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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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내전기
4대 클라우디우스5대 네로 갈바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Lucius Domitius Ahenobarbus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Nero Claudius Caesar Drusus Germanicus[1]
출생지이탈리아 안티움
사망지이탈리아 로마
매장지이탈리아 로마 도미티아 가 묘지
이름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황제 즉위 전)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즉위 후)
생몰년서기 37년 12월 5일 ~ 68년 6월 9일
재위기간서기 54년 ~ 68년

1 개요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이어지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다. 여러 매체에서 방탕한 생활로 인한 막장성과 광기를 동시에 갖춘 폭군의 대표로 꼽히지만 폭군이라기엔 과장된 측면이 큰 군주.[2]

2 즉위와 집권

네로는 아우구스투스의 증손녀인 (소)아그리피나의 아들로,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후처로 들어오며 그의 양자가 된다. 참고로 네로의 친아버지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대(大)안토니아의 아들이고, 대(大)안토니아는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의 딸이기에 네로는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은 셈이다. 어릴 때에는 영특하고 현명하였다고 한다. 손호?

사실 네로가 황제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았는데, 클라우디우스에겐 전 아내인 메살리나 발레리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브리타니쿠스란 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해 직접적으로 피가 안 섞였다고는 하나 표면적으로 남매간이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3]와 네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네로가 클라우디우스의 후계자가 되기 쉽도록 길을 터줬다. 이러한 아그리피나의 영향도 있었고, 불륜을 저질렀던 메살리나에 대한 악감정 탓인지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친아들인 브리타니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았다. 그 뒤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클라우디우스 사후 네로는 브리타니쿠스가 어리다는 이유로 17세의 나이에 황제로 추대되었다.

네로는 원래 왕이 될 생각이 없었고, 네로와 옥타비아의 결혼은 사실상 강제였기 때문에 금슬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옥타비아는 당시 기준으로도 착하고 현명한 아내감으로 명망이 높았고, 네로에게 철저히 무시당한 터라 로마 시민들의 동정을 받고 있었다. 네로의 아내 박대가 스스로 정통성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아그리피나는 그 점을 상당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게다가 네로가 포파이아를 사랑하게 되어 옥타비아를 몰아내려고 하자 아그리파나는 옥타비아 편을 들어 아들과 대립했다. 이 때 네로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실권을 잡으려 하면서 아그리피나와 조금씩 충돌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이혼 문제까지 끼어들자 둘의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진다.

이 때 아그리피나가 브리타니쿠스를 후원하자, 사실상 정통성에서 자신보다 우위에 있는 브리타니쿠스가 심각한 위협이 되었으므로 네로는 하수인을 보내 브리타니쿠스를 암살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아그리피나를 뒤이어 암살했다. 아그리피나를 죽이고 나서는 그동안 사이가 나빴던 아내 옥타비아에게 간통의 혐의를 뒤집어 씌운 뒤 처형한다. 이런 짓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네로의 치세에는 그다지 큰 영향이 없었는데, 왕위다툼에 이정도는 뭐당시 로마 시민들의 아그리피나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으며 이 때까지는 네로가 정치적으로 뚜렷한 실책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세네카와 근위대장 부루스의 보좌를 받은 네로의 초기 치세는 꽤나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아그리피나라는 걸림돌이 사라지자 네로는 조금씩 자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다. 때마침 보좌의 한 축이었던 부루스가 병에 걸려 죽자, 가족까지도 가차없이 살해해 버리는 네로의 성격에 경계심과 위협을 느낀 세네카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로써 네로는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네로는 자신을 위대한 예술가 라고 굳게 믿고 있었고, 연예인 기질이 강했는데 그를 제약하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자 이러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한다. 집정관을 역임한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니게르[4]에게 신설된 "아르비테르 엘레간티아이[5]"라는 장관직을 주고 궁정에서 모든 종류의 취향에 관한 판단을 맡겼으며[6], 자신은 그리스 문화와 시에 심취하여 수염을 기르고 그리스 등지에서 열리는 시 낭송 대회에 출전하여 빈축을 사기도 했고, 그와 관련된 여러 일화와 농담들이 전해진다. 올림픽 경기에 직접 출전해 자신을 위해 창설한 음악 경쟁에서 우승하고, 7두마차[7]를 끌고 출전한 전차경기에서는 중간에 전차에서 굴러떨어졌음에도 심판진의 안 퍼졌으면 님이 1등 판정으로 우승. 그 외에 다른 종목에서도 전부 우승하였다.[8] 그리스에서 열렬히 환영(?)받던 네로가 로마에서 자신의 시 낭송회를 열자, 연예인 황제에게 좌절한 시민들의 반응이 환장환상적이었다고 한다.

