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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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淸
? ~ 1135

1 소개

고려시대의 승려. 일반적으로 묘청이라는 법명이 유명하지만 뒷날 법명을 '정심(淨心)'으로 고쳤다.

고려사절요에는 그의 출신에 대해 "묘청은 서경승(西京僧)[1]이다" 라는 구절로만 설명하고 있고 그 외의 기록은 존재하지 않아 그의 외모, 출신, 왕을 만나기 전의 행적 등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사에서의 "천문관원(日者) 백수한이 묘청을 스승이라 불렀다"라는 기록과, "묘청은 음양가의 비술을 들먹이며 뭇 사람을 현혹했다"고 하는 등의 묘사를 봐서는 도참, 예언 등의 활동을 한 승려로 추측된다.[2]

2 서경 천도 운동

서경 출신으로 인종 때 왕실 고문 자리까지 올랐다. 이 때는 북방의 금나라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기세를 이어 송나라까지 강남으로 쫓아버리면서 새로이 중원의 패권을 잠식하는 시기였는데, 그는 강성한 금에 맞서 대항하자는 명분으로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이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게, 개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김부식 일파를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묘청이 살아 있는 동안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은 매번 싸우게 된다.

천도를 하기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많이 했는데, 기름을 넣은 떡을 대동강에 가라앉힌 다음 타이밍에 맞춰 인종을 대동강가로 끌고 나왔다고 한다. 기름이 물에 떠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효과를 노린 것인데, 이것을 대동강에 잠든 을 토해 대동강 물에 상서로운 기운이 깃든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서기가 비치니 서경은 천기가 가득한 땅이다' 라고 허위 광고를 한 것. [3]

하나 더 얘기하자면, 자신의 주청으로 건설된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되자 인종과 함께 보러 갔는데, 그때 김부식과 이런저런 논쟁을 벌이다가, 저 산으로 보라고 했다. 거기엔 별이 매우 낮게 떠 있었는데, 묘청은 저걸 보고 '남극성'이라며 상서로운 징조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사실 이건 높이 매달아 놓은 등불이었다.

인종도 한때 서경 천도 제안에 솔깃해서 서경에 자주 행차하고 임원역(林原驛) 근처에 대화궁을 지었지만 이런저런 악재가 일어났다. 벼락이 떨어진 일도 있었는데, 김부식은 그토록 좋은 곳이라면 뭣 때문에 벼락이 떨어지냐?라며 까댔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는 '벼락 한 번 떨어진 것은 서경이 좋지 않은 땅이라는 증거가 될 수 없으니 비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애초에 묘청이 먼저 (조작된) 증거들을 들이밀면서 서경이 상서로운 땅이라며 천도해야 한다며 설쳤으니(...), 이에 김부식이 벼락 얘기로 비꼬면서 맞받아 친 것이다. 이런 악재로 결국 천도는 무산되었다.

고려사를 보면 뭔가 어리버리한 인상도 준다. 서경 중흥사에 큰 화재가 났는데 누군가가 묘청에게 "네가 임금께 서경에 행차하시기를 청한 건 재앙을 진정시키기 위함인데 왜 이런 재난이 발생한 것이냐?"이라고 묻자 묘청은 얼굴을 붉히며 대답을 못하다가 한참 뒤 주먹을 쥐고 얼굴을 들고 "만약 주상께서 개경에 계셨으면 재난이 이보다 컸을 텐데, 다행히 서경에 오셔서 재앙이 밖에서 일어났으니 주상의 몸이 편안했던 것이다!"라고 말했고, 묘청을 믿는 팬클럽사람들은 함께 "이런데 어찌 믿지 않겠는가?"라고 호응했다.

그리고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하다가 금암역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폭풍우가 불어서 행차가 길을 잃어 늪에 빠지기도 하고 나무나 돌부리에 부딪혔으며 그날 밤에는 진눈깨비까지 내리고 추워지는 바람에 말과 낙타의 피해가 컸다. 이를 본 묘청은 "내가 이 날에 바람과 비가 있을 줄 알고 비와 바람의 신에게 '주상께서 길에 있으니 비바람을 일으키지 마라!'고 했더니 이미 승낙해 놓고 이처럼 약속을 어기니(원문에는 식언(食言)이라고 표현) 실로 가증스럽다!"라며 하늘을 탓했다고 한다. 뭔가 인지부조화가 계속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인데

