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식

金富軾
(1075년~1151년) Etching Kim 서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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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창이 그린 표준영정. 고려도경의 묘사를 재현한 듯하다.

1 개요

고려시대 중기의 문신. 호는 뇌천(雷川), 는 입지(立之),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주로 삼국사기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관직명이 수충정난정국찬화동덕공신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수태보문하시중판상서사겸이예부사현전태학사감수국사상주국치사(輸忠定難靖國贊化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檢校太師守太保門下侍中判尙書事兼吏禮部事賢殿太學士監修國史上柱國致仕)[1]로 무척 길다.

2 일대기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고려에서도 손꼽히는 문벌귀족 집안. 당대의 권신 이자겸(李資謙)하고도 맞짱을 뜰 수 있던 유일한 인물이였다. 하지만 이자겸 집권 시기에는 라이벌이라기보다는 협조하는 편이었다. 이자겸이 금에 대한 사대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고구려 계승의식을 강조하던 서경파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송나라와 신라에 우호적인 김부식이 속한 동경[2]파와는 어느정도 협력한 것. 적의 적은 내친구

사실 명문이긴 했지만 개경의 중앙귀족에 비하면 훨씬 못미치는 수준이었고, 부친이나 조부나 높은 직위에 있지는 않았다. 가문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떨치기 시작한 건 김부식의 5형제 때부터인데, 장남은 윤관의 여진전쟁 당시 전선에서 활약했고, 나머지도 모두 과거에 급제해서 5형제의 어머니는 고려에서 큰 포상을 받았다.

이후 이자겸 및 문벌귀족에 대항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예종은 신진 측근세력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이 때 측근세력으로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 한안인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자겸에게 제거된다. 이후 인종도 측근 신진세력을 양성하는데 이 때 적극적이었던 인물인 김찬과 안보린 등은 모조리 이자겸과 척준경(拓俊京)에게 제거된다. 김부식은 이 시기 한 번 꿈틀한 적을 제외하면 조용히 이자겸 치하에서 승진을 거듭하는 등 이자겸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중 김부식의 형인 김부일(金富佾)이 인종과 척준경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참가하여 이후 이자겸이 몰락한 이후에 급성장하게 된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김부식이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것은 아니다. 이후 그리고 척준경을 제거하면서 정권의 중심을 장악한 정지상(鄭知常) 등의 서경파에 대항하여 기존의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개경파 귀족으로서 김부식 일족이 급부상하게 된다.

그리고 서경파를 중심으로 하는 서경 천도운동이 결국 개경파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로 돌아가자 서경파중에서 강경파였던 묘청조광, 유참 등과 함께 서경을 기반으로 대위국을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른바 묘청의 난이다. 이 때 김부식은 개경파의 대표로서 묘청의 난을 제압하는 총대장에 임명 되는데, 일단 개경에 있던 온건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리고 시작한다. 결국 김부식은 1년 2개월에 걸친 내란 끝에 이 반란을 제압했다.

사실 서경 천도 운동은 국왕인 인종의 의도가 다분했다. 애초에 천도는 기존의 수도였던 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그 과정에서 왕권이 강화되는 수순을 밟기 때문이다. 인종의 경우는 이참에 고려 문벌귀족들을 엎어버리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서경의 서기가 돌고 하는 등의 장면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정치쇼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런 일화는 엄청나게 많다. 다만 상당수는 그걸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인종은 서경 천도와 왕권 강화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이게 외부적 칭제건원과 금국정벌 등으로 확대되는 것은 꺼리고 있었다. 당시 금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이자겸은 사대까지 받아들인 상황이었고, 서경파가 너무 강성해지는 것도 슬슬 견제에 들어가게 된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 일으키는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부터가 정지상 등이 묘청의 반란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증거이지만, 기존의 정적이므로 그런 것 없이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제거한 것이다. 애초에 문신간의 대립이기도 해서인지 고려사에서는 정지상 등은 반란자로 꼽지도 않고있다.

이때 김부식은 서경 하나로 반란군의 거점을 제한하는 계획을 세웠다. 김부식은 군을 셋으로 나누어 좌군은 황주와 자비령에서 서경을 견제하고, 우군은 동계로 진입하는 통로를 차단하며, 중군이 뒤에서 조율하는 방식으로 서경군의 세력 확대를 차단했다. 단지 이 기동만으로 개천, 성주에서 서경군 2,000명이 친왕파의 역봉기로 괴멸되고 서경군의 세력 확대 시도는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는 김부식의 동생 김부의의 제안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김부식이 이러한 전략적 의도와 결과를 예견할 식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직후 묘청의 목이 배달되었는데 여기까지는 관군의 무혈 승리였다. 다만 이후 난이 길어진 것은 정부 사절인 김부가 서경을 거칠게 다룬 탓이 컸다.