나름 시인이자 아티스트,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어보려고 노력은 참 많이 했지만 당시 로마인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인데, 명색이 황제란 인간이 정무는 안 돌보고 그리스에 가서 놀고 앉아있으니 실력 여하를 떠나서 좋은 소리가 나올 턱이 없다. 로마인들은 예술가 황제를 원한게 아니라 나라를 잘 돌보는 황제를 원했다. 다만 네로 사후에 그야말로 나라를 말아먹는 막장군주들이 속출한 덕분에 오히려 네로 치하를 그리워했다 한다.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많이 받아들였지만 결국 그리스 문화도 '외국' 문화였기 때문에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많았다.
특히 동성애의 경우, 로마인들은 그리스 식의 소아동성애가 장차 로마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들고 여성화시킨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다.[9] 예로 대 카토는 미소년 시종논밭이나 도자기보다 더 값나간다는 사실에 로마는 망할 거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디오 카시우스는 네로가 예술에 빠져 지내자 네로는 여자라고 험담을 했으며[10] 네로의 스승인 세네카도 이런 네로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만 로마의 예술 발전에는 매우 큰 공헌을 했다. 네로의 예술 활동은, 동양의 경우로 따지면 정무는 안 돌보고 황궁에 틀어박혀 도적 패거리가 깽판을 치든 말든 돌 감상에 시간을 허비한 북송의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다. 물론 통치는 그들보단 훨씬 잘했지만.

그렇게 취미활동을 즐기긴 했지만 네로가 정무에 그렇게 무신경한 것은 아니어서 네로 통치하의 로마는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었다. 특히 외교적인 면에서 네로는 그 이전 누구도 하지 못했던 획기적인 업적을 남기는데, 파르티아 방면으로 파견한 장군 코르불로의 중재를 통해 한동안 파르티아와의 평화를 얻어낸 것이다.

당시 파르티아의 황제였던 볼로가세스는 원래 측실 소생이라 황제가 될 자격이 없었으나 정실 소생이었던 동생 티리다테스가 황위에 오르는 것을 거부하고 장자상속의 원칙을 내세우며 형에게 양보한 덕분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동생의 의리에 감복한 형은 파르티아 정실왕자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걸로 보답하려 했고 국내의 반대파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도 겸해서 파르티아의 최고제사장 자리와 더불어 이웃나라이자 로마가 대두되기 이전에는 속국이었던 아르메니아 왕위를 주려고 하고 있었다.

이때 아르메니아의 관할문제를 두고 파르티아와 로마가 전쟁중이었는데 네로가 개입하여 티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신 대관식을 로마에서 치르게 함으로써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자존심을 모두 살렸다. 이 때 티리다테스는 비슷한 나이대였던 덕분인지 네로와 상당히 친해졌는데, 아르메니아로 돌아간 후 수도 명칭을 네로의 도시라는 의미의 '네로폴리스'란 이름으로 개명하고 축제를 매년 열었다. 심지어 네로가 죽은 후에도 이 축제를 계속할 수 있도록 로마에 허가를 요청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로마의 동방 국경이 안정되었다. 문제는 정작 네로 본인은 이걸로도 까였고 덕분에 한동안 내전이 벌어졌다는 것(...).
여기에 추가로 여담을 이야기 하면 이후 파르티아 와 다시 전쟁을 하는것은 트라야누스 인데 트라야누스 의 출정 은 파르티아 가 쳐들어와서 한게 아니라 그냥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네로 의 정책을 파기하고 출정 한 그냥 정복전쟁[11]이다. 즉! 협정내용 을 깬건 로마 였다.

