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dth=50 고려의 역대 국왕 | ||||
16대 예종 왕우 | ← | 17대 인종 왕해 | → | 18대 의종 왕현 |
묘호 | 인종(仁宗) | |
시호 | 극안공효대왕 (克安恭孝大王) | |
능묘 | 장릉(長陵) | |
성 | 왕(王) | |
휘 | 해(楷), 초명 구(構) | |
자 | 인표(仁表) | |
배우자 | 폐비 이씨(廢妃 李氏)[1], 폐비 이씨(廢妃 李氏)[2], 공예왕후(恭睿王后), 선평왕후(宣平王后) | |
아버지 | 고려 예종 | |
어머니 | 순덕왕후(順德王后)[3] | |
생몰년도 | 음력 | 1109년 10월 4일 ~ 1146년 2월 28일 |
양력 | 1109년 10월 29일 ~ 1146년 4월 10일 (38세) | |
재위기간 | 음력 | 1122년 4월 6일 ~ 1146년 2월 28일 |
양력 | 1122년 5월 15일 ~ 1146년 4월 10일 (23년 11개월) |
1 소개
고려판 세도정치의 시작을 알린 임금.
고려의 제17대 임금.
그의 치세는 한마디로 수난과 안습의 점철이며,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같은 굵직한 사건이 연달아 터져 나오는 등 실로 혼란이 가득했던 치세였다. 현종 이후 100여년간 지속된 고려의 전성기가 이 왕대에서 사실상 끝났으며, 그동안 문벌 귀족 사회에서 누적된 모순도 본격적으로 터지기 시작했다. 즉, 인종 시대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고려 전기 사회의 붕괴 조짐이 드러난 시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는 다시는 태평성대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4]
2 생애
2.1 재위 초
1122년 부왕 예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14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고려사》에 "예종 17년(1122) 4월 병신일에 예종이 죽자, 예종의 여러 동생들[5](삼촌들)은 그가 어리다는 이유로 왕위를 탐내기도 했으나 평장사(平章事) 이자겸(李資謙)이 그를 받들어 중광전(重光殿)에서 즉위시켰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외조부 이자겸의 힘을 빌려 왕위에 오른듯 보인다.
하지만 왕이 어린데다 외척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니 외척이 발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인종의 외조부였던 이자겸은 왕을 대신하여 정권을 한 손에 움켜 쥐었으며,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횡포를 부린다. 게다가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강제로 인종과 혼인시켰다. 본래 고려 왕실에 근친혼이 있었지만, 이자겸의 두 딸은 인종에게는 이모가 되는지라 당대의 예법으로도 인종과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었다.
인종이 즉위한 지 1년 후인 1123년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금태조 아골타가 사망하고 금태종이 즉위했다. 이 시기에 금나라와 송나라는 번갈아가며 고려에 사신을 보내며 동맹을 청했다. 7월에는 합문지후 후장이 이끄는 60여 명에 이르는 송나라 사신단이 금나라를 공격해 달라는 내용의 국서를 가지고 고려에 왔다. 그리고 8월에는 금나라 사신 고백숙 등이 고려에 와서 전란을 피해 고려로 망명한 주민들의 송환을 요구하는 금태종의 의사를 전달했다. 인구가 과소했던 고려는 국초부터 전란 등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 오는 북방 족속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고려는 끝내 이들을 송환하지 않았다. 또한 금태종은 인종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거란 천조가 서하로 도주한 사실을 알리려고 사신을 보냈는데 국경에서 접대를 불손히 해 고려에 이르지 못했다. 고려가 거란을 섬기는 예로써 앞으로 금나라를 섬겨야 할 것이다. 태조의 서거로 거란 천조를 잡지 못했다"고 하였다. 요나라 황제도 도주했으니 이제는 고려가 금나라에 사대하라는 것과 자신의 황제 등극을 통보하는 내용이었다. 금태종은 1125년 무주에서 요나라 황제를 사로잡아 요나라는 야율아보기의 건국 후 9대 219년 만에 멸망했다.
