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15대 숙종 왕옹 | ← | 16대 예종 왕우 | → | 17대 인종 왕해 |
묘호 | 예종(睿宗) | |
시호 | 명렬제순문효대왕 (明烈齊順文孝大王) | |
능묘 | 유릉(裕陵) | |
성 | 왕(王) | |
휘 | 우(俁) | |
자 | 세민(世民) | |
절일 | 함녕절(咸寧節) | |
배우자 | 경화왕후(敬和王后), 순덕왕후(順德王后)[1], 문정왕후(文貞王后) | |
아버지 | 고려 숙종 | |
어머니 | 명의왕후(明懿王后) | |
생몰년도 | 음력 | 1079년 1월 7일 ~ 1122년 4월 8일 |
양력 | 1079년 2월 11일 ~ 1122년 5월 15일 (44세) | |
재위기간 | 음력 | 1105년 10월 2일 ~ 1122년 4월 6일 |
양력 | 1105년 11월 10일 ~ 1122년 5월 15일 (16년 6개월) |
1 소개
고려 현종때 부터 100여년간 이어진 태평성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명군
어린 조카 헌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왕이 된 숙종(고려)의 맏아들. 부왕 숙종이 여진 정벌을 앞두고 급작스럽게 붕어하자, 그 유지를 이어 윤관(尹瓘)에게 여진족 정벌을 명해 동북9성을 쌓는 등 큰 수확을 보았지만(1107) 그만큼 손해도 많았고 여진의 세력이 강성함을 경계해서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결국 이같은 여진족의 끈질긴 게릴라 전술에 지친 예종이 동북 9성을 여진에게 포기함으로서 아니러니 하게도 여진 중흥의 발판이 되었다.
이후 패전의 책임을 들어 윤관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결국 윤관은 파직되었다. 그러나 죽기 직전(1110년,참고로 1111년 사망)에 예종에 의해 복직되었다. 여진 정벌 중에 한국사 역사상 최강의 인간흉기장수로 일컬어지는 척준경이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고, 그 활약은 인종 때까지도 이어진다.
2 대내 업적
예술에 조예가 깊어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향가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나름 문학적 소양을 나타냈다. 이건 사실 왕권 강화 목적이다. 공산 전투시 사망한 김락과 신숭겸을 기리는 글을 써서, 신하들에게 왕인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목적이었다. 예종은 또 현재 아악(雅樂)의 근본인 북송의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와 이를 정비했으며, 9성 개척으로 인한 국력 소모의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는 등 민생에도 신경을 썼다.
또한 학당을 많이 설치하는 등 유교적 통치를 강화하기도 했다. 이미 최충의 학당으로 대표되는 사교육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어서 숙종 대에는 폐지론까지 나온 국학(공교육) 진흥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선 국왕이 바로 예종이다. 9재 학당을 모방하여 국학 7재를 개설하였다. 7재란 주역, 모시(시경), 주례(3례의 하나), 상서(商書, 서경의 일부), 대례(戴禮, 예기), 춘추(오경)와 주례가 된다. 또 장학재단인 양현고를 국자감에 설치하였으며, 학문 연구기관인 보문각과 청연각도 설치하는 등 고려시대 중앙 교육 시설의 틀을 잡았다.
3 외교 업적
송나라와의 관계는 문종, 선종대를 거치며 상당히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송나라에선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國信使)로 승격시켜 당시 송나라를 제외한 나라중에 가장 높은 직위로 인정해 주었다.
정화(政和) 연간(1111년 ~ 1117년)에 고려의 사신을 국신사로 승격시켜 예우가 서하국보다 위에 있었고, 요나라 사신과 함께 추밀원(樞密院)에 예속시켰으며, 인반관(引伴官)등도 고쳐 접관반(接館伴), 송관반(送館伴)이라 하였다. 《대성연악(大晟燕樂)》과 변두(籩豆), 보궤(簠簋), 존뢰(尊罍), 따위의 그릇도 하사하고, 심지어는 예모전안에서 고려 사신을 위해 연회까지 베풀었다.