서경 공방전에서도 김부식은 서경군의 야습을 예측하고 대동강 남쪽의 후군에 예비대 1천명을 급파했고, 덕분에 관군은 서경군의 야습을 차단하여 서경군을 성 안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또한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간 것도 김부식의[3] 전략이었다. 김부식이 서경을 포위만 한 채 전쟁이 길어지자 그를 탄핵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김부식은 "전쟁이란 본래 빠른 승리를 기약하지 않는것도 있다"면서 공격론에 반대한다. 김부식은 서경의 기능 자체는 유지해야 한다고 보았고, 장기전으로 끌고가면서 최소한의 피해로 서경을 진압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묘청의 난 진압 과정에서 김부식이 치졸하게 윤언이를 견제한 것은 사실이나 그와 별개로 총사령관에게 요구되는 전략적 식견은 충분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공로로 의종 즉위후 김부식은 낙랑국 개국후(樂浪國 開國侯)로 봉해지기도 한다.

서경파를 제거한 이후 개경파 문벌귀족들은 그야말로 득세하게 된다. 김부식은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필연적인 내부 분열이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부식과 함께 서경파를 공격했던 윤언이와의 대립이다.[4] 윤관의 4남이기도 한 윤언이는 파평윤씨 가문으로 역시 고려에서 손꼽히는 문벌귀족 중에 하나였는데, 김부식은 윤언이가 묘청과 마찬가지로 칭제건원을 언급하였다는 이유로 윤언이를 탄핵한다. 이후 윤언이마저 좌천시킨 김부식은 고려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하지만 권불십년이라, 말년이 되자 그의 형제들도 모두 죽고 지지자들도 하나둘 제거되면서 김부식의 권력도 줄어든다. 그리고 마침내 김부식이 좌천시킨 윤언이에게 사면령이 내려져서 중앙 정계로 복귀하게 되면서 김부식은 수차례 은퇴를 청원한다. 김부식의 권세도 막을 내릴 때가 된 것이다.

이렇게 은퇴할 때가 된 김부식이 인종의 권유로 없어진 역사를 복원하라는 명을 받고 만든 것이 삼국사기이다. 김부식은 총제작자겸 감독일뿐 김부식이 독단으로 삼국사기를 쓴 것은 아니다. 다만 김부식의 입지를 고려하면 내용에 김부식과 그 세력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애초에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이는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황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은, 김충효, 정습명으로 김부식까지 모두 11명인데, 이들은 모두 김부식과 가까운 이들이었으며 주로 자료수집과 정리를 담당했다. 즉 편찬의 기준은 모두 김부식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여기에 김부식이 더한 것으로 추정되는 사론만 보아도 김부식의 의도는 국왕의 집필방침과 함께 양대축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3 사대주의 대표?

가장 대표적으로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비난한 사람이라면 단재 신채호가 있다. 단재는 조선상고사에서 김부식이 국사를 사대주의적인 삼국사기에 집약하고 당시 전해지던 다른 사서들을 말살했다고 적고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수십년후 이제현, 일연의 시기 혹은 조선 초기까지도 기존사서들이 전해지고 있었다. 애초에 사대주의라는 것 자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다른 나라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개념이 아니다. 상대가 우리 국력보다 훨씬 강한 대국인 만큼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비위나 맞춰주면서 얻을 것은 얻자는 논리다. 현실적이고 보수적이기는 해도 매국이나 나라의 정체성을 파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름부터 송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소식(소동파)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그러한 선입견을 강화시키기도 한다. [5]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김부식을 단순한 사대주의자로 보기엔 어려운 면들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 항목 참조. 물론 삼국사기가 꽤나 보수적인 내용인 것은 맞다. 애초에 삼국사기에 비교되는 고려시대의 역사서들이나 삼국사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는 구삼국사 등의 내용을 현재 추정하는 것과 비교하면 삼국사기는 보수적인 사서가 맞다. 다만 이런 부분을 인정해버리면 좋아할 세력[6]이 좀 많아서 대놓고 언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마땅히 다른 사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7].