1125년 금태종은 고려에서 온 국서를 접수하기를 거부했는데, 그 이유는 국서의 서식이 표(表)가 아니고 또 고려 왕이 신(臣)을 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금나라는 고려에 대해 요나라를 섬겼던 것처럼 금나라를 섬기라고 해 칭신사대(稱臣事大)의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것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었다. 고려는 이에 대해 한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듬해 1126년 조정회의에서 금나라와의 관계 설정 문제를 협의했다. 대다수는 여진족이 오랑캐이므로 상대할 수 없다고 했으나 이자겸과 척준경 등이 "금나라가 예전에는 작은 나라로써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으나 지금은 강대해져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켜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 되었고, 우리와 접경해 제반 정세가 사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선왕의 법도이니 마땅히 먼저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 것이 좋다"고 했고 인종은 이 주장을 채택했다. 이어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臣)이라 해 사대의 예로 국교를 맺게 되었다.
2.2 이자겸의 난(1126)
결국 인종은 18세가 되던 해에 이자겸의 횡포를 보다 못해 몰래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이자겸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이리하여 최탁, 오탁, 권수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동원하여 궁궐 내에 있던 이자겸의 끄나풀들을 제거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이자겸은 자기 집으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가졌으며, 자신과는 사돈지간이었던 소드마스터 척준경에게 군사를 주어 궁궐로 보내었다.
척준경은 궁궐 내에서 소란을 피우는 역적들을 무찌른다는 명분으로 왕궁에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는데, 함부로 왕궁을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얼마동안 대치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궐내에서 이자겸의 수하들이 제거당하는 소란 통에 척준경의 아들 척순과 동생 척준신이 살해당하는데, 궁밖에 내던져진 시체들을 척준경의 부하들이 발견한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척준경이 공격을 명하자 궁궐은 불타버리고 지낼 곳이 없어진 왕은 이자겸의 집에 머무른다. 이것도 끌려간게 아니라 왕이 스스로 호위병도 없이 걸어서 갔다. 이 사건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은 이제 본격적으로 왕이 되기 위한 야심을 드러내어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는 한편, 인종을 독살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기에 이르었다. 그러나, 인종의 왕비였던 두 딸이 독이 든 탕약을 실수로 떨어트린 척하고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깨먹는 등 방해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만다. 이 두 왕비는 이자겸이 축출당한 후 궁에서 쫓겨났지만, 인종을 헌신적으로 보살핀 보답인지 반역자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노비나 가택을 하사 받는 등 꽤 대접을 잘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이자겸 처벌을 귀양조치만으로 끝내고, 사후 관작까지 돌려준 것 등과 함께, 이자겸이 국정을 농단은 했지만 정말 찬역을 품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편, 인종은 척준경의 성품이 강직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몰래 척준경에게 선물을 하사하는 한편 친서를 내려서 회유하는데 성공한다. 인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척준경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선 덕분에 결국 이자겸은 축출되어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되었고, 이 곳에서 병사하였다.
이 후에 인종은 척준경의 공적을 치하하여 문하시중(종1품),즉 최고의 관직에 제수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척준경이 거절하였고, 그래서 인종은 대신 공신각에 그의 초상화를 걸어놓아 명예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이후 신하들(특히, 후에 묘청의 난에 가담하는 정지상)이 탄핵하여 할 수 없이 유배를 보냈는데 그래도 이 유배지가 척준경의 고향이었다.
2.3 묘청의 난(1135~1136)
이자겸 축출 뒤,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는데에 몰두하던 인종은 마침 풍수설에 심취하던 중에 한 인물을 총애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땡초 묘청이다. 묘청은 서경(평양)으로 천도하기 위해 온갖 술수로 인종을 현혹했는데, 예를 들면 대동강 물에 기름진 떡을 넣어서 강이 오색영롱하게 빛나 보이게 했다는 둥, 서경의 궁궐로 들어가니까 노랫소리가 들렸다는 둥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신채호 선생을 필두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남용하다 보니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왜곡된 기록이라고 보는 시각도 간혹 있지만,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묘지명에도 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왜곡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서경 천도 주장은 인종의 부왕인 예종도 써먹은 적이 있었고 인종도 이것으로 서경 사람들을 꼬셨기 때문에 소위 묘청의 난이라 불린 사건은 묘청이나 정지상 등의 서경파가 주도했다기보다는 왕이 자초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어쨌든 서경 천도 문제로 인해 조정에서 이와 관련한 논쟁이 있엇지만 개경파 유학자의 선두 주자였던 김부식의 방해로 실패, 게다가 평양에 짓기 시작한 궁궐에서 연이은 불길한 징조로 곤란해진 묘청은 반란을 일으켰다. 묘청과 그 세력은 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짓고 서경 이북 지역을 장악해 나갔으나 총사령관 김부식의 재빠른 조처로 곧 서경에 고립되었고 김부식의 조이기 전략 중 내분으로 묘청은 부장 조광에게 살해되었다. 그러나 이 후 서경의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서경 사람들이 다시 저항을 하게 되었고 완전히 이를 진압하는 데는 1년이 더 걸렸다.