3 로마 대화재

네로의 몰락은 엉뚱하게도 정무 수행에서가 아닌 다른 데서 촉발되었다. 우선 로마의 대화재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로마 시의 대화재는 지금까지의 역사에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규모로, 무려 5일에 걸쳐 불이 타올랐으며 로마의 14개 구 중 4개 구를 뺀 나머지가 탔다고 한다. 10개 구 중에서도 3개 구는 완전히 불에 타 소실되었고 나머지 7개 구도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이때 로마인들 사이에서 네로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는 네로의 그리스 애호 취향을 섞어 그럴 듯하게 각색한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 그리스 문화 중 호메로스일리아드, 오딧세이가 유명했는데 여기에 등장하는 트로이 전쟁의 하이라이트인 트로이가 파괴되고 불타는 장면을 네로가 일부러 연출하기 위해 로마를 불질렀다는 이야기였다. 이 소문은 나중에 네로가 로마를 불사른 다음 궁중의 높은 누각에 올라가 리라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까지 부풀어서 전해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 엉뚱한 걸 세우니까 이런 말을 들은 거다

하지만 이러한 루머와는 달리, 실제로 네로는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네로는 로마가 아니라 80km나 떨어진 해안 도시 안티움(오늘날의 안치오)에 있었으며 대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불타는 로마로 혼자 전차를 몰고 달려가 현장에 직접 나서 화재 진압을 전두지휘하였다. 심지어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게 되었을 때 '네로 방화 주범설'에 분노한 한 시민의 습격을 받았으나 의연하게 자신의 떳떳함을 밝혀 오해를 풀기도 하였다. 로마 대화재 이후, 건축 자재로 가연성 재료를 쓰는 것을 금지하는 법을 만든 것 역시 네로다. 또한 도시를 복구할 때도 민심을 잘 추슬렀는데 그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난민들을 지원한 데다 궁전을 개방하여 재산을 손실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사실 이 대화재를 네로가 직접 냈다면 네로의 정치적 생명은 그야말로 끝장나는 거다. 네로는 그런 일로 정치적 생명을 말아먹을 멍청이 는 아니다.[12]

그러나 많은 증거와 상황이, 네로가 화재와 무관함을 보여주는데도 불구하고, 네로가 범인이었고 직접 불을 지르지는 않았지만 네로의 명을 받은 노예들이 불을 질렀다는 식으로 낭설이 계속해서 퍼졌다[13]. 네로는 이러한 소문에 매우 질색하였으며 이를 일소하기 위해 기독교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죄를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는 나라의 행사에 불참하고 군대에도 불참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인식이 좋지 않았는데, 대화재와 같은 국가적 재난 때 시민들이 신전에 가서 울부짖을 때도 기독교인들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시민들은 기독교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네로는 이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기독교인들이 로마에 방화를 한 주범이라고 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기 시작한다[14].

4 몰락

대화재 이후 네로의 로마 재건 정책은 시민들의 혹평을 사게 되었다. 네로는 불에 타 소실된 넓은 지역에 네로를 위한 궁전[15][16]을 짓기로 하였는데 이를 전의 대화재 사건 의혹이 가득찬 와중에 그 자리에다…[17] 로마 시민들의 거처를 빼앗는 짓이라고 생각한 원로원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그의 양부인 클라우디우스의 신전터도 궁전 건설 계획 부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공사를 위한 비용은?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속주들도 털렸으며 심지어 신전까지 털렸다. 네로의 인기는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그 때문인지 일 년만에 그의 스승인 세네카까지 가담한 네로의 암살 계획이 발각된다. 세네카는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친다[18].

그 뒤 네로는 유태인의 반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유대 지방은 시리아 총독이었던 파르티아 전쟁의 영웅 코르불로의 관할하에 있었는데 네로는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코르불로 휘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내리고 코르불로를 자신이 머물던 그리스에 소환한다. 영문도 모른 채 달려온 코르불로에게 '내란 주모 혐의로' 자살할 것을 네로가 명령하였고 코르불로는 죽었다. 당시 로마 병사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코르불로(그의 인기는 사후에도 식을 줄 몰라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코르불로의 딸을 아내로 삼을 정도였다)가 황제에게 처형된 것에 경악하고 분개하는 장병이 많았다. 결국 젊은 장교들이 황제 암살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체포되었고 또한 근위군에 의한 암살시도도 있었다.

코르불로 사후 일 년 뒤에 갈리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빈딕스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스페인 총독이었던 갈바를 반란에 가담시켰으며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네로는 게르마니아 고지 사령관이었던 루키우스 베르기니우스 루푸스에게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루푸스는 빈딕스와 결전을 벌여 빈딕스를 격파하고 빈딕스는 자결한다. 하지만 네로를 따를 생각이 전혀 없었던 로마 군대는 루푸스에게 황제를 칭할 것을 요청하였고 루푸스는 이를 거절한다. 이렇듯 루푸스의 진압군마저 네로를 따를 마음이 없음을 보여주자 스페인 총독 갈바는 마음껏 황제를 칭하면서 원로원을 압박했다.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네로를 떠나 갈바 쪽으로 기운 것을 본 원로원은 마침내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고 이 때 네로의 근위대장도 갈바 쪽으로 붙게 된다.

