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천

義天

1055~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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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전기의 승려.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태후이다. 원래 이름은 후(煦)이이지만 당시 송나라 황제 송철종의 이름과 겹치는 바람에 피휘하느라 평생 자기 이름을 써본건 몇번 안된다. 대신 자인 의천으로 이름을 삼았다.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1]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시호이며 생시 이름은 아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한국사의 화폐사에도 이름이 있는 분이다. 송나라 유학 후 화폐의 효율성을 보고 주전도감을 설치, 해동통보, 삼한통보, 삼한중보와 같은 최초로 본격적인 주화 유통을 도입했다. 자세한 내용은 옆의 링크 참조. #

참고로 대학수학능력시험한국사(국사)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지눌과 섞어서 업적과 사상을 묻는 문제가 매우 자주 나온다.

2 불교에 귀의

어느 날 문종이 아들들을 모아 놓고 출가할 사람을 찾았는데 이때 자원하여 11세의 나이로 출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에 교종의 최고 지위인 승통이 되었다. 고려판 체자레 보르지아? 이 때문에 문종이 불교계를 장악하기 위해 아들을 출가시킨 것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지방 중심의 선종과 중앙의 교종으로 나뉘어 있었고, 교종 또한 왕실의 후원을 받은 화엄종[2]과 귀족 중심의 법상종으로 나뉘어 있었다. 의천은 '교관겸수'의 교리를 바탕으로 개성 흥왕사에서 교단 통합 운동을 시작하면서 천태종을 도입[3]면 하였고, 이후 국청사를 세우면서 선종의 통합도 이루려 하였다. 천태종의 개창은 교종에게는 별 영향이 없었지만 선종에게 엄청난 타격을 주었는데 이는 천태종으로 개종한 승려들 전원이 선종 승려였다는 데서 알 수 있다.

3 중국으로 밀입국, 그리고 고려 불교의 발전

오랫동안 송에 가서 제대로 된 불교를 배우고 싶어했으나 왕자가 위험한 바닷길을 갈 수 없다는 이유와 당시 복잡한 국제 정세[4] 때문에 계속 저지되었고 결국 송의 상선을 타고 밀항한다. 송 남부에서도 교단을 설립하고 절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하였지만, 소식(소동파) 등의 반대에 부딪힌 바도 있다[5]. 송, 요, 신라 등의 경전 주석서를 모아 4000여 권에 달하는 교장[6]을 펴냈는데, 후에 송에서는 유실된 경전을 찾기 위해 고려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러한 경전의 편찬은 교종 위주의 천태종의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사례로도 꼽힌다. 실제로 의천은 선종을 상당히 싫어하여 교장에 선종 계열 경전은 넣지 않았고 요나라에서 선종의 경전을 불태웠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도 하였다.

원효의 화쟁 사상에 주목해 원효를 띄운 인물이기도 하다. 원효에게 '화쟁국사'를 추증하기도 하였다.

최충 등의 유학과 의천의 불교가 어우러지면서 11세기 후반부터 12세기 초의 고려는 한국사에서 손꼽힐 정도의 문화 전성기를 맞지만, 천태종은 교단을 사상적으로 통합한 것이 아니라 인적으로 통합한 것에 불과하였다[7]. 의천 사후 천태종이 분열하면서 교단 통합은 이어지지 못했고, 지눌의 등장 이전까지 고려 불교는 다시 교종과 선종의 양립 구도를 이루게 된다.

4 관련 항목

  1. '대각'이라는 말은 부처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호가 올라갈 당시에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하지만 아우를 생각한 이 친히 올린 시호였기에(...)
  2. '만물이 하나로써 화합을 이룬다'는 사상이 곧 중앙 집권에 유리하다는 판단이었다. 애초에 똑같은 이유 때문에 화엄종은 신라 왕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종파이기도 했다.
  3. 천태종은 원래 중국 수나라 승려 지자에 의해서 창건된 종파로 삼국시대부터 수차례 한국땅에 전해졌다. 특히 광종은 천태종을 통해서 고려 불교를 통합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의천이 천태종을 창립했다는 말은 틀린 것이고, 개립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애초에 그냥 해동천태종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4. 이때 고려는 의 압박으로 공식적으로 송과의 교류를 끊은 상태였다. 물론 비공식적인 민간 차원의 교류는 계속 이어졌지만 아무리 출가했다고 하나 왕자가 송에 간다면 요와의 마찰을 빚을 수도 있었다.
  5. 소식은 고려가 송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한다고 의천의 입국부터 반대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당시 사정상 고려 왕자인 의천을 홀대할 수 없었던 송의 사정으로 의천이 송에 건너갔을 때 가이드 노릇까지 했다.
  6. 흔히 '속장경'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 학자가 붙인 이름으로 당대에는 교장이라고 하였다. 초조대장경은 경전을 모은 것이고 교장은 경전의 주석서들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대장경의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하여 학계에서도 교장이라는 표현을 권장한다.
  7. 사실상 왕자이자 왕제인 의천의 사회적 지위를 배경으로 하고, 자신 스스로의 지식과 경전들로 찍어눌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건 고려 왕실의 목표이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