2.4 죽음
어렸을 적부터 고난을 겪었던 탓인지 결국 만 36세 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승하했다.
일설에는 멀쩡하던 왕이 갑자기 병이 들어 의원의 치료에도 소용이없어 점쟁이를 불러 점을 쳤는데, 이자겸과 척준경, 묘청 등의 귀신이 왕에 몸에 씌여 병이 생겼다고 한다. 결국 왕실에서는 용한 무당을 불러 굿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어 인종은 끙끙 앓다가 승하했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정사의 기록이 아닌 야사에 불과하다.
3 평가
결국 인종의 치세는 혼란의 거듭되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에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등의 역대급 사건사고가 터지는 등 그야말로 바람잘 날이 없었다.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을 당시에는 궁궐이 전소되는 화를 입었으며, 묘청의 난 당시에는 묘청이 서경의 주민들을 선동하는 바람에 거진 내란 상태에 이르렀다.
이처럼 인종 대에는 기존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축적되기 시작하여 결국 그 아들인 의종(고려) 대에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고려사의 전개가 완전히 비틀어져 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왕위에 오르면서 일생을 권력 다툼에 시달려야 했고, 그의 사후에도 정변이 일어났으니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비운의 군주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묘청을 측근 세력으로 키워보기도 했으나, 김부식을 비롯한 기존 집권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힌 데다가, 묘청 또한 인종을 배반하면서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반역과 모반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일생 동안 왕위를 지켜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별다른 치적을 남길 수도 없었다. 인종이 후세에 남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업적은 김부식으로 하여금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점 정도였다. 그나마 당시에 김부식같은 대학자가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다행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종이 이자겸의 세력을 무찔렀을 때에 반역을 했던 이자겸과 그 일족을 없애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으나, 인종은 이자겸이 한때나마 자신의 장인이었으며 또한 외할아버지였으므로 죽일 수 없다 하여 유배형을 내리는데에 그쳤고, 이자겸의 가족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않았다. 당대의 사람들을 이를 두고 인종을 자비있고 덕있는 왕이라 칭송하였다. 그래서 "인종"인가보다.
그 외에 역시 공이 있다고는 하나 궁궐에 불을 질렀으니 당장 벌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척준경을 끝까지 옹호해주며 유배를 보내고서도 편히 지내도록 배려해 주었다거나, 이자겸의 음모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었던 이자겸의 딸들을 잘 보살펴주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볼때 능력과는 상관없이 인성은 좋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반역자들과 그 일족에 대한 처벌이 너무 미약하다며 인종을 우유부단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고 한다.
송나라의 관료였던 서긍이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에 지은 『고려도경』에서도 인종의 외모와 인품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서긍이 고려에 갔을 때에 인종은 아직 14세의 소년이었는데, 서긍은 그 외모에 대하여 "몸집은 작았으나 용모가 아름다고 풍만했다"고 하였으며,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성품이 자비롭고 배운 것이 많았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엄격하고도 명백히하였고, 또한 그 몸가짐이 단장하면서도 성인의 기풍이 있어서 과연 고려의 왕이 될만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4 가족
후궁과 폐비(이자겸의 두 딸들)도 있었지만 공예왕후 (恭睿王后) 임씨(任氏)에게서만 5남4녀를 보았다. 5남은 차례로 태자 왕현(의종), 대령후 왕경, 왕호(명종), 왕충희(출가 - 원경국사), 왕탁(신종)이었으니 5명 중 3명이 왕위를 승계한 셈이다. 그러나 이건 모두 무신정권 때문이다(...) 의종, 명종은 폐위되었고 신종 역시 7년만에 승하했으며, 그 아들 희종은 명종처럼 최충헌에게 역시 끌어내려졌다. 안습. 결국 다시 명종의 태자였던 강종이 즉위하고 2년 뒤 손자(인종에게는 증손자)인 고종으로 이어지게 된다.