3 묘청의 난

그러자 모든 것을 기득권의 훼방으로 여긴 묘청은 서경에 틀어박힌채, 개경의 귀족을 타도 하고자 함을 명분으로 세우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이라 정하였다. 원래 한자 문화권에서 천자의 나라는 격식을 갖춰 표기할 때 大+국호 또는 大+국호+國 등으로 적었다. 예를 들어 한(漢)나라는 大漢(國) 식으로 적는 식과 같다. 그리고 중국의 경우 천자국은 한 글자를 쓰는 게 정석으로 간주됐고, 또 제후의 작위를 줄 때도 한 글자를 쓰는 것이 두 글자를 쓰는 것보다 더 높은 것으로 간주됐다. 조선이 황제국을 선포하면서 '조선'을 버리고 '대한'이라고 국호를 고친 연유 역시 "천자국은 마땅히 한 글자를 써야 하니 두 글자인 조선 대신에 뭔가 한 글자로 바꾸자→삼한에서 따서 '한'이라고 하자!" 이렇게 결정 됐던 것이다. 아무튼 묘청의 반란군은 '위(爲)나라'라는 천자국을 선포한 셈이다. 실제로 묘청은 인종에게 서경을 천도하라고 권하며 칭제를 하고 연호를 선포하자고 했으니, 국호를 이런 식으로 지은 것이다. 고려의 광종은 황제를 칭했던 왕으로 여겨지는데, 그런 그도 국호를 한 글자로 고치지는 않았다.결국 묘청 등 서경 세력은 광종의 범위를 뛰어넘어 국호 또한 정석대로 한 글자로 고치는 대단한 결정을 내린 셈이다. 또 연호를 말 그대로 '하늘이 열었다' 또는 '하늘이 열렸다'는 뜻의 천개(天開)로 정하고 자신의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하늘이 보낸 충성스럽고 의로운 군대')이라 명명하여 난을 일으켰다. 특이하게도 반란군은 나라를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람도 황제로 추대하지 않았다. 만약 난이 성공적으로 끝나 인종의 신병을 확보하게 되면 그를 대위국의 황제로 모시려고 했던 것 같다. 강제 추대 애초에 서경 세력은 서경 천도와 인종의 건원칭제를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좌절돼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인종 외 다른 사람을 추대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서경 세력은 반란과 동시에 가짜 사신을 동북면으로 파견하였고, 또한 지방 관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들키지 않으면서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던 것인데, 때마침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개경에서 근무하는 군인 두 명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즉시 복귀하여 반란 사실을 알렸다.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대가 파견되었다. 자세한 규모는 불명이나, 우군만 2000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좌군과 중군의 규모를 알 수 없다. 먼저 우군이 서경에서 동북면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하는 한 편 가짜 사신들이 파견되었던 지역을 위무하여 역반란이 일어났다. 즉, 가짜 사신임이 들통났는데다가 관군의 선무공작이 주효하여 세력 확장을 위해 파견된 서경군이 모두 잡히거나 죽은 것이다. 그러는 한 편 좌군은 서경과 개경을 잇는 도로를 점하여 서경의 남쪽을, 중군은 우군이 점거한 지역을 통해 우회하여 서경의 북쪽을 점거했다. 대동강 하구를 관군 수군이 점령하여 서경의 서쪽도 점거당함으로서 서경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묘청은 수세에 몰린 끝에 어처구니없게도 부하인 조광(趙匡)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목은 협상용으로 쓰였다. 하지만 조광의 항복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부식은 "조광은 적들에게 협력했지만 대장의 목을 베어왔으니 공이 크니, 살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인종에게 보냈다. 이 글을 읽은 인종은 김부식의 의견을 따랐다. 그러나 김부식 외의 세력들이 "그건 김부식의 공이 아니니까 넌 얼른 토벌이나 해"라며 항복해 온 장수들을 하옥시켰다. 이 때문에 조광은 항전을, 김부식은 토벌을 하게 되었다. 조광은 다시 서경에서 항전을 시작하고, 결국 묘청의 난은 대규모 유혈 사태로 마무리되었다.