흠종(欽宗)이 즉위하자 (고려의) 축하 사신이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어사(御事) 호순척(胡舜陟)이 “고려가 50년 동안이나 국가(國家)를 미폐(靡敝)케 하였으니(재정을 궁핍하게 하고 민생을 피페하게 했으니) 정화(政和) 이후로는 사신이 해마다 와 회(淮)· 절(浙) 등지에서는 (고려 사신이 오는) 이를 괴롭게 여기고 있습니다. 고려가 과거에 거란(契丹)을 섬겼으므로 지금에는 반드시 금(金)나라를 섬길 터인데, 그들이 우리의 허실(虛實)을 정탐하여 (금(金)나라에) 보고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고려의 사행(使行)을) 중지시켜 오지 말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명주(明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그 예물(禮物)을 바치도록 하였다. 이듬해 그들은 비로소 귀국하였다. 왕휘(王徽) 이후부터 사신이 끊이지는 않았으나 거란(契丹)의 책봉(册封)을 받고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여 (송(宋)나라) 조정에 올린 글이나 기타 문서에 대부분 간지(干支)를 사용하였다.고려가 거란(契丹)에 대해 한 해에 조공(朝貢)을 여섯 번이나 하였지만 (고려 사신들의) 가렴주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거란에서는) 항상, “고려는 바로 우리의 노예(奴隷)인데 남조(南朝)는 무엇 때문에 고려를 후하게 대우하는가?” 라고 하였다. 송(宋)나라 사신이 (고려에) 왔다는 소식을 들으면 반드시 다른 일을 핑계하여 와서 정탐하고 하사한 물건들을 나누어 가져갔다. (거란이) 한번은 고려가 서쪽으로 (송(宋)나라에) 조공(朝貢)한 일에 대하여 힐책(詰責)하자, 고려는 표(表)를 올려 사과하였다. 그 표(表)의 대략 내용이, “중국에서는 3갑자(甲子)만에 한번씩 조공(朝貢)하고 대방(大邦)에게는 1년마다 여섯 번씩 조공(朝貢)합니다.” 하니, 거란이 깨달아 (고려가)마침내 화(禍)를 모면하였다. 고종(高宗)이 즉위하여서는 금(金)나라 사람들이 고려와 내통할까 염려하여, 적공랑(迪功郞) 호려(胡蠡)를 가종정소경(假宗正少卿)으로 삼아 고려국(高麗國)의 사신으로 임명하여 정탐하도록 하였다. 호려(胡蠡)의 귀국에 대해서는 사관(史官)이 기록을 빠뜨려 버렸다.
《송사》 외국열전 고려전
심지어 송나라에선 고려 사신들이 행패를 부리는데 이를 보고 한탄하는 기록도 남아있다. 참고로 이시기 고려 사신의 위상은 엄청났는데 각국의 사신들이 송황제와 대면하기전 고려사신을 먼저 접견해서 문제라는 기록도 남아있다. 사실 송사 고려전에서 문종 - 예종 사이의 기록들은 송나라에서 "와 고려 저새퀴들 진짜 너무 깝치는데 우리가 손쓸 방법은 없고 어휴.." 같은 한탄이 굉장히 늘어난다(...).
또한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를 파악하여 거란과 여진과의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 전략을 펼치기도 했다. 의주가 우리 땅이 된 것도 바로 예종의 치세. 거란의 지원 요청을 묵살하고(1115) 오히려 지원을 빌미로 거란의 내원성과 포주성을 도로 받아(1116~1117)낸 것이 바로 지금의 의주(당시 의주 방어사)이다.
그렇다고 여진족에게도 저자세로 나간 것도 아니었다. '형제국이 되자(물론 금이 형)',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며 아골타(아구다, 후의 금태조 완안아골타)가 제의해온 것 역시 짐짓 무시하였다(1117). 또 같은 해 여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천리장성의 높이를 석 자나 더 높였다. 이 공사를 여진은 방해했지만 이를 무시하고 천리장성 방비를 강화해 나갔다. 다만 국사 교과서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천리장성은 당시 고려가 진출한 북방경계에 비하면 한참 후방이었다.