김부식은 유명한 공자빠돌이이기도 했다. 왕이 국학에 방문해서 공자에 제사 지낸 것을 칭송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공자에 대한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하행국학표'를 저술했으며, 공자에 대한 찬사인 '중니봉부'[8]를 지어서 자신의 빠심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이런 특출난 점도 김부식이 모화주의자라는 평을 받는 한 가지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런 것은 유학자로서 당연한 행동이다. 애당초 고려의 정치제도가 유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행동이다. 당장에 전 세대의 서희강감찬, 윤관부터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여 벼슬길에 오른 유학자들이었고, 특히 윤관은 여진과 싸우는 진중에서도 경전을 휴대하고 탐독한 인물이다. 때문에 김부식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게 공자를 모화했다고 볼 수는 없다.

물론 정치가 김부식은 좀 다르다. 정치가 김부식은 금에 사대를 하자는 이자겸의 주장에도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고, 고려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남송에 대해서는 대놓고 거절했다. 같은 모화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아도, 고려시대의 김부식과 조선후기의 임경업 같은 부류는 차이가 크다. 이는 시대적 차이에 의거한 것이다.

따라서 김부식이 비난받아야 한다면 '사대주의자' 라기 보다는 그가 '신라정통론자'였고, 경주에 기반을 둔 경주 김씨로서 이를 신라의 삼국통일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는데, 그리고 대금사대를 시작하여 국시였던 북벌정책을 취소함에 있어서 그 정책이 불러올 반동을 무마하고 집권세력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명분론으로서 이용하여 궁극적으로는 역사를 지극히 정치적으로 이용한 자라는 것일 것이다.

다만 김부식의 삼국사기 신라는 안 좋게 표기하면 안 좋게 했지 절대 편향적이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 근거로 허구헌날 외적에게 털리는 호구국가[9]라는 것과 정치와 사회가 혼란스러움[10] 신라에게 안 좋게 서술된 거싱 많다는 것. 삼국사기는 김부식 혼자 편찬한 것[11]이 꼽힌다.
이는 상단에도 언급되지만 죄다 반박이 가능하다. 신라가 털린 것은 기록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애초에 신라는 국가 형성도 늦었고, 오랫동안 강성했던 국가가 아니었다. 한타 치고 나가서 당의 힘을 빌려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을 뿐이다. 때문에 신라의 패배 기록 자체를 숨길 수도 있었다고 하는 것은 신라중시가 아니라 역사 왜곡이다. 그리고 신라의 혼란스러움 묘사는 신라 후기인데, 신라의 혼란을 설명하지 않으면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고려의 건국을 설명할 수 없다. 김부식은 신라인이 아니라 고려사람이다. 신라의 흠을 가리고 고려 건국을 설명할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한 사람은 김부식 외에도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김부식은 대표편찬자로 그 아래 있던 사람들은 김부식보다 아래 위치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사론의 경우는 온전히 김부식의 의견이다. 무엇보다도, 삼국사기 내용이 신라 편향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삼국사기 편찬자가 김부식 외에도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그 신라편향적이지 않은 부분이 김부식의 의도가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김부식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기준인가.

4 수많은 라이벌

동시대의 명문장가 정지상과는 숙명의 라이벌 관계인데 문장에서는 정지상이 한 수 뛰어나서 김부식이 그를 질투했다고 한다. 사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지상과는 달리 김부식은 시보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당송대의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 때 즈음 고려에서는 그간 대세를 이루던 사륙변려체 대신 고문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훗날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은 제일 먼저 정지상부터 잡아 죽였다.

사실 정지상은 서경파였기 때문에 묘청과 연결고리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때 태평스럽게 개경에 남아있었다는 것만 봐도 반란과 직접적 연관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묘청 토벌을 담당한 김부식이 개경에 있던 서경파인 정지상, 백수한, 김안 등의 목부터 날린 것은 동경파가 서경파를 "기회는 이 때다" 하면서 제거한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

이는 고려 건국시기부터 있었던 고구려 계승주의와 신라 계승주의 간의 대립의 종결이기도 했다. 즉, 처음에는 고려 예종이 윤관 등을 통해서 육진 개척한 시기까지는 고구려 계승세력이 주도했지만, 나라 이름도 고(구)려 외척 이자겸이 득세하여 금에 사대를 받아들이는 때는 신라 계승세력이 정권에 중용되었다. 그런데 서경파인 정지상 등이 척준경 등을 동원해 이자겸을 제거하면서 이자겸에 협조한 동경파도 같이 눌러 버리다가 결국 척준경도 제거되면서 고구려 계승세력이 정권을 대부분 장악하게 되고, 이에 대한 절정이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으로 터져 나왔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를 제압했고 그 결과 서경파가 완전히 박살나 버렸다. 최종승자는 신라파

