 땅을 되찾겠다고 창칼을 휘두르면 일패도지인데, 혓바닥을 놀려서 온갖 아양을 떨었더니 뺏긴 9성을 고려한테서 돌려받았다고 하면 이후의 고려에 대한 정책이 어떻게 정해질지는 뻔하지 않은가.

어쨌든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후 패전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종의 비호로 다시 최고 재상직인 '수태보 문하시중'으로 복직했으나 얼마 못가 1111년에 사망했다. 시호는 문경(文敬)에서 문숙(文肅)으로 고쳐졌다.

3 평가

고려사열전을 보면 윤관에 대한 기록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다. 출생연도도 알려져 있지 않고,[6] 윤관 열전을 봐도 여진 정벌 기사를 보면 소드 마스터 척준경의 무용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 그만큼 윤관의 활약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며 그나마 그의 전적을 보면 사실 패배가 더 많았다. 붙잡힌 히로인 신세였다 척준경이 구해주는, 뭔가 만화 같은 전개가 많았다고. 그런 의미에서는 명장이라고 보기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별무반 양성을 주도했고, 강력한 부족인 여진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어떻게든 9성을 사수해 냈으며 또 그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더욱이 그 전설적 소드마스터 척준경을 발굴해 낸 인물도 바로 윤관이었다는 사실. 척준경이 옥에 갇혀 죽게 되었는데, 이를 살려준 인물이 윤관이다. 그래서 척준경은 윤관 휘하에서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분투했고,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행적을 보면 뛰어난 장군이라기보다는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지도력과 굳은 의지가 장기인 '뚝심형 리더'의 인상이 더 강해 보인다. 말하자면 '프로젝트 기획자'형 스타일. 하지만 전쟁 초기에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일거에 9성을 점거한 작전에서 윤관이 보여준 전략적 안목은 상당한 것이었다. 고려사 말미에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전장에서도 경서를 휴대했고, 어진 이와 착한 것을 좋아함이 당대 최고였다."고 그를 평가하고 있다.

북방에서 갖은 고생을 하고 말년에 출세했어도 그것을 누려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 아들 윤언이와 손자인 윤인첨도 재상직에 올랐고, 윤관 이후 파평 윤씨는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가문발로 컸다기보다는 무난하게 높은 가문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최상위권으로 드높인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초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자수성가까지는 좀 오버고.

4 여러 왕비의 조상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윤씨와 함안윤씨가 갈라졌다. 그 10대손이 그 유명한 폐비 윤씨(윤관 11대손).

넷째 윤언이의 먼 후손이 문정왕후(14대손)와 윤원형이고, 그외 후손으로 세조비이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10대손),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을 낳은 정현왕후(12대손), 중종의 비로 인종을 낳았고, 윤임의 동생인 장경왕후(13대손)가 있었다. 8대손 윤척에서 정희왕후와 정현왕후의 집안이 갈라지고(정현왕후와 같은 항렬에 윤필상과 세종의 부마 윤사로가 있다.), 정희왕후의 아버지인 윤번(9대손)으로부터 윤임은 4대손, 윤원형 5대손이니까 윤임은 윤원형의 9촌 아저씨 뻘이 된다.(한국어 위백에서 한 대를 잘못 계산했다.) 이것만 외어도 세조~명종까지의 역사가 다 나오는 후덜덜한 집안.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량, 윤원로와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의 딸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가 된다. 숙빈 윤씨에게 문정왕후는 친고모이고, 장경왕후는 10촌 할머니뻘이 된다.

고려시대 충혜왕의 후궁 희비 윤씨도 윤관의 후손이다. 넷째 윤언이의 4대손 윤보의 첫째 아들 윤계종의 딸이 희비 윤씨이다. 충목왕에게는 외6대조 할아버지가 된다. 윤계종의 동생 윤안숙이 바로 조선시대 왕비들과 후궁들의 조상이 된다.

5 사돈의 유래

윤관은 부하 장군인 부원수 오연총과 사돈을 하기로 했다. 윤관은 아들을 오연총은 딸을 보내기로 한 것. 그런데 술통을 들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많이 와서 강이 불어서 건너지 못했다. 결국 윤관과 오연총은 등걸나무에 앉아 상대편을 마주보고, 서로 가져온 술을 상대방에게 권하는 제스처를 취한 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마셨다.