이렇게 되자 네로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다음날 아침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들이 모두 도망가고 없음을 발견한 네로는 를 타고 파르티아로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선장들의 거절로 인해 이를 실현하지 못한다. 그 뒤 네로는 직접 로마 포룸으로 나아가 로마 시민들에게 연설하여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포룸으로 가는 도중 민중에게 맞아 죽을 것을 겁내어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마침내 네로는 자신의 노예의 집으로 달아나 숨게 되는데 이때 원로원이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였음을 알게 된다. 뒤이어 '원로원이 자신을 채찍질로 처형할 것'이라는 소문을 전해 듣고 공포에 질려 있다가 원로원으로부터 파견된 전령의 말발굽 소리를 듣자 칼로 자기 머리를 찌르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는다. Qualis Artifex Pereo

그래도 그에 대한 시민과 군인의 원한이 그리 깊지는 않았는지 죽은 뒤 별 험한 꼴 당하지 않고 정중히 화장되었다.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되어 자기 조상들의 묘역 인근에 매장되었으며, 나중에 밝혀진 네로의 무덤에서 그의 석관이 발견되었다.

5 평가

여러 막장스러운 사건을 제법 남겨서 폭군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로마 말기의 막장 황제들에 비할 만큼 끔찍한 막장은 아니었다. 네로의 통치는 몇가지 커다란 삽질도 했다지만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며 역대 폭군들처럼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심지어 최후의 인사였던 반란 진압 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도 결국 성공적이었다는 것이 입증되었으니 말이다. 로마 대화재 이후 소방법을 개정하고 로마를 새롭게 만드는 등 그가 저질렀다는 실책 중에서도 잘한 일이 많다.

종합적으로 보자면 폭군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는 인물. 공도 많고 과도 많은 인물이었으나, 변덕이 심하고 즉흥적인 성격이라 제국을 통치하는 황제에는 확실히 걸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노래 부르며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음유시인의 인생을 걷는 것이 어울리는 남자였는데, 본인 스스로도 황제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심정을 털어 놓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로마의 막장황제 = 네로'라는 공식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대화재 직후 자신이 로마에 불을 질렀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기독교도를 범인으로 몰고 박해하였기 때문이다. 이게 원인이 되어 훗날 전유럽이 기독교화되고 난 후 기독교인들이 너도나도 네로를 로마에 불을 지른 사악한 폭군으로 묘사하게 된 것이다. 물론 굳이 기독교 때문이 아니더라도 수에토니우스나 디오 카시우스 등의 역사가들에게도 많이 까였다. 제국의 황제임에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 노래나 시, 연극 등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고, 로마에서는 그리 좋은 취향이 아니었던 동성애적인 행사를 공개적으로 하는 등 "문란"했기 때문. 게다가 툭하면 로마가 아름답지 못하다며 다 때려부수고 새로 건축해야겠다고 떠들고 다녔는데, 이러한 평소의 언동 때문에 로마 대화재의 범인으로 지목되어 크게 이미지를 깎아먹었다. 아직 로마인들이 진짜 폭군들의 뜨거운 맛을 보지 못한 시절이기도 했고

네로는 자신의 사치를 감당하기 위해 로마의 속주를 세금으로 쥐어짰다. 당시 로마의 재정 수입방식이 잘못된 점 중 하나가 있는데 소득세가 없었다보니 고스란히 속주세로 메워야 했다. 이때 네로의 선물비용만 20억 세스테르테스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연간 군사비의 몇 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고 한다. 그만큼 속주는 막대한 세금을 내야했고, 심지어 속주 왕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도 발생하여 불만이 고조되었다. 60년의 브리타니아 켈트부디카 여왕의 거병이나 66~70년에 이스라엘에서 대대적인 민란이 일어난 원인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는 재미있는 이벤트를 자주 만들어냈고 황제로서 선정을 펼치려고 노력했으며, 개인으로서는 호감가는 젊은이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인기가 좋았다. 그 최후가 매우 비참했던데다 네로 사후 내전기를 거치며 자격 미달인 후대 황제들의 행태에 질린 근위대와 시민들이 네로 탄핵을 후회했다고 한다.[19]