조광의 항전은 의외로 길게 이어졌다. 그 이유는 서경이 워낙 견고해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김부식은 서경 주변에 여러 개의 성을 증축하고 그 주변에 참호를 파 지구전에 돌입했는데, 조정의 신하들은 북방의 금나라를 비롯한 적들이 겉으로는 화친하고 있지만 언제 우리를 공격할지 알 수 없는데 이토록 전쟁을 오래 끌다가 다른 변란이 발생하면 막아낼 방도가 없으므로 빨리 공격해서 반란을 평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서경의 반란세력은 금나라와 고려를 이간질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기도 했고, 이 주장이 그리 잘못된 것은 아닌 듯도 했으나 김부식은 '변방의 경비를 걱정해야 한다는 말은 타당하나, 서경이 매우 견고해 무턱대고 공격하다가는 많은 사졸이 상하여 오히려 변방 경계에 구멍이 생길 것이므로 온건한 계책으로 병력을 보존하고 국가의 위엄도 꺾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며 반박, 인종 역시 김부식의 말을 옳게 여겨 모든 작전권을 그에게 위임했다.
이 서경 포위전은 해를 넘겨 2년을 끌게 되는데, 송나라에서도 묘청의 난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근래 서경에서 난동을 일으킨다 하니 진압하기 어렵다면 10만 대군을 보내 도와주겠다.'는 허세 제안을 하기도 했다. 송나라 주제에 무슨 군대...
국지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포위망을 어찌하지 못한 서경의 군세는 군량부족에 시달리고 탈주자가 늘어나는 등 점차 힘을 잃어갔는데, 김부식은 전군(前軍)을 양명포의 산 위로 옮겨 군영을 세우게 한 뒤 2만이 넘는 인력을 동원해 서경의 서남쪽에 거대한 토산을 쌓기 시작했다. 서경군은 공사가 벌어지는 틈을 타 전군을 기습했지만 격퇴당했고, 관군 역시 서경을 공격했지만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한편으로 조광은 토산에 맞서기 위해 성 안에 이중성벽을 쌓기 시작했다.
지루한 대치가 계속해서 이어질 무렵, 윤언이와 지석숭이 '대치가 오래되었으므로 사변을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은밀히 군사를 내어 돌격해 겹성을 파괴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며 김부식에게 성을 급습할 것을 요청하였는데, 김부식은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윤언이가 거듭 요청하자 병력을 세 갈래로 나누어 서경을 대대적으로 기습했다. 서경군은 당시 토산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관군이 공격해올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다가 허를 찔려 윤언이의 말처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무너져 큰 피해를 입었다. 해가 지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서 관군은 철수했지만 한 번 싸움으로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은 서경군의 동요는 가라앉지 않았고, 조광을 비롯한 반란군의 수뇌부 대부분은 밤 사이 자결했으며, 성 안의 나머지 무리들은 다음날 우두머리인 최영을 사로잡아 항복하였고, 묘청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지속되었던 묘청의 난은 김부식의 의도대로 관군의 큰 피해 없이 진압되었다.

묘청의 난 덕분의 숭문천무(崇文賤武) 현상이 강화되어 후에 무신정변의 원인이 된다. 또한 태조의 유언인 훈요 10조에도 명시되어 있었던 서경의 지위가 하락되어 분사제도(分司制度)가 폐지되었다.[4]

이로써 정종이 서경 천도 운동까지 펼쳤고 한 때 고구려의 수도라고 계승을 하려던 의식마저 점차 사라져갔다. 한 마디로 망했어요.

4 평가

신채호가 매우 높게 산 인물로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잘 못 알려진 것이다. 신채호가 긍정적으로 평가한것은 묘청도, 서경천도도 아닌 북벌론 뿐이었다. 신채호가 평가한 묘청은 그저 김부식보다 나았다는 평가와, '狂'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미친놈이라는 얘기다.

신채호가 높게 평가한 북벌론의 주요 인물은 윤언이와 정지상이었으며, 이 둘 중에서도 서경천도를 지지한 정지상이 아닌, 반대쪽이었던 윤언이를 더욱 높게 평가하였다.

현대 사학자들의 평가는 그냥 정지상의 광대. 서경파인 정지상이 서경천도를 밀어붙이기 위해 성인의 이미지를 덧붙여 내세운 얼굴마담일 뿐이란 것이다. 묘청이라고 이걸 모를 리 없건만 서경천도의 가능성만 믿고 밀어붙였는데 결국 인종이 서경천도를 거부하자 빡친 나머지 폭주한 것이라는 견해다. 결국 정지상 등 서경파들은 통수맞고 사형.

실제로 묘청을 제외한 서경파들은 묘청이 난을 일으켰을 때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던 데다가 누구보다도 묘청의 목을 쳐야 한다고 진언했다. 애초에 서경천도운동 당시 찬성파 자체가, 한 일파가 아니라 서경 세력, 왕권 강화 주도 세력, 칭제건원 주도 세력 등 수많은 세력들이 하나로 뭉친 잡탕이었다. 그 중 서경 세력 내 과격파인 묘청이 폭주를 했으니 다른 분파들은 저 또라이와 엮여 사형크리당하고 싶을 리가 없었던 만큼 이렇게라도 묘청과의 관계성을 철저히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꼬리 자르기 왕 역시 주동자만 처단하라고 일렀기에 이들에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결국 김부식 등의 개경파들에게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베고 나서 아룀) 식으로 처단당하고 만다.

현대 북한의 역사 교육과정에서도 남한에 비해 매우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 이유로는 김부식으로 대표되는 사대주의 세력에 맞서 (비록 실패했지만)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듯한 노선을 지향했다는 점, 지금의 북한의 수도인 평양, 즉 서경으로 천도를 주장했던 점 등이 있다.
  1. 서경에서 활동하는 승려
  2. 역사저널 그날 129화 참조
  3. 이는 결국 반대세력이 잠수부를 동원해 자맥질을 한 결과 떡이 발견되어 들통나게 된다.
  4. 고려는 개경의 관청을 제2 수도인 서경에도 설치했는데 이것을 분사제도라고 한다. 태조 때 시작되어 예종 때 완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