야사 <백운소설>에 의하면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이고 난 뒤 어느날 헛간에서 쭈구리고 앉아 큰일을 보고 있었는데, 원한을 품은 정지상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김부식의 부랄을 덥썩 움켜쥐고 터트릴듯 말듯 오물락쪼물락 거리며 '이게 누구의 부랄이냐'고 묻자 부랄이 터질까봐 식은 땀을 흘리던 김부식은 그 희롱에 발끈하며 '니 에비 부랄이다 니 에비!'라고 발언하는 바람에 화가 난 정지상이 그 즉시 부랄을 터트려 죽였다고 전해진다(...). 즉 최후는 내가 고자라니......

또 백운소설에는 김부식이 시를 짓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것밖에 못짓냐 멍청아"라고 비웃고는 더 좋은 구절을 제시해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자세히 말하면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柳色絲綠 버들가지는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桃花點紅 복사꽃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툭튀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싸닥션을 날리더니 다음과 같이 면박을 주었다고 한다.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는 미친 놈이 어딨냐? 시를 쓰려면 "柳色絲綠(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桃花點紅(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라고 왜 짓지 못하는 거냐?!"

겨우 두 글자만 바꿔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일화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이 일화는 시를 퇴고하는 하나의 요령으로 인용되곤 하는 일화 중 하나다. 사실 김부식의 시보다 정지상이 고친 버전이 더 세련되긴 하다.

또한 본인이 토벌한 인물인 묘청과는 지금까지도 한국사 속 사상적 라이벌의 대표적인 예로 알려져 있다. 사대주의와 자주의 대표나 유학자와 승려라는 여러 입장 등으로 라이벌 플래그를 형성하는 모양. 물론 이렇게 단순화해서 보기에는 많이 복잡한 부분이지만.

묘청이나 정지상에 비해 덜 알려진 감이 있지만 윤관의 넷째 아들인 윤언이와도 여러 사연이 얽혀 거의 평생을 대립했다. 윤관은 예종의 명으로 대각국사 의천 의 비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의천의 제자들이 나중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고 항의를 하게 된다. 이에 예종은 김부식에게 비문을 고치게 하는데, 문제는 이 때 김부식은 아직 신진 관료에 불과했고, 또한 형식적으로라도 사양하지를 않아 윤관의 아들 윤언이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에 대한 복수로 윤언이는 김부식이 자기 전공인 <주역>을 인종에게 강의하는 자리에서 그가 진땀을 뺄 정도로 몰아붙여 무안을 주었다. 묘청의 난 진압 때 함께 참전하여 공을 다투기도 했는데 총대장 김부식은 윤언이가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그의 부대를 작전 방향과 전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이렇듯 김부식 본인도 뛰어난 능력만큼 자부심이 대단히 강했던 인물이었고 거기에 비타협적인 성품의 소유자라 이래저래 라이벌이 많았던 인물.

5 무신정변의 씨앗

김부식은 고려의 문관을 대표하는 인물인 동시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 마지막 문신 권력자였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김돈중은 행실이 경망스럽고 무례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아들 역시 아버지랑 짝짝궁으로 무신정권 확립에 큰 공(?)을 끼쳤다.