4 무과의 부활, 군사력 강화
또한 1109년(예종 4년), 앞서 언급한 국학 7재 중에 무관 양성을 위한 '무학재'라 불린 강예제를 엄청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설치하였고, 후기에는 무학재에 인원을 상대적으로 더 늘리기까지 하는 등 여러모로 군사분야에 신경을 많이 쓴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고려시대에 유일하게 시행된 무과 역시 예종 대에 실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문벌 귀족 사회였던 고려는 이후의 조선시대보다 훨씬 무과에 대한 천대가심해서 강예제 설치에는 엄청난 반발이 따랐다. 그런 반발에도 예종은 본래 유학재 70명, 무학재 8명으로 시작한 관학 7재를 10년 뒤에는 60명과 17명으로 조절해버렸다. 이걸 보면 유학이 3배 이상 많은 것 같지만. 유학재는 6재가 모인 것으로 각 재당 10명이었던 반면에 무학재는 17명으로 오히려 1.7배가 된다. 애초에 윤관의 별기군도 그렇고 예종으로서는 독한 맘을 먹고 군사력 강화를 진행한 것이다. #
그러나 무과는 결국 예종 다음 국왕인 인종 11년(1133년, 24년만)에 바로 폐지되어 경사 6학으로 재편되었다. 무과가 시험이 간단하고 상대적인 응시자가 적어(앞서 말한 뽑는 인원이 많았기 때문),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문과의 세가 약해진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려시대의 무과는 사실상 없는 것과 같다고 해석되다가, 최근에 예종때 아주 잠깐 했었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추가되었다. 학생들은 더 머리가 아파지겠지 공양왕 2년에도 무과가 257년 만에 부활되었으나 사실상 멸망 직전이라 의미 없는 부활이었다.
5 총론
그러나 말년에 지나친 음주가무와 연이은 연회파티로 인해 종기가 발병, 발병 후 한 달만에 죽고 만다. 향년 44세.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 정확히는 명렬제순문효대왕(明烈齊順文孝大王)이다.
43~44세인 고려 왕의 평균수명까지 살았던 인물이다. 재위기간도 17년으로 평균인 14년과 흡사하다. 더구나 폐위나 비명횡사한 케이스들을 제외하면... 사실상 현종 이후의 고려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마지막 군주로, 더 나아가 고려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성공을 거둔 현군이라 할만하다. 수백년 뒤의 어떤 왕과 비슷하다 인종이후의 왕들은 모두 시궁창
고려 중기 최대의 문제 인물중 하나인 이자겸은 예종 시기 전에도 이미 외척으로 존재하였지만, 예종대에는 꼼짝도 못하고 그냥 일반 외척으로 머물렀다는 것만 봐도 예종 이후와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자겸을 견제하기 위해 예종이 일부러 한안인(韓安仁)을 측근 세력으로 양성했다. 다만 예종이 죽을 시 그의 후계자 인종의 나이가 어렸기에, 인종의 안전한 제위 보장을 위해 이자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된다. 그리고 이는 수백년 뒤에도 반복된다.
선대의 왕들이 받아먹었다라고 해야 할 정도로 대내외적으로 시기를 잘 타고나기도 했고, 문벌 귀족들에게 휘둘린 감도 없지 않지만, 예종은 숙종시기 어느정도 확보된 왕권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이후 이자겸의 난과 함께 고려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이 막장의 후반기 300년은 설사 왕이 능력이 있어도 무인정권처럼 실권이 없거나 원의 내정간섭을 극복 못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6 가족 관계
그의 아들이 두 이모하고 결혼해 몸소 근친+자매덮밥을 실천한 인종(仁宗)이다.
첫 왕비가 사망한 후에 경원 이씨 집안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이가 순덕왕후 이씨이다. 기록에 의하면 경원 이씨 집안 여자들이 뛰어나게 아름다웠다고 하는데 이 분도 그러했다. 그녀가 죽자 예종은 신하들이 말라고 간관들이 나서서 안된다고 하는데도 대궐 밖까지 나가서 손수 조제를 올리고 영구 행렬을 보냈다.
심지어 예종이 혼당으로 가자 간관들이 강력히 만류하였다. 이에 예종은 "조제의 예식은 송나라 임금도 한 적 있거든? 나는 그 일을 본받은 것 뿐이라니깐! 그리고 혼당 한번 간다고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염?" 그리고는 기어코 하고 싶은대로 했다고 한다. 이점도 왕권 강화의 상징. 다만 이런 점에서 왕권은 강화해 놓고 후대가 약하면 외척정치가 시행되는데, 이점에서는 조선 정조와 이미지가 유사해진다.
순덕왕후 이씨 뒤에는 종친인 문정왕후 왕씨와 혼인했다. 인종은 순덕왕후 이씨 소생으로, 자신의 이모들과 결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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