6 대중매체

  • 게임 Ryse: Son of Rome에서는 네로가 죽지 않고 늙고 연로할 때까지 통치하고 있었다는 설정으로 등장한다. 게임상 설정으로는 네로가 두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그들의 이름이 '콤모두스'와 '바실리우스'다(...). 콤모두스는 네로처럼 로마사에서 못난 황제로 악평이 높고[20] 바실리우스[21]는 원래 왕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로 동로마 제국에서 황제를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1. 양자 입적 후
  2. 정작 네로 본인은 크게 잔인하지도, 정국에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그저 예술가적 기질이 너무 강한데다 몇가지 뻘짓을 크게 저지른 덕분에 후대에 안좋은 이미지가 전해졌을 뿐. 게다가 다른 막장황제들과 달리 네로 치하의 로마는 멀쩡히 굴러갔다.
  3. 브리타니쿠스의 누이
  4.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주인공 중 하나인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으로 나온다. 서양사에서는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로 알려져 있으며, 소설 판본에 따라서는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5. 우아함을 관장하는 장관 혹은 우아함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진다.
  6. 즉 취향과 관련된 문제가 생겼을 때, 페트로니우스의 결정이 바로 법적 효력을 지닌다는 의미다.
  7. 10두라는 이야기도 있다. 원래는 4두마차로 하여간 반칙.
  8. 네로를 이기면 사형 판결을 받기 때문에 선수들은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없었다.
  9. 5현제 라고 칭해지고 동시대 의 사람들도 황금시대 라고 말하던 트라야누스 도 미소년에 대한 동성애 에 대한 스캔들 논란이 있다. 물론 이건 거의 무시되는 수준이다. 다만 트라야누스 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 는 대놓고 안티노우스 를 사랑하기도 했다.
  10.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로마 남자들에게 가장 큰 불명예는 남자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11. 이사람 은 네로 의 정책뿐 아니라 도미티아누스의 협정도 깨버리고 다키아 전쟁 을 일으켰던 사람이다.
  12. 이때 의 화재진압 과 시민들을 위한 여러 대처 는 네로 에 대해 혹평을 했던 동시대 의 최고의 역사가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3. 이는 훗날까지 전해져 폴란드 작가 시엔키에비치의 소설 쿠오 바디스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14. 흔히 네로가 콜로세움에서 기독교도를 사자들의 밥으로 주는 등의 방식으로 처형했다는 얘기가 매우 유명한데, 네로는 콜로세움에서 단 한 명의 기독교도도 죽일 수 없었다. 왜냐면 콜로세움은 네로 사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콜로세움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네로의 거대한 동상(콜로수스) 자리에 지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설이 있을 정도. 콜로세움의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씨족 명) 원형 경기장이다. 아마도 이 설은 네로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원망+쿠오 바디스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또한 '로마'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콜로세움을 떠올릴 만큼 콜로세움 자체가 유명하기 때문이고..추가로 그 이후 에도 기독교도 의 순교인들 중 로마의 콜로세움 에서 죽은 사람은 1명도 없다.
  15. 도무스 아우레아(Domus Aurea). 황금저택(黃金邸宅)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16. 실제로는 이름만 이렇고 시민들의 휴식처 로 이용될수 있는 공원과 같은 구조 로 지으려 했다는 가설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도 대체 왜? 도무스 라는 이름을 썼냐는 비난을 한다. 도무스 가 개인사저 를 뜻하는 단어 였다고 한다.
  17. 어? 혹시 자기 집 지으려고 우리집 다 태운뒤 연극하고 있는거 아니야? 라고 생각해도 별수없다.
  18. 다만 세네카가 정말로 네로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 덕분에 네로의 무덤에는 꽃이 끊이질 않았다고. 대부분은 네로의 유모나 애첩인 아크테가 바친 것이지만, 의외로 일반 시민들이 바친 것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20. 다만 네로는 파르티아와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한편 대화재 진압과 전후 복구사업을 몸소 지휘하는 등 그나마 실드를 쳐줄 수 있는 구석이 군데군데 있지만, 이쪽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21. 라틴어식 발음으로, 그리스어식으로는 '바실레이오스'.