고려사에는 섣달 그믐[12]에는 역귀를 쫓는 의식을 했는데, 각 신하들이 각자 일종의 장기자랑[13]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로 날뛰고 즐기는 중에 내시(內侍)[14]였던 김부식의 젊은아들 수염킬러김돈중이 무신들을 만만히 보고는, 당시 견룡대정[15]이었던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먹는 사건이 발생한다.[16]알다시피 잘 키운 털이라도 그슬리면 그냥 말려버린다. 당연히 빡친 정중부는 싸가지없고 병신같은 김돈중을 때리고 욕했는데... 문제는 김부식이 황제한테 정중부를 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황제였던 인종은 그걸 허락했다.(...) 아무리 문신이 무신보다 위인 사회였다지만 김부식과 김돈중이 해도 너무했던 것. 다만 인종은 정중부를 아끼는 사람이었고, 은밀하게 도망다니게 해줘서 실제로 벌하지는 않았다. (부전자전)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정중부는 수십년 동안 깊은 앙심을 품게되고, 결국 이 앙심은 무신들의 반란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다만 김부식은 1151년에 죽었고, 그 뒤 약 20년 뒤인 1170년에 무신정변이 일어났을 때에는 김돈중은 무신들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하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고 죽은 김부식도 무덤까지 파헤쳐 시체를 토막내 부관참시당했다. 이렇게 하여 직계 핏줄이 끊어지고 만다. 그래서 현재도 그렇게 많은 경주 김씨 중에서도 김부식의 후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6 그 외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김부식의 외모에 대한 묘사가 있다. 그 기록에는 얼굴은 시커멓고 키가 크고 뚱뚱하며 눈이 튀어나왔다고 적혀 있다. 포청천? 또 서긍은 소동파 빠심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김부식, 김부철 형제의 이름 돌림자를 보고 슬그머니 어떤 뜻인지 물어보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 그가 등장하는 가사가 "죽림칠현 김부식"인데, 이 때문에 김부식이 죽림칠현이었다거나, 혹은 죽림칠현과 관계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김부식은 고려의 죽림고현과 전혀 관계 없는 인물이고 죽림칠현보다 한 세대 전의 사람이다. 죽림칠현은 김부식이 죽고 난 뒤인 무신정권기에 주로 활동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의 가사는 그냥 단순히 죽림칠현과 김부식을 동시에 나열한 것 뿐이다.

  1. 본인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
  2. 경주. 무인집권기의 신라 부흥운동인 동경의 난으로 인해 중심지였던 동경이 경주로 격하되게 된다.
  3. 사실 동생인 김부철의 능력이 컸다. 지구전도 김부철이 장기전략책인 평서십책 平西十策이다.
  4. 다만 윤언이와 김부식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 전부터 뒤틀린 관계였다. 김부식이 재상의 지위에 오르기 전에 벌어진 비문 사건부터 시작해서, 질긴 악연은 20년이 넘도록 지속된다.
  5. 게다가 동생 이름조차도 소식의 동생인 소철에게서 이름을 따와서 김부철이다(...).
  6. 환자 계열 추종자라거나, 일본이라거나, 중국이라거나 꼽아보면 꽤 많다.
  7.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성향을 대놓고 보여주는 것은 사론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의 말이 태사공왈 로 나타나는 것처럼,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의 의도 역시 사론으로 나타나는데, 이 부분을 보면 김부식의 의도 꽤나 모순적으로 나타난다.
  8. 중니는 공자의 자로 공자를 봉황에 빗대어서 칭총하면서, 자기도 공자의 뜻을 따르고 싶다는 글이다.
  9. 백제에게 패배(해론, 눌최, 김흠운, 죽죽 열전, 본기 등등) 고구려에게 패배(태종왕 본기, 필부전 등등) 말갈에게도 패배(문무왕 하의 탈기, 소나 등등) 당에게도 패배(석문 전투)
  10. 장보고 등 귀족들 땜에 허구헌날 왕위 교체가 심함(김양,장보고), 개혁안을 올려도 안들어 먹음(최치원), 골품제 땜에 출세길이 안 열려서 당나라로 망명(설계두), 흉년이 들자 곡식 빼돌리고, 안참여하면 독살(검군 열전) 등등
  11. 삼국사기는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의 주도하에 최산보(崔山甫)·이온문(李溫文)·허홍재(許洪材)·서안정(徐安貞)·박동계(朴東桂)·이황중(李黃中)·최우보(崔祐甫)·김영온(金永溫) 등 8인의 참고(參考)와 김충효(金忠孝)·정습명(鄭襲明) 2인의 관구(管句) 등 11인의 편사관에 의해서 편찬되었다. 인종 23년(1145) 을축년
  12. 제석(除夕)
  13. 잡기(杂技)라고만 되어 있다. 일반적으로는 귀신쫓는 춤 같은 것을 췄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4. 고려시대의 내시는 조선시대의 내시와는 전혀 다른 성향을 지닌 엄연한 관직으로 왕의 최측근역을 맡은 정식관료들이었으며, 다른 관직을 지닌 자가 겸임하였다. 고려 중기까지는 유력 귀족 자제들이 주로 맡았으며 이를 환관이 맡게 되는 것은 원간섭기를 거쳐 가며 원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다. 그래서 고려 초중기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선 내시에게 수염이 있다.
  15. 견룡군은 고려 왕실을 지키는 근위대이다.
  16. 정중부는 외모도 훤칠하고 멋진 수염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의 외모가 왕과 여러 대신에게 주목을 받자 김돈중이 이를 시기하여 벌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