대령후 왕경은 도량이 넓었으며, 공혜태후가 가장 좋아하는 자식이었다. 그러나 결국 인종의 의지대로 의종이 왕위에 올랐고, 여러 역모설 속에도 무고하여 의종이 처벌은 하지 않았으나 결국엔 의종 11년에 귀양을 가게 된다. 의종이 탄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겼었는데, 의종은 적당을 색출하지 못했다하여 재상들을 책망하는 조서를 내렸다. 이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연달아 체포되었는데, 대령후 집안의 종인 나언(羅彦)·유성(有成)·황익(黃益) 등이 의심을 받고 혹독한 문초를 당하게 되자 거짓 자백을 하였던 것이다. 왕경의 죽음은 알 수 없는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이의방이 의종 대신 그를 세우려다가 대령후가 승계되면 그가 바른 정치를 할까 두려운 이들이 대령후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마 그 이전에 죽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공예왕후 임씨는 의종 때 태후가 되었으나 명종 때까지 살아서 가슴졸이다가 4남 원경국사가 죽자 다음해(1183 - 명종 13년)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원경국사 이 양반도 막장인게 명종 10년에 어머니의 병(유종;;)을 치료하려 궁에 들어와서는 궁녀, 공주와 문란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명종이 보호해줘서 살았다고.
5 그 외에
참고로 인종은 현재 북한의 영토인 경기도 개풍군 청교면에 있는 장릉에 안장되었는데, 다른 고려 왕릉들처럼 이미 구한말 혹은 일제 시대 때 도굴당했다. 위 사진은 국보 94호인 '청자참외문양꽃병'으로 인종의 장릉에서 출토된 부장품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물론 정식 학술 발굴에 의한 출토품이 아니고 1916년에 조선총독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상에게 구입하면서 유물대장에 인종의 옥돌 시책과 함께 장릉 출토라고 기록해 놓아 신빙성이 아주 높다. 또 이것 외에 알려진 부장품으로 질이 우수한 청자접시 5점 1세트, 청자합, 청자받침대, 뚜껑있는 청자잔, 숟가락과 젓가락, 청동내합과 옥돌외합, 청동인장 등도 있다. 그러나 정작 도굴꾼이 파냈다는 장릉의 위치는 당시에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대로 개성 서쪽 벽곶동으로만 추정하였다. 또 해방 이후 북한에서 이에 대해 조사했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 ↑ 이자겸의 3녀로 입궁 후 연덕궁주(延德宮主)에 책봉되었으나 이자겸의 난 이후 동생과 함께 폐위되었다.
- ↑ 이자겸의 4녀로 입궁 후 복창원주(福昌院主)로 책봉되었으나 이자겸의 난 이후 언니와 함께 폐위되었다.
- ↑ 이자겸의 2녀로 예종비이자 인종의 어머니이다. 1118년에 사망하였다. 인종의 폐비인 이씨들의 언니이기도 하다.
- ↑ 사실이다. 인종 이후 고려는 무신정권, 몽골의 침략 및 내정간섭 등 난세의 연속이었으며 다시는 재흥을 꾀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은 세종~성종 동안 전성기를 누리고 영조, 정조 때에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중흥기가 도래했고 고려 이전의 백제조차도 말기 무왕 때에 잠깐이나마 중흥기를 이뤘지만 고려는 중기와 후기를 거쳐 멸망할때까지 국가 막장 테크를 타기 시작했다. 물론 공민왕 시기 때 중흥의 기회가 있었지만 권문세족의 횡포와 개혁의 실패, 공민왕이 노국공주가 죽은 후 암군으로 타락하여 암살당하면서 중흥이 실패로 끝났다.
- ↑ 숙종의 아들은 7명인데 "장남 예종과 이미 죽은 차남 왕필(王佖)과 출가한 3남 징엄(澄儼)을 제외하고도 4명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