이때부터 등걸나무의 사와 손을 모으다는 돈수를 붙인 사돈수라는 말이 생겼고, 여기에서 사돈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사둔은 틀린 말.

6 청송 심씨와의 산송

윤관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데, 이것을 두고 청송 심씨와 400년을 끈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임진왜란 직후 윤관 묘는 관리되지 않아 버려진 상태였는데, 당시의 권신이었던 영의정 심지원이 이곳에다가 자기 씨족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윤관의 씨족인 파평 윤씨 일족은 100년 후 심지원의 묘를 일부 파내는 방식으로 항의하였는데, 심씨도 지지 않고 윤씨 일족의 처벌을 요구하며 사태가 커졌다. 파평 윤씨는 4명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고, 청송 심씨도 3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라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던 영조는 양쪽 무덤을 그대로 두라는 식으로 중재하였다. 그럼에도 윤씨가 불복하여 이장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자, 노한 영조는 당사자를 때려죽였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분쟁)이 늘어났던 이유는 조상을 공경하였던 유교사상과 묏자리에 따라 자손이 부귀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풍수지리설이 결합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위의 사례처럼 다른 집안 묘역에 자기네 묘역을 조성하거나, 심한 경우는 아예 파내고 자기 조상을 모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조는 이를 무척 짜증스러워하며 “근자에 상언(사대부가 임금에게 올리는 탄원)한 것을 보니 산송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된다”고 투덜댄 적도 있다. 산송 문제가 하도 심각해지자 영조는 “늑장·유장·투장 같은 것을 각별히 엄금하고, 법대로 시행하고, 수령 또한 잡아다 죄를 묻고, 비리를 엄단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린다. 그는 묏자리를 뺏는 것은 다른 이의 집을 찬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도 폈다. 아관파천 직후 당시의 대신이었던 어윤중이 피살된 것도 산송 문제 때문이었다.

이후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나 2006년, 청송 심씨는 심씨 일족의 묘를 이장하고, 파평 윤씨는 필요한 토지 2500여평을 제공하는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유산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내세워 이장을 거부함으로써 문제가 다시 불거질 기미를 보이는 듯 하다가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결국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7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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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위와 같은 장군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윤관이다. 그런데 이 동상에 한자로 '문숙공 윤관 장군상'이라고 써 있어서인지 동상 주인공이 윤관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 그나마 동상 앞의 윤관 약력을 적은 석판도 국한혼용체로 써 있는 데다가 읽기도 불편하다. 그래서인지 이순신 장군 동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
이 동상은 197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충청북도에 거주하는 파평 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정. 얼굴이 대단히 비범하다. 함경도에 있는 사당의 것을 옮겨 그린 것이라고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마치 민간신앙 속 장군들을 묘사한 느낌도 들어서 윤관 역시 신격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관이 여진족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강을 건널 때 잉어때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강을 건너게 도왔다는 설화가 있다. 윤관의 시조가 잉어가 변신한 미소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연관된 설화가 생긴 듯 하다. 덕분에 파평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잉어빵은 먹는다.
  1. 게다가 고려 때에는 조선과는 달리 무과 자체가 활성화되지 못 했고, 있어도 일시적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대신 무신들은 대대로 세습으로 유지했다.
  2. 하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파평윤씨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냥 윤집형의 재능이 별로였을 수도 있다. 단적으로 당시는 혼인은 가문간의 결합인데 윤관의 어머니가 속한 가문을 보면 실제로 가문이 별볼일 없었는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애초에 소소한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가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게 윤관 이후의 일이다. 당장 윤관의 출생연도부터가 미상이다. 이 점을 볼때 윤집형 개인의 재능이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많이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고려나 조선이나 혼인은 명문가의 여인과 그보다는 조금 가문의 격이 떨어지지만 능력있는 남성 간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즉 명문가에서 가문은 조금 쳐지지만 장래성 있어보이는 사위를 스카우트해서 밀어주는 셈이라고 보면 된다.
  3. 왕건이 외고조부, 경순왕이 외증조부인 후덜덜한 혈통이다.
  4.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장인 '완안오아속'에 의해 여진족 통일 작업이 펼쳐지며
  5. 참고로 당시 여진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주축으로 그들을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다. 특히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
  6. 굳이 출생연도를 추정하자면 1040년대 전반기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여진 정벌에 참전한 사령관들은 부원수 오연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60대의 노인들이었는데, 그나마 오연총도 당시 50대였기 때문에 적지 않은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